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수의 ‘돈이 되는 茶 이야기’] 정치·외교의 필수품으로 쓰인 차(茶)
[서영수의 ‘돈이 되는 茶 이야기’] 정치·외교의 필수품으로 쓰인 차(茶)
중국, 주변국 유화정책에 활용... 일 사무라이들은 다도문화 즐기고 고려는 외교수단 삼아 #. 차는 중국에서 주변 국가로 전해지는 선린과 우호의 상징이었다. 중국 황실에서 사용하는 어용차는 조공을 바치려고 황제를 알현한 외국사신에게 주는 회사품(조공의 대가로 상국이 조공국에 내려 주는 하사품)으로 사용됐다. 사신을 통해 전달된 차는 해당 국가의 왕이 조정에서 신하와 왕족에게 하사하며 군신 간의 서열을 확인하는 표상이 됐다. 중국인이 갖고 있는 뿌리 깊은 화이사상에 바탕을 둔 유화정책의 대표적 수단이었던 차는 오늘도 각국의 수반이 중국을 방문하면 빠지지 않는 답례품으로 등장한다.
#. 차를 마시려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북바치는 기쁨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히데요시가 주군으로 모시는 오다 노부나가가 다회를 주최해도 좋다고 허락한 것이다. 일본 전국시대에는 차를 마시는 것이 사무라이 계층의 고급 문화로 정착했지만 마음대로 다회를 할 수 없었다. 전국시대 최고 실력자 노부나가는 아케치 미쓰히데같은 심복에게만 다회를 허락했다. 노부나가에게 인정받았다는 사실은 평민출신의 히데요시에게는 가문의 영광이었다. 다도 정치를 할 수 있게 된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에 이어 전국을 평정할 기회를 갖게 된다. 차 마시는 행위를 정치수단으로 활용한 노부나가는 당대 최고의 다도 선생 센노리큐를 ‘다두’로 모시고 다회를 개최하며 무장들의 논공행상과 서열을 조율했다. 센노리큐는 차노유라고 하는 다회를 통해 일본의 독특한 미학인 와비사비(侘び寂び)를 구현하는 일본 다도를 완성한 일대종사다. 1582년 6월 2일 미쓰히데가 일으킨 혼노지의 변으로 49세에 사망한 노부나가의 대업을 물려받은 히데요시는 센노리큐를 다도 선생으로 영입해 다도정치를 전수받아 세력 확장에 활용했다. 이 무렵 조선의 차는 사대교린의 외교정책과 군신관계를 이어주는 상징성을 넘어 주요 과세 대상이었다. 조정과 지방 관리의 과도한 세금폭탄을 피해 차는 암암리에 즐기는 골방문화로 퇴색의 길을 걷고 있었다.
차를 과세와 수탈 대상으로 삼은 조선에 비해 고려는 차 문화를 융성하게 하고 외교수단으로 적극 활용했다. [고려사]의 세가와 열전에 의하면 송나라 황실에서 받아온 대표적인 어용차인 용봉단차를 신하들에게 골고루 하사함으로써 왕의 권위를 높이고 신하들의 충성심을 끌어냈다고 한다. 고려는 한약재로 유명한 용뇌향을 가미한 뇌원차를 자체 개발해 989년부터 어용차로 사용했다. 뇌원차를 송나라에 공물로 가져갔을 뿐 아니라 거란족이 일으킨 요나라와 여진족이 창업한 금나라와 예물을 주고받을 때에도 사용했다. 송나라를 멸하고 중원을 차지한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의 부마국이 된 고려의 충렬왕은 조공사신을 보내며 화친과 복종의 상징으로 뇌원차를 보냈다.
