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을 기억하는 스무 가지 방식 (1) 기아사태] 우물쭈물하다 터져버린 기아사태
[1997년을 기억하는 스무 가지 방식 (1) 기아사태] 우물쭈물하다 터져버린 기아사태
노사는 버티고 언론은 여론 호도해 해결 지연시켜... 대외신인도 추락, 외환위기 수렁 속으로
역사의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를 계속해서 새로 쓴다. 그것은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를 다시 바라보고 과거의 사실에 현재를 비춰보는 과정이다. 1997년 외환위기도 역사로 저물고 있다. 외환위기를 통해 우리가 지금 새로 생각할 스무 가지를 추려 격주로 연재한다. 당시 일간지 기자로 위기의 현장을 취재했고 그때의 문제의식을 책 [한국경제 실패학]으로 써낸 백우진 한화투자증권 편집위원이 정리한다. 오해할 소지가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당시 직책을 적는다. [편집자] 1997년 11월 20일 저녁 아홉 시 반경.
“최근 극비리에 방한한 캉드쉬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를 만나 구제금융 방안을 협의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사실입니까?”
“공직을 떠난 사람으로서 할 말이 없습니다.”
전화로 질문한 사람은 필자였고, 대답한 이는 강경식 전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이었다. 나는 일간지 기자로 3개월 전부터 재정경제원을 3진으로, 통상산업자원부는 2진으로 취재하고 있었다. 전날 경질된 강 전 부총리는 부산 집에 내려가 있었다. 나는 신문사 편집국에서 전화를 걸었다.
돌아보면 이 통화에는 기자와 취재원의 통화 이상의 배경이 깔려 있었다. 이 통화는 외환위기의 도화선이 된 기아그룹 처리를 놓고 정부를 가장 강하게 비판한 신문과 경제부총리 사이의 문답이었다. 이는 수화기로 전해온 강 부총리의 냉랭한 어투의 이유 중 하나로 짐작한다. 그의 답변은 추가 질문을 차단하는 것이었고, 나는 통화를 이어가지 못했다. 강 부총리가 그 무렵 우리 신문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몇 년 뒤 그의 책을 통해 알게 됐다. 그는 1999년 12월에 발간된 책 [강경식의 환란일기]에서 “정론을 펴던 신문이 왜 갑자기 ‘기아 살리기’와 강경식 죽이기’로 돌아섰는지 나는 지금도 그 이유를 알 수 없다”며 의아해했다. 그는 기아 살리기와 자신의 퇴진을 주장한 이 신문의 사설을 거론했다. 그는 “특히 이 신문은 ‘삼성자동차 부산 유치위원장’을 내가 맡았다는 허위 보도를 했다”고 지적했다. 기아를 화의를 통해 살려야 한다는 일부 언론사의 오도는 시장 원리에 따른 기아 처리의 발목을 잡았다. 이들 언론의 논조는 누가 왜 바꾸었을까.
기아사태는 자금부족으로 기아가 부도유예협약 대상이 된 1997년 7월 15일 이후 약 100일을 끈 끝에 10월 22일 법정관리로 결론이 났다. 부도유예협약이 9월 29일 종료된 후 곧장 법정관리로 간 경우와 비교하면 23일이 더 걸렸다.
기아사태를 적기에 적절히 해결했다면 한국경제는 외환위기를 건너뛰거나 실제보다 덜 고통스럽게 넘겼을지 모른다. 그러나 기아 처리는 계속 지체됐고, 그럴수록 한국경제에 대한 해외의 신뢰기반이 점점 소실돼갔다. 이에 대해 강만수 재경원 차관은 책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2005년)]에서 “세계적인 대기업인 기아자동차가 법정관리를 거부하며 석 달을 버티는 동안 우리의 대외신인도는 떨어질 대로 떨어졌다”고 전했다. 강경식 부총리는 앞의 책에서 “7월 기아사태 이후 해외 금융시장에서는 우리 정부의 구조적 문제 해결 의지와 정책의 실천력에 대해 회의하기 시작했다”고 회고했다. 이로 인해 “차입 금리도 올라가는 추세였고 외화 확보도 어려워지고 있었다”며 “특히 국제신용평가회사에서는 국내 은행의 신용등급을 하향 조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고 전했다.
