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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제팅’ 여행이 뜬다

‘세트제팅’ 여행이 뜬다

‘왕좌의 게임’에서 킹스로드를 뒤덮은 너도밤나무 숲을 찾는 관광객이 많다.
카일 그레이와 크리스틴 호 부부는 지난해 4월 2주 동안 미국 케이블 채널 HBO 드라마 ‘왕좌의 게임(Game of Thrones)’의 지나간 네 시즌 전부를 한꺼번에 몰아 봤다. 중세 유럽을 본뜬 가상대륙 웨스테로스의 세븐 킹덤을 배경으로 전쟁과 사랑을 그린 대하드라마다. 4개월 뒤 그들은 세븐 킹덤을 통과하는 그 유명한 킹스로드를 뒤덮은 너도밤나무 아래 실제로 서 있었다. 한 주 뒤엔 ‘왕좌의 게임’ 시즌4에서 은발의 미녀 대너리스 타르게르옌이 미린 왕국을 공격하기 위해 행군한 길을 따라 걸었다.

‘반지의 제왕’이 촬영된 뉴질랜드의 패러다이스가 관광명소로 떠올랐다.
미국 샌프란스시코에 사는 그레이와 호는 일상에서 탈출해 작가 조지 R R 마틴이 만들어낸 유명한 판타지의 세계 속으로 실제로 뛰어든 것은 아니지만 그곳에 상당히 접근했다고 말할 수 있다. 최근 1년 동안 모든 일을 접고 세계를 두루 여행한 두 사람은 지난여름 ‘왕좌의 게임’ 촬영지 관광을 위해 유럽을 찾았다.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 심취하면서 원작 소설까지 읽기 시작한 호는 “우린 그때까지 테마 여행을 한번도 간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 드라마의 배경과 풍경이 너무도 아름다워 실제로 가보기로 했다.”

그레이와 호는 ‘왕좌의 게임’이 촬영된 장소를 인터넷에서 찾았다(이 인기 드라마에 관한 모든 사항을 파헤치는 웹사이트가 수두룩하다). 호의 추정에 따르면 온라인 조사에 약 10시간이 걸렸다. 그런 다음 드라마의 대부분이 촬영된 북아일랜드와 크로아티아를 2주 동안 둘러보기로 했다.

그들의 여행 시점은 우연히도 ‘왕좌의 게임’ 시즌5 현지 촬영과 맞물렸다. 그들은 세트장을 가까이서 구경하고 몰래 들어가 소품으로 장난도 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여행 블로그에 그런 모험담을 올렸다. 몇몇 유명한 장면을 촬영지에서 뻔뻔스럽게 재연한 사진도 많이 올렸다. 스크린 관광[screen tourism, 업계에선 ‘세트제팅(set-jetting)’이라고도 한다]의 전형이다.

요즘 그런 여행을 즐기는 사람이 그레이와 호만이 아니다. 스크린 관광은 새로운 현상은 아니지만 근년 들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지난해 조사업체 투리즘 컴페터티브 인텔리전스에 따르면 영화나 드라마 촬영지를 방문한 국제 관광객이 4500만 명에 이르렀다.

‘세트제팅’ 전문가이자 여행 온라인매체 트래블허시허시(스크린 관광의 정보와 조언을 제공한다) 발행인 그레첸 켈리는 이렇게 말했다. “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일상으로부터 탈출하기를 간절히 원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나 드라마의 판타지 속에서 지내는 것보다 더 나은 현실도피는 없다. 우리가 어렸을 때 영화나 TV 드라마에서 본 인물을 그대로 따라 연기하고 싶어한 것도 그 때문이다. 우린 상상 속의 상황을 체험해보기 원한다.”

관광업계가 그런 추세를 놓칠 리 없다. 모험여행담을 쉽게 공유할 수 있는 소셜미디어 사이트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면서 그런 추세를 한층 더 부추긴다. 예를 들어 인기 드라마 ‘브레이킹 배드(Breaking Bad)’의 주인공 월터 화이트의 집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어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같은 사이트에 올리면 ‘좋아요!’가 쏟아진다. 그런 체험을 원하는 사람이 많은 이유 중 하나다. 그레이와 호는 ‘왕좌의 게임’ 여행을 독자적으로 구상했지만 모로코에서 아이슬란드까지 그 드라마가 촬영된 곳곳의 여행사들은 짭짤한 수익원으로 스크린 관광상품을 판매한다.

흘러간 대형 영화 시리즈도 스크린 관광의 원천이다. 예를 들어 호화여행 전문업체 퀸테센셜리 트래블은 7일 일정의 ‘007’ 여행상품을 판매한다. 제임스 본드의 팬들을 그 전설적인 스파이의 발자취를 따라 유럽 전역으로 데려가는 프로그램이다. 팬들은 영국에서 본드가 탔던 럭셔리 스포츠카 애스턴 마틴을 몰아보고, ‘007 골든 아이’에서 제임스 본드가 뛰어내리는 장면을 찍은 스위스 베르차스카댐에서 번지점프를 즐기며, ‘007 카지노 로얄’의 배경인 이탈리아 코모 호숫가의 빌라에서 드라이 마티니를 홀짝이고, 더 내키면 ‘007 위기일발’에 나온 베니스 심플론 오리엔트 익스프레스 특급열차를 타고 영화 주인공들의 스릴을 체험한다.

