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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甲’, 회계법인 ‘乙’…한국판 ‘엔론 사태’ 도돌이표 [김기동의 이슈&로]

미국 엔론·대우조선 분식회계…핵심은 회계불투명
‘지정 감사제’ 폐지 여부 놓고…재계vs회계법인 갈등

경남 거제시 아주동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모습. [사진 연합뉴스] 
[김기동 법무법인 로백스(LawVax) 대표변호사] 아직 회계사기에 대한 경계(警戒)를 늦출 때가 아니다. 분식회계는 경영 성과가 실제보다 좋게 보이도록 회계 장부상 정보를 조작하는 행위이다. 분식회계(cosmectic accounting)라는 말은 장부를 화장한다는 뜻의 일본식 용어이나, 회계 조작은 명백한 범죄행위이므로 미국에서 사용하는 회계사기(accounting fraud)가 더 적절한 표현이다.

필자가 검사 재직 시 수사 책임자로서 관여했던 대우조선해양 사건 때 회계사기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그 이후 언론에서 회계사기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아직 금융감독원과 증권선물위원회의 공식 용어는 분식회계다.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형 회계사기 사건은 미국의 7대 기업에 속했던 에너지 기업 ‘엔론’ 사건이다. 2001년 1조4000억원의 분식회계가 드러나면서 엔론은 파산하고, CEO 회장은 징역 24년 4개월이 선고되었으며, 당시 엔론의 분식회계를 도운 ‘아더 앤더슨’이라는 회계법인은 해체됐다. 그물코는 성기지만 일단 걸리면 엄청난 중형을 선고하는 미국식 사법의 모습이다. 

엔론 사건에 견줄만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회계사기 사건은 2016년부터 2017년까지 대검찰청 부패범죄특별수사단에서 수사했던 대우조선해양 사건이다. 영업이익 기준으로 3년간 합계 약 2조3000억원의 분식회계를 행하고 이를 이용해 부정 취득한 신용등급으로 수년간 수조 원의 대출 사기를 저질렀으며, 조작된 성과지표를 이용해 수천억원의 성과급도 부당하게 지급하는 등 각종 비리가 드러났다. 수조원의 공적자금이 투입된 기업에서 일어난 비리라 국민들이 더 큰 공분을 느꼈다.

대우조선 회계사기의 주된 수법은 ‘공사 진행률’을 조작하는 방법이었다. 해양 시추선이나 유조선 같은 초대형 건조 프로젝트는 수년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기 때문에 총 예정원가 대비 실제 발생 원가 비율로 공사 진행률을 따져 매출을 연도별도 나눠 인식한다. 대우조선은 해양 플랜트 사업에서 천문학적 규모의 손실이 발생하자, 총 예정원가를 임의로 줄여서 공사 진행률이 높게 산출되게 하는 방법으로 매출을 과다하게 인식하고 거액의 손실을 은폐하는 방식을 동원했다. 

대우조선의 분식회계를 주도한 CEO, CFO 등 관련자들은 이전 유사 사건에 비해 훨씬 높은 중형을 선고받았고, 거액의 손해배상 책임도 졌다. 또한 분식회계를 알고도 묵인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회계법인 소속 전·현직 회계사들도 실형을 선고받았으며 양벌규정에 따라 함께 기소된 회계법인에는 벌금형과 아울러 영업정지 처분이 내려졌다. 회계법인 자체가 형사 처벌된 것은 1999년 대우그룹의 분식회계 사건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대규모 분식회계가 장기간 가능했던 것은 외부감사를 맡았던 회계법인이 감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점이 수사 및 재판을 통해 사법적으로 확인됐다. ‘감사받는 기업’이 ‘감사하는 회계법인’을 정하고, 회계법인은 ‘외부감사’ 용역을 수주하기 위해 혈안이 된 상황에서 기업의 부당한 요구에 결코 의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즉 기업이 갑(甲)이고, 회계법인이 을(乙)이었던 것이다.

대우조선 회계사기 사건의 재발을 막기 위해 제도 개혁이 이루어졌고, 그 중 핵심적인 장치가 2019년부터 시행되고 있는 ‘주기적 감사인 지정제’이다. 기업이 6년간 감사인을 자율적으로 선임하면 3년은 정부가 감사인을 지정하는 것으로, 감사인의 독립성 향상을 위해 마련된 제도다. 그런데 최근 ‘주기적 감사인 지정제’ 폐지 여부를 놓고 재계와 회계업계가 극심한 갈등을 벌이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지난 2월 지정 감사제 도입으로 감사 품질이 떨어지고 기업 부담만 증가하는 등 부작용이 크다면서 이 제도의 폐지를 금융위원회에 요청했고, 회계업계에서는 지정 감사제를 완화할 경우 기업의 신용도가 떨어질 수 있다며 제도 폐지를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다. 

국제경영개발연구원(IMD)은 매년 국가별 회계 투명성(회계감사기준의 준수 정도)을 평가해 국가별 순위를 발표하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2017년 63개국 중 63위로 꼴지를 기록했으나 2021년에는 37위를 기록해 꾸준히 순위가 상승하였다. 그러나 근래 발생한 은행이나 상장사 등의 대규모 횡령 사건 등으로 인해 2022년에는 53위로 다시 그 순위가 16계단이나 하락하는 등 우리나라의 회계 투명성은 아직 갈 길이 먼 상황이다. 우리나라 우량 기업들의 주가가 실제 가치에 비하여 고질적으로 저평가되는 소위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원인 중 하나가 회계 투명성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여의도 금융감독원. [사진 연합뉴스] 
지정감사제 도입 이후 기업이 회계 감사를 위해 투입해야 하는 비용과 인력이 늘어나는 등 기업의 부담이 증가한 것은 사실이다. 그 외 감사인이 무리한 보수를 요구하는 등 갑질 사례, 업무 능력이 부족한 회계법인이 지정되어 감사 품질이 저하된 사례 등도 일부 있을 것이다. 

그런 부작용에 대해서는 금융당국이 감독을 강화해야 하고, 제도 보완도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부작용이 일부 드러났다고 해서 시행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제도를 폐지하거나 대폭 완화하자는 주장은 너무 성급해 보인다.

어떤 경우에도 회계 감사인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던 대우조선 사건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분식회계로 부실기업을 제때 정리하지 못하면 국민들이 혈세로 부담해야 하는 사회적 비용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이 어려운 숙제에 대해 금융당국이 정확한 해법을 제시해주리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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