기아의 지배구조와 행태를 고려할 때 기아사태에 대처하는 길은 법정관리 외에는 없었다. 기아는 국민기업은커녕 대기업과 주인 없는 기업의 병폐가 중첩된 기업이었다. 기아는 다른 대기업처럼 계열사를 늘리며 방만하게 투자한 끝에 부실해졌다. 김선홍 회장과 노조는 유착·공생하는 관계여서, 김 회장은 노조의 요구를 쉽게 들어주고 경영에 대한 간섭을 용인했고, 노조는 파업을 불사하며 김 회장을 지켜줬다. 이 구조를 고려할 때 기아를 회생시키려면 김 회장의 퇴진이 불가결했고, 김 회장을 경영에서 배제하려면 법정관리를 해야만 했다. 법정관리는 중간단계였고 대주주를 찾아주는 제3자 매각이 그 다음 절차였다. 기아자동차는 법정관리를 거쳐 1998년 10월 현대자동차에 낙찰됐다.
기아는 회생 절차를 어떻게 방해했나. 기아 계열 18개사가 부도유예협약 대상이 된 이후 김선홍 기아 회장은 약속을 번번이 깨고 자신의 사표와 구조조정에 대한 노조의 동의서를 내지 않았다. 협약은 헛돌았다. 그러던 김 회장은 9월 22일 기습적으로 화의를 신청했다. 자신의 경영권을 지키려는 꼼수였다[당시 구조조정제도 설명은 박스기사 참조]. 기아는 또 정치권과 시민단체를 끌어들였다. 김영삼 대통령은 “기아를 부도내지 말아달라”고 당부한 바 있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둔 시점에 표를 의식한 이회창 신한국당 총재와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총재도 기아 회생을 약속했다. 60여 개 시민사회단체는 7월 21일 ‘기아 살리기 범국민운동연합’을 발족했다. 일부 언론매체는 기아의 메가폰이자 가장 강력한 지원 세력이었다.
강 부총리가 언급한 것처럼, 일부 언론이 처음부터 정부의 기아 처리를 가로막은 것은 아니었다. 한 신문사의 간부는 그해 7월 29일자 칼럼에서 “무조건 기아를 살려내라는 주문에는 무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기아사태의 해법’이라는 제목의 이 칼럼에서 “보호는 규제의 또 다른 얼굴”이고 “원칙 없는 기업 보호는 결국 국민적 비용부담으로 되돌아온다”고 우려했다. 아울러 기아로서도 ‘국민기업’이라는 호소를 통해 얻은 “여론의 동정이 필사의 자구를 방해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그랬던 이 간부는 8월 6일자 칼럼에서 다음과 같은 ‘각본설’을 전하면서 논점을 옮긴다. “정부가 삼성그룹과 짜고 고의적으로 기아를 부도유예 대상이 되도록 했다. 그 다음 단계로 김선홍 회장 등 기아 최고경영진을 퇴진시킨다. 그리고 친 삼성 외부경영진을 앉힌다. 궁극적으로는 삼성이 기아자동차를 인수한다.” 그는 강 부총리가 삼성의 자동차 진출을 적극 지원했다며 강 부총리가 부도유예를 적용받은 진로그룹에 비해 “기아 경영층에 유독 냉정하다는 사실도 각본설의 ‘심증’을 자극한다”고 근거를 든다. 이어 기아의 제3자 매각에 반대하는 의견을 낸다. 그는 “(정부는) 무리한 제3자 인수 추진이 기아자동차의 회생과 우리 자동차산업의 경쟁력을 오히려 결정적으로 저해할 우려가 높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또 재벌들은 “기술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막대한 자금력만으로 과당 출혈경쟁을 촉발할 경우 결국 업계 전체의 심한 피해를 자초할 것임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고 당부한다.
