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 만들 때 가장 행복한 '제빵왕 김영모'[이코노 인터뷰]
고품질 빵 내놓자 입소문 타고 순항
천연 발효빵으로 업계 들썩…“빵은 과학이다”
공익재단, 박물관 준비로 ‘아름다운 마무리’
[대담=최은영 이코노미스트 편집국장·글=김정훈 유통바이오부장] 우리는 특정 분야에서 돋보이는 숙련도를 보이는 사람을 명장(名匠)이라 부른다. 한 분야에서 뛰어난 장인에게 부여하는 영광스런 칭호인 셈이다. 이들이 만든 제품이나 상품은 기본적으로 우수한 품질이 보증된다. 우리는 1980년대부터 아예 기능장려법이 제정되며 국가적으로 ‘대한민국명장’을 선정하고 있다.
1982년 5월 서초구의 한 작은 점포에서 시작돼 약 42년간 사랑받아온 김영모과자점의 대표, 김영모 명장은 대한민국명장회의 명예회장이자 대한민국 제과명장 1호다. 빵을 좋아하는 사람은 물론, 빵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한 번쯤은 그의 이름을 들어봤을 터. 특히 김영모 명장은 지난 2010년 방영돼 큰 인기를 끌었던 ‘제빵왕 김탁구’의 실제 모델이기도 하다. 무려 50여 년간 제과·제빵 외길을 걸으며 최고의 명장 자리에 오른 그는 여전히 빵을 만들 때 가장 행복하다며 미소 짓는다. ‘이코노미스트’가 성남시 수정구에 위치한 카페형베이커리 ‘파네트리(Paneterie) 제과명장 김영모’에서 김영모 명장을 만나 그의 삶과 제빵 철학에 대해 들어봤다.
맛과 사람 중시한 제빵왕
김영모과자점은 국내 제과·제빵계의 전설적인 빵집으로 불린다. 김 명장이 서초구에서 시작한 이 작은 빵집은 ‘몽블랑’, ‘바케트샌드위치’ 등 김영모과자점만의 독자적인 메뉴들이 큰 인기를 얻으며 국내 대표 빵집이 됐다.
1982년 설립된 김영모과자점의 업력은 42년에 달하지만 그 인기와 명성 대비 매장 수가 적은 편이다. 현재 김영모과자점 매장 수는 서초본점을 비롯해 강남지역에만 7곳, 성남지역에 1곳 등 총 8곳이다. 대한민국 최고의 명장이 운영하는 빵집의 매장 수치고는 조촐(?)하다.
이는 평소 김 명장이 가진 철학 때문이다. 그는 애초에 제빵사업 보다는 국내 최고의 제빵 기술자가 되고 싶었다. 그런 그가 제과점을 열게 된 것은 주변 지인의 인수 제안이 시작이었다.
김 명장은 “저의 지인이 서초에서 제과점을 운영하다 자신은 빵을 만드는 기술이 없어 도저히 감당이 어렵다며 인수 제안을 해왔다”며 “그래서 이걸 인수해 20m2(6평)짜리 점포에서 처음 빵집을 시작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당시 매장은 작아도 제과의 품질만큼은 최고를 보장하는 과자점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좋은 품질을 유지한 빵을 팔다 보니 강남 고객들을 대상으로 입소문이 나며 점포가 하나둘 늘기 시작했다. 자금력이 생기면 인근에 점포를 하나씩 추가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결코 과도한 점포 확대를 추진하지 않았다.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만 매장을 늘렸다. 또 점포 간 거리도 가깝게 유지했다. 사업 초기, 자신이 직접 점포를 돌며 챙기기 위함이다. 또 직영점이 아니면 최고의 품질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김 명장은 “8개 매장이 각각 최고의 품질을 유지하는 이유는 레시피(Recipe)를 모두 메뉴얼화했기 때문”이라며 “앞으로도 김영모과자점을 프랜차이즈화할 계획은 없다”고 강조했다.
김영모과자점 홈페이지 메인 화면에는 인상적인 문구들이 적혀있다. ‘함께한 40년, 함께 할 100년’, ‘맛을 소중히, 사람을 소중히’, ‘김영모의 이름을 걸고, 최고 맛있는 빵을 만들기 위해 시작했습니다’ 등이다.
