BUKCHON | 북촌의 주인들 - 왕의 기운 흐르는 곳에 한옥으로 세컨드하우스
BUKCHON | 북촌의 주인들 - 왕의 기운 흐르는 곳에 한옥으로 세컨드하우스
“쏘 뷰티풀! 판타스틱!” 지난 7월 4일 오후 서울 종로구 가회동 북촌마을. 한옥이 줄지어 늘어선 좁은 골목길에 외국인 관광객들의 탄성이 터졌다. 그들은 한옥을 카메라에 담느라 분주했다. 최근 북촌 골목길은 관광객으로 늘 붐빈다. 집으로 향하는 지극히 사적인 공간이지만 어느 새 서울을 대표하는 관광코스가 됐다. 프랑스에서 온 한 관광객은 “한국에 오기 전 인터넷으로 북촌을 미리 접했는데 실제로 보니 훨씬 아름답다”며 “도심 한가운데 이런 전통 가옥이 존재한다는 게 신기하고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부럽기까지 하다”고 말했다.
북촌은 조선시대 백악산이라 불린 북산 아래 터를 잡은 마을이다. 이후 청계천과 종로의 윗동네라는 뜻으로 불렸다. 행정구역상 가회동과 송현동, 안국동, 삼청동, 사간동, 계동, 소격동, 재동 일부가 속한 북촌에는 현재 1233동의 한옥이 남아 있다. 북촌은 조선시대 사대부 등 상류층이 살던 마을이다. 그래서 아직도 멋진 기와를 앉힌 한옥이 많다. 반면 역관이나 의관, 궁중 나인 등 중인이 많았던 경복궁 너머 서촌의 한옥은 소박한 형태를 띠고 있다.
터줏대감 김승연 회장 한화타운 조성조선시대 사대부가 사라진 자리엔 최근 새로운 지도층 인사들이 둥지를 틀었다. 한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기업가와 예술인, 부유층이 북촌에 속속 입성하고 있는 것. 우선 기업 오너 일가가 눈에 띈다. 포브스코리아가 등기부등본 등을 통해 확인한 결과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과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을 비롯해 최은영 한진해운홀딩스 회장, 홍라희 리움 관장, 장세주 동국제강 회장, 이희상 동아원그룹 회장 등이 북촌에 한옥집을 마련했다.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의 동생인 신선호 산사쓰식품 회장과 크라운제과 창업자 2세인 윤영주 가회헌 사장도 북촌 사람이다.
예술가들 진출도 눈에 띈다. 특히 지난해 11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개관하면서 국내 미술관 지도를 새로 그리고 있다. 북촌 일대에 자리한 전시공간은 50여 개 정도. 아트선재센터, 금호미술관 등 미술관을 비롯해 대형화랑인 현대·국제·학고재 외에도 이화익·PKM·조선·트렁크·도올·리씨·공근혜·빛 등 20여 곳이 기획전 위주로 전시장을 운영하고 있다. 인사동이 관광객 대상의 공예품매장, 식당가로 변모하면서 북촌이 새로운 미술동네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북촌에서 가장 큰 규모의 한옥을 가진 이는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다. 헌법재판소에서 감사원 방향으로 오르는 언덕길 왼쪽에 자리한 김 회장의 집은 ‘가회동 1번지’로 통한다. 김 회장은 1960년대부터 북촌에서 살아온 터줏대감이기도 하다. 김 회장과 그의 동생 김호연 빙그레 최대주주, 장남 김동관 한화솔라원 기획실장 등 한화 일가는 북촌에 총 1만6848㎡(5100평)의 땅을 보유하고 있다.
김동관 실장은 삼청동 35번지 주택과 가회동 임야 2620㎡(792평)를 부친으로부터 증여받아 보유하고 있다. 김 회장의 북촌사랑은 남다르다. 그는 2006년부터 북촌마을의 영세민을 위해 매년 쌀 240포대(포대당 10㎏)를 기증한다. 노인정 어르신들이 야유회를 갈 때마다 버스를 대절해 주기도 한다.
한화는 2000년대 들어서 김 회장 집 주변 언덕에 한옥을 현대식으로 꾸민 한화외교단지를 조성했다. 15채 규모로, 붉은 한옥식 기와에 발코니와 마당 등 서양식 주택 형태를 접목한 대표적인 한옥형 주택이다. 볕이 잘 들고 한옥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여 외국인들 사이에선 명품 주거지로 통한다는 게 인근 공인중개소 대표의 말이다.
