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오
약가 낮춰도 환자 부담은 증가 우려…제약·바이오, 돌파구는
- [약가 인하 후폭풍] ②
약가 인하시 의약품 공급 안정성·시장 질서 전반 영향
R&D 투자 지속 위한 제도 개선·재원 확보 병행해야
포트폴리오 다각화·해외 진출 등 차별화 전략 필요
[이코노미스트 이승훈 기자] 정부가 제네릭(복제약) 가격을 원본 의약품의 40%대로 낮추는 약가 제도 개편을 추진하면서, 정책 효과를 둘러싼 논쟁이 확산하고 있다. 건강보험 재정 절감이라는 정책 목표와 달리, 약가 인하가 반드시 환자 부담 완화로 이어지지 않았던 과거 경험이 재조명되면서다. 제약업계는 이번 개편이 가격 조정 차원을 넘어 산업 구조와 환자 비용 부담까지 왜곡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현재 국내 약가 체계는 ▲사용량 약가 연동제 ▲실거래가 약가 인하 ▲계단식 약가 인하 등 여러 제도가 병렬적으로 작동하는 구조다. 이 과정에서 하나의 품목이 여러 제도의 영향을 중복으로 받으면서, 제약사로서는 가격 하락 폭과 시점을 예측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업계는 이러한 불확실성이 연구개발(R&D)과 설비투자 축소로 직결된다고 보고 있다.
의료비 부담·유통 현장 혼란↑
제약업계가 이번 개편과 가장 유사한 정책으로 꼽는 사례는 2012년 일괄 약가 인하다. 당시 정부는 대대적인 약가 인하를 통해 약품비를 줄이겠다는 목표를 내세웠다. 실제 시행 직후 약품비 지출은 일시적으로 감소했지만, 장기적으로는 다시 증가세로 돌아섰다.
한국제약바이오협회(KPBMA) 정책보고서에 따르면 2012년 일괄 약가 인하 이후 소비자의 약제비 부담은 13.8% 증가한 것으로 분석됐다. 약가 인하로 급여 의약품의 수익성이 악화하자, 제약기업들이 비급여 의약품의 생산 비중을 늘리고 상대적으로 마진이 높은 품목으로 포트폴리오를 조정한 것이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다. 자체 생산 제품 비중은 줄고, 수입 의약품 코프로모션이 확대되면서 비용 구조가 달라졌다는 분석이다.
결과적으로 급여 영역의 가격은 낮아졌지만, 환자가 실제로 체감하는 의료비 부담은 커지는 역설이 나타났다는 평가다. 업계에서는 이번 개편 역시 비슷한 경로를 밟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이번 약가 제도 개편 과정에서 ‘시장연동형 실거래가제’가 다시 강화될 경우, 유통 현장의 혼선이 커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요양기관의 구매가 인하 압력이 심화하면 초저가 낙찰과 과도한 할인 경쟁이 반복되고, 판촉 영업자(CSO) 의존도가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CSO 대행사는 늘어나고 있지만, 우회적 리베이트를 걸러낼 실질적인 검증 장치는 충분하지 않다”며 “가격 압박이 심해질수록 투명한 경쟁보다는 편법이 늘어날 가능성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단순히 기업 문제를 넘어 의약품 공급 안정성과 시장 질서 전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대목이다.
단순 인하 아닌 '관리·조정' 필요해
이번 약가 제도 개편안 발표를 앞두고 제약업계는 여러 차례 현장의 어려움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정책 방향을 조율하거나 합의를 도출하는 구조적인 논의는 이뤄지지 않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정책 결정 과정에서 산업계 의견을 제도적으로 반영할 공식 협의체나 거버넌스가 부재하다는 점이 한계로 꼽힌다.
해외 사례로는 영국의 의약품 가격 규제계획(PPRS)이 이상적 대안으로 거론된다. 영국은 개별 품목 가격을 직접 통제하기보다, 제약사가 국민보건서비스(NHS)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총이익을 관리하는 방식으로 약값을 간접 규제한다. 또 5년마다 정부와 영국 제약산업협회(ABPI)가 협상을 통해 제도를 개정하면서, 산업계와 정부 간 예측 가능성을 높인다는 평가를 받는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협상형 구조가 재정 관리와 산업 육성을 동시에 고려한 모델이라는 점에서 참고할 만하다고 평가한다. 단순 인하가 아닌 ‘관리’와 ‘조정’의 관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국내 역시 가격 인하 일변도의 정책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지적한다. 안정훈 이화여대 융합보건학과 교수는 KPBMA 정책보고서를 통해 약가 인하 정책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약가 사후관리 제도의 정비와 함께 R&D 투자를 지속할 수 있는 제도 개선 및 재원 확보 방안이 병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안 교수는 우선 사용량-약가 연동제와 실거래가 약가인하 제도의 시행 시기를 통합해 제도의 중복 적용을 줄이고, 기업의 약가 예측 가능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또 의약품 실거래 가격과 약가 간 차이가 일정 범위 내에 있을 때 약가 인하를 면제하거나 유예하는 ‘R-zone’ 도입을 통해 저가 공급 유인을 유지하면서도 건강보험 재정 관리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매출액 규모별 R&D 투자 기준을 설정해 혁신형 제약기업 지정 여부와 관계없이 약가 인하율을 차등 감면함으로써 연구개발 유인을 강화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R&D·글로벌 전략이 가른다
약가 인하라는 구조적 압박 속에서 제약·바이오 기업들의 생존 전략으로는 제품 포트폴리오 다각화와 해외 시장 진출이 제시된다. 한국신용평가는 ▲수출 의약품 ▲개량신약 ▲바이오시밀러 등 약가 인하 영향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제품군을 얼마나 확보했는지가 기업 간 실적 격차를 좌우할 것으로 내다봤다.
다만 이러한 전략은 중소형 제약사에게는 또 다른 진입장벽이 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글로벌 임상·허가·마케팅 역량과 초기 투자 여력을 갖춘 기업만이 실질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업계에서는 이번 약가 개편이 단순한 비용 절감 정책을 넘어, 국내 제약산업의 구조조정을 가속하는 계기로 작용할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약가 인하 환경에서는 단기 실적 방어보다 중장기 파이프라인과 글로벌 진출 전략이 기업 가치의 핵심 지표가 된다”며 “R&D 투자 여력이 부족한 기업들은 포트폴리오 전환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어, 기업 간 격차는 더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고 덧붙였다.
김수민 한국신용평가 수석애널리스트는 “이번 제도 개편은 복제약 의존도가 높은 중소형 제약사의 수익성에 직접적인 하방 압력으로 작용할 것”이라며 “복제약 개발에 따른 기대 이익이 감소하면서 단순 복제약 생산보다는 R&D를 통한 차별화가 사실상 강요되는 환경이 조성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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