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력발전소에서 피어난 희망

전시회는 지난 10월 13일 공식 개막했지만 크루즈비예가스의 조각 작품 ‘빈 터(Empty Lot)’는 여전히 미완성이다. 비계(scaffolding) 위의 경사면에 설치한 2개의 대형 삼각형 구조물 위에 흙을 채운 삼각형 상자들을 배치한 작품이다. 한 경사면은 터바인 홀의 발코니에서 시작해 바닥과 만나고 또 다른 경사면은 바닥에서 시작해 뒤쪽 벽과 만난다. 상자 속의 흙은 크루즈비예가스와 이 프로젝트의 큐레이터 마크 갓프리가 런던 곳곳에서 채취했다. 하이드파크와 런던 남부에 있는 호니먼 박물관, 버킹엄궁, 갓프리의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 정원 등등.
크루즈비예가스는 상자 속 흙에 곡물이나 꽃의 씨앗을 심지 않았다. 하지만 전시회 기간 내내 이 흙에 물을 준다. 갓프리는 관람객이 흙 상자에 씨앗을 뿌리고 그 씨앗이 뿌리를 내려 성장할 가능성을 생각한다. 하지만 크루즈비예가스는 흙 속에 들어있을지 모르는 뭔가에 더 관심이 있는 듯하다.
터바인 홀의 공간 맞춤형 설치미술 전시회 시리즈는 테이트 모던이 문을 연 2000년 유니레버의 후원으로 시작돼 12년 동안 기억에 남을 만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루이스 부르주아의 대형 거미 조각부터 올라푸르 엘리아손의 인공태양, 도자기로 만든 해바라기 씨앗을 카펫처럼 깔아놓은 아이웨이웨이의 작품까지. 관람객은 아이웨이웨이의 도자기 씨앗이 깔린 전시회장 바닥에 드러눕거나 엘리아손의 인공태양에서 쏟아져 나오는 빛을 듬뿍 쪼이고 카스텐 횔러가 설치한 거대한 미끄럼틀을 탔다.

크루즈비예가스의 ‘빈 터’로 테이프를 끊은 새 전시회 시리즈는 테이트 미술관 그룹(런던의 테이트 브리튼, 리버풀과 세인트 아이브스의 갤러리 2곳 포함)의 중요한 변화와 맞물려 시작됐다. 이 미술관 그룹의 고향인 테이트 브리튼(테이트 모던에서 템즈강 상류 쪽으로 3.2㎞ 지점에 있다)은 2년 전 6800만 달러 규모의 보수공사를 마쳤다. 같은 시기 테이트 모던 역시 전시 공간을 60% 늘리는 확장 공사를 거의 끝마쳤다. 규모는 뉴욕 현대미술관 (MoMA)의 절반에 불과하지만 관람객 수는 그 2배에 달했던 테이트 모던으로선 절실하게 필요한 공사였다.
본관의 리모델링을 감독한 스위스 건축가 자크 헤어조크와 피에르 드 뫼롱이 신관을 설계했다. 이전에 이 건물이 화력발전소로 쓰일 당시 연료를 저장했던 탱크를 ‘세계 최초의 라이브 아트와 행위예술 전용 미술관’으로 개조하는 작업을 포함한 대규모 프로젝트다. 일부는 이미 완공됐고 ‘스위치 하우스’라고 불리는 벽돌 건물은 내년 6월 문을 연다.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터바인 홀은 문을 닫았었다. 기존의 전시관 4층에서 새로운 다리를 통해 증축된 공간으로 연결되며 남쪽 벽에 연결 문이 설치됐다. 현대자동차가 2025년까지 터바인 홀의 새 전시회 시리즈를 후원하기로 계약했다. 이 계약은 테이트 역사상 최장기 기업 후원 사례이며 MoMA나 로스앤젤레스 현대미술관 같은 다른 대형 미술관들을 상대로 경쟁력을 갖추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테이트가 이렇게 미래를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 가운데 영향력 있는 미술 전문지 ‘아트 리뷰’는 니콜라스 세로타 테이트 미술관 총관장을 2014년 ‘세계 미술계 파워100’의 1위로 선정했다. “테이트의 국제적 영향력과 권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설명이 따랐다. 다시 문을 연 터바인 홀의 규모와 명성도 한몫했다.

