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성형 AI가 선호하는 단어는 ‘delve’ [한세희 테크&라이프]
모바일 시대 떠오른 한글 자모는 ‘ㅋ’
AI시대 속 자주 활용 되는 단어도 존재
[한세희 IT 칼럼니스트] 모바일 시대를 맞아 가장 신분이 격상된 한글 자모가 있다. 바로 ‘ㅋ’이다.
사실 ‘ㅋ’이 들어가는 단어는 많지 않다. 일상에서 잘 쓰이지 않는 자음이다. 다만, 모바일 시대 속 채팅의 일상화로 그 활용 빈도가 엄청나게 늘었다. 지금 모바일 메신저창에 가장 많이 찍혀 있는 글자도 아마 ‘ㅋ’일 가능성이 높다.
‘ㅋ’은 개수가 몇 개 인지에 따라 상대방이 어떤 뜻으로 보냈는지 진지한 고민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모바일 메신저 등장 이전과 이후 ‘ㅋ’의 활용 빈도가 얼마나 바뀌었는지 실증적으로 파악하기는 어렵겠지만, 과거에 비해 훨씬 자주 쓰인다는 점은 틀림 없다.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의 확산은 사람들의 언어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각종 신조어와 줄임말이 등장해 기성 세대를 어리둥절하게 했고, 인터넷 커뮤니티의 분위기나 특성에 따른 특이한 문체나 유행어가 나타나기도 했다.
이는 익명의 개인이 집단으로 모일 수 있다는 인터넷의 특징, 컴퓨터 키보드나 스마트폰 자판으로 인한 기계적 환경의 제약 등 여러 기술적 변화에 대응해 우리가 쓰는 언어가 적응하거나 새로운 가능성을 찾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기술이 언어를 바꿨다. 혹은 우리가 언어를 기술에 적응시켰다고 설명할 수 있다.
생성형 AI가 선호하는 표현
모바일을 넘어 이제 인공지능(AI)의 시대다. 사람보다 더 그럴듯하게 문장을 만들어내는 생성형 AI는 우리의 언어 생활을 어떻게 바꿀까. 업무나 일상에 생성형 AI를 많이 쓸수록 우리의 언어가 AI의 직접적 지배를 받게 되지는 않을까. 다시 말해 AI가 불러주는 표현을 우리가 더 많이 쓰게 되지는 않을까.
최근 AI 관계자들 사이에서 AI가 문장을 생성할 때 선호하는 표현이나 단어가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대표적인 것이 ‘delve’이다. 보통 ‘delve into’와 같은 식으로 쓰여 ‘~을 철저하게 조사하다’ 정도의 뜻을 갖는다. 아주 드문 표현은 아니지만, 일상에서 널리 쓰이지는 않는다.
무슨 이유인지 챗GPT 같은 생성형 AI가 만들어낸 문장에선 이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이는 AI로 쓴 글을 골라내는 표지 역할을 할 수 있다. 최근에는 이 문제를 검증한 논문까지 나왔다.
독일 튀빙겐대학과 미국 노스웨스턴대학 연구자가 최근 공개한 논문에 따르면 2022년 말 챗GPT가 등장한 이후 2023년과 20204년 사이 영어로 쓰인 학술 논문에서 실제로 ‘delve’의 사용 빈도가 눈에 띄게 높아졌다.
이들은 3700만건 이상의 의학 및 바이오 분야 논문을 모아 놓은 미국 국립보건원(NIH) ‘퍼브메드’(PueMed) 사이트에서 지난 2010부터 2024년 사이 나온 논문 1400만건의 초록을 분석했다.
그 결과 2024년 나온 논문에서 ‘delves’는 2023년 이전 기간에 비해 25배나 사용 빈도가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진은 2024년 나온 논문의10% 정도는 생성형 AI를 활용해 초록을 쓴 것으로 추정했다.
아울러 ▲한국 ▲중국 ▲대만 연구자 논문에선 생성형 AI 표식어를 근거로 AI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논문 비중은 15%로 전체 평균 10%보다 높았다. 영어가 자유롭지 않아 생성형 AI의 도움을 받은 경우가 많은 것으로 보여진다.
다만 생성형AI가 작성한 논문의 범람을 우려하는 국제 과학계 분위기를 생각하면 이것이 동양 과학자들에게 불리한 결과로 수도 있다. 지금도 비영어권 과학자들의 연구가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상황이다.
물론 이같은 표현이 있다 해서 생성형 AI로 쓴 논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전체적으로 논문에 생성형 AI를 활용하는 경우가 크게 늘었음은 확실해 보인다.
사람 구분 짓는 ‘AI 언어’
예전에 비해 갑자기 사용량이 늘어난 단어는 ▲코로나 바이러스 ▲판데믹 ▲에볼라 등 세계적 사건과 연관됐다. 이를 감안했을 때 ‘delve’의 높아진 활용 빈도는 거대 언어모델에 기반한 생성형 AI의 영향 때문으로 보인다.
생성형 AI가 ‘delve’를 편애하는 이유는 알기 어렵다. 일각에서는 권위 있게 정보를 제공하는 느낌을 제공하기 위함이라는 관측도 있다.
생성형 AI의 학습을 위한 답변 검토 작업은 주로 아프리카 영어권 저임금 인력에게 맡겨진다. 아프리카 영어권에선 다른 영어 사용 권역에 비해 ‘delve’를 많이 쓰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앞으로 이 같은 ‘AI 표식어’ 사용 여부에 따라 사람을 미묘하게 구별하거나 낙인을 찍는 일도 생길 수 있다. AI가 인간 활동 대부분을 평준화하고, 이 때문에 AI를 뛰어넘는 생각과 표현, 실행이 가능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구별되는 세상이 올 수도 있다. 마치 돈이나 지식, 말투나 교양으로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구분되듯 말이다.
언어는 인간이 지닌 생각의 표현이자 생각을 만들어내는 틀이다. 이메일이나 보고서 작성뿐 아니라 ▲교육 ▲운전 ▲대출 여부 판단 ▲재판 ▲군사 작전 결정까지 AI에 맡기고, AI가 알려주는 말로 표현하고 생각한다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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