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백마의 전설 남아있는 샤토 슈발 블랑 [와인인문학]
- 스스로 왕관 벗어 던진 무관의 제왕
실크처럼 촘촘한 질감과 우아한 피니시
[글·사진=김욱성 와인칼럼니스트] 프랑스 보르도 우안 생테밀리옹(Saint-Émilion)을 대표하는 최고급 와이너리(포조주 양조장) ‘샤토 슈발 블랑’. 이름 그대로 ‘흰 말’(White Horse)을 뜻하는 이 우아한 샤토의 로비에 들어서면 전면을 장식한 거대하고 눈부신 백마 그림이 방문객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는다.
이 백마에는 프랑스 부르봉 왕조를 새로 세운 ‘선량왕’ 앙리 4세의 낭만적인 전설이 깃들어 있다. 장거리 여행 중에도 지친 말을 자주 바꿔 타곤 했던 그가 파리로 향하던 길에 생테밀리옹 인근 농가에 훌륭한 흰말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일부러 하루를 묵어가며 말을 갈아탔다는 이야기다.
‘닭고기’를 약속한 선량왕
앙리 4세는 프랑스 역사상 가장 사랑받는 군주 중 한 명이다. 30년간 이어진 구교와 신교의 끔찍한 종교 전쟁(위그노 전쟁)을 종식하기 위해 스스로 구교로 전향했고 1598년 낭트 칙령을 내려 종교의 자유를 선포했다. 그의 정치는 따뜻하고 실용적이었다. ‘일요일이면 모든 백성의 식탁에 닭고기를 올리게 하겠다’는 유명한 약속은 400년 전 평민들에게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만큼 기적 같은 꿈이었다. 하지만 그는 파탄 난 경제를 살려내며 이 약속을 지켰고 백성들은 그를 ‘선량왕’이라 부르며 칭송했다.
흥미롭게도 프랑스인들에게 닭은 각별한 상징이다. 2000년 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갈리아(지금의 프랑스) 지역을 점령했을 때 그곳 사람들을 라틴어로 수탉을 뜻하는 ‘갈루스’(Gallus)와 발음이 비슷한 ‘골루아’(Gaulois)라 부르며 조롱한 것이 발단이었다. 오기가 발동한 골족은 아예 수탉을 자신들의 상징으로 삼아버렸다.
이 흥미진진한 전설을 품은 샤토 슈발 블랑의 본격적인 역사는 183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근의 거대한 포도밭이었던 샤토 피지악(Château Figeac)이 분할 매각되면서 포므롤 경계에 맞닿은 15헥타르의 알짜배기 자갈밭이 뒤카스(Ducasse) 가문에 넘어간 것이 시작이었다. 이후 꾸준히 영토를 확장한 슈발 블랑은 1862년 런던과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압도적인 품질로 메달을 휩쓸며 세계 무대에 화려하게 데뷔했다. 오늘날 라벨에 자랑스럽게 새겨진 두 개의 메달이 바로 그 증거다. 1998년에는 루이비통을 이끄는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의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이 샤토를 인수하며 럭셔리 제국의 핵심 자산이 됐다.
슈발 블랑은 생테밀리옹의 절대 군주로 군림해 왔다. 오랫동안 샤토 오존(Château Ausone)과 함께 생테밀리옹 최고 등급인 ‘프리미에 그랑 크뤼 클라세 A’를 양분했으나 2012년 앙젤뤼스와 파비가 동일 등급으로 승격되자 자존심이 상했는지 아예 등급제에서 탈퇴해 버렸다. 이제 계급장이 없는 무관의 제왕이 됐지만 아무도 그들의 권위를 의심하지 않는다.
영화 캐스팅 비화와 로버트 파커를 문 개
이 위대한 와인은 할리우드의 러브콜도 숱하게 받았다. 애니메이션 ‘라타투이’와 제임스 본드 영화 ‘네버 세이 네버 어게인’에 등장했고 명작 ‘사이드웨이’에서는 주인공이 패스트푸드점에서 몰래 마시는 궁극의 와인으로 조명받았다. 재미있는 비화가 있다. 사이드웨이의 감독이 원래 섭외하려던 곳은 샤토 페트뤼스(Château Pétrus)였다. 하지만 이름 없는 감독의 제안을 잡상인 취급하며 문전박대한 페트뤼스 덕분에 슈발 블랑이 대신 그 영광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평론가와 얽힌 통쾌한 에피소드도 빼놓을 수 없다. 1980년대, 세계 최고의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가 1981년 빈티지를 시음하고 낮은 점수를 주자 샤토의 매니저 자크 에브라르는 불만을 품고 그를 다시 초청했다. 포도밭에 도착한 파커가 매니저가 키우던 개에게 다리를 물리는 사고가 발생했는데 피가 나는 상처에 붙일 밴드를 달라는 파커에게 매니저가 밴드 대신 파커가 발행한 와인 평론지를 무심하게 던져줬다는 전설적인 이야기다. 다행히 서로 화해했고 재평가를 통해 점수는 상향 조정됐다고 한다.
오늘날 슈발 블랑은 생테밀리옹에서 가장 현대적인 와이너리로 진화했다. 지롱드 강 우안 최초로 포도밭 지하에 배수 설비를 깔았고 크기가 제각각인 52개의 콘크리트 발효조를 품은 2000만달러(약 301억원)짜리 최첨단 셀러를 구축해 구획별 정밀 양조를 완성했다. 포므롤과 맞닿은 점토와 자갈밭은 카베르네 프랑과 메를로 품종의 기적 같은 블렌딩을 낳는다.
프랑스 체류 시절 운 좋게 이 위대한 샤토를 직접 방문해 2011년 빈티지를 시음할 기회를 얻었다. 2011년산은 메를로의 비중이 높던 다른 빈티지와 달리 카베르네 프랑이 52%를 차지해 결이 달랐다. 깊고 짙은 루비색을 뚫고 잘 익은 딸기와 검은 올리브 및 트러플 그리고 은은한 삼나무와 다크 초콜릿의 향연이 펼쳐졌다.
타닌은 아직 젊고 단단했지만 거대한 구조감 속에서도 실크처럼 촘촘한 질감과 우아한 피니시가 혀끝을 황홀하게 감쌌다. 시간을 초월한 백마의 질주는 잔 속에서 여전히 멈추지 않고 있었다. 와인 애호가에게 최고의 와인은 한 번도 여행하지 않은 와인이다. 양조 된 곳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와인은 복잡한 유통 과정(여행)을 겪은 와인에 비하면 거의 완벽한 조건에서 보관되고 숙성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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