크루즈비예가스의 부모는 1960년대에 아유스코에 정착했다. 그들은 법을 어겨가며 사람이 살기에 부적합한 화산 지대에 집을 짓고 살았다. “그곳에서 사람이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그는 말했다. “하지만 부모님은 그곳에 집을 만들었다. 구할 수 있는 재료는 무엇이든 이용해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지었다. 우리 가족은 가난했지만 어떤 면에서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부자였다. 돈이 아니라 연대감을 자본으로 한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부모님에 관해 이야기하는 그의 말투에서 대단한 애정이 묻어났다. 하지만 그는 작품 속에서 그들의 삶을 재현하거나 아유스코의 생활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려고 하진 않는다고 말한다. 대신 역사 속 특정 순간의 경험을 되살리고자 한다. 발전과 개발의 약속이 무너졌을 때, 그리고 사람들이 임시변통으로 삶을 꾸려갈 수밖에 없을 때 등등. “에너지가 시간과 공간에 따라 각기 다른 재료를 이용해 얼마나 다양한 형태를 띠게 되는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고 그가 말했다.
기이한 잡종처럼 느껴지는 ‘빈 터’의 의미를 짐작하게 하는 설명이다. 런던 곳곳에서 퍼온 흙이 담긴 거친 나무 상자들과 크루즈비예가스가 길거리나 쓰레기통에서 찾은 재료로 만든 여러 개의 가로등으로 이뤄진 이 작품에서는 남미의 빈민가와 채소밭을 합쳐놓은 듯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하지만 크루즈비예가스가 이곳에서 찾은 재료 중 그를 가장 매료시킨 것은 삼각형 구도의 조형물을 받치고 있는 비계다. “이전에 난 ‘자아구성’이 비계라고 여러 차례 말했다. 그때는 비유적으로 한 말이었지만 지금은 현실이 됐다. 내 비유를 눈앞의 현실로 만들어준 이 작품이 아주 마음에 든다. 내 모든 작품을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종합한 작품이다.”
크루즈비예가스는 헤어초크와 드 뫼롱이 증축한 전시 공간의 뒷벽에 비계가 설치된 것이 “훌륭한 우연의 일치”라고 말했다. 터바인 홀에 전시된 설치미술이 단지 예술작품일 뿐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도시 런던의 일부라는 사실을 강조해주기 때문이다. 그는 또 ‘빈 터’의 전시가 끝나 작품이 철거될 날을 기대한다. 나무 상자 속의 흙이 런던의 공원과 정원으로 되돌아가고, 비계도 해체돼서 또 다른 형태로 거듭나 이 도시의 일부로 되돌아가게 될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작품의 일시성이 그를 희망으로 가득 차게 만든다. “자신을 회복하는 희망”이다. 하지만 그는 재개관한 터바인 홀의 첫 전시작인 ‘빈 터’에 대해 어떤 해석을 내리기는 원치 않는다. 그 작품을 볼 수백만 명의 관람객 각자가 나름대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주고 싶어서다. 그는 “어떤 해석도 환영한다”고 말했다.
- EDWARD PLATT NEWSWEEK 기자 / 번역 정경희
[박스기사] 현대미술로 현대자동차 알린다

영국 테이트 모던 미술관과 11년 장기 파트너십 맺고 자동차에 문화·예술적 가치 불어넣어현대자동차는 영국의 세계적인 현대미술관 테이트 모던 미술관과 2015년부터 2025년까지 11년 간의 장기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문화예술과의 만남을 통해 자동차에 이동수단 그 이상의 가치를 불어넣기 위해서다. 이번에 현대차가 테이트 모던 미술관과 체결한 후원 기관은 이 미술관이 체결한 협약 가운데 역대 최장 기간이다. 현대차 관계자는 “10년 이상의 장기간 지원해야 문화예술의 육성과 저변 확대에 기여할 수 있고, 현대차 입장에서도 기업경영 전반에 문화예술의 가치를 제대로 접목시키려면 그만한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판단했다”고 밝혔다.
현대차가 여러 문화예술 분야 가운데 현대미술에 주목한 이유는 기존의 관습에서 벗어나 혁신을 추구하는 현대미술의 가치가 현대차의 브랜드 방향성인 ‘모던 프리미엄’과 부합되기 때문이다. 2011년에 발표된 현대차 브랜드 방향성 모던 프리미엄은 현대라는 기업명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으로, 고객의 기대를 뛰어넘는 혁신적인 경험과 가치를 고객에게 제공하는 것을 뜻한다.
현대차와 테이트 모던 미술관은 협업을 통해 가장 혁신적인 현대미술을 발굴해 전 세계인에게 선보이는 것은 물론 한국 현대미술의 세계화도 추진하는 등 현대미술 저변과 한·영 문화교류의 확대를 위한 다양한 사업을 추진키로 했다. 이 파트너십에 따라 현대차와 테이트 모던 미술관은 2025년까지 초대형 전시실 터바인 홀에서 현대커미션이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현대미술과 최신 트렌드를 선보인다.
— LEE KI J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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