심지어 이전엔 관광지라고 명함도 못 내밀던 곳도 새로운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미국 미주리주 케이프 지라도는 미시시피 강변의 조용하고 따분한 마을이었다. 그러나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히트 영화 ‘나를 찾아줘(Gone Girl)’가 그곳에서 촬영됐다는 사실 덕분에 요즘은 관광객으로 흥청거린다. 지자체가 그 영화에서 주인공(벤 애플렉이 연기했다)이 소유한 ‘더 바’ 같은 장소를 돌아보는 관광상품을 개발했기 때문이다.

리즈 위더스푼이 주연한 영화 ‘와일드(Wild)’의 주무대인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acific Crest Trail, 멕시코 국경에서 캐나다까지 연결된 4265㎞의 트레킹 코스)의 웹사이트에는 그 영화가 최근 미국에서 개봉된 이래 방문자가 485% 늘었다. ‘와일드’는 삶의 유일한 희망이자 버팀목이었던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인생을 포기한 채 고통 속에서 살아가던 주인공이 슬픔을 극복하고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생사를 넘나드는 극한의 공간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로 떠나며 펼쳐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 어소시에이션은 영화사와 손잡고 멕시코에서 캐나다까지 그 길을 안전하게 트레킹할 수 있도록 하이커를 대상으로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와일드’에서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을 트레킹하는 주인공 (리즈 위더스푼 분).
 관광업의 황금알 낳는 거위
런던의 노팅힐 카니발. 영화 ‘노팅힐’ 덕분에 런던을 찾는 관광객이 크게 늘었다.
영화나 드라마와 아무 관련 없는 업체들도 이런 추세에 편승하려고 한다. 예를 들어 미국의 여러 호텔은 팬들이 고대하던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50 Shades of Grey)’의 밸런타인데이 개봉 직전 그 영화 제목을 단 상품을 내놓았다. 플로리다주 포트 로더데일의 B 오션 리조트는 성인용품이 들어 있는 ‘러브 키트’와 실크 타이가 포함된 휴가 상품을 제공한다. 추가 비용을 지불하면 호텔 측은 고객을 헬기에 태워 영화 주인공들이 즐긴 첫 데이트를 재연해준다. 그 원작 소설과 영화의 무대인 시애틀의 하야트 앳 올리브 8 호텔은 방문자가 직접 안내서를 들고 그 작품에 나오는 명소들을 돌아보는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수익면에서 그런 상품의 효과는 매우 크다. 스크린 관광의 경제·문화적 혜택을 도모하는 단체 유로스크린은 지난해 유럽 4개 도시와 그곳에서 촬영된 영화와 드라마에 대한 연구를 의뢰했다. 컨설팅 업체 휴먼 디지털이 소셜미디어 댓글과 대화 3500만 건을 분석한 결과 영화 촬영지가 관광에 큰 수익을 올려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예를 들어 1999년 영화 ‘노팅힐’은 매년 런던에 관광 수입 2490만 파운드(약 417억원)를 안겨준다.

유로스크린을 설립한 애드리언 우턴(영화사 필름런던의 CEO)은 이렇게 말했다. “분석 결과 영화 제작으로 관람권과 캐릭터 상품만이 아니라 촬영지의 관광상품도 팔 수 있다는 점이 확실히 밝혀졌다. 관광 마케팅에는 더 없는 호재다. 영화와 TV 드라마는 개인 소비자가 어디를 찾아가고 그곳에 가서 무엇을 하는지에 큰 영향을 미친다.”

미국 뉴멕시코주 앨버커키의 주민은 그 효과를 실감한다. 미국의 다른 지역보다 더 오래 지속되는 경기침체에도 불구하고 앨버커키 방문자 수가 2013년에는 전년 대비 2.2% 늘었다. 세계적으로 흥행에 성공한 TV 드라마 ‘브레이킹 배드’ 덕분이다. 이 드라마는 폐암 말기로 시한부를 선고 받은 화학 교사가 아내와 뇌성마비를 가진 아들, 새로 태어난 딸을 위해 마약 제조업에 나서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영화 ‘겨울왕국’이 개봉된 이래 노르웨이 관광청 웹사이트 방문객이 세 배로 늘었다.
앨버커키 관광국의 마케팅 책임자 태니어 아멘타는 “경기침체에도 불구하고 ‘브레이킹 배드’의 인기는 대단했다”고 말했다. “방문객 수가 줄지 않은 것은 그 드라마 덕분이다.”

앨버커키는 ‘브레이킹 배드’의 주인공과 그의 단짝이 마약을 제조한다는 불미스러운 행동의 악명을 이용해 관광객을 끌어들인다. 방문객은 전차, 자전거, 복제된 레저용 자동차(드라마에서처럼 차문에 유명한 총알 구멍도 나 있다)를 타고 곳곳을 돌아볼 수 있다. 이전에는 앨버커키를 방문할 생각조차 없었던 사람도 요즘은 그곳을 찾는다.