김 명장은 사업 초기 빵을 잘못 만들어 판매했을 때를 떠올리며 “잘못 만든 음식은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다”고 회상했다. 실제 그는 김영모 과자점 오픈 초기, 자신이 만든 빵을 먹고 탈이 난 고객의 사연을 소개했다. 그는 “한번은 저희 슈크림 빵을 먹고 탈이 난 고객이 있었다”며 “저의 아내가 매일 해당 고객 집에 출근하다시피 해 치료와 빨래를 해드리며 사죄했다”고 회상했다. 이어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음식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 계기”라고 덧붙였다.
김영모과자점 오픈 당시 상호명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이유도 여기에 있다. 김 명장은 김영모과자점을 준비하던 시절, 무교동에 위치한 ‘보리수 과자점’이란 곳에서 빵을 만드는 직원이었다. 당시 사장에게 새로 시작할 과자점의 상호명 자문을 구했다. 사장의 첫마디는 ‘너의 이름인 김영모를 상호에 내걸어라’였다. ‘이름을 내걸면 한시도 소홀할 수 없지 않겠느냐’라는 의미였다. 실제 일본에서는 이런 이유로 제빵사들의 이름이 들어간 제과점들이 많다. 그는 “내 이름을 내건다는 것이 참 민망하고 쑥쓰러웠다”면서도 “당시 사장님의 조언에 용기를 얻었고 지금은 잘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고 뿌듯해했다.
유럽에서의 작은 우연, ‘발효빵 시초’가 되다
“빵은 과학이다.”
평소 김 명장이 미디어 인터뷰 등에서 언급한 말이다. 이날 인터뷰에서도 그는 이 말을 강조했다. 빵이 만들어지는 방식은 간단하다. 밀가루를 반죽하고 이를 구워내면 낸다. 여기에 다른 재료들이 들어갈 순 있지만 기본적인 틀은 반죽 후 빵을 구워내는 식이다. 김 명장의 답변은 단순히 빵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생각했다. ‘여러 정성과 노력이 들어가야 좋은 빵이 나온다’ 정도의 철학으로 여겼다. 하지만 그의 얘기를 들어보니 ‘빵은 정말 과학’이었다.
김 명장은 “빵은 미생물을 다루는 영역”이라며 “미생물은 적정 온도에서 자라고 발효시간도 정확히 맞춰야 한다”고 했다. 그가 이런 얘기를 강조한 것은 국내 최초로 천연 발효빵을 개발했기 때문이다. 대체로 빵을 만들 때는 당분이나 영양분을 가한 습기가 있는 밀가루에 섞으면 알코올 발효를 일으키는 빵 효모인 ‘이스트’(yeast)를 사용한다. 이스트는 빵을 굽는 과정에서 모양을 부풀리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
다만 이스트는 밀가루 분해 성분이 적다. 이렇게 만들어진 빵을 먹으면 소화가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김 명장이 자연 발효되는 빵을 만들게 된 이유다. 김 명장이 만든 유산균발효종, 천연과일발효종 등은 한국 미생물 보존센터에 영구 보존되고 있다.
김 명장은 “빵에 함유된 미생물을 소홀히 다루면 빵의 맛 자체가 나빠진다”며 “공부를 하지 않으면 좋은 빵을 만들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가 천연 발효빵을 만들게 된 계기는 작은 우연에서 시작됐다. 1980년대 초 김 명장은 사업 일정상 스위스를 방문했다. 그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 아침, 숙소 창문을 열었는데 구수한 빵 냄새가 방으로 흘러들어왔다. 냄새를 따라 찾은 곳은 규모가 매우 작은 빵집이었다. 그는 바로 오후 시내관광투어 일정을 취소하고 작은 매장 안에서 종일 빵 냄새를 음미했다. 그리고는 이 매장의 주인(셰프)을 만나고 싶다고 요청했다.
김 명장은 “가게 문을 닫을 때쯤 주인인 셰프가 나와서 나에게 ‘어디서 왔냐’고 물었고 난 ‘한국에서 왔다’고 말했다”며 “당시에는 88올림픽이 열리기 전이라 유럽인들이 한국이란 나라를 알지도 못할 때였다”고 회상했다.
