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경제는 전례 없는 도전에 직면해 있다. 과거의 경제 위기들이 금융 시스템의 붕괴나 일시적인 수요 쇼크에서 기인했다면, 지금 우리가 마주한 위기는 훨씬 더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성격을 띤다. 바로 ‘인구통계학적 한계(demographic limitations)’다. 선진국을 중심으로 빠르게 진행되는 고령화와 노동 인구의 감소는 더 이상 단순한 사회 현상이 아니다. 이는 지속 가능한 성장 자체를 위협하는 가장 강력한 구조적 역풍으로 작용하고 있다. 더 적은 수의 일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부양 인구를 떠안아야 하는 상황에서, 과거와 같은 수준의 경제적 번영과 복지 시스템을 유지하는 것은 점점 불가능에 가까워지고 있다.인구통계학적 위기와 생산성의 수수께끼이러한 절박한 현실 앞에서 경제학 교과서가 제시하는 해법은 비교적 명확하다. 노동 투입량이 줄어든다면, 노동생산성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21세기의 우리는 그 생산성 향상의 열쇠가 ‘디지털 기술’에 있다고 믿어왔다. ▲인공지능(AI) ▲로보틱스 ▲빅데이터 ▲블록체인으로 대표되는 4차 산업혁명 기술들이 인구 감소의 공백을 메우고, 새로운 성장의 동력이 될 것이라는 기대였다.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당혹스러운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바로 '글로벌 생산성 역설'(Global Productivity Paradox)이다. 지난 십수 년간 전 세계적으로 디지털 기술에 대한 투자는 천문학적인 규모로 이뤄졌다. 기업들은 앞다퉈 디지털 전환(DX)을 외쳤고, 각국 정부는 스마트 국가 건설을 약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 성장의 핵심 척도인 총요소생산성(TFP)은 정체돼 있거나, 심지어 뒷걸음질 치고 있다. 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하는데, 왜 경제 통계는 그만큼의 성장을 보여주지 못하는가. 이 질문은 더 이상 학술적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다. 인구 절벽 앞에 선 각국 정부와 기업에게 이는 생존이 걸린 시급한 과제가 됐다.이번 기고는 이 역설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사례인 ‘핀란드’를 분석함으로써 그 해답을 찾고자 한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세 가지 주장을 제시한다. 첫째, 디지털 투자는 결코 실패하지 않았다. 둘째, 우리가 목격하는 생산성 역설은 실체라기보다 착시에 가깝다. 셋째, 빠르게 진행되는 고령화와 노동 인구 감소라는 구조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성장 엔진이자, 이 역설에 대한 명확한 해법으로서 ‘디지털 성장 원칙'(Digital Growth Principle, DGP)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디지털 성장 원칙은 ▲AI ▲로보틱스 ▲3D 프린팅 ▲블록체인 경제를 비롯한 차세대 신기술에 대한 집중 투자가 인구 감소 시대의 핵심 성장 메커니즘이라는 전제 위에 서 있다.이 논의가 갖는 핵심적 의미는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된다. 하나는 선진국 정책 입안자들에게 미시경제적 성과가 거시경제 전반으로 확산되는 과정을 가속화할 수 있는 검증된 정책 모델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개발도상국과 저개발국 경제를 위한 새로운 성장 프레임워크로서 디지털 성장 원칙의 가능성을 구체화했다는 데 있다. 전략적인 디지털 투자가 정보기술 인프라 격차에서 비롯된 글로벌 양극화를 완화하고, 경제적 수렴을 촉진하는 핵심 수단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는 점에서다.핀란드의 역설: 완벽한 디지털 국가의 멈춰 버린 성장판왜 하필 핀란드인가. 핀란드는 이 분석을 위한 가장 완벽한 테스트 베드다. 핀란드는 유럽에서 가장 빠르게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는 국가 중 하나인 동시에, 전 세계에서 가장 디지털 친화적인 나라로 꼽히기 때문이다.핀란드는 정부 주도의 강력한 전략 아래 '설계 기반 디지털'(Digital by Design) 국가로 탈바꿈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가 발표하는 디지털경제사회지수(DESI)에서 핀란드는 2018년부터 2023년까지 6년 동안 무려 네 차례나 1위를 차지하며 압도적인 디지털 역량을 과시했다.