(이 간부는 2008년 칼럼에서 11년 전과는 전혀 다른 주장을 했다. 그는 “1997년 그해, 한보철강과 기아자동차 사태 대응에 때를 놓친 것도 외환위기를 재촉했다”고 분석했다. 또 “기아차 사태 때 정부는 3개월을 허송한 뒤에야 법정관리를 결정했다”면서 “법정관리든, 부도처리든 기민하게 했더라면 국제신인도가 치명적 상태로 추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신문은 기아자동차 인수를 추진한다는 삼성그룹의 내부 보고서를 9월 22일자로 보도하면서 강 부총리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노골적으로’라고 표현할 정도로 기아의 구체제 살리기에 나선다. 이날 사설에서 ‘삼성 기아 인수 음모설의 충격’을 논하고, 9월 27일자 사설에선 기아사태를 화의로 해결하라고 촉구한다. 10월 21일자 사설에선 강 부총리가 물러나야 한다는 8월 30일자 사설을 반복한다. 기아사태는 언론의 역할이 중요함을 반면교사의 사례로 보여줬다. 기아의 구체제를 언론이 홀로 나서서 연장해준 것은 아니지만, 일부 언론사가 적어도 기아 경영진과 노조의 버티기에 강한 부목을 댄 건 분명하다. 이로 인해 정부가 기아사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현재의 언론 지형은 그때와는 정반대에 가까워졌다. 20년 전에는 매스 미디어를 몇몇 언론사가 과점하고 여론을 좌지우지하며 종종 왜곡했다. 이제는 언론매체가 백화제방해 경쟁한다. 우선 인터넷과 모바일을 매개로 콘텐트를 전파하는 언론매체 숫자가 급증했다. 또 성향에 따라 게시판에 콘텐트를 공유하는 각종 사이트도 언론매체의 역할을 하고 있다. 팟캐스트 방식을 통해 방송도 대중 각자가 직접 내보내는 물꼬가 트였다. 아울러 소설 미디어에서 각자 뉴스에 대해 논평하고 자신의 주장을 편다.
그 결과 뉴스는 기존 언론매체가 내보내는 그 자체로 수용되지 않는다. 저마다 자신의 관점과 가치관에 따라 걸러서 소화한다. 또 다양한 새 미디어를 통해 자신의 견해를 전파하고 강화한다. 기존 언론매체는 여론을 좌우할 수 없게 됐다.
그래서 여론 형성 과정이 이전과는 다른 양상으로 더욱 중요해졌다. 전에는 여론이 오도되고 왜곡되는 폐해가 컸다면, 이제는 다양한 주장이 걸러지고 퇴출되고 조정되며 수렴하는 과정이 작동하지 않는다. 여론이 형성되지 않는다. 갖가지 주장이 백가쟁명할 뿐 의견이 모이지 않는 사회는 어느 방향으로든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
언론매체와 미디어 수용자에게 주어진 과제는 틀린 얘기를 걸러내고 바로잡는 소양과 역량, 문화를 조성해나가는 일이다. 또 노래방에 가듯이 토론을 즐기면서 자신의 주장에 포함된 오류를 인정하고 사실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갖추는 일이다. 과거 쟁점에서 어느 편이 맞았는지 복기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모든 과정에서 진영이 논리와 사실을 넘어서는 행태를 바로잡아야 한다.
# 후기 1. “백 기자, 게임 끝났어. 캉드쉬가 며칠 전에 서울에 왔다갔어.” 내가 그날 강 부총리를 전화 취재한 건 이 말을 듣고서였다. 캉드쉬가 다녀갔다는 사실은 앞서 한국 정부가 국제 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신청하기로 결정했음을 뜻하는 초대형 뉴스였다. 믿을 만한 소식통의 정보였지만, 사안이 사안인지라 확인을 거쳐야 했다. 강 부총리와 통화를 끝내고 귀가해 기사 초안을 써놓고 재경원을 함께 취재하는 선배와 후배에게 추가 취재를 부탁했다. 마침 두 동료는 과천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선배는 “윤증현 금융정책실장이 시인하지 않는데, 부인하지도 못하더라”고 말했다. 결정은 내 몫이었다. 경제부장 보고를 거쳐 편집국 야근국장에게 기사를 발제하고 송고한 시각은 11월 21일 새벽 1시 50분. 세계 최초 보도였다.
