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와 정부의 상업 개정 ‘동상이몽’] 재계는 대주주 힘 강화, 정부는 대주주 힘 빼기
[재계와 정부의 상업 개정 ‘동상이몽’] 재계는 대주주 힘 강화, 정부는 대주주 힘 빼기
정부·여당 “집중투표제 의무화”… 재계·야당 “해외 투기자본 멍석 깔기” 2016년 11월 15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제1소위원회. 백혜련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작심한 듯 입을 열었다. “최순실·박근혜 게이트는 정말 서구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사건입니다. 대기업 재벌이 협박을 당했든 공갈을 당했든 알아서 갖다 바쳤든 서구에서는 그런 것들이 다 감시되고 그런 일이 일어났으면 바로 대표이사는 법적 책임을 집니다. 견제 장치가 하나도 없어 이런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런 이유에서 여러 상법 조항이 도입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백 의원의 발언은 지금의 정부와 여당이 왜 상법을 고치려고 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국내 대부분의 대기업은 총수가 회사를 마음대로 해도 견제할 수 있는 장치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삼성·롯데·SK 등 국내 재벌 대기업이 정체가 불분명한 미르나 K스포츠재단에 수십억원을 낸 것도 이런 구조 탓이라는 해석이다.
실제로 주식회사의 최고의사결정기구는 총수 등 오너 일가가 아니라 이사회다. 하지만 이사회가 사실상 총수의 뜻대로 구성돼 이사들은 거수기(擧手機)에 불과하다는 게 문제의 핵심이다. 총수의 전횡을 제대로 감시할 사람이 없다는 얘기다. 총수가 잘못을 해도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다. 그래서 정부와 여당은 총수 뜻에 반하는 의견을 낼 수 있는 사람이 이사회에 들어갈 수 있도록 제도를 바꿔보겠다는 것이다. 이게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상법 개정안의 취지다. 이를 위해 정부와 여당은 ▶집중투표제 의무화 ▶감사위원 분리 선출 ▶다중 대표소송 도입 등을 추진하고 있다. 이는 대부분 대주주의 의결권을 제한하는 내용인데, 법무부도 올 4월 집중투표제 의무화 등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의견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제출했다.
재벌 대기업 등 재계는 ‘멘붕’이다. 특히 지난해부터 주주총회 의결 요건을 완화하거나 의결 정족수 기준을 폐기하는 방향으로 상법 개정을 요구했는데, 혹 떼려다 되레 혹을 붙이게 생겼다. 재계는 규제 완화를, 정부와 여당은 규제 강화라는 서로 다른 꿈을 꾸고 있었던 셈이다. 재계는 무엇보다 집중 투표제 등을 시행하면 해외 투기자본의 경영권 간섭이 본격활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한다. 외국인 지분율이 높은 일부 기업은 적대적 인수·합병(M&A)에 노출될 가능성을 걱정한다. 이런 마당에 정부와 여당은 올해 안에 상법 개정안을 통과시키겠다는 의지를 다지고 있다. 재계는 이를 막을 전략을 고심 중이다. 재계로선 차등의결권과 포이즌 필(신주인수선택권)과 같은 경영권 방어 장치 도입도 시급하다는 입장이다. 야당도 여당 주도의 일방적 법안 처리에 반대하고 있어 상업 개정의 전장(戰場)은 국회가 될 전망이다. 이와 더불어 정부와 재계의 장외 여론전도 뜨거울 것 같다. 문재인 정부가 추진 중인 상법 개정안은 사실 박근혜 정부 시절이던 2013년 이미 법무부가 입법예고를 했던 것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공약이기도 했던 ‘경제민주화’의 일환이었고, 정부의 추진 의지도 강했다. 학계와 정치권도 법안에 찬성하는 목소리가 더 컸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이 재계를 만난 후 태도를 바꿨다. 2013년 8월 중순 19개 경제단체가 상법 개정안에 대해 전면 재검토를 건의했다. 며칠 후에는 10대 그룹 총수가 박 전 대통령을 만났는데, 이 자리에서 박 전 대통령은 “논란이 되고 있는 상법 개정안에 대한 우려를 잘 알고 있다”며 “그 문제는 정부가 신중히 검토해서 수정안을 내놓겠다”고 밝혔다. 이후 청와대는 “시간이 더 걸릴 것”이라고 한 후 상업 개정안에 대한 논의를 진전시키지 못했다. 결국 법안은 준비되지 못했고, 야당은 반발했다. 학계도 우려를 표명했다. 