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순창의 시간이 남기는 맛을 기록하다 [길에서 만난 사람]
- 여행작가 김민수의 ‘문득 끌리는 순창 여행’
500일의 산책, 여행 단편이 아닌 ‘삶의 궤적’ 담다
금산여관 인연과 강천산 겨울, 시간이 빚은 장맛
그는 왜 제주의 광활한 푸른 바다를 뒤로하고 순창의 소박하고도 깊은 내륙의 골목을 택했을까. 그는 이번 작업이 단순히 유명 명소를 훑고 지나가는 ‘단편’이 아니라, 오랜 시간 정성을 들여 장을 익히듯 스스로를 발효시키는 과정이었다고 고백한다.
누룩처럼 쓰리고 정처럼 읽는다
이날 북콘서트에서 청중의 마음을 가장 깊게 파고든 문장은 이 책의 첫머리였다. “순창의 여행에는 깊이가 있다. 누룩처럼 쓰리고 정처럼 읽는다.” 인위적으로 매끄럽게 ‘익은’ 상태가 아니라, 발효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생채기와 인내를 뜻하는 듯한 ‘쓰리고’라는 표현은 현장의 많은 이들에게 묘한 울림을 주었다. 행사에 참석한 한 공직자는 “수많은 홍보 책자를 접해왔지만 누룩처럼 쓰리다는 첫 문구를 보고 나선 처음으로 책을 끝까지 읽지 않을 수 없었다”며 그 진정성에 공감을 표했다.
김 작가는 이 투박하면서도 진실한 깊이를 담아내기 위해 1년 6개월간 순창을 제집처럼 들락거렸다. “취재를 위해 순창의 굽이진 길을 오가며 깨달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제가 과거 전국의 섬을 낱낱이 누비며 『대한민국 100섬 여행』을 펴냈을 때만큼이나 많은 공력과 물리적인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요.” 그는 화려하게 치장된 관광지가 아닌, 빨래가 널려 있는 마당과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식당처럼 주민들의 일상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속살’에 집중했다. 낡은 운동화 끈을 조여 매고 매일 읍내를 걷는 산책자로 지낸 500일의 시간은 그렇게 정직한 문장이 되었다.
발효된 여행자에게만 들리는 이야기
김 작가는 순창의 여행을 ‘발효’ 그 자체에 비유한다. 봄에 정성껏 담근 장이 뜨거운 여름을 견디고 가을이 되어서야 비로소 제맛을 내듯, 순창의 매력도 성급한 방문객에게는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기다림의 시간을 견딘 여행자에게만 순창은 그 비장(秘藏)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8년 전 순창의 ‘금산여관’에 머물렀던 여행자가 자신의 88번째 생일을 맞아 제주에서 다시 이곳을 찾아오고, 주인이 잠시 자리를 비우면 단골손님이 자연스럽게 빗자루를 들어 마당을 쓰는 풍경이 이곳에선 일상적인 인연의 형태다.
“순창은 충분히 발효된 여행자에게만 더욱 깊고 내밀한 이야기를 건넵니다. 흰 눈에 덮인 겨울 강천산의 적막함을 온몸으로 겪어보고 나서야 비로소 이듬해 봄의 정취가 왜 그토록 오롯한지 이해되는 식이죠.” 그는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억지로 꾸며낸 ‘인스턴트 여행’이 아닌, 기다림이 남긴 진한 장맛 같은 여행을 권한다. 그것은 한 번의 방문으로는 결코 완성될 수 없는, 여러 번의 마주침이 쌓여 만들어지는 깊이다.
그가 꼽은 가장 강렬한 동화(同化)의 순간은 뜻밖에도 유명 관광지가 아닌 읍내 중식당 ‘춘화루’의 평범한 오전 11시 풍경이었다. “오전 밭일을 마친 주민들이 참을 먹듯 둘러앉아 소주잔을 기울이며 고단함을 털어내는, 그야말로 짙은 로컬의 현장이었습니다. 누구 하나 이방인인 저에게 호기심 어린 눈길을 주거나 경계하지 않았죠. 그들의 무관심 속에 섞여 들어가 풍경의 배경이 되는 순간, 저는 묘한 해방감을 느꼈습니다.”
그는 이를 ‘묽어지는 것’이라 표현했다. 무언가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특별해지고 싶은 욕심이 순창이라는 담백한 공간과 만나 희석되는 과정이다. 이것은 타협과 양보가 필요한 동반 여행이나 SNS를 의식한 인증샷 위주의 여행이 아닌, 오로지 자신의 감각에만 집중하는 ‘혼자만의 여행’에서만 만날 수 있는 고차원적인 경험이다. 내가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풍경 속으로 녹아들어 사라지는 찰나의 평온이다.
김 작가는 이번 책에 미처 다 담지 못한 순창의 또 다른 보석으로 유등면의 ‘유등스테이’를 언급했다. 고택의 결이 살아있는 한옥에서 아보카도 커피를 마시며 고성능 오디오로 음악을 듣는 경험은, 순창의 정서가 어떻게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현대적인 미감으로 진화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투박한 시골 정서와 세련된 취향이 공존하는 이 공간은 순창이 가진 무궁무진한 스펙트럼을 증명한다.
그는 순창을 찾을 예비 여행자들에게 진심 어린 당부를 남겼다. “타인의 ‘좋아요’를 위해 맛집을 전전하고 카메라 렌즈로만 세상을 보는 여행에 지쳤다면 순창으로 오십시오. 대신, 반드시 혼자 오십시오.” 타인의 시선과 목소리라는 소음에서 완전히 벗어나, 오롯이 자기 내면과 대면할 수 있는 시간. 그는 순창의 나지막한 능선과 깊은 숲길이 그 고독한 독백을 묵묵히 받아줄 만큼 넉넉한 품을 가졌음을 500일의 기록으로 증명해 보였다.
행사장 밖으로 나오자, 군청 앞 음악 분수대가 화려한 물줄기를 뿜어내며 시범 운영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날의 진짜 여운은 솟구치는 물줄기보다는, “자신을 위해 혼자 오라”던 작가의 나직한 목소리와 순창의 밤공기 속에 더 짙게 배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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