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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연금 수익률 8.67%…‘푸른씨앗’이 보여준 기금형의 힘
- [500조 퇴직연금 어디로]①
호주·영국·미국 성공 방정식 벤치마킹 필요
'푸른씨앗'이 입증한 전문 운용의 힘
[이코노미스트 이병희 기자] 국내 퇴직연금 적립금이 550조원을 돌파하며 거대한 자산 시장으로 성장한 가운데 기금형 퇴직연금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기존 퇴직연금의 대부분은 원리금보장형 상품 가입 비중이 크고 수익률이 높지 않아 퇴직자의 노후 안전판 역할을 맡기기에 한계가 있었지만 기금형 퇴직연금을 도입할 경우 수익률을 높일 수 있다는 기대감이 크기 때문이다.
뭉치면 살아난다…3대 ‘기금형 퇴직연금’
기금형 퇴직연금이란 가입자가 개별 금융 상품을 일일이 골라 매수·매도하는 대신 기금을 선택하고 수탁법인과 기금운용 전담기구가 자산 배분·운용사 선정·위험관리·리밸런싱(자산 재배분) 등을 전담하는 제도다. 여러 사업장의 적립금을 모아 하나의 커다란 목돈으로 만든 뒤 규모의 경제를 확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또 전문적인 장기·분산투자를 통해 운용 수수료를 낮추고 수익률을 극대화하는 것이 핵심 목적이다.
새로 구축되는 기금형 제도는 확정기여(DC)형을 중심으로 적용된다. ▲금융기관 개방형 ▲연합형 ▲공공기관 개방형 등 3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금융기관 개방형은 은행·증권·보험사 등 민간 금융 회사가 별도의 수탁법인을 설립해 여러 사업장의 적립금을 기금화해 운용하는 방식이다. 연합형은 여러 사업주가 공동으로 수탁법인을 설립해 소속 근로자의 적립금을 함께 운용하는 형태다. 수탁법인 이사회에는 노사가 동수로 참여하며 이사회와 별도로 금융·투자 전문가로 구성된 기금운용 전담기구를 둬 전문성을 확보한다. 공공기관 개방형은 중소기업퇴직연금기금인 ‘푸른씨앗’의 가입 대상을 확대해 공공성을 강화하는 방식이다.
고용노동부는 지난해 10월 28일 노동계·경영계·청년·정부·전문가가 참여하는 ‘퇴직연금 기능 강화를 위한 노사정 태스크포스(TF)’를 출범시켰고 10차례 회의와 이견 조율을 거쳐 지난 2월 6일 기금형 퇴직연금 활성화와 퇴직급여 사외적립 의무화에 합의했다.
퇴직연금 운용 방식을 두고 노사정이 머리를 맞댄 것은 퇴직연금 수익률이 저조했기 때문이다. 퇴직 후에도 안전한 노후 생활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퇴직연금이 높은 수익률을 유지해야 하는데 지금까지는 그렇지 못했다는 뜻이다.
금융감독원 통합연금포털에 따르면 2025년 말 기준 전체 적립금 501조4000억원 가운데 예·적금 등 원리금보장형 상품 비중은 75.4%에 달했다. 이 가운데 확정급여(DB)형 적립금 228조9000억원 중 원리금보장형 비중은 91.9%에 육박했다. 가입자가 직접 자산을 운용하는 확정기여(DC)형과 개인형퇴직연금(IRP) 역시 원리금보장형 비중이 각각 67%와 55.7%로 절반을 웃돌았다.
원리금보장형 상품은 대부분 예적금이나 채권 등 안전자산에 투자하는 비중이 큰 대신 수익률은 높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지난해 DB형 연간 수익률은 3.5% 수준이었다. DC형과 IRP 수익률이 각각 8.5%와 9.4%였다는 점과 비교하면 수익률이 얼마나 낮은지 짐작할 수 있다.
장기 수익률 측면에서도 임금 상승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2021~2025년 임금상승률은 18.9%였는데 DB형의 연도별 수익률을 복리로 계산한 누적 수익률은 15.9%였다.
