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ASEAN 금융의 변화가 한국 금융권에 던지는 의미 [동남아시아 투자 나침반]
- 지점 수 경쟁 아닌 현지 생태계 파트너 되는 게 중요
디지털과 통합으로 진화하는 아세안…한국 금융 스며들 방법 찾아야
[김상수 Hanbridge 대표] 아세안(ASEAN) 금융시장은 오랫동안 ‘성장 잠재력이 큰 미개척지’로 인식돼 왔다. 그러나 2025년에 이르러 그 성격은 확연히 달라지고 있다. 아세안은 더 이상 단순한 신흥 금융시장이 아니다. 은행 중심의 견고한 구조 위에 디지털 전환과 역내 통합이 동시에 진행되는 ‘복합 금융권역’으로 진화하고 있다.
이 변화의 한가운데에 이미 한국 은행들이 서 있다. 2024년 말 기준, 한국계 은행 해외 점포 206개 중 약 31.6%인 65개가 아세안에 포진해 있으며, 베트남과 인도네시아를 중심으로 현지 법인 전환과 리테일·기업금융 확대가 본격화됐다. 이제 핵심은 ‘얼마나 더 진출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살아남을 것인가’**이다.
아세안 금융의 두 얼굴 ‘따로 또 같이’
아세안 금융시장의 가장 큰 특징은 은행 의존도가 절대적으로 높다는 점이다. 주요 5개국의 금융자산 중 은행 자산 비중은 평균 70~80%에 달해 미국이나 한국보다 훨씬 높다. 또한, 다수 국가에서 국영 상업은행이 시장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는 공통점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은행 중심 구조’의 내막은 국가별로 판이하다.
싱가포르는 소수의 대형 로컬은행(DBS·OCBC·UOB)이 리테일을 장악하고, 외국계 은행은 기업금융·자산관리·무역금융에 특화된 이중 구조를 형성한다. 베트남은 4대 국영 상업은행이 자산의 절반 이상을 점유하는 가운데, 디지털 결제와 금융 접근성이 폭발적으로 개선되며 산업의 외연이 빠르게 확장되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100개가 넘는 은행이 난립해 있지만 대형 국영은행 위주의 집중도가 높고, 외국계 은행은 현지 은행 인수를 통해서만 실질적인 영업이 가능하다. 말레이시아는 이슬람 금융과 전통 금융이 공존하며, 디지털 은행 도입 역시 혁신보다는 안정을 우선하는 점진적 방식을 택하고 있다. 즉, 아세안은 하나의 시장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각기 다른 규제 철학과 성장 경로를 가진 여러 시장의 결합체다.
최근 아세안 은행 산업을 관통하는 변화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결제 부문을 필두로 한 디지털 금융의 확산, 둘째는 역내 금융 통합의 진전이다. 계좌 보유율이 50% 안팎에 불과한 국가가 많은 아세안에서 디지털 금융은 선택이 아닌 필연이다. 그 결과 전통 은행들은 핀테크를 경쟁자가 아닌 협력자로 인식하며 디지털 전환을 가속하고 있다. 싱가포르의 디지털 은행 라이선스, 베트남의 모바일 결제 급성장, 인도네시아 표준 QR 결제 방식인 QRIS(Quick Response Indonesian Standard)의 확산은 모두 이러한 흐름의 방증이다.
동시에 아세안은 자격을 갖춘 은행이 역내 타국 진출 시 현지 은행과 유사한 혜택을 받는 ‘QAB(Qualifying ASEAN Bank)’ 제도와 국가 간 QR 결제 연동 등을 통해 금융 통합을 시도하고 있다. 이는 아직 제한적이지만, 달러 의존도를 낮추고 역내 자본과 결제 흐름을 강화하려는 전략적 방향성을 분명히 보여준다.
진출을 넘어 정착으로
한국 은행들의 아세안 진출은 명확한 출발점을 갖고 있었다. 제조 기업의 해외 생산기지 이전을 지원하기 위한 기업금융으로 시작해, 이후 리테일과 현지 기업금융으로 영역을 넓혀왔다. 이 전략은 베트남과 인도네시아에서 일정 부분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환경은 변했다. 현지 규제는 정교해졌고, 디지털 은행과 빅테크의 진입은 경쟁 구도를 구조적으로 바꾸고 있다. 더 이상 한국 기업의 뒤를 따르는 ‘주재원 은행’ 모델로는 생존과 차별화를 담보하기 어렵다.
이제 한국 은행들의 아세안 전략은 ‘확장’이 아닌 ‘재정의’ 단계에 들어서야 한다.
첫째, ‘현지 중소기업·벤처 금융’으로 역할을 확장해야 한다. 아세안 중소기업의 자금 조달 격차(Funding Gap)는 여전히 막대하다. 한국 은행은 단순 대출자가 아니라, 보증·기술평가·정책금융과 연계된 종합 금융 솔루션 제공자로 진화할 여지가 크다.
둘째, 디지털 금융에서 ‘플랫폼 협력자’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현지 핀테크 기업을 직접 이기려 하기보다 데이터, 결제, 공급망 금융(SCF) 영역에서 협력 구조를 설계하는 것이 훨씬 현실적이고 효과적이다.
셋째, RCEP 및 한-아세안 FTA 기반의 ‘통상 금융 허브’ 역할이다. 원산지 규정 통합과 역내 공급망 재편은 무역금융, 외환, 프로젝트 파이낸스(PF) 수요를 구조적으로 확대시킨다. 이는 한국 은행들이 강점을 발휘할 수 있는 영역이다.
마지막으로, 정책금융기관 및 공공금융과의 결합이다. 기술보증, 수출금융, ODA(공적개발원조)와 연계된 금융 모델은 아세안이 요구하는 ‘개발·안정·포용 금융’과 한국이 제공할 수 있는 역량이 만나는 접점이다.
아세안 금융시장은 여전히 성장 중이지만, 더 이상 단순하지 않다. 2025년은 한국 은행에게 “얼마나 커질 것인가”보다 “어떤 은행이 될 것인가”를 묻는 해가 될 것이다. 한국 은행이 선택해야 할 길은 분명하다. 지점 수를 늘리는 소모적 경쟁이 아니라, 현지 금융 생태계의 일부로 기능하는 ‘신뢰 기반 파트너’가 되는 것이다. 이 선택이야말로 아세안 금융의 다음 국면에서 한국 은행이 지속 가능하고 의미 있는 존재로 남을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이다.
필자는 삼정 KPMG∙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한국벤처투자 등 23년이상 다양한 사업경험과 더불어 벤처캐피탈∙회계법인∙인프라∙스타트업 등에서 경력을 쌓았다. 현재 싱가포르의 Hanbridge의 대표로 한국 중소∙벤처기업의 해외 진출 및 해외 자금 유치를 돕는 역할과 함께 한국과 동남아시아의 생태계를 연계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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