김 명장은 자신의 명함을 그의 손에 쥐어주며 ‘반드시 다시 돌아오겠다’고 말했다. 빵 만드는 기술을 배우겠다는 일념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이후 세번이나 이곳을 다시 방문해 점포 지하실에 마련된 작은 공장에서 쉐프와 함께 땀을 흘리며 빵을 만들었다. 천연 발효빵을 배우게 된 계기였다. 김 명장은 여기서 배운 기술을 바탕으로 유럽 등지를 돌며 천연 발효빵 공부를 진행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천연 발효빵을 개발하는 데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한국에서 시도한 천연 발효빵은 만든 지 석달 만에 부패됐다. 스위스에서 맛본 감동스런 빵 맛을 전혀 구현하지 못했다. 이유는 서로 다른 환경 때문이었다. 김 명장은 “한국과 유럽은 기후와 토양 자체가 다르다”며 “그래서 한국만의 토종 천연 발효법 개발에 나섰고 결국 성공했다”고 설명했다.
김 명장의 천연 발효법은 적정 산도(pH)를 활용하는 것이 핵심이다. 반죽 후 7일 정도가 지나면 산도가 상승하기 시작한다. 이때 pH 수치가 4~4.5 정도가 되면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유해균은 모두 죽고 유산균만 살아남는다. 이 상태의 반죽을 활용해 빵을 만든다. 지금 국내에서 많이 활용되는 천연 발효빵 레시피의 시초는 김 명장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탄생했다.
김 명장은 이렇게 개발한 천연 발효 제빵 기술에 대해 특별히 특허 등록을 하지 않았다. 모두가 이 기술을 활용해 좋은 빵을 만들어 국민들이 건강한 빵을 먹을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했다.
그는 “과거 어떤 선배님 한 분이 해외연수를 다녀온 뒤 저에게 ‘왜 그렇게 돈 들여 배운 기술들을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하고 다니냐’며 다그친 적이 있다”며 “저는 노하우를 자꾸 공개해서 이 시장 자체를 더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이어 “당시 노하우 공개로 제과업계에서 미움을 받기도 했지만 저는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최근 김영모과자점을 비롯해 성심당, 안스베이커리, 나폴레옹과자점, 리치몬드과자점 등 이른바 동네 제과점들이 큰 인기를 얻고 있다. 하지만 이런 제과점들 외에 소규모 빵집들은 파리바케뜨 등 대형 프랜차이즈에 치이며 점차 자취를 감추는 실정이다. 대형화된 동네 제과점과 프랜차이즈 외 빵집은 살아남기 힘들어졌다.
김 명장은 이런 부분에 대해 매우 안타까워했다. 자신이 2000년대 초반 제과협회장을 역임할 당시 동네 제과점 사장들에게 경고했던 부분이지만 이들은 위기의식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김 명장은 “2003년도에 대한제과협회장이 된 후 전국 제과점 순회를 돌며 앞으로 프랜차이즈가 계속 성장하니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며 “하지만 당시 동네 제과점들은 문만 열어놔도 손님이 계속 몰릴 때라 전혀 위기의식을 못 느낄 때였다”고 말했다. 이어 “동네 제과점 사장들은 손님이 들어와도 TV를 보며 ‘어서오세요’, 손님이 나갈 때도 TV를 보며 ‘안녕히 가세요’ 인사하더라”라며 “그때 제과점을 돌며 내부 인테리어도 바꾸고 직원들에게는 고객들에게 더 밝게 응대하라고 여러 조언을 건넸지만 듣질 않았다. 그리곤 2~3년 후부터 프랜차이즈에 치여 동네 제과점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끊임없이 공부하고, 공부하라”
그는 앞으로 제과점 운영을 꿈꾸는, 혹은 운영 중인 젊은 세대에게 ‘끊임없이 공부하고, 공부하라’고 충고한다. 김 명장은 “점포를 내고 롱런을 하려면 많은 공부가 필요하다”며 “브랜드가 만들어지고 지속 성장하려면 이를 수성하려는 의지와 노력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젊은 세대로 향하는 김 명장의 조언은 자신의 자녀들에게 하는 조언이기도 하다. 그는 아들 둘과 딸 하나, 총 세명의 자녀를 두고 있다. 기본적으로 김 명장은 자녀들이 스스로 원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을 하길 원했다. 그러면서도 내심 자신의 가업을 이을 자녀가 나오길 바랐다. 현재는 둘째 아들이 가업을 이어 제빵사의 길을 걷고 있다.