당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 경제·경영·상법을 연구하는 50명의 대학 교수를 상대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80%가 상법 개정안에 찬성 의견을 내기도 했다. 당시 대학 교수였던 김상조 현 공정거래위원장도 언론을 통해 상업 개정안이 무산된 것을 비판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5년. 문재인 정부가 다시 집중투표제를 들고 나온 것이다. 집중투표제는 주주총회에서 이사진을 선임할 때 1주당 선임되는 이사 수만큼 의결권을 부여하는 제도다. 기존에는 이사 후보에게 1주당 1표씩 의결권을 행사했지만, 집중 투표제에서는 1주당 뽑을 이사 수만큼 투표권을 줘서 선호하는 후보에게 표를 몰아줄 수 있다. 예컨대 A, B, C 3명의 이사를 뽑는다고 가정하면 한 주주가 100주를 갖고 있을 경우 기존에는 3명에게 각각 100주의 찬반권만 행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집중투표제가 의무화하면 A에게 찬성 또는 반대 300표를 모두 던지고 B, C에게는 의결권을 포기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되면 최다수를 얻는 사람부터 순차적으로 이사에 선임되기 때문에 소액주주들이 자신들을 대표하는 사람을 이사로 선임하거나, 대주주가 내세운 후보 중 문제가 있는 사람이 이사로 선임되는 것을 막을 수 있게 된다. 즉, 소액주주도 의결권을 집중해 자신들이 원하는 이사를 뽑을 수 있게 된다는 게 핵심이다. 같은 원리로 해외 투기자본에 악용될 소지도 있다.
개정안은 또 기업의 감사위원회 위원이 되는 이사를 다른 일반 이사들과 분리해 뽑도록 했는데, 개정안이 그대로 시행되면 대주주는 감사위원이 되는 이사를 분리 선출하는 단계부터 3%로 의결권을 제한받는다. 이사회는 통상 7~9명의 이사(감사위원인 이사 포함)로 이뤄진다. 상법상 자산 2조원 이상 상장회사는 이사 중 3명 이상을 감사위원으로 둬야 한다. 감사위원인 이사는 회사의 업무 및 회계 감독권을 가진다. 지분 쪼개기(3% 이하)를 통해 의결권 제한 규정을 피할 수 있는 해외 투기자본이 감사위원을 뽑아 기업 경영권을 좌지우지할 가능성이 커진다는 얘기다. 감사위원은 이사를 겸임하기 때문에 외국계 투기자본이 감사위원을 장악하면 무리한 배당이나 자산 매각 등을 요구할 수 있게 된다.
재계는 집중투표제를 도입하면 해외 투기자본이 국내 기업 이사회에 진출하는 통로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이사회가 7명으로 구성된 회사라고 가정하면 최소 4명(감사위원 분리 선출 3명+집중투표제 1명)을 해외 투기자본이 원하는 인물로 선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정주 한국경제연구원 기업혁신팀장은 “시뮬레이션 결과 집중투표제를 의무화하면 국내 10대 기업 중 4곳은 외국계 주주가 요구하는 이사를 선임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최대주주가 투표 전략을 잘못 짜면 지분이 더 많은데도 경영권을 빼앗기는 상황도 얼마든지 생길 것”이라고 우려했다. 해외 투기자본이 악용하지 않더라도 기업의 이사회나 주주총회가 분열돼 중요한 의사결정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걱정도 나온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기업의 의사결정은 시의성이 중요한 사안이 많다”며 “그런데 상법 개정안으로 다양한 이해관계를 지닌 사람들이 이사회에 진입하게 되면 해당 기업은 싸움만 하다가 의사결정 시기를 놓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다중대표소송도 논란의 한 가운데 있다. 다중대표소송은 모(母)회사가 자(子)회사 지분을 30% 이상 보유하고, 모회사 주주가 모회사 지분을 0.01%(상장사 기준, 비상장사는 1%)만 갖고 있으면 소송이 가능하다. 심지어 모회사 1주만 있어도 되는 법안(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 발의)도 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이 제도를 시행하고 있는 일본이 100% 모·자회사 간에만 허용되도록 엄격히 제한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 안이 시행되면 예컨대 A그룹의 지주사인 ㈜A가 A전자 지분 34% 보유하고 있다. 그런데 미국의 행동주의 펀드인 엘리엇 매니지먼트(Elliot management·이하 엘리엇)가 ㈜A의 주식을 0.1% 갖고 있다고 치자. 이렇게 되면 엘리엇은 0.1%의 ㈜A 주식을 숙주 삼아 전혀 다른 법인격인 A전자 임원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권한을 확보할 수 있다. A전자뿐만이 아니다. 엘리엇은 ㈜A가 지분 30% 이상을 갖고 있는 주요 계열사 전부를 같은 식으로 쥐고 흔들 수 있게 된다.