차는 봉건제도를 유지하는 큰 축인 토지와 노비를 대체하는 대표적인 하사품이었다. 공신에게 내리는 토지는 무한정한 것이 아니고 노비를 많이 갖게 하는 것은 신하의 힘을 과도하게 키우는 불안 요인이 있었다. 어용차를 하사하는 것은 군신 관계의 충성과 국가 사이의 신뢰 관계를 유지시키는 효율적인 통치행위였다. 어용차를 하사품으로 사용한 최초의 나라는 당나라다. 안사의 난으로 힘을 잃은 현종에 이어 황제에 오른 숙종은 금주령을 반포했다. 안사의 난을 수습한 곽자의 장군에게 숙종은 어용차를 하사하며 궁중 피로연과 제사에 술 대신 차를 사용하도록 했다. 황실에 차를 바치는 공차제도도 숙종 때 시작됐다.
차 산업과 문화가 비약적으로 발달한 당나라 때부터 차는 중화사상을 실천하는 유화정책의 상징인 동시에 부를 창조하는 교류 품목이었다. 당 태종 이세민은 그 당시 토번으로 불렸던 티베트의 왕 송찬간포(松贊干布)의 아들 공송공찬에게 문성공주를 출가시키며 결혼 예물로 차를 보냈다. 당태종이 문성공주를 화번공주로 삼아 시집보낸 사건은 주변국과의 갈등을 화전 양면 전략으로 풀어 중원을 지켜온 역대 중국 정권에서 가장 성공한 외교사례로 평가받는다. 차를 마시지 않았던 티베트인은 문성공주가 차를 소개한 이후 필수 품목이 되어 지금은 가장 차를 많이 마시는 민족이 됐다. 641년 장안을 출발해 티베트로 향한 문성공주는 당태종의 친 딸이 아닌 먼 친척의 딸로서 급히 공주로 포장된 외교관이었다. 18명이나 되는 당나라 화번공주의 상당수는 이처럼 급조된 경우가 많았다. 화번공주를 맞이하는 나라에서는 이를 알면서도 묵인했다. 화친의 상징으로 시집오는 공주는 진위 여부보다 중국황실의 공주라는 ‘타이틀’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문성공주와 결혼한 공송공찬이 643년 사망하자 문성공주는 시아버지였던 송찬간포와 646년 재혼했다.
차를 비롯한 곡식종자를 축하 예물로 보내며 송찬간포와 문성공주의 혼인을 인정한 당 고종은 송찬간포를 부마도위로 임명하고 서해군왕으로 책봉했다. 문성공주를 맞이한 송찬간포도 649년 병사하고 만다. 문성공주는 송찬간포의 어린 손자가 등극하면서 섭정이 된 재상 녹동찬(祿東贊)을 앞세워 송찬간포가 못 다한 개혁정책을 시행했다. 녹동찬은 송찬간포가 문성공주에게 청혼하기 위해 당나라에 파견했던 사신이었다. 서역의 패자로 부상한 티베트는 당나라의 서쪽 변방을 지켜주는 든든한 방벽이 되어줬다. 옛날부터 차를 외교수단으로 활용한 중국의 전통은 21세기에도 살아있다. 2013년 6월 중국을 공식 방문한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호남성에서 생산되는 안화흑차(安化黑茶)를 선물했다.
서영수 - 1956년생으로 1984년에 데뷔한 대한민국 최연소 감독 출신. 미국 시나리오 작가조합 정회원. 1980년 무렵 보이차에 입문해 중국 윈난성 보이차 산지를 탐방하는 등 차 문화에 조예가 깊다. 중국 CCTV의 특집 다큐멘터리 [하늘이 내린 선물 보이차]에 출연했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차를 마시려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북바치는 기쁨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히데요시가 주군으로 모시는 오다 노부나가가 다회를 주최해도 좋다고 허락한 것이다. 일본 전국시대에는 차를 마시는 것이 사무라이 계층의 고급 문화로 정착했지만 마음대로 다회를 할 수 없었다. 전국시대 최고 실력자 노부나가는 아케치 미쓰히데같은 심복에게만 다회를 허락했다. 노부나가에게 인정받았다는 사실은 평민출신의 히데요시에게는 가문의 영광이었다. 다도 정치를 할 수 있게 된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에 이어 전국을 평정할 기회를 갖게 된다.