다만 김 명장은 경영에 참여하고 있는 첫째 아들과 김영모과자점 운영과 관련해 의견 충돌이 있었다고 고백했다. 김 명장은 “기본적으로 저는 우리 아이들이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해 실패도 해보고 성공도 해봐야 한다는 생각”이라며 “(첫째 아들에게도)김영모과자점 사업과 관련해 할 수 있는 것은 뭐든지 시도해보라는 입장이지만 딱 한 가지 양보할 수 없는 부분 ‘제품의 품질’이다”라고 말했다.
첫째 아들은 김영모과자점 제품을 국내 대표 온라인업체에서 팔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김 명장은 ‘반드시 오늘 만든 빵만 고객에게 팔아야 한다’는 주의였다. 하루만 지나도 맛의 품질이 달라질 수 있어서다. 김 명장은 온라인 판매를 하게 되면 빵을 하루 묵혀 다음날 배송하다 보니 김영모 과자점만의 빵 맛을 보장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백화점에서 파격적인 수수료를 무기로 입점을 제안했을 때도 맛의 품질 문제가 생길 수 있어 모두 거절했다”며 “지금은 아들에게 직접 공장을 만들고 품질에 문제가 없는 상태라는 조건 하에서 온라인업체 입점을 추진해보라고 한 상태”라고 밝혔다.
김 명장은 1953년생으로 올해 71세다. 그는 여전히 새벽 5시에 일어나 밤 12시에 잠들 때까지 제과점 매장을 돌며 경영을 살필 정도로 왕성한 건강을 자랑한다. 하지만 그도 슬슬 ‘김영모가 없는’ 김영모과자점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김 명장은 “저도 나이가 벌써 70대로 접어들어 슬슬 마무리할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며 “김영모과자점을 성장시키는 것은 저희 직원들과 자녀들의 몫”이라고 말했다.
김 명장의 은퇴 준비 역시 ‘김영모’답다. 그는 제과, 제빵 후배들에게 무엇을 남겨야 할까를 고민해왔다. 그리고 밑그림을 어느 정도 그려놨다. 그것은 바로 공익재단과 박물관 설립이다.
김 명장은 지난해 7월 재단법인 김영모문화재단을 설립했다. 그는 이 재단에 자신의 남은 재산을 모두 쏟아 재능이 있지만 자금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돕고 있다. 자신의 유고 시에도 재단 운영에 문제가 없도록 수익사업 구조도 마련했다. 또한 그의 마지막 꿈은 경기도 이천에 대형 박물관을 짓는 것이다. 이를 위해 김 명장은 이천 지역에 땅 1만3223m2(4000평)를 사놨다. 그는 이 박물관을 아이들이 제과, 제빵은 물론, 역사공부도 함께 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 계획이다.
