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일반
“제비꽃은 왜 씨앗을 폭발시킬까” 서경배 회장이 3000억 내놓고 과학자 찾은 이유
- 아모레퍼시픽 서경배과학재단 10주년
생명과학 신진 연구자 5년간 연구성과 선보여
생명과학 신진 연구자 장기 지원
노화 연구 권위자 마이클 홀 교수 기조강연
“당장 돈 안 되는 연구에 3000억”
서경배과학재단 10년의 성과
[이코노미스트 서지영 기자] 제비꽃은 어떻게 씨앗을 멀리 날려 보낼까. 상처가 나도 흉터가 남지 않는 동물의 피부에는 어떤 비밀이 있을까. 보이지 않는 뇌 신경망을 더 선명하게 들여다볼 방법은 없을까.
화려한 제품이나 눈에 띄는 기술 뒤에는 당장 답을 찾기 어려운 질문이 많다. 서경배과학재단이 지난 10년간 집중해온 것도 이런 ‘아직 답이 없는 질문’이다. 단기간에 성과를 내기 어려운 생명과학 분야 신진 연구자들에게 장기적인 연구 기회를 제공하며 기초과학의 저변을 넓혀왔다.
서경배과학재단은 지난 29일 서울 용산구 아모레퍼시픽 본사에서 설립 10주년을 기념하는 ‘SUHF 심포지엄 2026’을 열었다. 2020년부터 이어온 이 행사는 재단의 지원을 받은 연구자들이 장기간 수행한 연구 결과를 대중과 공유하는 자리다. 올해는 특히 2021년 선정된 신진과학자들이 5년간 진행한 연구를 공개했다.
서경배과학재단은 아모레퍼시픽그룹 서경배 회장이 2016년 사재 3000억원을 출연해 설립했다. 생명과학 분야의 젊은 연구자를 매년 선발해 연구비를 지원하고 있다. 연구자가 단기간의 성과나 상용화 가능성에 매이지 않고 장기적인 연구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재단의 핵심 방향이다.
이번 심포지엄의 주제는 ‘공명하는 생명의 결(Resonant Patterns of Life)’이었다. 기조강연은 영양소 감지와 세포 성장 조절을 연결하는 TOR 신호망을 발견한 스위스 바젤대학교 마이클 홀(Michael Hall) 교수가 맡았다.
홀 교수는 세포가 외부에서 들어오는 영양분을 어떻게 감지하고 성장과 대사에 활용하는지에 대한 연구로 잘 알려진 생물학자다. 그의 연구는 세포 성장과 노화, 대사질환 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기반을 제공해왔다.
이번 행사에서는 세계적인 석학의 연구뿐 아니라 국내 신진과학자들의 연구도 소개됐다.
현유봉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는 제비꽃의 종자 산포 방식에서 출발해 식물의 물 이용 전략을 연구한 결과를 발표했다. 제비꽃은 열매가 익으면 별도의 외부 도움 없이 씨앗을 멀리 퍼뜨린다. 연구진은 이 과정에서 열매 꼬투리 내부의 수분 변화가 어떻게 씨앗을 튕겨내는 힘으로 전환되는지를 살폈다.
식물이 물을 이용하는 방식에 대한 연구는 단순히 한 식물의 생태를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연구진은 식물에서 관찰되는 물관 막힘 현상이 감염을 막거나 과일이 성숙하는 과정과도 연결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구태윤 KAIST 의과학대학원 교수는 ‘보이지 않는 생명현상을 보는 새로운 시야’를 주제로 생명현상을 관찰하는 기술을 소개했다. 시료 내부에 염색약이 침투할 수 있도록 구조를 바꾸는 방법부터 기존 의료영상에서 새로운 정보를 추출하는 기술, 제한된 자원으로 뇌 신경망을 관찰하는 연구까지 다양한 접근법이 소개됐다.
양한슬 KAIST 생명과학과 교수는 아프리카가시쥐를 활용한 피부 재생 연구를 발표했다. 아프리카가시쥐는 피부에 큰 상처가 생겨도 일반적인 포유류와 달리 흉터를 거의 남기지 않고 손상된 조직을 회복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구진은 이 동물의 피부 구조와 세포가 스트레스를 견디는 방식 등을 분석해 흉터 없이 피부가 재생되는 원리를 찾고 있다. 인간의 피부 재생과 상처 치료에 적용할 수 있는 새로운 단서를 확보하는 것이 연구의 궁극적인 목표다.
서경배과학재단 1기 신진과학자인 이정호 KAIST 의과학대학원 교수 겸 소바젠 CSO는 특별강연에 나섰다. 이 교수는 지난 10년간 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구한 ‘뇌 체성 모자이시즘’을 소개했다.
체성 모자이시즘은 하나의 개체 안에서도 서로 다른 유전적 특성을 가진 세포가 존재하는 현상을 말한다. 이 교수는 뇌에서 발생하는 이러한 유전적 다양성이 퇴행성 뇌질환을 비롯한 신경계 질환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연구해왔다. 이날 강연에서는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질환 이해와 치료법을 개발할 가능성도 제시했다.
이번 심포지엄에는 연구자뿐 아니라 고등학생과 교사, 기업 연구원 등 300여명이 참석했다. 연구자들의 발표와 함께 현역 과학자들의 연구를 소개하는 포스터 세션도 마련됐다.
서경배과학재단이 강조하는 것은 연구 결과 자체만이 아니다.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젊은 과학자가 한 분야를 오래 파고들 수 있도록 지원했다는 점이다.
서경배 이사장은 “신진과학자들이 한계 없이 탐구하고 도전할 수 있는 연구 환경을 만들고자 노력해왔다”며 “앞으로도 과학이 가진 무한한 가능성을 믿고 그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어가기 위한 노력을 이어가겠다”고 말했다.
재단이 생명과학에 장기 투자를 이어가는 배경에는 아모레퍼시픽의 사업과도 맞닿아 있다. 피부와 모발, 노화 등 인체와 관련된 연구는 화장품 산업과 접점이 있지만, 기초과학 단계에서는 당장 제품으로 연결되지 않는 연구가 대부분이다. 기업이 직접 수행하기 어려운 장기 연구를 외부에서 지원하는 방식으로 과학 생태계에 투자한다는 의미가 있다.
실제로 이번 심포지엄에서 소개된 연구들도 당장의 상품화를 목표로 한 연구와는 거리가 있다. 식물의 물 이동, 동물의 조직 재생, 뇌세포의 유전적 다양성처럼 산업적 성과로 이어지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한 주제들이다.
한 생명과학 업계 관계자는 “기업 입장에서는 당장 사업에 적용할 수 있는 기술에 관심이 쏠리기 쉽지만, 결국 새로운 산업을 만들어내는 것은 기존에 없던 현상을 발견하는 기초연구에서 출발한다”며 “10년 단위로 연구자를 지원하는 구조가 국내 과학계에서 더 다양하게 만들어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뷰티업계 관계자도 “피부·모발·노화처럼 뷰티산업과 연결되는 분야일수록 단기간에 제품을 만드는 기술보다 인체와 생명현상을 제대로 이해하는 연구가 중요하다”며 “기업의 연구개발과 별개로 장기적인 기초과학에 투자하는 민간 재단의 역할이 커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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