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00만명 앓는 ‘내 머릿 속의 지우개’ 이젠 없을까…치매 정복 나선 ‘이 약’
[‘치매 정복’ 길이 보인다]①
에자이·바이오젠 개발한 신약 ‘레켐비’ 美 FDA 승인
가짜약 투여군 대비 인지기능 저하 속도 5개월 늦춰
알츠하이머병은 ‘퇴행성’이라는 이름답게 나이 들수록 발병 확률이 높아진다. 대부분 65세 이상인 노인에게서 나타나지만, 최근에는 40·50대 환자도 늘고 있다. 알츠하이머병 환자들은 처음에 건망증을 비롯한 가벼운 증상을 겪는다. 하지만 인지기능이 더 떨어지면 성격 변화와 우울증, 수면 장애 등을 경험한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전 세계 치매 환자의 수는 5500만명에 달하고, 매년 1000만명의 환자가 생겨난다.
그동안 치매 치료는 증상을 완화하는 데 그쳤다. 치매의 원인을 직접 다루지 않고, 질환으로 인한 증상만 줄이는 식이다. 하지만 이런 치매 치료에 새 길이 열릴 전망이다. 알츠하이머병 치료제인 ‘레켐비’(성분명 레카네맙)가 최근 미국에서 정식으로 승인되면서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지난 7월 6일(현지시각) 알츠하이머병 치료제인 레켐비를 최종 승인했다. 올해 초 임상 2상 결과를 바탕으로 신속 승인된 지 반년만이다. FDA 산하 약물 평가·연구 센터의 테레사 부라키오 신경과학 부문 사무국장은 “여러 연구를 통해 레켐비가 알츠하이머병 환자들에게 안전하고 효과적인 치료제라는 점을 확인했다”며 “이번 허가는 알츠하이머병을 근본적으로 치료할 수 있는 약물이 실제 효과가 있다는 점을 보여준 첫 사례”라고 평가했다.
알츠하이머병은 아밀로이드-베타 단백질이 플라크 형태로 뇌에 쌓이면 발생한다고 알려져 있다. 레켐비의 성분인 레카네맙은 ‘아밀로이드 베타 프로토피브릴’ 항체로 플라크가 생기지 않도록 해 인지 능력이 떨어지는 속도를 늦춘다. 약물을 개발한 일본의 에자이와 미국 바이오젠은 여러 임상시험을 통해 레켐비가 이들 단백질을 제거해 알츠하이머병의 진행 속도를 느리게 한다는 점을 증명했다.
알츠하이머병 환자 1795명이 참여한 임상 3상 결과에 따르면 레켐비를 투여한 임상 참여자는 기억력과 판단력, 인지력이 떨어지는 속도가 가짜약(위약)을 투여한 사람들보다 5개월(27%)가량 느렸다. 치매 임상 평가 척도-박스 총점(CDR-SB)에서도 가짜약을 투여하고 18개월이 지난 임상 참여자들은 1.66점 악화했지만, 레켐비를 투여한 환자들은 1.22점 나빠지는 데 그쳤다. CDR-SB는 알츠하이머병의 정도를 측정하는 지표다.
당초 임상 3상 결과가 좋았던 만큼 레켐비가 최종 승인될 가능성은 컸다. FDA의 말초·중추신경계 약물 자문위원회도 지난 6월 이 약물의 승인을 만장일치로 권고하면서 새로운 알츠하이머병 치료제의 탄생에 힘을 실었다. 자문위원회는 레켐비가 경증이나 초기 단계의 질환을 치료하는 데 효과가 있다고 봤다. FDA가 자문위원회의 결정을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통상 이 기관의 판정을 받아들여 왔다.
초기 단계 환자만 사용 가능…비용 문턱도
전문가들은 레켐비가 치매 정복의 길을 열었다고 평가한다. 리처드 오클리 알츠하이머협회 연구부국장은 FDA가 레켐비를 정식으로 승인한 것과 관련해 “알츠하이머성 치매가 종말의 시작점(the beginning of the end)에 들어섰다”고 말했다. 치료 효능은 앞선 치료제보다 높고, 부작용도 다른 약물과 비교하면 적다. 특히 알츠하이머병의 원인으로 꼽히는 요인을 치료할 수 있다는 약물이라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레켐비가 세계 첫 알츠하이머병 치료제인 것은 아니다. 앞서 에자이와 바이오젠은 지난 2021년 알츠하이머병 치료제 아두헬름(성분명 아두카누맙)을 출시한 바 있다. 하지만 아두헬름은 이 약물을 투여한 환자가 사망한 뒤 부작용 논란을 낳으며 시장에서 사라졌다. 당시 환자를 죽음으로 이끈 증상은 아밀로이드와 관련한 영상 이상(ARIA)이다. 이 부작용은 아밀로이드-베타 단백질을 표적하는 약물에서 나타나는 중증 이상 반응으로, 뇌가 팽창하거나 미세한 출혈이 발생한다.
에자이와 바이오젠이 아두헬름의 실패를 교훈 삼아 만든 것이 레켐비다. 아두헬름은 임상 참여자 3명 중 1명에게서 ARIA가 발생했지만, 레켐비의 ARIA 발생률은 10%에 그친다. 임현국 가톨릭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최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바이오플러스-인터펙스에서 알츠하이머병을 주제로 한 세션의 연사로 참여해 “알츠하이머병 치료제로 알려진 다른 약물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만 조절하는 대증적 요법”이라며 “임상 자료를 보면 레켐비는 아밀로이드 단백질을 충분히 제거한다”고 했다.
레켐비의 부작용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레켐비를 투여한 환자들은 임상 과정에서 3명이 사망했다. 레켐비를 처방받을 수 있는 환자가 일부인 점도 한계다. FDA는 경도 인지 장애나 경증 치매 환자의 인지 능력이 떨어지는 속도를 늦추는 약물로 레켐비를 승인했다. 초기 단계의 알츠하이머병 환자들만 레켐비를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중증의 알츠하이머병을 앓아 치료가 필요한 환자는 레켐비를 처방받을 수 없다.
2만6500만 달러(약 3450만원)에 달하는 연간 치료 비용도 부담이다. 수천만원에 달하는 비용을 지불하고 인지 능력의 저하 속도를 5개월가량 늦추기 때문에 이른바 ‘가성비’가 낮다는 지적도 나온다. 알츠하이머병 치료제를 개발 중인 국내 기업의 한 대표는 “레켐비는 초기 단계의 알츠하이머병을 앓는 환자에게 처방해 질병의 진행 속도를 늦출 때 의미 있는 약물”이라며 “(치료 비용을 고려하면) 환자들이 효과를 체감할지는 미지수”라고 말했다.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레켐비는 알츠하이머병 환자들에게 질환을 치료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에자이와 바이오젠도 이번에 허가받은 미국 외 일본과 중국, 영국 등에 레켐비를 허가 신청했다. 국내 규제기관인 식품의약품안전처(식약처)에는 지난 6월 품목허가를 신청했다. 허가 과정이 문제없이 진행되면 내년 중 국내 환자도 레켐비를 쓸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식약처 관계자는 “보완할 자료가 얼마나 추가될지에 따라 최종 허가 시점은 달라질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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