# 후기 2. 나는 1998년 11월 다니던 신문사를 떠났다. 입사 7년 만이었다. 기아사태에 대한 논조와 보도도 퇴사하는 계기가 됐다. 부도유예협약은 영국 대처 정부에서 시행한 ‘신사 협정(Gentlemen’s Agreement)’과 비슷한 제도였다. 구조적으로 누적된 적자로 인해 결국 위기에 봉착한 기아자동차도 부도 유예협약의 대상이 됐다. 김선홍 기아 회장의 관심사는 경영권을 지키는 것이었고, 그렇게 하기 위한 제도는 화의가 유일했다. 당시 기업구조조정 관련 제도인 부도유예협약과 화의, 법정관리에 대해 알아본다.
▶부도유예협약. 이름 그대로 부도를 한동안 미뤄줘 적용된 기업에 회생 기회를 주는 은행 간 자율협약. 경쟁력이 있는 기업이 한때의 자금부족이나 심지어 자금난 소문만으로도 부도에 몰려 쓰러지는 것을 막기 위해 도입됐다. 부도유예협약 기간에 은행들은 대상이 된 기업에 대해 어음을 부도처리하지 않고 당좌거래를 정지하지 않아, 그동안 해당 회사가 정상적인 기업활동을 하면서 자산매각 및 인원감축 등 구조조정과 경영혁신 계획을 세워 이행하면서 회생을 꾀하도록 했다. 1997년 4월에 체결됐고 그달 27일 진로그룹 계열사 6개사에 처음 적용됐다. 협약 기간은 2개월 정도(초기엔 3개월)였다. 이 협약을 적용받는 조건은 대주주나 최고경영자의 주식 또는 경영권포기 각서, 임금·인원 감축에 관한 노조 동의서, 자금관리단 파견 동의서 등의 사전 제출이었다. 부도유예협약은 1998년 6월 기업구조정협약으로 대체됐고, 기업 재무구조 개선작업은 워크아웃으로 불리게 됐다. 워크아웃은 2001년 9월 이후엔 기업구조조정촉진법에 따라 시행되고 있다.
▶화의. 기업이 부도 위험에 처했을 때 법원의 중재를 받아 채권자들과 채무변제 협정을 체결해 재기를 모색하는 제도. 법원은 화의 신청이 타당하다고 판단되면 법정관리와 마찬가지로 채무이행을 동결하는 재산보전처분 결정을 내려 부도를 막아준다. 법원이 법정관리인을 선임하고 기업경영까지 책임지는 법정관리와는 달리, 화의제도에서는 법원이 기업경영에 전혀 개입하지 않고 기존 경영자가 기업경영을 계속 맡는다. 그러나 기아자동차가 시도한 것처럼 화의제도는 도산 상태를 일시적으로 회피하고 경영권을 유지할 목적으로 악용됐다. 또 대기업이 신청한 화의에 대해 인가가 나지 않거나 인가가 나더라도 회생에 실패해 채권자들의 권리행사가 유보되고 절차비용만 증가하는 등의 부작용이 발생했다. 이에 따라 2006년 ‘채무자 회생 및 파산에 관한 법률(통합도산법)’이 제정되면서 화의법과 화의절차가 폐지됐다.
▶법정관리. 기업이 자력으로는 살아나기 어려울 만큼 빚이 많지만 회생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할 경우 법원이 제3자를 법정관리인으로 지정해 기업활동 전반을 대신 관리하도록 하는 제도. 회사정리라고도 불린다. 2006년 통합도산법으로 일원화되면서 법정관리에 들어가더라도 원칙적으로 기존 경영진이 경영권을 유지할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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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를 계속해서 새로 쓴다. 그것은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를 다시 바라보고 과거의 사실에 현재를 비춰보는 과정이다. 1997년 외환위기도 역사로 저물고 있다. 외환위기를 통해 우리가 지금 새로 생각할 스무 가지를 추려 격주로 연재한다. 당시 일간지 기자로 위기의 현장을 취재했고 그때의 문제의식을 책 [한국경제 실패학]으로 써낸 백우진 한화투자증권 편집위원이 정리한다. 오해할 소지가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당시 직책을 적는다. [편집자] 1997년 11월 20일 저녁 아홉 시 반경.
“최근 극비리에 방한한 캉드쉬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를 만나 구제금융 방안을 협의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사실입니까?”
“공직을 떠난 사람으로서 할 말이 없습니다.”
