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이슈
분절된 세계 속 한국, ‘브리지 외교’ 시험대에 오른다 [스페셜리스트뷰]
- 경주로 모이는 세계 각국 정상들
APEC, 중견국 외교의 새 모델 제시
공급망·기후·디지털까지 의제 확장
미국은 올해 들어 중국산 전자·반도체·배터리 제품에 대해 최대 100%의 관세를 부과하며 새로운 보호무역 전쟁을 촉발했다. 중국은 이에 대응해 희토류와 핵심 광물의 수출 통제를 강화하며 경제 안보의 무기로 맞서고 있다.
글로벌 무역의 48%,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62%를 차지하는 APEC의 위상은 역설적으로 강화됐다. 바로 신냉전적 분절화 속에서 협력의 잔존 무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게 이번 APEC 개최는 20년 만의 복귀이자, 중견국의 재정의라는 도전이다.
미·중 사이에서 중재자이자 규범 제안국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 그리고 이 행사가 단발성 외교 이벤트를 넘어 새로운 전략적 자산이 될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균열된 세계 속 새로운 시험대
세계는 다시 균열을 넓히고 있다. 백악관의 메시지는 강경과 회유 사이를 오가지만, 신호는 분명하다. 안보가 효율을 대체했고, 관세와 수출통제는 상시화됐다. APEC 최고경영자(CEO) 서밋에는 인공지능(AI) 생태계의 정점인 엔비디아 CEO 젠슨 황이 참석을 예고했다.
기술 네트워크의 중력은 경주로 쏠리고, 그 무대의 사회자는 한국이 될 공산이 크다. 무대 뒤편에서도 물밑은 분주하다. 한–미 통상 패키지는 정상회의 즈음 타결 가능성이 커졌다는 신호를 냈다. 한국이 브리지의 실물을 보여줄 기회다. 관건은 대타협의 문구가 아니라 집행의 설계다.
오늘날의 무역질서는 APEC이 출범하던 1989년과 전혀 다르다. 미국은 경제안보를 명분으로 관세를 다시 외교의 무기로 삼고 있다. 트럼프 2기 행정부는 중국산 제품에 대한 고율관세를 재개하면서, 동맹국의 디지털 무역 우위에 대해서도 차별적 과세를 시사하고 있다.
중국은 이에 맞서 희토류·흑연 등 전략 광물의 수출허가제를 강화하며, 공급망을 통한 반격에 나섰다. 유럽은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미국은 Foreign Pollution Fee Act를 추진하며 새로운 무역장벽을 만들고 있다. 즉, 효율성(efficiency)보다 안보(security)가 무역질서를 지배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중국이 희토류·전략광물의 수출허가제를 전격 강화하자 미국 재무장관은 중국이 다른 나라를 함께 끌어내리려 한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 재료들은 반도체·전기차·군사용 산업의 필수 인풋이다. 공급망 통제는 기술우위 경쟁과 직결된다. 이런 맥락에서는 APEC 정상회의가 기술·자원 규범을 설정하는 무대가 될 가능성이 커진다.
즉, 단지 관세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조건에서 어떻게 무역·투자가 이뤄져야 하는가라는 새로운 규칙을 논의하는 장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에 따라 글로벌 기업들은 중국+1 또는 중국+N 전략을 본격화하고 있다. 생산거점은 베트남, 인도, 인도네시아 등으로 분산되고 있으며, 한국은 이 변화의 허브 후보지로 부상하고 있다. 반도체, 배터리, 정밀기계 등 한국의 산업기반은 미·중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필수적인 교차점에 위치한다.
결국, 경주의 APEC은 지정학적 분절 속에서 다자협력의 현실적 해법을 시험받는 회의가 될 것이다.
2025년 경주 APEC은 푸트라자야 비전 2040(Putrajaya Vision 2040)의 3대 축인 무역·투자 자유화, 혁신·디지털 전환, 포용·지속가능성을 이어받는다.
2024년 페루 회의가 내세운 구호 ‘임파워·인클루드·그로우(Empower. Include. Grow)’ 는 한국의 주제인 ‘커넥트·이노베이트·프로스퍼(Connect. Innovate. Prosper)’ 로 계승된다. 그러나 미·중 패권 경쟁이라는 시대적 긴장은 기존 의제의 우선순위를 재구성하게 만들고 있다.
오늘날 가장 필요한 것은 시장 개방 보다 정책의 예측가능성이다. 관세·수출통제가 뉴노멀이 된 질서에서 개방은 낮은 세율이 아니라 낮은 불확실성을 뜻한다. APEC의 자발적 협력 구조는 강제성이 없지만, 바로 그 유연성이 지정학적 대립을 조정할 수 있는 장점이 된다.