런던의 변호사 출신으로 전업 여행가로 변신한 조 피츠시몬스도 그중 한 명이다. 피츠시몬스는 스트리밍 기반 디지털 영상 서비스 넷플릭스를 통해 ‘브레이킹 배드’를 독파한 뒤 지난해 미국 여행 일정에 앨버커키를 추가했다. 그는 레저용 자동차를 타고 촬영지를 돌아보면서 가짜 ‘마약’을 구입하고, 드라마에 나온 바로 그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한 경험을 블로그에 올렸다. 우연히 최근 방영을 시작한 ‘브레이킹 배드’ 후속 드라마 ‘베터 콜 솔(Better Call Saul)’의 촬영 현장도 구경할 수 있었다. 그 드라마 역시 앨버커키에 관광자원이 될 가능성이 크다.

특히 지금은 TV가 세트제팅의 주요 동인이다. 대중문화 전문가들이 말하듯이 드라마의 새로운 황금기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트래블허시허시의 켈리는 이렇게 말했다. “TV의 작은 스크린과 영화의 대형 은막 사이에 구분이 흐려졌다. 요즘은 여러 인기 드라마가 관광객을 끄는 저력을 과시한다. ‘섹스 앤 더 시티(Sex and the City)’를 보라. 흘러간 드라마지만 팬들은 여전히 그 드라마를 주제로 한 관광을 목적으로 뉴욕을 찾는다.”

물론 모든 여행자가 ‘브레이킹 배드’의 팬 피츠시몬스나 ‘왕좌의 게임’의 팬 그레이와 호처럼 열성적이진 않다. 스크린 관광 컨설턴트로 ‘영화 촬영지 관광객의 체험(The Experiences of Film Location Tourists)’이라는 책을 쓴 스테펀 로슈에 따르면 그들은 스크린 관광객의 열혈팬으로 한 부류일 뿐이다. 영화나 드라마와 관련된 곳을 찾아가 유명 장면들을 재연하거나 촬영지의 세부 정보를 얻는 게 그들의 목적이다. 그러나 작품에 대한 애착보다는 영화나 드라마에 나왔다는 새로운 명소에 그냥 호기심을 갖고 찾아가 그곳의 풍물을 즐기는 여행자들이 더 큰 시장을 이룬다.

예를 들어 뉴질랜드는 지난 10년 동안 단숨에 세계 최고 인기 관광지 중 하나로 떠올랐다. 뉴질랜드의 빼어난 경관을 압축해 보여준 영화 ‘반지의 제왕(Lord of the Rings)’ 덕분이다.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히트작 ‘겨울왕국’도 노르웨이 관광산업의 성장에 큰 도움이 됐다. 과거 노르웨이는 다른 유럽 관광지와 힘겨운 경쟁을 벌여야 했다.

관광객이 영화 촬영지를 찾는 주된 이유가 무엇이든 공통의 맥락은 정서적 공감대다. 로슈는 이렇게 설명했다. “허구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장소는 특별한 정서적 의미를 갖는다. 이전에는 몰랐던 곳에서 갑자기 뭔가를 느낀다. 그래서 그곳을 이전과 다른 식으로 접근하게 된다. 영화 ‘하이랜더(Highlander)’에 나온 스코틀랜드의 성은 그냥 하나의 성이 아니다. 실제로 가본 적은 없지만 영화를 통해 봐서 이미 잘 알고 있는 성이다. 따라서 그 성에 관한 허구의 역사와 자신이 저절로 자연스럽게 융합된다.”

그레이와 호는 그런 유대감과 상상의 세계를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레이는 “영화나 드라마 촬영지를 찾아가면 자동적으로 역할극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의 아내 호도 맞장구쳤다. “특정 장소에 서서 등장인물들이 여기에 있었고 지금 나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하는 게 얼마나 멋진가? 캐릭터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었다.”

그레이와 호는 ‘왕좌의 게임’ 여행에서 돌아온 후 새로 탐사할 드라마를 넷플릭스에서 찾았다. 영국 TV 드라마 ‘더 폴(The Fall)’이다. 북아일랜드 벨파스트를 무대로 도시를 공포로 몰아넣는 연쇄살인범을 체포하기 위해 런던 경시청에서 파견된 형사의 활약상을 그린 작품이다. 그레이와 호는 그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시즌1 대부분 동안 한 호텔에서 지내며 수영을 하고 연인과 즐기고 기자와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면서 상당히 눈에 익었다는 느낌을 가졌다. 기시감(deja -vu)이었다.

그레이는 한참 후에야 왜 그런지 알았다. 그들이 북아일랜드를 여행할 때 머물렀던 바로 그 호텔이었다. 그들은 이미 ‘더 폴’의 세트제터였던 것이다. 당시엔 그런 사실을 전혀 몰랐을 뿐이다.

- 번역 이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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