김 명장은 “단순히 빵을 진열하는 박물관이 아니라 제빵 과정을 재연하는 곳이 될 것”이라며 “또 한국관, 세계관 이런 식으로 역사를 공부할 수 있는 관람시설을 만들려 한다”고 밝혔다. 그는 또 “조선시대에 등장한 술빵이나 술떡도 결국 발효기술이 가미된 음식들”이라며 “박물관 전시를 위해 이런 물품들을 조금씩 모으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단순하게 뭔가를 전시하는 곳이 아니라 교육적이고 문화적인 가치를 지닌 박물관을 만들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인터뷰 말미, 그에게 가장 기쁠 때와 슬프거나, 화날 때를 물었다. 기쁠 때는 너무도 간단하다. 매장을 찾은 손님들에게 ‘빵이 너무 맛있어요’라고 칭찬을 들을 때다. 제빵사에 빵이 맛있다는 칭찬만큼 행복한 일은 없다. 화가 날 때는 잘못된 제품을 진열했을 때, 직원들의 손님 응대가 잘못됐을 때다. 이토록 빵과 손님에게 진심인 명장이라니. 40년이 넘는 세월, 우리를 위해 건강한 빵을 만들어준 김 명장에게 진심어린 박수를 보내는 동시에 그의 염원대로 멋진 박물관을 만들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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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5월 서초구의 한 작은 점포에서 시작돼 약 42년간 사랑받아온 김영모과자점의 대표, 김영모 명장은 대한민국명장회의 명예회장이자 대한민국 제과명장 1호다. 빵을 좋아하는 사람은 물론, 빵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한 번쯤은 그의 이름을 들어봤을 터. 특히 김영모 명장은 지난 2010년 방영돼 큰 인기를 끌었던 ‘제빵왕 김탁구’의 실제 모델이기도 하다. 무려 50여 년간 제과·제빵 외길을 걸으며 최고의 명장 자리에 오른 그는 여전히 빵을 만들 때 가장 행복하다며 미소 짓는다. ‘이코노미스트’가 성남시 수정구에 위치한 카페형베이커리 ‘파네트리(Paneterie) 제과명장 김영모’에서 김영모 명장을 만나 그의 삶과 제빵 철학에 대해 들어봤다.
맛과 사람 중시한 제빵왕
김영모과자점은 국내 제과·제빵계의 전설적인 빵집으로 불린다. 김 명장이 서초구에서 시작한 이 작은 빵집은 ‘몽블랑’, ‘바케트샌드위치’ 등 김영모과자점만의 독자적인 메뉴들이 큰 인기를 얻으며 국내 대표 빵집이 됐다.
1982년 설립된 김영모과자점의 업력은 42년에 달하지만 그 인기와 명성 대비 매장 수가 적은 편이다. 현재 김영모과자점 매장 수는 서초본점을 비롯해 강남지역에만 7곳, 성남지역에 1곳 등 총 8곳이다. 대한민국 최고의 명장이 운영하는 빵집의 매장 수치고는 조촐(?)하다.
이는 평소 김 명장이 가진 철학 때문이다. 그는 애초에 제빵사업 보다는 국내 최고의 제빵 기술자가 되고 싶었다. 그런 그가 제과점을 열게 된 것은 주변 지인의 인수 제안이 시작이었다.
김 명장은 “저의 지인이 서초에서 제과점을 운영하다 자신은 빵을 만드는 기술이 없어 도저히 감당이 어렵다며 인수 제안을 해왔다”며 “그래서 이걸 인수해 20m2(6평)짜리 점포에서 처음 빵집을 시작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당시 매장은 작아도 제과의 품질만큼은 최고를 보장하는 과자점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좋은 품질을 유지한 빵을 팔다 보니 강남 고객들을 대상으로 입소문이 나며 점포가 하나둘 늘기 시작했다. 자금력이 생기면 인근에 점포를 하나씩 추가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결코 과도한 점포 확대를 추진하지 않았다.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만 매장을 늘렸다. 또 점포 간 거리도 가깝게 유지했다. 사업 초기, 자신이 직접 점포를 돌며 챙기기 위함이다. 또 직영점이 아니면 최고의 품질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김 명장은 “8개 매장이 각각 최고의 품질을 유지하는 이유는 레시피(Recipe)를 모두 메뉴얼화했기 때문”이라며 “앞으로도 김영모과자점을 프랜차이즈화할 계획은 없다”고 강조했다.
김영모과자점 홈페이지 메인 화면에는 인상적인 문구들이 적혀있다. ‘함께한 40년, 함께 할 100년’, ‘맛을 소중히, 사람을 소중히’, ‘김영모의 이름을 걸고, 최고 맛있는 빵을 만들기 위해 시작했습니다’ 등이다.
김 명장은 사업 초기 빵을 잘못 만들어 판매했을 때를 떠올리며 “잘못 만든 음식은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다”고 회상했다. 실제 그는 김영모 과자점 오픈 초기, 자신이 만든 빵을 먹고 탈이 난 고객의 사연을 소개했다. 그는 “한번은 저희 슈크림 빵을 먹고 탈이 난 고객이 있었다”며 “저의 아내가 매일 해당 고객 집에 출근하다시피 해 치료와 빨래를 해드리며 사죄했다”고 회상했다. 이어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음식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 계기”라고 덧붙였다.