차를 수탈대상 삼은 조선
차를 과세와 수탈 대상으로 삼은 조선에 비해 고려는 차 문화를 융성하게 하고 외교수단으로 적극 활용했다. [고려사]의 세가와 열전에 의하면 송나라 황실에서 받아온 대표적인 어용차인 용봉단차를 신하들에게 골고루 하사함으로써 왕의 권위를 높이고 신하들의 충성심을 끌어냈다고 한다. 고려는 한약재로 유명한 용뇌향을 가미한 뇌원차를 자체 개발해 989년부터 어용차로 사용했다. 뇌원차를 송나라에 공물로 가져갔을 뿐 아니라 거란족이 일으킨 요나라와 여진족이 창업한 금나라와 예물을 주고받을 때에도 사용했다. 송나라를 멸하고 중원을 차지한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의 부마국이 된 고려의 충렬왕은 조공사신을 보내며 화친과 복종의 상징으로 뇌원차를 보냈다.
차는 봉건제도를 유지하는 큰 축인 토지와 노비를 대체하는 대표적인 하사품이었다. 공신에게 내리는 토지는 무한정한 것이 아니고 노비를 많이 갖게 하는 것은 신하의 힘을 과도하게 키우는 불안 요인이 있었다. 어용차를 하사하는 것은 군신 관계의 충성과 국가 사이의 신뢰 관계를 유지시키는 효율적인 통치행위였다. 어용차를 하사품으로 사용한 최초의 나라는 당나라다. 안사의 난으로 힘을 잃은 현종에 이어 황제에 오른 숙종은 금주령을 반포했다. 안사의 난을 수습한 곽자의 장군에게 숙종은 어용차를 하사하며 궁중 피로연과 제사에 술 대신 차를 사용하도록 했다. 황실에 차를 바치는 공차제도도 숙종 때 시작됐다.
차 산업과 문화가 비약적으로 발달한 당나라 때부터 차는 중화사상을 실천하는 유화정책의 상징인 동시에 부를 창조하는 교류 품목이었다. 당 태종 이세민은 그 당시 토번으로 불렸던 티베트의 왕 송찬간포(松贊干布)의 아들 공송공찬에게 문성공주를 출가시키며 결혼 예물로 차를 보냈다. 당태종이 문성공주를 화번공주로 삼아 시집보낸 사건은 주변국과의 갈등을 화전 양면 전략으로 풀어 중원을 지켜온 역대 중국 정권에서 가장 성공한 외교사례로 평가받는다.
시진핑, 박 전 대통령에게 차 선물
차를 비롯한 곡식종자를 축하 예물로 보내며 송찬간포와 문성공주의 혼인을 인정한 당 고종은 송찬간포를 부마도위로 임명하고 서해군왕으로 책봉했다. 문성공주를 맞이한 송찬간포도 649년 병사하고 만다. 문성공주는 송찬간포의 어린 손자가 등극하면서 섭정이 된 재상 녹동찬(祿東贊)을 앞세워 송찬간포가 못 다한 개혁정책을 시행했다. 녹동찬은 송찬간포가 문성공주에게 청혼하기 위해 당나라에 파견했던 사신이었다. 서역의 패자로 부상한 티베트는 당나라의 서쪽 변방을 지켜주는 든든한 방벽이 되어줬다. 옛날부터 차를 외교수단으로 활용한 중국의 전통은 21세기에도 살아있다. 2013년 6월 중국을 공식 방문한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호남성에서 생산되는 안화흑차(安化黑茶)를 선물했다.
서영수 - 1956년생으로 1984년에 데뷔한 대한민국 최연소 감독 출신. 미국 시나리오 작가조합 정회원. 1980년 무렵 보이차에 입문해 중국 윈난성 보이차 산지를 탐방하는 등 차 문화에 조예가 깊다. 중국 CCTV의 특집 다큐멘터리 [하늘이 내린 선물 보이차]에 출연했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