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은 영원하다’…레거시 미디어와 OTT의 상생[스페셜리스트뷰]
웨이브, ‘뉴클래식 프로젝트’로 과거 히트 드라마 다시 선보여
추억의 명작 지속적으로 소비될 수 있게 하는 노력 필요
[한정은 웨이브 마케팅그룹장]시대가 변해도 클래식은 사랑 받는다. 명작은 오랜 시간 두고두고 회자되면서 그 가치를 더하기도 한다. 음악이 그렇고, 영화도 그렇게 소비돼 왔다. 클래식 작품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시대적 상황에 맞게 조금씩 변화하기도 한다. 바로 이 포인트에서 궁금증이 생긴다. 책은 개정판이 나오고, 영화는 화질과 음악을 개선하거나 감독판으로 리마스터링되면서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데, 왜 드라마는 유독 신작 위주로 소비될까?
과거의 드라마들은 주로 방송사에서 제작돼 채널을 통해서만 방영됐기 때문에 방송 기간이 지나면 다시 시청하기가 어려웠다. 그 후에는 방송사 홈페이지에서 유·무료 VOD를 제공했지만, TV보다는 상대적으로 접근성이 낮아 채널적 허들이 일부 존재했다. 이로 인해 과거의 많은 명작 드라마가 대중의 기억 속에서 흐릿해지기도 했다.
1994년부터 2004년까지 NBC에서 방영된 미국의 전설적인 시트콤 ‘프렌즈’는 우리나라에서도 케이블TV를 통해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학창시절 영어공부를 하겠다고 마음먹어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한번쯤 프렌즈로 영어공부에 도전해봤을 것이다. 이처럼 친숙한 프렌즈를 2022년, 제작사인 워너브라더스가 HBO MAX의 출범과 함께 서비스하겠다고 결정했다.
필자는 OTT로 이직하던 시기에 이 소식을 접하게 됐는데, 반갑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HBO MAX의 입장에서는 HBO를 대표하는 콘텐츠로 팬들의 이목을 끄는 이슈메이킹을 하면서, 여기에 추가로 프렌즈 원년멤버들이 17년만에 재회하는 모습을 담은 스페셜 쇼 ‘프렌즈: 더 리유니언’을 제작해 검증된 타이틀을 새롭게 보여줬다. 이는 HBO MAX를 전 세계에 효과적으로 알리고 구독하게끔 만든 주목할 만한 아이템이었다고 생각한다.
프렌즈는 종영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전세계는 물론 한국에서도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한국에도 프렌즈처럼 꾸준히 회자되는 과거의 드라마들이 있다. 1990~2000년대의 문화를 그리워하는 기성세대는 물론, 그 시절의 문화를 새로운 트렌드로 받아들이는 젊은 세대에게 과거 드라마들이 ‘다시 보고 싶은 드라마’로 커뮤니티에서 확산되고 있다. 특히 재미와 공감을 쫓는 MZ세대에게 ‘짤’과 ‘밈’(Meme)으로 새롭게 소비되는 것을 보며 명작 드라마의 기한이 끝나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K-콘텐츠인 ‘오징어 게임’, ‘더 글로리’ 등이 연일 글로벌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지금, 이 드라마들이 나오기까지 초석이 됐던 지상파 드라마, KBS 50년·MBC 60년·SBS 30년의 역사가 웨이브 내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 레전드 드라마들을 다시 보게 하자. 이것이 ‘뉴클래식 프로젝트’의 시작이었다.
그렇다면 왜 ‘내이름은 김삼순’, ‘미안하다 사랑한다’일까?
‘내이름은 김삼순’과 ‘미안하다 사랑한다’, 이 두 작품을 선정한 데는 꽤 사연이 깊다. 현재는 디지털 파일로 모든 작품을 입고하고, 최종본은 물론 음악과 대사가 분리돼 있는 클린본을 파일로 보관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20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디지털 라이브러리 시스템이 자리잡지 않은 시대였다.
이로 인해 과거 드라마의 원본, 특히 클린본 영상을 찾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지방의 레코드샵, 서점 등을 통해 간신히 수출용 DVD를 확보했고, 이 영상들을 활용해 업스케일링과 재편집을 할 수 있는지 검토했다.
