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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걷다가 예술을 만나다

길을 걷다가 예술을 만나다

멜버른부터 뉴욕, 파리, 리스본까지… 세계 곳곳에서 마주치는 다채로운 길거리 미술의 세계길거리 미술은 영향력이 큰 현대미술의 한 장르다. 현대 도시 중 길거리 미술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은 찾아보기 힘들다. 길거리 미술에서는 낙서 같은 글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 때때로 그림이 크고 아름다운 경우도 있는데 이런 작품들은 주로 공식적인 미술 축제에서 그려진 것이다.

어번 스크롤 / 루 챔벌린 지음 / 하디 그랜트 펴냄
대다수 길거리 미술 작품은 규모가 작고 간과되기 쉽지만 하나하나가 표현의 자유를 찬양하는 동시에 익명의 시위 수단이 되기도 한다. 길거리 미술은 장난스러울 수도 있고 심오한 의미를 지닐 수도 있으며 신념과 두려움, 기쁨을 표현하기도 한다. 또 부드럽고 감동적이며 수수한 작품이 있는가 하면 자기주장이 강하고 공격적인 작품도 있다.

스프레이를 써서 그렸든 스텐실 기법을 이용했든, 혹은 보도 위에 휘갈겨 썼든 마음에 와 닿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과감하고 시적인 문구들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메시지들은 영감이나 놀라움, 혹은 불쾌감을 유발한다. 정치·사회적 불안으로 삶이 더 힘들어질 때는 그런 메시지들이 유난히 신경을 거슬리게 한다. 이 기사에 실린 사진들은 길거리 미술이 가치를 인정받는 크고 작은 도시에서 찍은 것들로 행인에게 말을 거는 힘이 있다. 미적 가치보다는 그것이 전달하는 메시지를 기준으로 작품을 골랐다.
 호주 멜버른
조지 로즈의 ‘YOU’RE RAD’ (사진 촬영 2018년). / 사진:LOU CHAMBERLIN
멜버른은 길거리 미술의 메카다. 길가 벽에는 인생과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대형 벽화들이 그려졌다. 유머와 지혜, 저항의 말이 담긴 낙서도 많다. 세계 각지에서 온 미술가들이 이 복잡한 도시 미술에 자신의 흔적을 더한다. 멜버른 교외 피츠로이에 조지 로즈가 그린 ‘YOU’RE RAD’(‘당신은 정말 근사해’)는 굽이치는 화려한 색 띠와 커다란 흰 글씨, 검은색으로 과감하게 가로지른 굵은 선들과 검정 물감 방울들이 분출되는 사랑의 감정을 말해준다. 평범한 도시의 우중충한 벽에 그려진 벽화 하나가 그 이미지와 메시지로 얼마나 이목을 집중시키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다. 멜버른은 길거리 미술을 풍요로운 문화 환경의 한 측면으로 포용했다. 교외 구석구석까지 꽤 광범위한 지역에서 길거리 미술을 찾아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눈길을 끄는 작품이 모여 있는 지역은 피츠로이와 콜링우드, 리치먼드, 브룬스윅, 그리고 CBD(중심상업지구)다.
 미국 뉴욕
제이슨 네일러의 작품 (사진 촬영 2018년). / 사진:LOU CHAMBERLIN
사랑은 모든 예술의 근원이다. 일상의 때가 묻은 길거리 곳곳의 미술에서도 사랑의 표현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화려한 색상의 글씨가 눈길을 사로잡는 제이슨 네일러의 작품이 대표적이다. 네일러의 작품은 뉴욕시 곳곳에서 발견된다. 이 도시에는 재능 있는 작가들이 다양한 스타일로 제작한 길거리 미술이 넘쳐난다. 뉴욕은 1970년대에 낙서 미술의 중심이 됐다. 1980년대에는 키스 해링이 상징적인 인물화를 중심으로 한 낙서 미술로 뉴욕 지하철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또 장 미셸 바스키아의 생기 넘치는 길거리 미술은 갤러리와 수집가의 관심을 모았다. 그 후 로어 이스트 사이드와 부시윅, 윌리엄스버그 등을 중심으로 뉴욕의 길거리 미술은 꾸준히 발전해 왔다.
 노르웨이 스타방거
돌크의 스텐실 작품 (사진 촬영 2016년). / 사진:LOU CHAMBERLIN
사랑이라는 주제로 다시 돌아와 얘기하자면 유감스럽게도 우리 모두는 사랑과 증오가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 꺼져가는 사랑은 미움이나 증오로 변할 수 있다. 돌크의 수류탄 모양 머리를 가진 인물들의 그림은 그런 상황을 재치 있게 표현했다. 돌크는 노르웨이의 존경받는 스텐실 아티스트로 국내뿐 아니라 세계 곳곳의 도시에 작품을 남겼다. 스타방거는 노르웨이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지만 길거리 미술의 측면에선 최강자다. 해마다 열리는 누아트 거리예술축제(Nuart Festival)에서는 국내외 미술가들이 도시 곳곳에 벽화를 그려 활기 넘치는 시각환경을 만들어낸다.
 영국 런던
자부의 작품 (사진 촬영 2015년). / 사진:LOU CHAMBERLIN
유머는 예술에서 언제나 중요한 요소지만 길거리 미술에서는 특히 그렇다. 그 작품들은 종종 보는 이의 얼굴에 미소를 떠오르게 하거나 큰 소리로 웃게 하기도 한다. 프랑스 미술가 자부가 그린 캐릭터의 얼굴에서 묻어나는 기쁨은 무엇에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신선하다. 2012년부터 런던에서 살아온 자부는 런던 길거리 미술의 중심인 쇼어디치에 이 즐거운 분위기의 그림을 그려 넣었다. 런던은 낙서와 길거리 미술의 역사가 길다. 하지만 순식간에 그려진 이 그림들은 금세 사라질 확률도 높다. 이들 지역에서 고급주택화가 진행되면서 오래된 벽들이 벽화와 함께 사라지기 때문이다. 요즘 런던에서 길거리 미술을 카메라에 담으려는 관광객에게 가장 인기 있는 곳은 해크니와 캠든, 펜지 등이다.
 포르투갈 리스본
±MAISMENOS±의 작품(사진 촬영 2016년). / 사진:LOU CHAMBERLIN
리스본의 길거리 미술은 최근 들어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시 의회가 도시 재개발의 한 과정으로 길거리 미술가들에게 버려진 건물에 그림을 그리도록 독려한 덕이다. 도심뿐 아니라 시 외곽에도 멋진 벽화가 늘어나면서 지역사회에 자부심을 안겨준다. 많은 길거리 미술가가 작품 속에 ‘지혜의 말’을 담는다. 이런 작품들은 지붕 위, 보도 위, 소화전, 교량 받침대 등 의외의 장소에서 발견되곤 한다. 작품에 담긴 메시지는 부드럽고 감동적인 것부터 경박하거나 심오한 것까지 다양하다. 희망이나 격려, 조언이 담긴 것들도 있다. 리스본 길거리 미술에서 특히 주목받는 화가는 ±MaisMenos±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포르투갈 출신의 미겔 야누아리오다. ±MaisMenos±는 도시 환경을 개선하고자 하는 그의 시각개입(visual intervention) 프로젝트다. 재치 있는 말장난을 이용해 사람들이 지배적인 사회·경제 체제를 돌아보게 하는 직설적이고 날카로운 메시지를 전달한다.
 프랑스 파리
클렛 아브라함의 비닐 스티커 작품 (사진 촬영 2015년). / 사진:LOU CHAMBERLIN
대다수 도시와 마찬가지로 파리도 특정 지역에 길거리 미술이 몰려 있다. 다양한 문화가 뒤섞인 13구에는 도시의 캔버스 역할을 하는 건물이 많다. 자유분방한 벨빌의 일부 거리는 야외 갤러리나 다름없다. 파리 동남쪽 교외의 비트리쉬르센은 벽들이 온통 그림과 스텐실로 뒤덮였다. C215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미술가가 이곳에 살면서 세계 곳곳의 미술가 수십 명을 초대해 함께 길거리 미술 작업을 해왔기 때문이다. 파리에서 길거리 미술을 찾아다니다 보면 클렛 아브라함 같은 다작 작가의 재미있는 작품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어 즐겁다. 그는 언어의 개입 없이 세계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도로표지판에 떼어낼 수 있는 비닐 스티커를 붙여 거리에 웃음을 전파한다.