핀란드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구개발(R&D) 지출 비중은 지속적으로 3%를 상회하고 있으며, 이는 전 세계적으로도 최상위권에 해당한다. 또한 핀란드 정부는 'AI 기본과정'(Elements of AI)이라는 혁신적인 무료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전 국민의 1% 이상에게 인공지능의 원리를 교육하는 등 인적 자본의 디지털화에도 막대한 투자를 이어왔다.상식적으로라면 이러한 세계 최고 수준의 디지털 인프라와 혁신 역량은 폭발적인 경제 성장으로 이어져야 마땅하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다. 핀란드의 거시경제 성적표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지난 수년간 핀란드의 연간 GDP 성장률은 미미한 수준에 머물렀고, 2023년에는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며 경기 위축을 겪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생산성 지표다. 2021년 팬데믹 이후의 일시적 기술적 반등을 제외하면, 핀란드의 연간 총요소생산성(TFP) 성장률은 0%대에 머물거나 오히려 감소하는 경향을 보여 왔다.세계 1위의 디지털 경쟁력을 갖춘 나라가 왜 경제 성장에서는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가. 이 극명한 불일치, 즉 핀란드의 생산성 역설은 우리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과연 디지털 투자는 생산적인가.’ 혹은 우리가 디지털 기술의 경제적 효과를 과대평가해 온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거시 지표의 표면을 넘어, 기업이라는 미시경제의 현장으로 깊숙이 들어가 봤다.현미경으로 들여다본 진실: 디지털성장원칙(DGP)의 입증거시 통계가 보여주는 ‘평균의 함정’을 피하고자, 2010년부터 2023년까지 핀란드 기업들의 방대한 패널 데이터를 분석했다. 목적은 인구 감소 시대에 디지털 투자가 생산성 향상을 이끄는 핵심 메커니즘이라는 디지털 성장 원칙을 실증적으로 검증하는 데 있었다. 디지털 성장 원칙은 인공지능, 로보틱스, 블록체인 등 신기술에 대한 집중 투자가 기업의 생산성 향상을 견인한다는 명제를 전제로 한다.그러나 기업 수준에서 생산성을 분석하는 작업은 통계적으로 절대 단순하지 않다. 여기에는 크게 세 가지 난관이 존재한다. 첫째는 ‘관찰되지 않는 이질성’의 문제다. 어떤 기업의 성과가 디지털 투자 때문인지, 아니면 데이터로 포착되지 않는 경영진의 역량 때문인지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둘째는 ‘동태성’의 문제다. 기업의 생산성은 어느 한 시점에 갑자기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축적된 역량과 성과의 영향을 지속적으로 받는다. 셋째는 ‘내생성’의 문제다. 디지털 투자가 생산성을 높이는 것인지, 아니면 생산성이 높은 기업이 여유 자금을 활용해 디지털 투자를 늘리는 것인지 인과관계를 명확히 식별하기 어렵다.기존의 단순한 분석 기법으로는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으며, 그 결과는 필연적으로 편향될 가능성이 크다. 이에 본 분석에서는 최신 계량경제학 기법인 '시스템 일반화 적률법'(System GMM)을 도입했다. 이 방법론은 변수들의 과거 값을 도구 변수로 활용함으로써, 경영진의 능력이나 역인과 관계와 같은 통계적 잡음을 제거하고 디지털 투자의 순수한 효과를 식별할 수 있게 해준다.분석 결과는 매우 분명했다. 통계적 잡음을 제거하자 디지털 투자의 진정한 위력이 드러났다. 핵심 발견은 다음과 같다. 기업의 디지털 자본 집약도, 즉 총자산 대비 디지털 기술 및 소프트웨어 자산의 비중이 1%포인트 증가할 때, 해당 기업의 총요소생산성(TFP)은 약 3.5%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이 결과는 통계적으로 매우 유의미할 뿐 아니라, 경제적 의미 또한 상당하다. 통상적인 물적 자본 투자나 노동 투입만으로는 달성하기 어려운 수준의 생산성 향상 효과가 디지털 투자에서 발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디지털 성장 원칙이 단지 이론적 가설에 그치지 않고, 기업 현장에서 실제로 작동하는 강력한 성장 엔진임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디지털 투자는 절대 실패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업 단위에서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내고 있었다.역설의 해부: 기술의 실패가 아닌 ‘변환의 실패’미시(기업) 수준에서는 3.5%라는 강력한 생산성 향상이 확인되는데, 왜 거시(국가) 수준의 통계는 0% 성장을 가리키고 있을까. 