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살이도 쇼핑하듯…‘소유’ 종말이 낳은 구독 신세계 [구독 어디까지 해봤니]①
- 소비 문법 ‘소유’에서 ‘경험’으로
AI 결합 지능 구독 시대도 ‘성큼’
[이코노미스트 정길준 기자]
구독경제가 소유의 문법을 통째로 바꾸고 있다. 과거 신문이나 우유처럼 단순히 물건을 주기적으로 받아보던 일차원적 정기 배송의 시대는 끝났다. 이제 집은 머무는 공간에서 생활 서비스를 묶는 플랫폼으로 진화했고, 과자는 허기를 채우는 간식에서 내 취향을 고르는 정교한 큐레이션으로 격상됐다.
최근 산업 경계를 허무는 패키지로 구독경제가 다시 달아오르고 있다. 소비자가 거액을 들여 물건을 한 번에 사들이는 대신 주거 공간과 먹거리, 개인의 은밀한 취향까지 전문가에게 설계 받는 방식이 주목받고 있다.
대형 건설사와 가전 공룡이 손을 잡은 사례가 대표적이다. GS건설과 LG전자는 성수1지구를 시작으로 재개발 정비사업 단지에 프리미엄 가전 구독 서비스를 적용했다. 입주민은 고가의 생활 필수 가전을 큰 지출 없이 구독 형태로 이용하면서 ▲무상 사후관리(AS) ▲무상 이전·설치 ▲정기 케어까지 결합한 올인원 서비스를 누리게 된다.
이러한 시도는 가전 시장의 침체기 속에서 B2B(기업 간 거래)와 구독 사업을 새로운 미래 먹거리로 밀어붙이고 있는 LG전자의 전사적 전략과 궤를 같이한다.
LG전자는 올해 1분기 중동 전쟁 등 지정학적 리스크와 소비심리 위축에도 실적 하락을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특히 구독 사업은 전년 동기 대비 15% 성장한 6400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이처럼 B2C(기업-소비자 거래) 시장에서 재미를 본 LG전자가, 이번 GS건설과의 협업으로 B2B 주거 영역으로 가전 구독 성과를 확장하고 나섰다.
국내에서도 이와 유사한 ‘유휴하우스’ 같은 혁신적인 주거 비즈니스 모델이 등장했다. 집을 재테크나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언제든 이동할 수 있는 유연한 생활 인프라로 바라보는 시선의 전환이 출발점이었다.
유휴하우스는 완벽한 구독 형태는 아니지만 장·단기 임대 형식을 띠면서 주거를 구독처럼 다변화해 이용할 수 있다. 유휴하우스를 운영하는 로컬 비즈니스 기업 블랭크 관계자는 “제주도는 한달살이 수요로 올해 연말까지 거의 꽉 찼고, 나머지 지역은 집 형태에 따라 많게는 2년에서 3년 정도 장기 거주하는 경우도 있다”고 설명했다.
아파트와 단독주택의 거주 성향 차이로 고민하다가 “직접 살아보고 결정하자”며 유휴하우스를 찾은 예비 신혼 커플부터 단양에 머물며 KTX로 서울을 오간 스타트업 여성 CEO(최고경영자)도 있다. 특히 경북 영주 유휴하우스의 경우 서울 아파트에서 어린 아들 둘의 층간소음 때문에 가슴을 졸이던 부부가 내려와 2년째 장기 계약 후 살고 있다. 빈집이었던 공간에 아이들이 유입되면서 지역 어린이집이 새로운 인력을 고용하고, 동네 어르신들이 활력을 되찾는 등 로컬 생태계에도 긍정적인 파급 효과를 낳고 있다.
유휴하우스는 누적 체류 기간 1만8000일, 누적 입주자 수 720명을 달성했다. 속초·봉화·단양·전주·여수·제주 등 10곳이 넘는 빈집을 재생해 13억원의 지역경제 유입 효과를 창출했다. 성수기와 주말 가동률은 각각 85%, 80%로 수요가 끊이지 않는다.
신제품 테스트베드 안착한 과자 구독
일상에 밀접한 식품 구독은 일찌감치 자리매김했다. 롯데웰푸드가 선제적으로 론칭한 과자 구독 서비스 ‘월간과자’는 정기 배송형 스낵 구독의 대중화를 이끌었다. 올해로 6년 차에 접어든 이 상품은 비록 회사의 전체 실적에 의미 있는 영향을 주지는 않지만, 소비자들에게 제품을 소개하고 만나는 방식을 재정의했다.
롯데웰푸드 관계자는 “과자에 관심이 있는 소비자들이라면 신제품을 합리적 가격으로 빠르게 체험할 수 있는 서비스”라며 “제조사 입장에서도 고객 반응을 빠르게 확보할 수 있어 유용하다”고 설명했다.
전호겸 서울벤처대학원대학교 구독경제전략연구센터장은 “불황기에는 큰돈을 들여 가전이나 노트북을 한 번에 사기보다 적은 정액 비용으로 서비스를 빌려 쓰려는 경향이 강해진다”며 “기업으로서도 록인(Lock-in) 효과 이후 마케팅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어 구독화에 사활을 거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전 교수는 “단순히 할인쿠폰 몇 장을 모아놓고 구독으로 포장한 형편없는 서비스들이 많다”며 “소비자가 실질적으로 2배에서 7배의 이익을 체감할 수 있는 정교한 설계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해지 대신 공유·정지… ‘록인 효과’ 노리는 기업들
이처럼 한번 구축된 구독 생태계를 기업들이 쉽게 놓지 못하는 이유는 서비스에 묶인 고객이 가져다주는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수익 구조에 있다. 리서치 오픈서베이의 구독경제 리포트에 따르면 구독 상품의 가격 부담을 느낀 소비자들은 서비스를 아예 끊어버리기보다 비용 최적화를 위해 ‘가족·친구와 계정 공유’(37.2%)나 ‘구독 일시정지’(27.1%) 또는 ‘연간 결제 전환’(19.2%) 등의 우회로를 택하며 어떻게든 구독 상태를 유지하려는 것으로 나타났다.
비용 절감에 가장 적극적인 20대와 30대는 계정 공유 비율이 각각 42.3%, 43.3%에 달했고 일시정지 경험도 30대(35.2%)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일어났다. 정교한 개인화 데이터와 결합해 일단 구독 고객을 확보하면 소비자가 관성적으로 서비스를 유지하기 때문에 기업은 안정적 캐시카우를 확보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렇듯 과거 물품을 빌려 쓰던 렌털 중심의 1세대 구독과 쿠팡·네이버 등 쇼핑 멤버십 중심의 2세대 플랫폼 구독을 거쳐, 인공지능(AI)의 문제 해결 능력인 ‘지능’ 자체를 매달 과금해 사용하는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전 교수는 “생성형 AI 시장의 유일한 수익 모델은 구독뿐이다. 범용 인공지능(AGI) 시대가 오면 ‘지능 구독 시대’로 넘어갈 것”이라며 “AI가 일상화되는 현시점에서 구독이라는 개념은 경제 시스템에서 절대 사라질 수 없는 인프라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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