이후 작품 선정으로 가장 먼저 고려한 부분은 방송 당시 신드롬을 일으킬만한 팬덤의 유무였다. 그 다음으로는 배우들과 연출자들이 현재까지 왕성하게 활동 중인지, 그리고 내용적으로 다시 보고 싶을 만한 포인트가 있는지 차례로 검토했다. 이러한 기준으로 작품을 리스트업 하고, 다양한 커뮤니티에서 매년 회자되고 있는 ‘다시 보고 싶은 드라마’ 검색량을 참고해 두 타이틀을 선정했다.
내 이름은 김삼순과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당시 ‘삼순이 신드롬’과 ‘미사 폐인’이라는 수식어가 생겨날 정도로 시대를 대표하는 명작이라고 판단했다. 시대적 흐름의 변화도 유의미하게 다가왔다. 2005년의 내 이름은 김삼순 삼순이는 서른살 노처녀에 촌스러운 이름과 외모 콤플렉스를 갖고 있어 일과 사랑도 마음처럼 풀리지 않아 전국민의 짠한 응원을 받았던 캐릭터였다.
하지만 2024년의 삼순이는 다르다. 노처녀라는 타이틀과 어울리지 않는 서른살 전문 파티시에로서 일과 사랑에 당당한 이 시대의 진정한 삼순이로 재조명된다. 구작임에도 신작으로 재해석할 수 있는 신선한 포인트를 시대적 흐름에서 발견한 것이다. 더욱이 이 드라마를 명작으로 이끈 원작자인 감독, 스태프들이 감사하게도 프로젝트 제안을 수락하면서, 오리지널리티를 보존하며 명작을 새롭게 재탄생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신감을 가졌다.
여기에 최근 ‘선재업고 튀어’, ‘킹더랜드’, ‘눈물의 여왕’ 등 장르물에 피로감을 느낀 시청자들이 오히려 가볍게 즐길 수 있는 로코물로 회귀하는 시청 트렌드를 보며 내 이름은 김삼순 또한 원작이 가지고 있는 로코물의 근본을 살린다면 이 시기에 함께 효과적으로 소구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구작인데 신작 같은, 근본 있는 신작
과거 미니시리즈는 보통 60~70분의 분량으로 16부작 혹은 20부작으로 방영됐다. 가끔 소위 ‘시청률 대박’ 드라마에서는 광고 판매를 위해 실제 방송 분량을 70분 이상으로 가져가기도 했다. 하지만 ‘콘텐츠 홍수’ 시대가 도래하면서 콘텐츠 소비 방식도 변화됐다. MZ세대는 한 작품을 빨리 보기 위해 1.2배속, 1.5배속, 2배속으로 작품을 시청한다.
이것도 모자라 축약 리뷰로 콘텐츠를 소비하거나 일명 ‘좌표’를 찍어 원하는 부분만 골라서 본다. 유튜브 숏츠, 인스타 릴스 등 짧은 영상의 이용량도 매해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소비 행태에 아무리 훌륭한 신작이라 하더라도 60분물 16부작을 다 보려면 물리적으로 큰 부담이 될 수 있다. ‘빈지 워칭’(콘텐츠를 장시간 몰아서 시청하는 것)을 하려 해도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이런 현실을 반영해, 우리는 주인공들의 서사 혹은 핵심 서사 위주로 분량을 줄이고 회차를 압축했다. 원작의 깊이감이나 의도는 살리면서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을 고민했고, 이를 위해 원작 연출자들을 섭외해 심도 있는 이야기를 나눴다. 원작에 대한 애정이 깊은 원작자들이라 긴 설명 없이도 모든 것을 이해했고, 당시 아쉬웠던 포인트들까지 살려서 재제작 하고 싶다는 아이디어가 쏟아졌다.
작품을 애정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한껏 느껴졌던 부분이다. 세세한 디테일 하나까지도 모두 기억하고 새롭게 재창조하려는 원작자들의 열정에 마케터로서 어떤 것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기획회의를 통해 2024년도의 ‘시대적 감수성’을 고려했고, 데이트 트렌드 등 스토리적 측면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또한 웨이브가 추구하는 OTT 시리즈화에 대한 본질적 내용인 업스케일링 화질, OST 리메이크, 자막 편의 및 제작물 리패키징 등 오리지널리티를 유지하면서도 신작화하는 부분에 대한 논의 과정을 충분히 거쳤다. 이를 통해 내이름은 김삼순은 8부작으로, 8시간만에 정주행이 가능해졌고, 미안하다 사랑한다 역시 6부작으로 주인공 서사들을 중심으로 정주행 할 수 있게 됐다.