김영모과자점 오픈 당시 상호명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이유도 여기에 있다. 김 명장은 김영모과자점을 준비하던 시절, 무교동에 위치한 ‘보리수 과자점’이란 곳에서 빵을 만드는 직원이었다. 당시 사장에게 새로 시작할 과자점의 상호명 자문을 구했다. 사장의 첫마디는 ‘너의 이름인 김영모를 상호에 내걸어라’였다. ‘이름을 내걸면 한시도 소홀할 수 없지 않겠느냐’라는 의미였다. 실제 일본에서는 이런 이유로 제빵사들의 이름이 들어간 제과점들이 많다. 그는 “내 이름을 내건다는 것이 참 민망하고 쑥쓰러웠다”면서도 “당시 사장님의 조언에 용기를 얻었고 지금은 잘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고 뿌듯해했다.
유럽에서의 작은 우연, ‘발효빵 시초’가 되다
“빵은 과학이다.”
평소 김 명장이 미디어 인터뷰 등에서 언급한 말이다. 이날 인터뷰에서도 그는 이 말을 강조했다. 빵이 만들어지는 방식은 간단하다. 밀가루를 반죽하고 이를 구워내면 낸다. 여기에 다른 재료들이 들어갈 순 있지만 기본적인 틀은 반죽 후 빵을 구워내는 식이다. 김 명장의 답변은 단순히 빵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생각했다. ‘여러 정성과 노력이 들어가야 좋은 빵이 나온다’ 정도의 철학으로 여겼다. 하지만 그의 얘기를 들어보니 ‘빵은 정말 과학’이었다.
김 명장은 “빵은 미생물을 다루는 영역”이라며 “미생물은 적정 온도에서 자라고 발효시간도 정확히 맞춰야 한다”고 했다. 그가 이런 얘기를 강조한 것은 국내 최초로 천연 발효빵을 개발했기 때문이다. 대체로 빵을 만들 때는 당분이나 영양분을 가한 습기가 있는 밀가루에 섞으면 알코올 발효를 일으키는 빵 효모인 ‘이스트’(yeast)를 사용한다. 이스트는 빵을 굽는 과정에서 모양을 부풀리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
다만 이스트는 밀가루 분해 성분이 적다. 이렇게 만들어진 빵을 먹으면 소화가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김 명장이 자연 발효되는 빵을 만들게 된 이유다. 김 명장이 만든 유산균발효종, 천연과일발효종 등은 한국 미생물 보존센터에 영구 보존되고 있다.
김 명장은 “빵에 함유된 미생물을 소홀히 다루면 빵의 맛 자체가 나빠진다”며 “공부를 하지 않으면 좋은 빵을 만들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가 천연 발효빵을 만들게 된 계기는 작은 우연에서 시작됐다. 1980년대 초 김 명장은 사업 일정상 스위스를 방문했다. 그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 아침, 숙소 창문을 열었는데 구수한 빵 냄새가 방으로 흘러들어왔다. 냄새를 따라 찾은 곳은 규모가 매우 작은 빵집이었다. 그는 바로 오후 시내관광투어 일정을 취소하고 작은 매장 안에서 종일 빵 냄새를 음미했다. 그리고는 이 매장의 주인(셰프)을 만나고 싶다고 요청했다.
김 명장은 “가게 문을 닫을 때쯤 주인인 셰프가 나와서 나에게 ‘어디서 왔냐’고 물었고 난 ‘한국에서 왔다’고 말했다”며 “당시에는 88올림픽이 열리기 전이라 유럽인들이 한국이란 나라를 알지도 못할 때였다”고 회상했다.