전화로 질문한 사람은 필자였고, 대답한 이는 강경식 전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이었다. 나는 일간지 기자로 3개월 전부터 재정경제원을 3진으로, 통상산업자원부는 2진으로 취재하고 있었다. 전날 경질된 강 전 부총리는 부산 집에 내려가 있었다. 나는 신문사 편집국에서 전화를 걸었다.
돌아보면 이 통화에는 기자와 취재원의 통화 이상의 배경이 깔려 있었다. 이 통화는 외환위기의 도화선이 된 기아그룹 처리를 놓고 정부를 가장 강하게 비판한 신문과 경제부총리 사이의 문답이었다. 이는 수화기로 전해온 강 부총리의 냉랭한 어투의 이유 중 하나로 짐작한다. 그의 답변은 추가 질문을 차단하는 것이었고, 나는 통화를 이어가지 못했다.
기아사태 적기에 해결했더라면
기아사태는 자금부족으로 기아가 부도유예협약 대상이 된 1997년 7월 15일 이후 약 100일을 끈 끝에 10월 22일 법정관리로 결론이 났다. 부도유예협약이 9월 29일 종료된 후 곧장 법정관리로 간 경우와 비교하면 23일이 더 걸렸다.
기아사태를 적기에 적절히 해결했다면 한국경제는 외환위기를 건너뛰거나 실제보다 덜 고통스럽게 넘겼을지 모른다. 그러나 기아 처리는 계속 지체됐고, 그럴수록 한국경제에 대한 해외의 신뢰기반이 점점 소실돼갔다. 이에 대해 강만수 재경원 차관은 책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2005년)]에서 “세계적인 대기업인 기아자동차가 법정관리를 거부하며 석 달을 버티는 동안 우리의 대외신인도는 떨어질 대로 떨어졌다”고 전했다. 강경식 부총리는 앞의 책에서 “7월 기아사태 이후 해외 금융시장에서는 우리 정부의 구조적 문제 해결 의지와 정책의 실천력에 대해 회의하기 시작했다”고 회고했다. 이로 인해 “차입 금리도 올라가는 추세였고 외화 확보도 어려워지고 있었다”며 “특히 국제신용평가회사에서는 국내 은행의 신용등급을 하향 조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고 전했다.
기아의 지배구조와 행태를 고려할 때 기아사태에 대처하는 길은 법정관리 외에는 없었다. 기아는 국민기업은커녕 대기업과 주인 없는 기업의 병폐가 중첩된 기업이었다. 기아는 다른 대기업처럼 계열사를 늘리며 방만하게 투자한 끝에 부실해졌다. 김선홍 회장과 노조는 유착·공생하는 관계여서, 김 회장은 노조의 요구를 쉽게 들어주고 경영에 대한 간섭을 용인했고, 노조는 파업을 불사하며 김 회장을 지켜줬다. 이 구조를 고려할 때 기아를 회생시키려면 김 회장의 퇴진이 불가결했고, 김 회장을 경영에서 배제하려면 법정관리를 해야만 했다. 법정관리는 중간단계였고 대주주를 찾아주는 제3자 매각이 그 다음 절차였다. 기아자동차는 법정관리를 거쳐 1998년 10월 현대자동차에 낙찰됐다.
기아는 회생 절차를 어떻게 방해했나. 기아 계열 18개사가 부도유예협약 대상이 된 이후 김선홍 기아 회장은 약속을 번번이 깨고 자신의 사표와 구조조정에 대한 노조의 동의서를 내지 않았다. 협약은 헛돌았다. 그러던 김 회장은 9월 22일 기습적으로 화의를 신청했다. 자신의 경영권을 지키려는 꼼수였다[당시 구조조정제도 설명은 박스기사 참조].