한화외교단지 관리사무소 직원은 전화통화에서 “과거엔 한화 임원들이 거주하기도 했는데 요즘은 외교관과 외국계 기업 임원, 장기체류 중인 바이어들이 살고 있다”며 “관광코스 끝자락에 위치해 조용하고 인근 한옥들 또한 깔끔한 편이라 입주 외국인들이 상당히 만족해 한다”고 말했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도 북촌에 대저택을 갖고 있다. 신 회장은 2011년 12월 가회동주민센터 뒷골목 ‘백인제 가옥’ 바로 옆 한옥을 샀다. 대지면적 482.6㎡(145평), 건물면적 265.7㎡(80평) 한옥 건물의 당시 매매가격은 45억원이었다. 신 회장의 집은 헌법재판소 삼거리에서 가까워 교통이 편리하다.
1977년에 가회동에 이사 온 이희상 동아원그룹 회장도 가회동에 자그마한 한옥 몇 채를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2005년 이후 아내와 아들 명의로 옆집을 사들이고 있다. 이 회장의 장녀 이윤혜씨 역시 가회동에 15억원 상당의 빌라를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홍라희 리움 관장도 2009년과 2010년 가회동 31번지에 나란히 붙은 한옥 두 채를 매입했다. 리뉴얼 공사를 통해 한 채로 만들었다. 최은영 한진홀딩스 회장도 북촌의 주인이다. 최 회장은 가회동 1번지 주택을 2011년 4월 10억원에 매입했다. 최 회장은 게스트하우스였던 건물을 리모델링해 자택으로 바꾸었다.
대림산업 이해욱 부회장의 장모인 구훤미 오성로지스 대표도 2011년 7월 계동 76번지 지상 3층 지하 1층 건물을 매입하면서 북촌마을 주민이 됐다. 구 대표는 건물 리모델링 후 임대사업을 하고 있다. 거래 당시 매매가는 약 70억원으로 알려졌다. 구 대표는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여동생이다. 그의 딸 김선혜씨가 이해욱 부회장과 결혼하면서 LG와 대림산업의 연을 맺었다.
북촌 일대에서 단일 주택 규모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곳이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의 동생인 신선호 산사쓰식품 회장의 한옥이다. 신 회장은 1986년 창덕궁과 맞붙은 원서동의 대지 1120㎡(340평) 한옥을 사들였다. 신 회장은 슬하에 2남2녀를 두었는데 큰딸이 전 태광그룹 이호진 회장의 부인 신유나씨이다. 신 회장은 자신의 집과 맞붙은 대지 52평짜리 한옥을 지난 1999년에 사들인 뒤 둘째딸인 리나씨에게 2006년 증여하기도 했다.
신 회장의 집은 연중 비어 있는 날이 더 많다고 한다. 주로 일본에서 활동하는 신 회장이 한국에 체류할 때만 사용하기 때문이다. 주변 공인중개소에 따르면 지난해 집을 매물로 내놨지만 워낙 평수가 큰데다 일반인이 살 수 있는 가격이 아니라 매매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북촌에 기업 오너 일가 등 부유층이 둥지를 틀기 시작한 것은 2002년 이후다. 당시 북촌에 한옥을 마련하는 것이 유행하면서 매물이 딸릴 정도였다고 한다. 주로 서울 강남 일대 초고층주상복합이나 아파트 등 번잡한 주거지에 살던 이들이 북촌을 찾았다. 5~6년 전에도 한 차례 물갈이가 이뤄졌다. 한옥의 가치가 재조명되고 북촌이 관광명소로 떠오르면서 강남의 큰손과 예술가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반대로 터줏대감들은 집을 팔고 아파트 혹은 전원주택으로 이주했다.
등기부상 손 바뀜이 자주 일어나는 시점도 2002년 이후다. 재미있는 점은 가회동 한옥마을은 2005년 이전에, 삼청동과 맞닿은 한옥마을은 2005년 이후에 주인이 바뀌었다. 특히 가회동과 삼청동을 잇는 언덕에 위치한 가회동 31번지 일대가 노른자위로 떠올랐다. 북촌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최고입지인데다, 경복궁과 창덕궁 등 궁궐의 기운을 받는다는 풍수 덕분이다.
부유층의 북촌 입성 대열에는 서미갤러리의 홍송원 대표도 끼어있다. 그가 가회동에 터를 잡으면서 ‘부유층 사모님’의 가회동 러시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홍 대표는 1996년 5월 서미갤러리 터를 사들였다. 이어 2001년, 2003년 남편과 아들 명의로 인근 땅을 사들여 현재의 서미갤러리타운을 만들었다. 이후 홍 대표는 갤러리와 카페 부지를 지인들에게 소개했고, 부유층의 한옥 구입도 연결했다. 지난해 봄 미국 작가 로버트 테리안 전시를 마지막으로 문을 닫은 서미갤러리는 현대카드에 5년간 임대했다.