이를 우리 실정에 대비하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국내 일반 지주사의 자회사 지분율은 법정 하한선(상장사 20%, 비 상장사 40%)을 훨씬 웃도는 72.8%(지난해 3분기 기준)에 이른다. 금융지주사는 무려 90.4%다. 지주사가 아닌 삼성전자만 해도 지난해 말 기준으로 삼성디스플레이(84.8%)·삼성바이오로직스(31.5%)·삼성메디슨(68.5%)·세메스(91.5%) 등을 보유하고 있다. SK·LG·롯데 등 이미 지주사 체제로 전환한 그룹은 말할 것도 없고, 현대차그룹 등도 다중 대표소송에 다 걸리는 구조다. 한 법무법인의 변호사는 “극단적 예로 자회사가 모회사와 거래하다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다른 곳과 거래를 트면서 모회사와의 거래를 접는다고 가정하면 자회사에는 이득이지만 모회사는 다를 수 있다”며 “이때 모회사 주주가 자회사 임원을 상대로 소송을 거는 등 악용 여지가 많다”고 꼬집었다.
이처럼 순기능보다는 역기능이 많아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도입한 전례를 찾기 힘들 정도다. 한국경제연구원이 세계 주요 국가의 상법을 분석한 ‘상법 개정안 제도 국제비교’ 보고서에 따르면 정부가 추진 중인 상법 개정안은 대부분 다른 선진국에는 없거나 일부 국가만 제한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감사위원 분리선출제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입법 사례가 없었다. 대주주의 권한을 지나치게 제한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자산 규모 2조원 이상인 상장사가 두 명 이상의 이사를 뽑을 때 집중투표제를 의무화한 나라는 러시아·멕시코·칠레 3곳뿐이었다. 한국을 비롯해 미국·일본·필리핀·대만·이탈리아·중국 등에는 집중투표제가 도입돼 있지만 개별 기업이 정관 개정을 통해 집중투표제를 배제할 수 있도록 허용해 자율에 맡기고 있다. 재벌닷컴에 따르면 자산 2조원 이상 138개 상장사 중 집중투표제를 채택한 기업은 전체의 10.1%인 14곳뿐이다. 그나마 한국전력·한국가스공사·지역난방공사·강원랜드·신한금융지주·KB금융지주 등 대개 공기업이나 금융사다. 미국은 1940년대 애리조나 등 22개 주에서 집중투표제를 강제 규정으로 도입했지만 이후 부작용이 속출하면서 1950년대 이후 대부분의 주가 기업 자율로 적용하도록 제도를 고쳤다. 한때 집중투표제를 의무화한 일본도 주주 간에 경영권 분쟁이 끊이지 않자 1974년 집중투표제 의무화를 폐지했다. 다중대표소송제도 비슷하다. 이 제도를 의무화한 곳은 일본 밖에 없는데, 일본은 경영권 침해와 자회사 주주의 권리 침해 등을 이유로 다중대표소송 대상을 100% 자회사로 한정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자유한국당 윤상직 의원은 5월 15일 기업의 경영권 방어 수단인 차등의결권과 포이즌 필 도입을 골자로 한 상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하면서 상법 개정이 여야의 뜨거운 감자로 재부상하고 있다. 앞서 권성동 의원 등 자유한국당 의원 10명은 지난해 11월에 비슷한 내용의 상법 개정안을 발의한 바 있다. 윤 의원은 “국내 기업이 해외 투기자본의 공격 대상이 되고 있다”며 “제2의 소버린, 제2의 엘리엇이 나오지 않도록 무방비로 노출된 국내 기업의 경영권 방어 장치 마련이 시급하다”고 개정안 발의 취지를 설명했다. 기업이 경영권을 방어하는 데 수조원을 쏟아 붓게 방치하면 ‘경제 살리기’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는 논리다. ‘배임 면제’ 조항을 신설한 것도 눈에 띈다. 경영진이 회사에 최선의 이익이 된다는 선의의 판단 아래 경영상 결정을 내렸다면 회사에 손해를 끼쳤더라도 특별배임죄 판단 때 정상을 참작하도록 하자는 취지다.