김 명장은 자신의 명함을 그의 손에 쥐어주며 ‘반드시 다시 돌아오겠다’고 말했다. 빵 만드는 기술을 배우겠다는 일념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이후 세번이나 이곳을 다시 방문해 점포 지하실에 마련된 작은 공장에서 쉐프와 함께 땀을 흘리며 빵을 만들었다. 천연 발효빵을 배우게 된 계기였다. 김 명장은 여기서 배운 기술을 바탕으로 유럽 등지를 돌며 천연 발효빵 공부를 진행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천연 발효빵을 개발하는 데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한국에서 시도한 천연 발효빵은 만든 지 석달 만에 부패됐다. 스위스에서 맛본 감동스런 빵 맛을 전혀 구현하지 못했다. 이유는 서로 다른 환경 때문이었다. 김 명장은 “한국과 유럽은 기후와 토양 자체가 다르다”며 “그래서 한국만의 토종 천연 발효법 개발에 나섰고 결국 성공했다”고 설명했다.
김 명장의 천연 발효법은 적정 산도(pH)를 활용하는 것이 핵심이다. 반죽 후 7일 정도가 지나면 산도가 상승하기 시작한다. 이때 pH 수치가 4~4.5 정도가 되면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유해균은 모두 죽고 유산균만 살아남는다. 이 상태의 반죽을 활용해 빵을 만든다. 지금 국내에서 많이 활용되는 천연 발효빵 레시피의 시초는 김 명장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탄생했다.
김 명장은 이렇게 개발한 천연 발효 제빵 기술에 대해 특별히 특허 등록을 하지 않았다. 모두가 이 기술을 활용해 좋은 빵을 만들어 국민들이 건강한 빵을 먹을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했다.
그는 “과거 어떤 선배님 한 분이 해외연수를 다녀온 뒤 저에게 ‘왜 그렇게 돈 들여 배운 기술들을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하고 다니냐’며 다그친 적이 있다”며 “저는 노하우를 자꾸 공개해서 이 시장 자체를 더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이어 “당시 노하우 공개로 제과업계에서 미움을 받기도 했지만 저는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최근 김영모과자점을 비롯해 성심당, 안스베이커리, 나폴레옹과자점, 리치몬드과자점 등 이른바 동네 제과점들이 큰 인기를 얻고 있다. 하지만 이런 제과점들 외에 소규모 빵집들은 파리바케뜨 등 대형 프랜차이즈에 치이며 점차 자취를 감추는 실정이다. 대형화된 동네 제과점과 프랜차이즈 외 빵집은 살아남기 힘들어졌다.
김 명장은 이런 부분에 대해 매우 안타까워했다. 자신이 2000년대 초반 제과협회장을 역임할 당시 동네 제과점 사장들에게 경고했던 부분이지만 이들은 위기의식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김 명장은 “2003년도에 대한제과협회장이 된 후 전국 제과점 순회를 돌며 앞으로 프랜차이즈가 계속 성장하니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며 “하지만 당시 동네 제과점들은 문만 열어놔도 손님이 계속 몰릴 때라 전혀 위기의식을 못 느낄 때였다”고 말했다. 이어 “동네 제과점 사장들은 손님이 들어와도 TV를 보며 ‘어서오세요’, 손님이 나갈 때도 TV를 보며 ‘안녕히 가세요’ 인사하더라”라며 “그때 제과점을 돌며 내부 인테리어도 바꾸고 직원들에게는 고객들에게 더 밝게 응대하라고 여러 조언을 건넸지만 듣질 않았다. 그리곤 2~3년 후부터 프랜차이즈에 치여 동네 제과점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끊임없이 공부하고, 공부하라”
그는 앞으로 제과점 운영을 꿈꾸는, 혹은 운영 중인 젊은 세대에게 ‘끊임없이 공부하고, 공부하라’고 충고한다. 김 명장은 “점포를 내고 롱런을 하려면 많은 공부가 필요하다”며 “브랜드가 만들어지고 지속 성장하려면 이를 수성하려는 의지와 노력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젊은 세대로 향하는 김 명장의 조언은 자신의 자녀들에게 하는 조언이기도 하다. 그는 아들 둘과 딸 하나, 총 세명의 자녀를 두고 있다. 기본적으로 김 명장은 자녀들이 스스로 원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을 하길 원했다. 그러면서도 내심 자신의 가업을 이을 자녀가 나오길 바랐다. 현재는 둘째 아들이 가업을 이어 제빵사의 길을 걷고 있다.