"연 수익률 6~8%"…호주·영국·미국 노후 자산 어떻게 굴리나
해외 주요 선진국들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기금형 퇴직연금을 정착시켜 연 6~8%대의 안정적인 장기 우상향 수익률을 거두고 있다. 하나은행 등 국내 주요 금융사가 호주와 영국의 퇴직연금 시장을 현지 벤치마킹하며 해법을 모색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하나은행에 따르면 호주는 1992년 ‘수퍼애뉴에이션’(Superannuation) 제도를 도입한 이후 30년 넘게 기금형 시장을 발전시켜 왔다. 호주 모델의 핵심은 퇴직연금을 수십 년간 축적되는 장기 자산으로 바라보고 주식·채권뿐만 아니라 부동산·인프라 등 다양한 대체자산에 고루 분산투자하는 데 있다. 기금 운용은 머서(Mercer)·시에프에스(CFS) 등 소매형 기금과 에이알티(ART)·어웨어슈퍼(Aware Super) 등 비영리 산업형 기금이 담당한다. 호주 건전성감독청(APRA)은 매년 ‘성과 평가(Performance Test)’를 실시해 기금의 운용 성과를 엄격히 검증한다. 성과가 부진한 기금에는 신규 가입을 제한하는 등 강력한 후속 조치를 단행한다.
영국은 2012년 ‘자동가입’ (Auto-enrolment) 제도를 도입해 제도 시행 전 47% 수준이던 가입률을 82%까지 끌어올렸다. 가입 확대의 중심에는 여러 사업장이 하나의 기금에 참여하는 ‘마스터 트러스트’(Master Trust) 제도가 있다. 대표적 공공 기금인 ‘네스트’(NEST)를 포함한 영국의 기금들은 독립적인 트러스티(Trustee) 이사회가 가입자의 수급권 보호와 이익을 최우선으로 기금을 운영한다. 가입자가 복잡한 투자 상품을 직접 고르지 않아도 생애주기펀드(TDF) 등 사전지정운용제도(디폴트옵션)를 통해 전문가가 설계한 포트폴리오대로 자산이 자동 운용된다.
미국은 ‘401(k)’ 제도를 바탕으로 기업 내 수탁위원회(Fiduciary Committee)의 엄격한 자산 선정과 실적배당형 자산 중심의 장기 복리 효과를 창출하며 근로자의 노후 자산을 안정적으로 증대시키고 있다. 실제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지난 7월 미국 애리조나주 투손의 코스트코 매장에서 근무하는 계산원 토니 바자르(60)의 사연을 보도한 바 있다. 40년 가까이 계산원으로 근무한 그의 퇴직연금 계좌에는 100만달러가 넘는 돈이 쌓인 것으로 알려졌다. 본인이 장기간 납입한 돈과 회사 지원금·투자 수익 등이 합쳐진 퇴직연금 자산이 우리 돈으로 13억원 넘게 쌓인 것이다.
가능성 입증한 ‘푸른씨앗’…30인 이하 사업장의 반란
국내 퇴직연금 시장에서도 기금형 제도의 성공 가능성을 먼저 입증한 선행 모델이 있다. 근로복지공단이 30인 이하 소규모 사업장 근로자를 대상으로 운영 중인 공공 기금형 퇴직연금 ‘푸른씨앗(중소기업퇴직연금기금)’이다.
2022년 9월 도입된 푸른씨앗은 근로복지공단이 수탁기관 역할을 수행하고 전문 자산운용기관(전담운용사)에 운용을 위탁하는 대형 기금 방식으로 작동한다. 자금을 한데 모아 목돈으로 만들고 자산배분 효율성을 극대화해 주식·채권·대체투자 등 다양한 실적배당형 포트폴리오에 투자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출범 4년 만에 가입 사업장이 약 4만2000곳으로 늘고 가입자는 약 19만명으로 확대됐다. 적립금은 1조9000억원 규모다. 2025년 수익률은 8.67%로 집계됐다.
정승희 하나금융연구소 수석연구원은 ‘호주 수퍼애뉴에이션 제도가 주는 시사점’ 보고서를 통해 “국내에서도 퇴직연금시장의 확대를 통해 연금자산을 축적하고 이를 효율적으로 운용해 금융시장의 발전을 도모할 필요가 있다”며 “연금적립을 통해 주식투자를 하고 이에 주가가 상승해 연금이 재적립되는 선순환 구조가 형성된다면 자산운용시장을 중심으로 한 국내 금융시장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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