이에 대해 더불어민주당은 “기업 편들기용 법안”이라며 선을 그었다. 하지만 여당 안팎에선 “협상 테이블을 꾸려볼만하다”는 의견도 나온다는 전언이다. 지난해 11월 자유한국당 소속 권성동 법제사법위원장이 내놓은 상법 개정안에 비해 타협의 여지가 충분하다는 이유에서다. 포이즌 필만해도권 위원장은 이사회 결의로 도입이 가능하도록 했으나, 윤 의원은 여기에 주주총회 특별결의 요건을 추가해 경영진의 남용 가능성을 방지하는 문구를 넣었다. 권 위원장이 법안에 황금주(소수 지분으로 회사 주요 결정에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주식)와 임원임명권부주식(이사회 구성 권한이 있는 주식)을 명기한 데 비해 윤 의원은 이를 법안에서 빼고, 시행령으로 처리할 수 있게 여지를 뒀다는 것도 차별점이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하반기 국회에서 여야간 힘겨루기가 본격화하겠지만 정부와 여당도 투자 활성화가 당장 발등의 불이어서 ‘빅딜’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집중투표제 의무화나 차등의결권 등은 사회적으로도 찬반이 명확하게 갈리고 있는 터라 국회 밖 여러 변수도 법 개정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조양호 회장 등 대한항공 오너 일가의 갑질 사태는 대기업 지배구조 개편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조 회장 일가가 사적인 심부름에 대한항공 지점 등 회사 조직을 이용했다는 의혹이 잇따라 제기되고 있다. 그런데도 대한항공 이사회는 조 회장 일가 거취에 관해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이는 상법 개정의 필요성을 절실히 보여주는 사례다. 그런가 하면 엘리엇의 최근 활동은 상법 개정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엘리엇은 최근 1%대 지분으로 현대차그룹의 지배구조 개편안을 멈춰 세웠다. 또 정부를 상대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국민연금의 합병 찬성 결정으로 피해를 입었다며 7000억원 대의 배상을 요구하고 있다. 엘리엇이 기업 가치보다 시세차익과 배당 등 이익만을 노리고 행동하고 있다는 점이 명확해질수록 재계의 상법 개정 반대 이유가 설득력을 얻을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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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주식회사의 최고의사결정기구는 총수 등 오너 일가가 아니라 이사회다. 하지만 이사회가 사실상 총수의 뜻대로 구성돼 이사들은 거수기(擧手機)에 불과하다는 게 문제의 핵심이다. 총수의 전횡을 제대로 감시할 사람이 없다는 얘기다. 총수가 잘못을 해도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다. 그래서 정부와 여당은 총수 뜻에 반하는 의견을 낼 수 있는 사람이 이사회에 들어갈 수 있도록 제도를 바꿔보겠다는 것이다. 이게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상법 개정안의 취지다. 이를 위해 정부와 여당은 ▶집중투표제 의무화 ▶감사위원 분리 선출 ▶다중 대표소송 도입 등을 추진하고 있다. 이는 대부분 대주주의 의결권을 제한하는 내용인데, 법무부도 올 4월 집중투표제 의무화 등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의견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제출했다.
재벌 대기업 등 재계는 ‘멘붕’이다. 특히 지난해부터 주주총회 의결 요건을 완화하거나 의결 정족수 기준을 폐기하는 방향으로 상법 개정을 요구했는데, 혹 떼려다 되레 혹을 붙이게 생겼다. 재계는 규제 완화를, 정부와 여당은 규제 강화라는 서로 다른 꿈을 꾸고 있었던 셈이다. 재계는 무엇보다 집중 투표제 등을 시행하면 해외 투기자본의 경영권 간섭이 본격활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한다. 외국인 지분율이 높은 일부 기업은 적대적 인수·합병(M&A)에 노출될 가능성을 걱정한다. 이런 마당에 정부와 여당은 올해 안에 상법 개정안을 통과시키겠다는 의지를 다지고 있다. 재계는 이를 막을 전략을 고심 중이다. 재계로선 차등의결권과 포이즌 필(신주인수선택권)과 같은 경영권 방어 장치 도입도 시급하다는 입장이다. 야당도 여당 주도의 일방적 법안 처리에 반대하고 있어 상업 개정의 전장(戰場)은 국회가 될 전망이다. 이와 더불어 정부와 재계의 장외 여론전도 뜨거울 것 같다.