다만 김 명장은 경영에 참여하고 있는 첫째 아들과 김영모과자점 운영과 관련해 의견 충돌이 있었다고 고백했다. 김 명장은 “기본적으로 저는 우리 아이들이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해 실패도 해보고 성공도 해봐야 한다는 생각”이라며 “(첫째 아들에게도)김영모과자점 사업과 관련해 할 수 있는 것은 뭐든지 시도해보라는 입장이지만 딱 한 가지 양보할 수 없는 부분 ‘제품의 품질’이다”라고 말했다.
첫째 아들은 김영모과자점 제품을 국내 대표 온라인업체에서 팔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김 명장은 ‘반드시 오늘 만든 빵만 고객에게 팔아야 한다’는 주의였다. 하루만 지나도 맛의 품질이 달라질 수 있어서다. 김 명장은 온라인 판매를 하게 되면 빵을 하루 묵혀 다음날 배송하다 보니 김영모 과자점만의 빵 맛을 보장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백화점에서 파격적인 수수료를 무기로 입점을 제안했을 때도 맛의 품질 문제가 생길 수 있어 모두 거절했다”며 “지금은 아들에게 직접 공장을 만들고 품질에 문제가 없는 상태라는 조건 하에서 온라인업체 입점을 추진해보라고 한 상태”라고 밝혔다.
김 명장은 1953년생으로 올해 71세다. 그는 여전히 새벽 5시에 일어나 밤 12시에 잠들 때까지 제과점 매장을 돌며 경영을 살필 정도로 왕성한 건강을 자랑한다. 하지만 그도 슬슬 ‘김영모가 없는’ 김영모과자점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김 명장은 “저도 나이가 벌써 70대로 접어들어 슬슬 마무리할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며 “김영모과자점을 성장시키는 것은 저희 직원들과 자녀들의 몫”이라고 말했다.
김 명장의 은퇴 준비 역시 ‘김영모’답다. 그는 제과, 제빵 후배들에게 무엇을 남겨야 할까를 고민해왔다. 그리고 밑그림을 어느 정도 그려놨다. 그것은 바로 공익재단과 박물관 설립이다.
김 명장은 지난해 7월 재단법인 김영모문화재단을 설립했다. 그는 이 재단에 자신의 남은 재산을 모두 쏟아 재능이 있지만 자금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돕고 있다. 자신의 유고 시에도 재단 운영에 문제가 없도록 수익사업 구조도 마련했다. 또한 그의 마지막 꿈은 경기도 이천에 대형 박물관을 짓는 것이다. 이를 위해 김 명장은 이천 지역에 땅 1만3223m2(4000평)를 사놨다. 그는 이 박물관을 아이들이 제과, 제빵은 물론, 역사공부도 함께 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 계획이다.
김 명장은 “단순히 빵을 진열하는 박물관이 아니라 제빵 과정을 재연하는 곳이 될 것”이라며 “또 한국관, 세계관 이런 식으로 역사를 공부할 수 있는 관람시설을 만들려 한다”고 밝혔다. 그는 또 “조선시대에 등장한 술빵이나 술떡도 결국 발효기술이 가미된 음식들”이라며 “박물관 전시를 위해 이런 물품들을 조금씩 모으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단순하게 뭔가를 전시하는 곳이 아니라 교육적이고 문화적인 가치를 지닌 박물관을 만들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인터뷰 말미, 그에게 가장 기쁠 때와 슬프거나, 화날 때를 물었다. 기쁠 때는 너무도 간단하다. 매장을 찾은 손님들에게 ‘빵이 너무 맛있어요’라고 칭찬을 들을 때다. 제빵사에 빵이 맛있다는 칭찬만큼 행복한 일은 없다. 화가 날 때는 잘못된 제품을 진열했을 때, 직원들의 손님 응대가 잘못됐을 때다. 이토록 빵과 손님에게 진심인 명장이라니. 40년이 넘는 세월, 우리를 위해 건강한 빵을 만들어준 김 명장에게 진심어린 박수를 보내는 동시에 그의 염원대로 멋진 박물관을 만들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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