이 둘 사이의 간극, 즉 ‘미시–거시 간 단절'(Micro–Macro Disconnect)이 바로 핀란드 생산성 역설의 실체다. 이 단절은 기술 자체의 결함 때문이 아니라, 미시적 성과가 거시적 지표로 변환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구조적 요인들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이를 ‘변환의 실패'(Translational Failure)라고 부른다.첫 번째 원인은 '집계와 확산'(Aggregation and Diffusion)의 문제다. 디지털 혁신의 혜택은 경제 전반에 균등하게 분포되지 않는다. 앞서 확인한 3.5%의 생산성 향상 효과는 디지털 기술을 선도적으로 도입한 소수의 ‘선도 기업’에 집중돼 있을 가능성이 크다. 반면, 경제의 다수를 차지하는 ‘후발 기업’들은 여전히 아날로그 방식에 머물러 있거나, 기술 도입 과정에서 비용·인력·역량의 한계에 직면해 있다. 소수의 선도 기업이 아무리 빠르게 성장하더라도, 다수의 후발 기업이 제자리에 머문다면 국가 전체의 평균 생산성은 개선되기 어렵다. 문제는 혁신의 부재가 아니라, 혁신의 확산 속도에 있다.두 번째 원인은 ‘길고 가변적인 시차'(Long and Variable Lags)다. 디지털 기술과 같은 범용 기술은 도입 즉시 생산성으로 전환되지 않는다. 공장에 인공지능 시스템을 도입했다고 해서 다음 날 바로 생산성이 상승하는 것은 아니다. 기술 도입 이후에는 조직 구조의 재편, 인력 재교육, 업무 프로세스 전반의 재설계 등 이른바 ‘보완적 투자’가 뒤따라야 한다. 핀란드의 디지털 전환은 여전히 진행 중이며, 그 거시적 성과를 수확하기까지는 아직 상당한 숙성 기간이 필요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제이(J) 커브의 바닥을 통과하고 있는 단계에 있을지도 모른다.세 번째 원인은 ‘측정 오류'(Measurement Error)다. 이는 현재 사용되는 경제 통계의 구조적 한계와 직결돼 있다. 오늘날의 GDP와 생산성 지표는 20세기 제조업 경제를 기준으로 설계됐다. 공장에서 생산되는 물리적 재화의 수량은 비교적 정확하게 측정하지만, 디지털 경제가 창출하는 새로운 형태의 가치는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다. 예컨대 검색 서비스나 무료 메신저가 소비자에게 제공하는 막대한 효용, 디지털 서비스의 품질 향상, 거래 속도의 증가나 위험 감소와 같은 요소들은 기존 통계에 거의 반영되지 않는다. 핀란드 경제는 통계에 잡히지 않는 영역에서 이미 상당한 성장을 이루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미래의 거울: 블록체인 경제가 보여주는 단절의 현장이러한 ‘변환의 실패’는 과거의 데이터 분석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현재 부상하고 있는 차세대 디지털 기술인 블록체인 경제에서도 동일한 문제가 실시간으로 재현되고 있다. 분산원장기술(DLT), 스테이블코인,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는 앞서 언급한 집계와 확산의 문제, 시차의 문제, 그리고 측정 오류라는 세 가지 단절 요인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사례들이다.먼저 ‘확산의 실패’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세계 최대 컨테이너 운송사 머스크(Maersk)와 IBM이 주도했던 물류 블록체인 플랫폼 ‘트레이드렌즈'(TradeLens)를 들 수 있다. 이 플랫폼은 기술적으로 완성도가 매우 높았다. 서류 처리 비용을 약 20% 절감하고, 배송 시간을 최대 40% 단축하는 등 기업 단위에서는 분명한 효율성 개선 효과가 확인됐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2022년 결국 서비스 종료라는 결말을 맞았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생태계 내 다른 참여자들, 즉 후발 기업들을 충분히 끌어들이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그것이 산업 전반으로 확산하지 못하면 거시적 성과는 사실상 0에 수렴한다는 점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측정 오류’의 문제는 스테이블코인 기반 결제 시스템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비자(Visa)와 같은 글로벌 기업들이 시도하고 있는 스테이블코인(USDC) 기반의 기업 간 거래(B2B) 결제는 기존에 며칠씩 소요되던 국제 송금을 단 몇 초 만에 완료할 수 있게 한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생산성 향상은 속도의 비약적 증가, 거래 리스크의 제거, 그리고 수수료 절감이다. 