내 이름은 김삼순은 향수가 있는 세대에게는 다시 만나는 삼순이로, 삼순이를 경험하지 못했던 세대에게는 구작이지만 ‘볼만한 신작’, 즉 레전더리 신작처럼 포지셔닝해 시청을 유도하고자 했다. 여기에 더불어 2024년 내 이름은 김삼순의 ‘팬과의 시간’을 기획해 배우들과 팬들과의 만남을 추진 중이다. 올 타임 레전드 로코 내 이름은 김삼순과 함께 전국의 삼순이들이 19년만에 모이는 것이다. 이미 예능 프로그램 ‘지구오락실’을 통해 MZ들에게 ‘짤’로 익숙한 콘텐츠지만 이 작품이 2024년 버전으로 공개되면 MZ세대의 시청자들에게도 김삼순의 건강한 힐링 에너지를 새롭게 전달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근본 있는 신작 뉴클래식 프로젝트, 레거시와 OTT의 상생 모델
글로벌 OTT 출현과 디지털 플랫폼 광고의 증가로 방송사 광고 매출이 감소하고, 제작비는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국내 OTT가 선뜻 글로벌 OTT 규모의 오리지널 콘텐츠를 제작하기에는 비용적 부담과 효율성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유독 신작 위주로 소비되는 드라마는 신규 가입자를 유치하는 데 큰 역할을 하지만, 꾸준한 신작 제공이 어렵다면 가입자는 빠르게 이탈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글로벌 OTT는 방송사 콘텐츠들을 수급해 유통하고 있다. 덕분에 K-콘텐츠가 전 세계적으로 사랑을 받고 있지만 이 또한 신작 위주의 소비가 큰 부분을 차지한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K-콘텐츠가 전 세계의 사랑을 받는 동시에 신작과 함께 과거의 K-콘텐츠도 다시 재조명되길 기대했다.
원작 IP를 보유한 지상파가 이 부분을 OTT에 재판매하거나 다시 소비되도록 하고, OTT로 새롭게 제작된 신작이 다시 TV로 편성된다면 서로 양방향의 시너지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시청률 30~50%를 넘나들던 빅히트작들이 시대를 초월해 다시 사랑 받고, 또 한 번의 신드롬이 일어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요즘 중고등학생들에게 2000년대 복고 열풍이 불고 있다고 한다. 태어나기도 전에 유행했던 감성에 신선함을 느끼며 특이한 개성을 ‘힙하다’고 표현한다. 뉴트로 패션과 관련된 인스타그램 해시태그 게시물 수는 벌써 2만7000개를 넘어섰다. 드라마도 이런 시도들로 인해 지속적으로 소비된다면 명작이 단순히 옛 것으로만 남지 않고 세대별 또 다른 의미로 새롭게 다가갈 것이다. 꾸준히 오랫동안 사랑받고 지속적으로 소비되는 것. 이것이 클래식의 진정한 의미라고 본다.
따라서 시대가 흐르면서 이러한 명작들이 지속적으로 소비될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산업내에서 필요하다고 본다. K-콘텐츠의 신작과 더불어 구작도 기술 개선을 더해 시청자들이 다시 볼 수 있도록 시청 편의에 일부 투자와 지원을 하고, 신작과 과거 라이브러리가 함께 소비가 된다면 K-콘텐츠의 미래는 더 밝지 않을까. 이를 위해서는 라이브러리의 디지털 아카이빙의 중요성, 자료 확보, IP 권리자들과의 계약관계 등 방송사와 OTT와의 상생 모델에 대한 논의가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할 것이다.
여기에 방송사와 OTT의 경쟁이 아닌 상생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정부부처의 지원 사업이 병행된다면 다양한 관점에서의 협업 모델이 탄생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웨이브의 뉴클래식 프로젝트가 시간이 흘러도 새로운 방식으로 K-콘텐츠를 소비할 수 있게 하는 의미 있는 첫 시도가 되길 기대한다.
한정은 마케팅그룹장은 CJ ENM에서 통합마케팅팀, JTBC에서 마케팅팀장과 편성담당을 거쳐, 2022년 웨이브의 최고마케팅책임자(CMO)로 합류했다. 웨이브의 중장기적인 브랜드 전략 수립과 오리지널 콘텐츠, 드라마, 예능 등 콘텐츠 마케팅 전략 개발, 실행을 총괄했다. 이 외에도 CRM(고객관계관리), 홍보를 포함한 전체 마케팅 조직을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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