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보이스피싱이 모두 은행 책임?...왜 통신사와 정부는 뒤로 빠져있나 [이근면의 시사라떼]
- 보이스피싱, ‘국민 감시’ 말고 ‘통신사 책임’ 물어야
‘전 국민 얼굴 인증’은 전형적인 행정 편의주의
[이근면 사람들연구소 이사장] 보이스피싱은 ‘고질적 방관 범죄’다. 수년째 범죄는 반복되고, 피해 규모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며, 수법은 날로 교묘해지는데 대응은 늘 제자리걸음이다. 사건이 터지면 분노하고, 여론이 들끓으면 보상을 논의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다시 잊힌다. 그 사이 범죄는 진화한다.
최근 은행의 배상 책임을 강화하고 피해 보상 비율을 높이자는 논쟁이 한창이다. 어딘가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전세사기 피해 보상 논란 때와 판박이다. 결국 질문은 하나로 귀결된다. ‘그 보상 재원은 누구의 주머니에서 나오는가?’
보이스피싱 피해 보상도 결국 국민의 돈이다. 은행의 부담은 수수료 인상으로, 공적 재원 투입은 세금으로 국민에게 전가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범죄를 막지 못한 책임은 과연 누구에게 있는가. 은행인가, 통신사인가, 감독기관인가. 아니면 늘 그랬듯 아무런 권한도 없이 의무만 떠안는 ‘국민’인가.
전 국민 얼굴 인증, 왜요? 제가요? 지금이요?
보이스피싱 예방책으로 거론되는 ‘전 국민 휴대전화 얼굴 인증 의무화’는 언뜻 강력해 보인다. 그러나 이는 전형적인 과잉 규제이자 행정 편의주의적 발상이다. 범죄는 소수가 저지르는데, 그에 따른 불편과 사회적 비용은 전 국민이 떠안아야 한다. 노인, 아동, 장애인 등 디지털 취약계층까지 잠재적 위험 요소로 간주하는 셈이다.
얼굴 정보는 가장 민감한 생체 데이터다. 이를 통신 인프라 전반에 상시 축적하는 것은 보안 리스크를 구조적으로 키우는 일이다. “안전을 위해 자유를 조금 양보하자”는 명분은 여기서 통하지 않는다. 이것은 자유의 일부를 양보하는 차원이 아니라, 국민 전체를 상시 감시 체계 아래 두는 문제다. 빈대 한 마리 잡겠다고 초가삼간을 다 태우는 격이다.
AI 시대, ‘기술적으로 못막는다’ 변명 통하지 않아
더 큰 문제는 기술적 방임이다. 오늘날 AI는 ▲음성 패턴 ▲통화 빈도 ▲발신 행태 ▲위치 변화 ▲단말기 이동 경로까지 실시간으로 분석할 수 있다. 동일 번호나 유사 패턴의 반복 발신, 비상식적으로 짧은 시간 내의 번호 변경과 지역 이동 등 범죄 징후는 데이터로 남는다. 이런 신호는 ‘사후 수사’의 대상이 아니라 ‘사전 차단’의 대상이어야 한다.
그런데도 통신사가 “우리는 단순 전달자”라며 책임을 회피한다면, 이는 기술 부족이 아니라 명백한 직무 유기다. 대한민국 통신 산업은 결코 낙후되지 않았다. 통신 3사는 세계 최고 수준의 네트워크와 AI 역량을 자랑한다. 그 뛰어난 기술을 광고와 요금제 수익화에만 쓰고, 정작 국민 보호에는 무력하다면 그들의 기술은 존재 가치를 잃는다.
돈은 통신사가 벌고, 책임은 은행이 져라?
현재 제도는 은행에 대해 “이상 거래를 탐지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배상 책임을 일부 지우고 있다. 그렇다면 범죄의 통로인 통신망을 관리하는 통신사는 왜 책임에서 자유로운가.
보이스피싱은 전화가 연결되지 않으면 성립조차 할 수 없다. 통신망은 범죄의 필수 플랫폼이다. 플랫폼에는 권한이 있고, 권한에는 응당 책임이 따른다. 유독 보이스피싱 앞에서만 통신사가 면책 특권을 누리는 것은 책임의 비대칭이자 정책적 특혜다.
전세사기와 닮은 ‘사후 약방문’ 국가
이 구조는 전세사기 사태와 소름 끼치게 닮아 있다. ▲관리·감독의 실패 ▲위험 신호 방치 ▲예방 부재가 이어지다 결국 세금으로 피해를 메우는 방식이다. 보이스피싱 대응 역시 예방에는 소홀한 채, 피해 발생 후 보상 논의로만 흐르고 있다. 이 과정에서 감독기관과 정부의 책임 소재는 희미해진다.
보이스피싱은 어느 날 갑자기 떨어진 재앙이 아니다. 수년간 통계가 쌓였고 수법과 대포폰 유통 경로도 드러나 있다. 그런데도 ▲통신사에 대한 사전적 기술 차단 의무 ▲금융권과의 공동 책임 구조 ▲예방 성과에 대한 정량적 평가 기준은 여전히 부재하다. 명백한 정책의 실패다.
진짜 해법은 ‘국민 감시’가 아닌 ‘플랫폼 책임’
대응 방향은 분명하다. 기술 강국답게 기술로 막아야 한다. 첫째, AI 기반 이상 통화의 실시간 차단을 의무화해야 한다. 둘째, 대포폰 개통 및 유통 관리 실패의 책임을 통신사에 명확히 귀속시켜야 한다. 셋째, 피해 발생 시 은행뿐만 아니라 통신사도 배상 책임을 분담하는 구조를 제도화해야 한다. 넷째, 면피성 노력이 아니라 실질적인 ‘피해 감소율’을 기준으로 책임을 물어야 한다.
아울러 법과 제도의 재정비가 시급하다. 통신·금융·감독 당국이 서로 선 긋기에 바쁜 지금의 구조로는 예방 시스템이 작동할 수 없다. 범죄 예방 실패에 대한 공동 책임 체계를 법제화하고, 실질적 차단 성과를 낸 주체에게는 규제 완화나 인센티브를 주는 ‘성과 연동형 규제’가 필요하다. 그래야 기술이 현장에서 작동하고, 책임은 결과로 증명된다.
보이스피싱은 더 이상 개인의 부주의나 노년층의 정보 소외 문제로 치부할 일이 아니다. 이는 국가적 관리 실패가 누적된 시스템 범죄다. 이를 인정하지 않고 또다시 세금으로 피해를 덮으려 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다음에는 막겠다”는 공허한 약속만 반복하게 될 것이다.
빈대 한 마리를 잡겠다고 집을 불태우는 나라는 안전한 나라가 아니다. 진짜 안전은 편한 정책이 아니라 옳은 정책, 즉 책임져야 할 곳에 확실히 책임을 묻는 것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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