그러나 송금되는 금액, 즉 거래의 명목 가치 자체는 변하지 않기 때문에 기존의 GDP 산정 방식으로는 이러한 혁신적 효율성 개선을 거의 포착할 수 없다. 기업의 수행 업무 방식은 훨씬 효율적으로 바뀌었지만, 국가 통계는 이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것이다.마지막으로 ‘시차의 문제’는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 프로젝트인 ‘mBridge’에서 확인할 수 있다. 국제결제은행(BIS)이 주관한 이 프로젝트는 국경 간 결제 비용을 최대 50%까지 절감할 수 있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줬다. 기술적·미시적 잠재력은 분명히 확인됐지만, 이 성과가 실제 국가 경제의 생산성 지표로 반영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금융 규제의 정비, 기존 은행 시스템과의 통합, 국제 공조 체계 구축 등 국가 금융 인프라 전반의 재구성이 선행돼야 하기 때문이다. 블록체인 기술 역시 지금은 변환의 시차 구간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한국과 디지털성장원칙
그렇다면 한국의 상황은 어떨까. 최근 핀란드 기업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연구는 생산성 역설이 기술의 한계가 아니라 집계와 확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착시에 불과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미시적 수준에서는 디지털 자본이 여전히 강력한 성장 엔진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디지털 자본 집약도가 1%포인트 증가할 때 기업의 총요소생산성(TFP)이 약 3.5% 상승한다는 분석 결과는 한국 경제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거시적 단면에서 보면 대한민국 역시 생산성 역설의 징후를 보인다. 한국은 GDP 대비 연구개발(R&D) 투자 비중이 세계 1~2위를 다툴 만큼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며, 반도체와 정보통신기술(ICT) 분야에서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국가다. 그런데도 총계 수준의 TFP 성장률은 둔화하고 있다. 이는 디지털 투입과 생산성 산출 사이에 존재하는 구조적 단절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핀란드가 유럽 내에서도 최고 수준의 고령화 국가라면, 대한민국은 합계출산율 0.7명대라는 전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인구 절벽에 직면해 있다. 축소되는 노동력 환경에서 현재의 생활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근로자 1인당 생산성, 즉 노동생산성의 획기적인 향상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산성의 비약적 증대는 현실적으로 디지털 전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대한민국에 디지털 성장 원칙은 단순한 경제 전략을 넘어 사회 계약을 유지하기 위한 ‘존립의 문제(Survival Issue)’로 재구성된다. 과연 이 원칙은 세계 최악 수준의 인구 절벽에 직면한 한국에서도 유효할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국에서의 효과는 핀란드를 상회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우선 투입 구조의 질적 수준 측면에서 한국은 뚜렷한 우위를 갖고 있다. 핀란드의 R&D 지출 비중이 GDP 대비 약 3% 수준이지만 한국은 4.9%를 넘어서는 세계 최고 수준의 R&D 집약도를 보유하고 있다. 여기에 초고속 인터넷 보급률과 광케이블 침투율 등 세계 최고 수준의 디지털 인프라는 디지털 자본이 생산성으로 전환되기 위한 최적의 환경을 제공한다. 네트워크 효과가 강하게 작용하는 디지털 경제의 특성상, 이처럼 고도화된 인프라를 갖춘 한국에서는 디지털 자본의 생산성과 탄력성이 3.5%라는 수치를 충분히 상회할 가능성이 있다.실제로 한국 기업을 대상으로 한 미시적 실증 연구들 역시 이러한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과거 국내 제조업과 서비스업 기업 분석 결과에 따르면, 정보기술(IT) 자본의 한계생산성은 비(非) IT 자본보다 최대 8배 높게 나타난 바 있다. 또한 무형자산 중심 산업에서 노동생산성 성장의 60% 이상이 총요소생산성(TFP) 증가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은, 소프트웨어와 데이터베이스와 같은 디지털 자산이 이미 한국 경제의 핵심 성장 동력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마지막으로 대한민국이 직면한 인구통계학적 절박성은 디지털 전환의 한계 이익을 극대화하는 강력한 촉매로 작용할 것이다. 