5년 만에 다시 등장한 집중투표제
그로부터 5년. 문재인 정부가 다시 집중투표제를 들고 나온 것이다. 집중투표제는 주주총회에서 이사진을 선임할 때 1주당 선임되는 이사 수만큼 의결권을 부여하는 제도다. 기존에는 이사 후보에게 1주당 1표씩 의결권을 행사했지만, 집중 투표제에서는 1주당 뽑을 이사 수만큼 투표권을 줘서 선호하는 후보에게 표를 몰아줄 수 있다. 예컨대 A, B, C 3명의 이사를 뽑는다고 가정하면 한 주주가 100주를 갖고 있을 경우 기존에는 3명에게 각각 100주의 찬반권만 행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집중투표제가 의무화하면 A에게 찬성 또는 반대 300표를 모두 던지고 B, C에게는 의결권을 포기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되면 최다수를 얻는 사람부터 순차적으로 이사에 선임되기 때문에 소액주주들이 자신들을 대표하는 사람을 이사로 선임하거나, 대주주가 내세운 후보 중 문제가 있는 사람이 이사로 선임되는 것을 막을 수 있게 된다. 즉, 소액주주도 의결권을 집중해 자신들이 원하는 이사를 뽑을 수 있게 된다는 게 핵심이다. 같은 원리로 해외 투기자본에 악용될 소지도 있다.
개정안은 또 기업의 감사위원회 위원이 되는 이사를 다른 일반 이사들과 분리해 뽑도록 했는데, 개정안이 그대로 시행되면 대주주는 감사위원이 되는 이사를 분리 선출하는 단계부터 3%로 의결권을 제한받는다. 이사회는 통상 7~9명의 이사(감사위원인 이사 포함)로 이뤄진다. 상법상 자산 2조원 이상 상장회사는 이사 중 3명 이상을 감사위원으로 둬야 한다. 감사위원인 이사는 회사의 업무 및 회계 감독권을 가진다. 지분 쪼개기(3% 이하)를 통해 의결권 제한 규정을 피할 수 있는 해외 투기자본이 감사위원을 뽑아 기업 경영권을 좌지우지할 가능성이 커진다는 얘기다. 감사위원은 이사를 겸임하기 때문에 외국계 투기자본이 감사위원을 장악하면 무리한 배당이나 자산 매각 등을 요구할 수 있게 된다.
재계는 집중투표제를 도입하면 해외 투기자본이 국내 기업 이사회에 진출하는 통로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이사회가 7명으로 구성된 회사라고 가정하면 최소 4명(감사위원 분리 선출 3명+집중투표제 1명)을 해외 투기자본이 원하는 인물로 선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정주 한국경제연구원 기업혁신팀장은 “시뮬레이션 결과 집중투표제를 의무화하면 국내 10대 기업 중 4곳은 외국계 주주가 요구하는 이사를 선임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최대주주가 투표 전략을 잘못 짜면 지분이 더 많은데도 경영권을 빼앗기는 상황도 얼마든지 생길 것”이라고 우려했다. 해외 투기자본이 악용하지 않더라도 기업의 이사회나 주주총회가 분열돼 중요한 의사결정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걱정도 나온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기업의 의사결정은 시의성이 중요한 사안이 많다”며 “그런데 상법 개정안으로 다양한 이해관계를 지닌 사람들이 이사회에 진입하게 되면 해당 기업은 싸움만 하다가 의사결정 시기를 놓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상법 개정안, 투기자본 멍석 깔기?
이를 우리 실정에 대비하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국내 일반 지주사의 자회사 지분율은 법정 하한선(상장사 20%, 비 상장사 40%)을 훨씬 웃도는 72.8%(지난해 3분기 기준)에 이른다. 금융지주사는 무려 90.4%다. 지주사가 아닌 삼성전자만 해도 지난해 말 기준으로 삼성디스플레이(84.8%)·삼성바이오로직스(31.5%)·삼성메디슨(68.5%)·세메스(91.5%) 등을 보유하고 있다. SK·LG·롯데 등 이미 지주사 체제로 전환한 그룹은 말할 것도 없고, 현대차그룹 등도 다중 대표소송에 다 걸리는 구조다. 한 법무법인의 변호사는 “극단적 예로 자회사가 모회사와 거래하다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다른 곳과 거래를 트면서 모회사와의 거래를 접는다고 가정하면 자회사에는 이득이지만 모회사는 다를 수 있다”며 “이때 모회사 주주가 자회사 임원을 상대로 소송을 거는 등 악용 여지가 많다”고 꼬집었다.