김선홍 회장-노조, 언론사 동원해 버텨
강 부총리가 언급한 것처럼, 일부 언론이 처음부터 정부의 기아 처리를 가로막은 것은 아니었다. 한 신문사의 간부는 그해 7월 29일자 칼럼에서 “무조건 기아를 살려내라는 주문에는 무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기아사태의 해법’이라는 제목의 이 칼럼에서 “보호는 규제의 또 다른 얼굴”이고 “원칙 없는 기업 보호는 결국 국민적 비용부담으로 되돌아온다”고 우려했다. 아울러 기아로서도 ‘국민기업’이라는 호소를 통해 얻은 “여론의 동정이 필사의 자구를 방해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그랬던 이 간부는 8월 6일자 칼럼에서 다음과 같은 ‘각본설’을 전하면서 논점을 옮긴다. “정부가 삼성그룹과 짜고 고의적으로 기아를 부도유예 대상이 되도록 했다. 그 다음 단계로 김선홍 회장 등 기아 최고경영진을 퇴진시킨다. 그리고 친 삼성 외부경영진을 앉힌다. 궁극적으로는 삼성이 기아자동차를 인수한다.” 그는 강 부총리가 삼성의 자동차 진출을 적극 지원했다며 강 부총리가 부도유예를 적용받은 진로그룹에 비해 “기아 경영층에 유독 냉정하다는 사실도 각본설의 ‘심증’을 자극한다”고 근거를 든다. 이어 기아의 제3자 매각에 반대하는 의견을 낸다. 그는 “(정부는) 무리한 제3자 인수 추진이 기아자동차의 회생과 우리 자동차산업의 경쟁력을 오히려 결정적으로 저해할 우려가 높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또 재벌들은 “기술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막대한 자금력만으로 과당 출혈경쟁을 촉발할 경우 결국 업계 전체의 심한 피해를 자초할 것임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고 당부한다.
(이 간부는 2008년 칼럼에서 11년 전과는 전혀 다른 주장을 했다. 그는 “1997년 그해, 한보철강과 기아자동차 사태 대응에 때를 놓친 것도 외환위기를 재촉했다”고 분석했다. 또 “기아차 사태 때 정부는 3개월을 허송한 뒤에야 법정관리를 결정했다”면서 “법정관리든, 부도처리든 기민하게 했더라면 국제신인도가 치명적 상태로 추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신문은 기아자동차 인수를 추진한다는 삼성그룹의 내부 보고서를 9월 22일자로 보도하면서 강 부총리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노골적으로’라고 표현할 정도로 기아의 구체제 살리기에 나선다. 이날 사설에서 ‘삼성 기아 인수 음모설의 충격’을 논하고, 9월 27일자 사설에선 기아사태를 화의로 해결하라고 촉구한다. 10월 21일자 사설에선 강 부총리가 물러나야 한다는 8월 30일자 사설을 반복한다.
오류 인정하고 승복하는 문화 필요
현재의 언론 지형은 그때와는 정반대에 가까워졌다. 20년 전에는 매스 미디어를 몇몇 언론사가 과점하고 여론을 좌지우지하며 종종 왜곡했다. 이제는 언론매체가 백화제방해 경쟁한다. 우선 인터넷과 모바일을 매개로 콘텐트를 전파하는 언론매체 숫자가 급증했다. 또 성향에 따라 게시판에 콘텐트를 공유하는 각종 사이트도 언론매체의 역할을 하고 있다. 팟캐스트 방식을 통해 방송도 대중 각자가 직접 내보내는 물꼬가 트였다. 아울러 소설 미디어에서 각자 뉴스에 대해 논평하고 자신의 주장을 편다.
그 결과 뉴스는 기존 언론매체가 내보내는 그 자체로 수용되지 않는다. 저마다 자신의 관점과 가치관에 따라 걸러서 소화한다. 또 다양한 새 미디어를 통해 자신의 견해를 전파하고 강화한다. 기존 언론매체는 여론을 좌우할 수 없게 됐다.
그래서 여론 형성 과정이 이전과는 다른 양상으로 더욱 중요해졌다. 전에는 여론이 오도되고 왜곡되는 폐해가 컸다면, 이제는 다양한 주장이 걸러지고 퇴출되고 조정되며 수렴하는 과정이 작동하지 않는다. 여론이 형성되지 않는다. 갖가지 주장이 백가쟁명할 뿐 의견이 모이지 않는 사회는 어느 방향으로든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
언론매체와 미디어 수용자에게 주어진 과제는 틀린 얘기를 걸러내고 바로잡는 소양과 역량, 문화를 조성해나가는 일이다. 또 노래방에 가듯이 토론을 즐기면서 자신의 주장에 포함된 오류를 인정하고 사실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갖추는 일이다. 과거 쟁점에서 어느 편이 맞았는지 복기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모든 과정에서 진영이 논리와 사실을 넘어서는 행태를 바로잡아야 한다.