한국은 이번 회의에서 공급망 투명성 표준(APEC Supply Chain Transparency Standard)을 제안할 예정이다. 반도체·배터리·희토류 3대 품목을 대상으로 정책 변화, 원자재 리스크, ESG 요소 등을 분기별로 공개하는 리스크 브리핑 체계를 구축하자는 것이다.
분기별 위험 대시보드(정책변수·원자재·물류·ESG)를 자율 공시하도록 권고하게 된다. 법적 구속력은 없더라도, 다자 차원의 공통 언어를 만들면 시장은 위험을 가격에 반영할 수 있다.
희토류를 매개로 한 디커플링 경고가 잇따르는 지금, 투명성 표준은 불확실성 프리미엄을 덜어낼 가장 값싼 정책수단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법적 구속력이 아닌 공감대 기반의 신뢰 회복 메커니즘으로, APEC 본연의 합의 문화와 부합한다.
또한, 한국은 고율관세나 수출통제 조치에 대해 사전 통지와 유예기간을 권고하는 예고 규범을 제안해, 돌발적 무역충격을 줄이는 실용적 방안을 준비 중이다. 고율관세·수출허가제 신설 시 사전 통지–영향평가–유예기간을 자발적 규범으로 묶을 수 있다. 워싱턴과 베이징의 급격한 전환이 반복되는 환경에서 정책의 시간표 자체가 공공재가 될 수 있다.
APEC의 미래 경쟁력은 데이터 이동의 규범에 달려 있다. 디지털 통상은 상품보다 빠르게 성장하고 있지만, 개인정보 보호와 사이버 안보 논쟁은 이를 제약하고 있다. 한국은 일본·싱가포르와 함께 트러스트 데이터 모빌리티(Trusted Data Mobility) 2.0을 추진 중이다.
이는 클라우드·AI·제조데이터 교류에 필요한 보안·거버넌스 동등성 평가 틀을 제시하는 자율규범으로 제조데이터의 동등성 평가와 상호 인증을 담은 최소 공통분모 표준을 APEC 권고안으로 끌어올린다. 이는 WTO의 빈 공간을 메우는 기능적 다자주의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APEC AI 제조 샌드박스(APEC AI Manufacturing Sandbox)를 통해 회원국 중소제조기업이 공정데이터를 익명화하여 공유하고, 에너지 효율·불량률을 동시에 개선하는 시범사업을 제안할 계획이다. 이처럼 기술협력 중심의 실행형 다자주의는 거대국 정치가 아닌 실용적 혁신외교 모델로서 APEC의 진화를 보여준다. 미국 CNN은 이를 두고 한국 주도의 실용적 기능주의 다자주의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경주 APEC은 기후위기 대응과 에너지 안보를 동시에 다룬다. 한국은 에너지 집약형 산업 구조를 감안해 APEC 청정전환 파이낸스 플랫폼을 제안할 계획이다. 한국이 제안하는 청정전환 파이낸스 플랫폼의 핵심은 구호가 아니라 측정 가능한 자본동원이다.
즉, 탄소감축·고용창출·지역파급이라는 3대 KPI를 공통지표로 표준화해 민간자본이 들어올 이유와 방법을 동시에 제시하는 것이다. APEC이 2025년 의제에서 에너지 전환과 탄소 없는 에너지 확장을 우선순위로 못 박은 만큼, 플랫폼화는 시의적절하다.
또한 액화천연가스(LNG)·암모니아·구리·니켈 등 전환 핵심자원에 대한 공동비축 및 조기경보 체계를 통해 공급망 충격을 완화하는 구상도 검토된다. 이는 중국의 희토류 통제나 중동 불안 등 외생 변수에 대한 다자형 안전판이 될 수 있다.
G7은 이미 공급선 다변화·공조 유지를 공식화했다. 동시에 에너지 측면에선 중동 리스크와 EU의 러시아산 LNG 축소 계획은 가격 변동성 확대를 예고한다. 이 모든 흐름은 APEC이 LNG·암모니아·구리·니켈·희토류에 대해 선제적 완충장치를 갖출 필요성을 뒷받침한다.
희토류를 둘러싼 미·중의 공방은 더 격렬해지고 있고, 에너지·메탈 시장은 지정학·정책 리스크의 합성물이 됐다. APEC은 법적 구속력은 약하지만, 바로 그 유연성 덕분에 정치적 경쟁을 비껴가는 기능적 합의를 쌓을 수 있다.
경주의 의제가 공동비축·조기경보로 구체화될 때, APEC은 대화의 장을 넘어 리스크를 흡수하는 인프라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마지막으로, 고령화·돌봄·노동참여율 하락 등 사회문제 역시 경제 의제로 다뤄진다.