이처럼 순기능보다는 역기능이 많아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도입한 전례를 찾기 힘들 정도다. 한국경제연구원이 세계 주요 국가의 상법을 분석한 ‘상법 개정안 제도 국제비교’ 보고서에 따르면 정부가 추진 중인 상법 개정안은 대부분 다른 선진국에는 없거나 일부 국가만 제한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감사위원 분리선출제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입법 사례가 없었다. 대주주의 권한을 지나치게 제한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자산 규모 2조원 이상인 상장사가 두 명 이상의 이사를 뽑을 때 집중투표제를 의무화한 나라는 러시아·멕시코·칠레 3곳뿐이었다. 한국을 비롯해 미국·일본·필리핀·대만·이탈리아·중국 등에는 집중투표제가 도입돼 있지만 개별 기업이 정관 개정을 통해 집중투표제를 배제할 수 있도록 허용해 자율에 맡기고 있다. 재벌닷컴에 따르면 자산 2조원 이상 138개 상장사 중 집중투표제를 채택한 기업은 전체의 10.1%인 14곳뿐이다. 그나마 한국전력·한국가스공사·지역난방공사·강원랜드·신한금융지주·KB금융지주 등 대개 공기업이나 금융사다. 미국은 1940년대 애리조나 등 22개 주에서 집중투표제를 강제 규정으로 도입했지만 이후 부작용이 속출하면서 1950년대 이후 대부분의 주가 기업 자율로 적용하도록 제도를 고쳤다. 한때 집중투표제를 의무화한 일본도 주주 간에 경영권 분쟁이 끊이지 않자 1974년 집중투표제 의무화를 폐지했다. 다중대표소송제도 비슷하다. 이 제도를 의무화한 곳은 일본 밖에 없는데, 일본은 경영권 침해와 자회사 주주의 권리 침해 등을 이유로 다중대표소송 대상을 100% 자회사로 한정하고 있다.
국회 밖 여론전도 뜨거울 전망
이에 대해 더불어민주당은 “기업 편들기용 법안”이라며 선을 그었다. 하지만 여당 안팎에선 “협상 테이블을 꾸려볼만하다”는 의견도 나온다는 전언이다. 지난해 11월 자유한국당 소속 권성동 법제사법위원장이 내놓은 상법 개정안에 비해 타협의 여지가 충분하다는 이유에서다. 포이즌 필만해도권 위원장은 이사회 결의로 도입이 가능하도록 했으나, 윤 의원은 여기에 주주총회 특별결의 요건을 추가해 경영진의 남용 가능성을 방지하는 문구를 넣었다. 권 위원장이 법안에 황금주(소수 지분으로 회사 주요 결정에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주식)와 임원임명권부주식(이사회 구성 권한이 있는 주식)을 명기한 데 비해 윤 의원은 이를 법안에서 빼고, 시행령으로 처리할 수 있게 여지를 뒀다는 것도 차별점이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하반기 국회에서 여야간 힘겨루기가 본격화하겠지만 정부와 여당도 투자 활성화가 당장 발등의 불이어서 ‘빅딜’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집중투표제 의무화나 차등의결권 등은 사회적으로도 찬반이 명확하게 갈리고 있는 터라 국회 밖 여러 변수도 법 개정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조양호 회장 등 대한항공 오너 일가의 갑질 사태는 대기업 지배구조 개편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조 회장 일가가 사적인 심부름에 대한항공 지점 등 회사 조직을 이용했다는 의혹이 잇따라 제기되고 있다. 그런데도 대한항공 이사회는 조 회장 일가 거취에 관해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이는 상법 개정의 필요성을 절실히 보여주는 사례다. 그런가 하면 엘리엇의 최근 활동은 상법 개정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엘리엇은 최근 1%대 지분으로 현대차그룹의 지배구조 개편안을 멈춰 세웠다. 또 정부를 상대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국민연금의 합병 찬성 결정으로 피해를 입었다며 7000억원 대의 배상을 요구하고 있다. 엘리엇이 기업 가치보다 시세차익과 배당 등 이익만을 노리고 행동하고 있다는 점이 명확해질수록 재계의 상법 개정 반대 이유가 설득력을 얻을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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