사진에서 보는 차량 진입금지 표지판 등이 좋은 예다. 아틀라스(어깨에 지구를 짊어지고 있는 거인)를 연상시키는 인물이 그려진 스티커를 붙여 웃음을 자아낸다. 도로표지판에 이런 스티커를 붙이는 것은 불법이기 때문에 그는 밤의 어둠을 틈타 작업한다. 이 스티커들은 당국이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짧게는 1주일, 길게는 5년씩 그 자리에 붙어 있다.

길거리 미술이 활성화된 도시는 이 밖에도 많다. 첼레 발파라이소와 스페인 바르셀로나, 미국 로스앤젤레스와 마이애미,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등등. 마지막으로 재미있는 작품 하나를 소개하겠다. 보도는 도시 환경에서 주목할 만한 곳은 아니지만 스마트폰보다 바닥을 내려다보는 것이 즐거움을 줄 때가 있다. 난 몇 년 전 그리니치 빌리지를 걷다가 보도 위에 그려진 ‘생쥐 횡단보도(Rats crossing)’라는 표지를 보고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실용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한 이 작품에 뉴욕의 본질이 담긴 듯했다.

- 루 챔벌린



※ [필자는 여행작가로 지난 10년 동안 세계 곳곳의 길거리 미술을 사진에 담아왔다. 이 기사는 최근 그녀가 펴낸 책 ‘어번 스크롤(Urban Scrawl: The Written Word in Street)’에서 발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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