집값 너무 올라 진입 장벽 우려북촌에 입성한 부유층들은 대부분 나란히 붙은 주택을 구입해 리모델링한다. 공인중개소 등에 따르면 한옥마을은 주로 한적한 겨울에 리모델링이 많이 진행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문제도 발생한다. 무늬만 한옥으로 변질되는 것. 실제로 일부 한옥은 기존 건물을 아예 밀어버리고 건물의 밑부분을 콘크리트로 채웠다. 그리고 담장 밖으로 드러난 부분만 목재와 기와로 마감했다. 또 경사진 길에 자연스럽게 이어지던 처마 곡선도 집주인이 지하층을 높게 지어 사실상 2층집을 만들면서 파괴됐다. 자연스럽게 이어져야 할 한옥의 담벼락과 처마가 들쭉날쭉한 이유다.
가회동에서 만난 한 주민은 “강남 등지에서 온 사람들은 직접 살기보다는 별장이나 갤러리 등 세컨드하우스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주인은 있지만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이 허다하다는 것. 가회동 33번지 골목에서 만난 한 주민은 “우리 골목에도 기업 회장 일가 집이 있는데 어쩌다 불이 켜져 있을 뿐 사람 드나드는 것을 보지 못했다”며 “가끔 외국인들이 나오는 걸 보면 기업의 영빈관으로 쓰는 것 같다”고 말했다.
부유층의 한옥마을 투자가 이어지면서 북촌 일대 한옥 가격도 크게 오르고 있다. 실제로 북촌 일대 시세는 주택시장 불경기에도 아랑 곳 않고 상승세다. 1990년대 초반만 해도 3.3㎡당 700만원 선이었던 한옥 시세는 최근 3000만원까지 치솟았다. 위치가 좋은 곳은 3.3㎡당 5000만원까지 가격이 올랐다. 전세의 경우 99㎡ 기준으로 3억원이 넘는다.
중앙고등학교 인근의 한 중개사무소 대표는 “최근 한옥 열풍이 불면서 부동산을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지만 66㎡대 낡고 허름한 한옥조차도 전세를 얻으려면 2억5000만원은 줘야 한다”며 “사실 겨울에 춥고 주차도 불편해 실거래가 이뤄지는 경우는 드물다”고 말했다.
비싼 건축비 역시 북촌마을 입성의 걸림돌이다. 일반주택은 3.3㎡당 300만~400만원이 들지만 한옥은 아무리 저렴해도 600만원을 넘어선다. 소목장, 와공(기와공사 인력) 등 인건비가 높기 때문이라는 게 시공업체의 설명이다. 기계화된 시공이 불가능하고 자재를 규격화하는 것도 쉽지 않다.
천정부지로 오른 상가건물 임대료도 북촌을 삭막하게 만드는 요소다. 관광객 유입이 많아지자 입주를 문의하는 업체가 늘고 있다. 기존에 전세로 입주해 있던 사람들은 불안할 수밖에 없는 상황. 한옥이나 도로변 작은 매장에서 공방을 운영하는 예술가와 장인들의 터전이 위협받고 있다.
가회동성당 인근의 한 공예품매장 주인은 “건물 주인이 올해 임대료를 두 배 가까이 올렸다”며 “애써 일궈 놓은 곳이라 떠나기도 쉽지 않아 올려줄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예술계에서는 북촌이 서울 동숭동 대학로의 전철을 밟지나 않을까 우려한다. 북촌이 막뜨기 시작한 초기에 골목에 온기를 불어넣었던 아마추어 작가들이 하나둘 쫓겨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나친 상업화에 대한 우려도 크다. 대한항공이 서울 종로구 송현동 옛 미국대사관 직원 숙소 터에 7성급 관광호텔을 건립하겠다는 계획은 여전히 지역 주민의 거센 반발을 사고 있다. 북인사마당 건너편인 이곳은 북촌 한옥마을, 덕성여중과 맞붙어 있다. 소규모 공방 자리에 밀고 들어오는 프랜차이즈 매장들도 북촌의 고풍스런 이미지와 맞지 않다는 지적이다.
이 같은 우려 탓에 최근 서울시와 종로구는 주민이 주도적으로 북촌 한옥마을을 가꾸고 지킬 수 있도록 ‘북촌협의회’를 창립했다. 주민대표 12명, 전문가 7명, 행정 공무원 6명으로 구성된 협의회에서 북촌의 관광지·상업화 문제같은 현안을 논의하고 주민 간 갈등을 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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