한국은 보건과 경제를 연계한 ‘헬스×이코노미 대화(Health × Economy Dialogue)’ 를 통해 고령사회 일자리와 돌봄 산업의 새로운 표준을 제시하려 한다.
이는 보건을 단순한 비용 항목이 아니라 성장 인프라로 재정의하고, 인구 구조 변화로 인한 충격을 흡수하기 위해 노동·기술·재정이 교차하는 개혁을 다자 협력의 틀 안에 녹여내겠다는 구상이다.
이미 APEC 보건장관 회의는 보건–고용–재정–디지털의 교차 전략과 인구변화 대응 로드맵을 공식 아젠다로 끌어올렸다. 한국이 올해 의장국으로 주도하는 대화 트랙도 그 연장선이다.
APEC 차원의 세컨드 액트(Second-Act) 고용 표준—정년 후 단계적 소득 연착륙, 직무재설계, 건강관리 연계 근로—를 권고안으로 표준화. 한국의 고령친화 일자리 창출 속도가 미·일 대비 더딘다는 연구를 감안해, 직무 전환과 숙련 보강을 데이터로 설계하겠다는 것이다.
고령층의 디지털 배제는 생산성뿐 아니라 건강결과(의료순응, 만성질환 관리)에 직격탄이다. APEC은 고령층 디지털 포용을 의장국 한국의 핵심 연간 과업으로 전면화했다. 연금·노동·보건은 분리 예산이 아니라 하나의 수지표다.
한국은 올해 국민연금 개혁으로 기금 소진 시점을 조금이나마 늦췄다. 다음 단계는 고령자 고용 연장, 건강수명 연장, 장기요양비용의 선제억제가 동시에 작동하도록 성과연동 재정 틀을 설계하는 일이다.
APEC의 가장 큰 약점은 '합의는 많고, 실행은 적다'는 점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한국은 각 의제별로 민관합동 실행 TF를 가동해, 정상선언이 실제 사업으로 이어지도록 설계하고 있다. 정상회의에서 선언문이 나오더라도, 후속 실행이 없으면 이벤트로만 끝나는 회의가 된다.
실제로 세계무역기구(WTO)는 2026년 상품무역성장률을 1.8%에서 0.5%로 하향 조정했으며, 이런 추세는 다자주의가 실질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을 경우 나타나는 경고신호다. 그러나 미·중 간 의제 충돌이 발생하면 회의가 정치화될 가능성, 숙박·보안 등 개최 인프라의 국내 준비 부족, 중소기업이 글로벌 규범 변화에 대응할 역량의 격차 등의 위험요인도 존재한다.
이 때문에 정부 주도의 일회성 행사를 넘어, 산업계·지방정부·시민사회가 참여하는 거버넌스 구조가 절실하다. 행사 이후 무엇을 남길 것인가가 이번 APEC의 진정한 성패를 가를 것이다.
APEC 2025는 한국이 글로벌 중견국(Global Middle Power)으로서 외교적 정체성을 재구성할 기회다. 한쪽 진영에 편승하기보다, 투명성과 예측가능성이라는 보편 가치를 중심으로 협력을 제안해야 한다. 한국이 제시할 세 가지 키워드는 다음과 같다. 개방(open)을 통해 관세와 통제를 넘어서 예측 가능한 시장으로, 연결(connect)로 데이터·기술·사람을 잇는 플랫폼 외교의 실현, 합의를 실질적 결과로 전환하는 민관 협력의 실행(deliver)이 필요하다.
이 세 축이 실현된다면, APEC 경주는 단순한 정상회의가 아니라 신뢰 회복의 회의, 그리고 한국이 향후 10년간 글로벌 공급망과 디지털 통상 질서를 주도할 전략적 분기점이 될 것이다.
세계는 지금 '협력의 피로'에 빠져 있다. 하지만 위기 속에서도 다자주의는 여전히 가장 현실적인 해법이다. 한국이 주도하는 APEC 2025는, 단순한 구호가 아닌 측정 가능한 협력의 언어를 복원하는 실험이 되어야 한다.
한국은 개방·연결·실행으로 APEC의 비전을 측정 가능한 성과로 바꿀 것이다. 이 메시지가 경주에서 울려 퍼질 때, 한국은 단순한 개최국을 넘어 신뢰 가능한 중견국, 규범 제안국, 그리고 동아시아 협력의 중심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성균관대를 졸업하고 경영학 박사를 취득하고, 오하이오주립대에서 인적자원개발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대자동차 기획실과 인사부문에서 9년 간 근무한 경력이 있고, 대한경영학회 회장, 한국제품안전학회 회장, 산학협력단장·연구처장협의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제40대 한국생산성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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