합계출산율 0.7명대라는 전례 없는 노동력 감소 국면에서 디지털 기술은 더 이상 보조적 수단이 아니라, 노동을 근본적으로 대체하는 필수재로 자리 잡게 된다. 숙련된 인적 자본이 디지털 기술과 결합할 때 발생하는 시너지는 인구 감소의 역풍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의 생산성 도약을 가능하게 할 것으로 기대된다.인구감소를 넘어서는 길핀란드의 사례는 우리에게 분명한 교훈을 남긴다. 이른바 생산성 역설은 디지털 기술의 실패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기술의 잠재력이 거시경제 전반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성장통이며, 동시에 20세기형 통계 체계가 빚어낸 착시에 가깝다. 디지털 성장 원칙(Digital Growth Principle)에 따르면, 디지털 자본에 대한 투자는 기업 수준에서 이미 확실하고 강력한 보상을 제공하고 있다.따라서 정책 입안자와 기업 리더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디지털 투자의 효과를 의심하거나 주저할 것이 아니라, 미시적 성과가 거시적 성장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변환의 실패’를 극복하는 데 모든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는 점이다.선진국 경제에 있어 지금 가장 시급한 과제는 ‘혁신의 가속화’가 아니라 ‘혁신의 확산’이다. 정부의 지원 정책은 이미 잘하고 있는 소수의 선도 기업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오히려 기술 도입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소기업과 전통 산업군을 대상으로 한 지원에 집중돼야 한다. 아울러 디지털 기술 도입이 실제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기술 그 자체에 대한 투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해당 기술을 운용할 인력을 양성하고, 조직 구조와 업무 프로세스를 변화시키는 ‘보완적 자산’에 대한 투자가 반드시 병행돼야 한다. 핀란드의 'AI 기본과정'과 같은 전 국민 재교육 프로그램은 인적 자본을 업그레이드함으로써 기술 확산의 시차를 단축하는 대표적인 모범 사례다. 더 나아가 디지털 시대에 부합하는 새로운 경제 지표를 개발해, 우리가 창출한 가치를 제대로 측정하려는 노력 역시 병행돼야 할 것이다.개발도상국과 저개발국에게도 디지털 성장 원칙은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선진국이 걸어온 산업화의 경로를 그대로 따라가는 추격 전략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수 있다. 오히려 디지털 인프라를 도로와 전기와 같은 핵심 공공재로 인식하고 과감하게 투자함으로써, 발전 단계를 건너뛰는 ‘립프로그'(Leap-Frog) 전략을 구사하는 것이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핀란드의 경험은 디지털 자본이 글로벌 경제에서 수렴(convergence)을 달성하기 위한 가장 빠른 지름길임을 보여준다.결론적으로 인구 감소는 피할 수 없는 미래다. 그러나 그것이 곧 경제 성장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디지털이라는 강력한 성장 엔진은 이미 우리 앞에 준비돼 있다. 핀란드의 생산성 역설은 그 엔진을 어떻게 예열하고, 어떻게 국가 경제라는 거대한 시스템에 연결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이정표다. 기술을 믿고, 확산을 서두르며, 사람에게 투자하는 것. 이것이 인구 감소를 넘어 지속 가능한 성장으로 나아가는 유일하고도 확실한 길, 바로 디지털 성장 원칙이다.
필자는 현재 영국계 글로벌 사모펀드 한국 대표를 맡고 있다. 연세대학교에서 국제경제학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영국 런던정경대(LSE), 프랑스 파리 HEC, 미국 뉴욕대(NYU) 스턴 스쿨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MBA 과정을 마쳤다. 하버드 케네디 스쿨(Harvard Kennedy School)에서도 수학했다. 금융위원회 외신대변인으로 활동하며 정책 소통 경험을 쌓았고, 사우디아람코 코리아 임원을 역임하며 글로벌 에너지 및 투자 분야에서 전문성을 인정받았다. 현재 한양대학교 경영대학 및 블록체인융합학과 겸임교수로서 강단에 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