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 일반
“이 운용사, 20% 날린 적 있습니다”…펀드 ‘흑역사’ 공개
- [반토막 펀드의 비밀]②
은행·증권사 상품 선정에도 영향…판매 문턱 높아질 가능성
손실 고지 강화가 불완전판매 분쟁에 미칠 영향도 주목
이제 펀드 시장의 경쟁 기준이 달라질 전망이다. 과거 동종 상품에서 20%를 넘는 손실이 발생했다면 그 이력이 신규 상품 판매 과정에서 투자자에게 공개된다. 그동안 개별 상품의 수익률과 투자 전략에 가려졌던 운용사의 ‘실패 기록’이 판매 경쟁의 전면에 등장한다. 특히 해외부동산·대체투자 등 대규모 손실을 경험한 운용사는 신규 상품을 내놓더라도 과거 성적표가 따라붙게 된다. 운용사의 손실 관리 능력이 은행·증권사의 상품 선정과 투자자의 선택을 가르는 새로운 기준으로 자리 잡을지 주목된다.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금융당국은 9월 30일부터 공모펀드 투자자에게 제공되는 핵심위험 정보를 강화했다. 특히 자산운용사가 과거 운용한 동종 상품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대규모 손실이 발생했다면 펀드명과 투자지역, 투자자산, 손실 발생 시점과 규모 등 관련 정보를 투자자가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그동안 펀드 투자설명서는 현재 판매하는 상품의 투자 대상과 위험등급, 보수·수수료 등을 중심으로 구성됐다. 앞으로는 투자자가 신규 상품만 보는 데 그치지 않고 운용사가 비슷한 상품을 과거 어떻게 운용했는지까지 함께 살펴볼 수 있게 되는 셈이다.
금융감독원은 올해 해외부동산펀드 관련 기업공시 작성기준도 별도로 개정하는 등 관련 정보 제공을 강화하고 있다. 펀드 하나 가입하는데 운용사 ‘과거 성적표’까지 본다. 이번 제도 변화가 주목받는 이유는 과거 손실 이력이 현재 상품 판매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어서다.
특히 해외부동산과 특별자산, 대체투자 등은 코로나19 이후 고금리와 부동산 가격 조정, 공실 증가 등이 겹치며 손실 사례가 잇따랐다. 일부 해외부동산 펀드는 자산 매각 지연이나 가치 하락으로 만기가 연장됐고 원금 손실도 현실화했다. 레버리지를 활용하거나 특정 자산에 집중 투자한 상품 역시 시장 상황이 급변할 경우 손실 폭이 커질 수 있다.
같은 유형의 펀드라도 과거 대규모 손실 사례가 적은 운용사와 여러 차례 손실을 경험한 운용사 사이에서 투자자의 선택이 달라질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자산운용업계에서는 제도가 정착하면 운용사별 과거 손실 데이터를 비교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날 것으로 보고 있다. 최근 5년을 기준으로 운용사별 20% 이상 손실 상품 수 ▲최대 손실률 ▲손실 상품의 투자지역 ▲해외부동산·특별자산·레버리지 등 상품 유형을 묶으면 운용사별 위험관리 성과를 비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단순히 손실 펀드 숫자만으로 운용사의 역량을 판단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운용사의 전체 펀드 규모와 상품 수가 다른 데다 부동산·특별자산처럼 원래 위험도가 높은 상품을 많이 운용하는 회사일수록 손실 상품의 절대 숫자가 많아질 수 있어서다. 같은 20% 손실이라도 시장 급락에 따른 평가손실인지, 투자자산 선정이나 레버리지 관리 실패에서 비롯된 손실인지에 따라 성격도 다르다.
때문에 업계에서는 단순 손실 건수보다 전체 운용 상품 대비 대규모 손실 상품 비중과 손실 발생 원인, 이후 회수율 등을 함께 살펴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럼에도 과거 대규모 손실 이력이 투자자에게 보다 직접적으로 노출된다는 점은 운용사 입장에서 부담이다. 특히 비슷한 상품을 다시 내놓을 경우 과거 부실 투자 사례에 대한 설명이 사실상 신규 상품 판매의 첫 관문이 될 수 있다.
변화는 자산운용사에만 그치지 않는다. 실제 투자자와 접촉하는 은행과 증권사 등 판매사의 상품 선정에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
펀드 판매사는 통상 여러 운용사가 제안한 상품 가운데 자체 심사를 거쳐 판매 상품을 선정한다. 앞으로 특정 운용사의 동종 상품에서 반복적으로 대규모 손실이 발생했다는 사실이 투자자에게 제공될 경우 판매사 입장에서도 해당 상품을 채택하는 데 이전보다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판매 이후 문제가 발생했을 때 투자자가 “과거에도 비슷한 상품에서 큰 손실이 났는데 왜 판매했느냐”고 문제를 제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운용사의 과거 운용 실적이 투자자 선택뿐 아니라 은행·증권사의 상품 라인업에 들어가기 위한 경쟁에서도 중요해질 수 있다.
반대 측면도 있다. 판매 과정에서 과거 손실 사례와 위험을 충분히 설명했다는 기록이 남는다면 향후 손실 발생 시 금융회사가 적정한 설명 절차를 거쳤다는 근거로 활용될 여지도 있다. 다만 단순히 서류에 손실 이력을 기재했다는 사실만으로 불완전판매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실제 판매 과정에서 투자자의 경험과 위험 감수 능력에 맞는 상품을 권유했는지, 핵심 위험을 충분히 설명했는지 등이 함께 판단될 수밖에 없다.
업계가 주목하는 대목은 이번 변화가 펀드 판매 경쟁의 기준 자체를 바꿀 수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 신규 펀드 시장에서는 최근 수익률이나 시장 전망, 유명 운용역의 이력 등이 중요한 마케팅 수단이었다. 하지만 과거 동종 상품의 대규모 손실 사례까지 투자 판단 자료로 활용되면 높은 수익률을 낸 경험뿐 아니라 큰 손실을 얼마나 피했는지도 운용사의 경쟁력이 될 수 있다.
특히 해외부동산처럼 투자자산의 유동성이 낮고 손실 회복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상품에서는 과거 위험관리 능력에 대한 투자자의 관심이 더욱 커질 가능성이 있다.
자산운용업계 관계자는 “과거 상품의 손실 이력이 신규 상품 판매 과정에서 투자자에게 보다 명확하게 제시되면 운용사 입장에서는 트랙레코드 관리의 중요성이 이전보다 커질 수밖에 없다”며 “판매사 역시 상품을 선정할 때 과거 운용 성과와 손실 사례를 이전보다 면밀하게 들여다보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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