# 후기 1. “백 기자, 게임 끝났어. 캉드쉬가 며칠 전에 서울에 왔다갔어.” 내가 그날 강 부총리를 전화 취재한 건 이 말을 듣고서였다. 캉드쉬가 다녀갔다는 사실은 앞서 한국 정부가 국제 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신청하기로 결정했음을 뜻하는 초대형 뉴스였다. 믿을 만한 소식통의 정보였지만, 사안이 사안인지라 확인을 거쳐야 했다. 강 부총리와 통화를 끝내고 귀가해 기사 초안을 써놓고 재경원을 함께 취재하는 선배와 후배에게 추가 취재를 부탁했다. 마침 두 동료는 과천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선배는 “윤증현 금융정책실장이 시인하지 않는데, 부인하지도 못하더라”고 말했다. 결정은 내 몫이었다. 경제부장 보고를 거쳐 편집국 야근국장에게 기사를 발제하고 송고한 시각은 11월 21일 새벽 1시 50분. 세계 최초 보도였다.
# 후기 2. 나는 1998년 11월 다니던 신문사를 떠났다. 입사 7년 만이었다. 기아사태에 대한 논조와 보도도 퇴사하는 계기가 됐다.
[박스기사] 당시 기업회생 제도 살펴보니 - 김선홍, 기아 살리기보다 경영권에 집착 비판
▶부도유예협약. 이름 그대로 부도를 한동안 미뤄줘 적용된 기업에 회생 기회를 주는 은행 간 자율협약. 경쟁력이 있는 기업이 한때의 자금부족이나 심지어 자금난 소문만으로도 부도에 몰려 쓰러지는 것을 막기 위해 도입됐다. 부도유예협약 기간에 은행들은 대상이 된 기업에 대해 어음을 부도처리하지 않고 당좌거래를 정지하지 않아, 그동안 해당 회사가 정상적인 기업활동을 하면서 자산매각 및 인원감축 등 구조조정과 경영혁신 계획을 세워 이행하면서 회생을 꾀하도록 했다. 1997년 4월에 체결됐고 그달 27일 진로그룹 계열사 6개사에 처음 적용됐다. 협약 기간은 2개월 정도(초기엔 3개월)였다. 이 협약을 적용받는 조건은 대주주나 최고경영자의 주식 또는 경영권포기 각서, 임금·인원 감축에 관한 노조 동의서, 자금관리단 파견 동의서 등의 사전 제출이었다. 부도유예협약은 1998년 6월 기업구조정협약으로 대체됐고, 기업 재무구조 개선작업은 워크아웃으로 불리게 됐다. 워크아웃은 2001년 9월 이후엔 기업구조조정촉진법에 따라 시행되고 있다.
▶화의. 기업이 부도 위험에 처했을 때 법원의 중재를 받아 채권자들과 채무변제 협정을 체결해 재기를 모색하는 제도. 법원은 화의 신청이 타당하다고 판단되면 법정관리와 마찬가지로 채무이행을 동결하는 재산보전처분 결정을 내려 부도를 막아준다. 법원이 법정관리인을 선임하고 기업경영까지 책임지는 법정관리와는 달리, 화의제도에서는 법원이 기업경영에 전혀 개입하지 않고 기존 경영자가 기업경영을 계속 맡는다. 그러나 기아자동차가 시도한 것처럼 화의제도는 도산 상태를 일시적으로 회피하고 경영권을 유지할 목적으로 악용됐다. 또 대기업이 신청한 화의에 대해 인가가 나지 않거나 인가가 나더라도 회생에 실패해 채권자들의 권리행사가 유보되고 절차비용만 증가하는 등의 부작용이 발생했다. 이에 따라 2006년 ‘채무자 회생 및 파산에 관한 법률(통합도산법)’이 제정되면서 화의법과 화의절차가 폐지됐다.
▶법정관리. 기업이 자력으로는 살아나기 어려울 만큼 빚이 많지만 회생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할 경우 법원이 제3자를 법정관리인으로 지정해 기업활동 전반을 대신 관리하도록 하는 제도. 회사정리라고도 불린다. 2006년 통합도산법으로 일원화되면서 법정관리에 들어가더라도 원칙적으로 기존 경영진이 경영권을 유지할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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