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허물지 않고 전략을 세우다[김현아의 시티라이프]
- [기술에서 전략으로]②
적응형 재사용, 고비용·저효율이 아니라 다른 형태의 수익과 편익을 창출하는 과정

[김현아 가천대 사회정책대학원 초빙교수·정책평가연구원 연구위원·전 국회의원] 런던 템스강변의 옛 화력발전소 굴뚝은 이제 테이트 모던 미술관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산업유산이 문화시설로 변모하며 연간 수백만 명이 찾는 명소가 된 이런 사례는 이제 세계 곳곳에서 발견된다.
공장이 예술 창고로, 관공서가 스타트업 사무실로, 쇼핑몰이 주거·문화 복합단지로 변신한다. 한국도 이 흐름에 올라탔지만 곳곳에서 난관에 부딪히고 있다. 서울로7017은 운영비와 저조한 이용률, 주변 정비계획과의 충돌로 존치 여부가 논의되고 있다. 영등포 대선제분 부지는 당초 공장 건물을 보존하며 문화공간으로 재생하려 했으나, 준공업지역 규제 완화와 수익성 문제로 결국 일부만 보존하고 나머지는 고밀 복합개발로 사업의 방향을 바꾸었다. 도시재생 정책이 큰 방향에서는 옳았지만 서두르고 치밀하지 못했고, 정권 교체와 경기침체까지 겹치면서 원래의 계획이 흔들리고 수정되고 있다. 너무 서두른 게 문제였을까? 아니면 우리가 놓친 것이 있는 걸까
정책의 지속성, 제도로 예측가능성을 확보하다
늘 정치는 정책을 변덕스럽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도가 남아 있으면 정책은 유지되고 민간의 투자는 유지된다. 로스앤젤레스는 1999년 적응형 재사용 조례(ARO)를 제정해 노후 오피스를 주거로 바꿀 때 주차 기준 완화, 내진 설계 간소화, 개발 인허가 절차 단축 같은 유연한 규칙을 마련했다. 이 제도는 수차례 개정을 거듭하면서도 도심 전역으로 확대되었고, 20년 넘게 유지됐다. 그 결과 1만2000호 이상의 신규 주택이 공급됐으며, 역사적 건물 보존과 생활 인프라 확충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대표적으로 브로드웨이 거리에 있던 한 금융사 빌딩은 아파트로 전환되면서 수백 세대의 도심 주거를 공급했고, 인근 상권을 살리는 효과까지 냈다.
독일 에센의 졸페라인(Zollverein)은 폐광 이후 방치될 위기에서 2001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면서 보존·재활용의 장기 로드맵이 세워졌다. 초기에는 탄광 건물을 문화공간으로 활용하며 적자를 감수해야 했지만, 시간이 지나 명성이 높아지자 기업 본사, 디자인 대학, 창업 지원 시설이 들어섰다. 지금은 연간 100만 명 이상이 방문하는 독일의 대표적 문화관광지가 됐다. 공공이 수십 년간 정책을 일관되게 밀어붙인 덕분에 민간이 뒤늦게 따라와 선순환을 형성한 사례다.
적응형 재사용은 초기 비용이 크기 때문에 재원 조달 구조가 관건이다. 뉴욕 하이라인은 고가 화물철도를 공원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시민단체가 나서 민간 기부금을 모았고, 시정부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2005년에는 특별구역 지구제를 도입해 인근 부지 소유자들이 개발권을 다른 지역으로 이전해 판매할 수 있도록 했으며, 인접지 개발에는 용적률 보너스를 부여했다. 대신 개발업자들은 그 대가로 공원 기금에 기여했다. 공공은 규제 완화로 민간 수익성을 높여주고, 민간은 가치 상승분을 공원 운영에 환류시킨 셈이다. 이 구조 덕분에 공원은 민간 투자를 끌어들이면서도 공공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개장 이후 하이라인은 연간 800만 명 이상이 찾는 관광지가 됐고, 인근 부동산 가격은 10년간 두 배 이상 상승했다.
영국은 ‘그린 딜’ 정책을 통해 친환경 리트로핏에 필요한 초기 비용을 보조금과 저리 융자로 지원한다. 런던의 공공임대주택 단지에서는 이 제도를 활용해 단열재 교체, 고효율 보일러 설치 등이 이뤄졌고, 결과적으로 에너지 비용 절감 효과가 입주민의 생활 안정으로 이어졌다. 요점은 한 가지 재원에 의존하지 않고 정부·민간·지역 커뮤니티가 분담 구조를 만들어 리스크를 낮춘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이익, 장기적 가치로 환산하다
적응형 재사용은 단기 수익만 놓고 보면 매력이 떨어진다. 하지만 해외 도시들은 장기적인 공공가치를 경제적 언어로 환산해 전략을 세운다. 하이라인은 조성 자체로는 수익을 내지 않지만, 공원 개장 후 인근 부동산 가치와 관광 수입이 크게 늘면서 시의 세수 증대 효과가 막대했다. 한 연구에서는 공공투자 1달러가 8달러의 경제효과로 돌아왔다고 분석했다.
운영조직인 ‘하이라인의 친구들’은 지속적으로 후원금을 유치하며 프로그램을 운영해 단순 공원 이상의 가치를 창출했다. 런던 배터시 발전소는 1980년대 가동을 멈추고 수십 년간 흉물처럼 방치됐지만, 2010년대 대규모 민관 협력 개발이 추진되면서 다시 살아났다. 복원 비용은 막대했으나, 민간 개발자가 인근 부지에 아파트와 상업시설을 고밀도로 지을 수 있도록 허용하고 그 수익으로 본체 복원 비용을 충당하게 했다.
현재 이곳은 글로벌 기업 본사, 문화시설, 고급 주거단지가 결합된 런던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됐다. 독일 에센의 졸페라인 역시 초기에는 적자 문화시설 중심이었지만, 장소성이 쌓이며 디자인 대학과 기업 입주가 이어졌다. 문화적 명성이 결국 경제적 자립으로 이어진 것이다. 연간 수백만 명의 관광객 유입은 지역 상권에도 활력을 불어넣었다. 런던은 리트로핏을 통해 절감되는 에너지 비용과 탄소 배출 저감 효과를 강조하며, 중앙정부에 부가가치세 인하를 요청했다. 사회적 가치와 환경적 편익을 정량화 해 단기 수익률의 한계를 보완하는 것이다. 파리 역시 ‘2050 탄소중립 계획’의 일환으로 리트로핏을 도시 전체의 전략 과제로 삼아, 건물 단위 에너지 절감 효과를 세부 지표로 관리하고 있다.
개발 너머의 가치, 전략으로 읽다
해외 사례들은 공통적으로 낡은 공간의 재활용을 단순한 개발이 아니라 도시 전략으로 격상시켰다. 단기 비용 대비 편익만 보면 재개발이 유리해 보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환경적 지속가능성, 도시 정체성, 사회적 연대 같은 무형의 가치가 훨씬 크다는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다. 이를 위해 공공은 제도의 일관성을, 민간은 창의적인 사업구조를, 지역은 장소성을 투자한다. 적응형 재사용은 고비용·저효율이 아니라 다른 형태의 수익과 편익을 창출하는 과정이다. 과연 한국의 도시정책은 적응형 재사용의 도입이나 겉모습 뿐만 아니라 위에서 살펴본 정책의 일관성과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까지 환산하며 다양한 비용분담구조를 실행하고 있을까?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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