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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태선 베어링자산운용 대표

곽태선 베어링자산운용 대표

‘펀드공장장’ 곽태선 베어링자산운용 대표의 투자철학은 선한 투자 원칙을 지키고, 고객을 먼저 생각하는 투자다. 그는 1억7천만원을 들고 창업, 세 번의 M&A를 통해 24년 만에 수탁고 9조원 규모의 자산운용사로 성장시켰다. 하버드 로스쿨 법학도가 인적네트워크가 전무했던 국내에서 성공하기까지는 사연도 많았다.
곽태선 대표가 투자자문사를 창업한 지 24년, 펀드 환매가 일어나는 상황에서 베어링자산운용은 수탁고가 늘고 있다. 원칙을 지키는 투자로 대우채, 카드채 등의 리스크를 피해갔던 점이 시장에서 높게 평가 받았다.
소년은 어느날 아침, 거울 속에 비친 낯선 동양인을 발견하고 놀랬다. 작은 눈에 까만 머리카락의 모습은 미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생김새와 거리가 멀었다. 재빨리 뒤돌아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틀림없는 자신이었다. 아버지를 따라 미국에 이민 간 곽태선 베어링자산운용 한국법인 대표는 고등학교 시절까지는 스스로 미국인임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 한국인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미국 학교에서 ‘태권도 선생님’으로 불리며 잘 지낸 덕이다. 운동 잘하는 학생으로 인정받으며 학생회 부회장도 맡았다. 그런 그가 어느날 문득 거울을 보고 자신의 정체성에 눈을 뜬 것이다. 인생의 터닝포인트,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은 ‘한국’임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투자자문사를 창업한 지 24년, 곽 대표는 올해 최고 전성기를 맞았다. 월간 영업이익은 창업이래 제일 높고 직원수도 54명으로 가장 많으며, 수탁고도 9조원을 넘었다. 배당주 펀드가 시장에서 주목 받았던 지난해에는 배당주 펀드로는 신영자산 다음으로 많은 수탁고가 유입됐다. 개인 투자자와 기관투자자로부터 각각 4천억원의 투자금이 지난해에 이어 올해 유입됐다.

베어링자산운용은 지난해 배당주 펀드로 3개의 상을 수상했고, 올 들어 국내 채권부문 최우수 중소형 운용사로 선정되는 등 채권부문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지난 3월에 아시아·태평양 지역 경제월간지인 아시안인베스터(AsianInvestor)가 주관하는 ‘2015 아시안인베스터 코리아 어워즈’에서 국내 채권부문 최우수 중소형 운용사에 선정됐다. 지난해에는 중소형 운용사로는 유일하게 국내 주요 공적 연금 운용사로 선정되었고, 올해 국민연금 공단이 선정하는 상반기 국내주식 위탁운용사 중 배당주형 운용사에 이름을 올렸다.

베어링자산운용의 호조는 베어링이 세이에셋코리아를 인수한 2013년 이후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동안 곽 대표는 세 번의 M&A를 성사시켰다. 1992년 정진호 MC 파인스트리트 자문 대표와 손빈 전 엑츠투자자문 대표와 함께 자문사인 ‘에셋코리아’를 공동 창업했다. 이후 동양 투자자문과 합병했고, 다시 SEI Investments, IFC와 합작을 거쳐 세이에셋코리아를 만들었다. 그런 격변의 시기에도 곽 대표는 변함없이 한 곳에 서 있었다.

“우리를 믿고 투자해준 고객을 우선 생각하며 M&A를 진행했습니다. 1997년에는 자산운용사 라이센스 구하기가 어려워 동양과 합병했고, 2013년에는 개인 주주로서 회사를 키우고 안정성을 유지하는데 한계가 있다고 판단, 글로벌 회사와의 인수를 진행했고요.”

집을 팔아 마련한 1억 7천만원으로 시작한 조그마한 회사는 2013년, 굴지의 글로벌 회사인 베어링이 인수할 만큼 성장했다. 사업을 시작한 지 무려 22년만이다. 장기 투자한 셈이다. 세이에셋코리아는 외국계 회사가 지분을 100% 보유하고 있는 회사임에도 직접 운용비중이 98%를 넘어 탄탄한 국내 운용기반을 다졌다는 점을 높이 평가 받았다. 곽 대표는 ‘M&A’는 인생과 비슷하다고 했다. 회사의 생과 사를 경험하는 것이니만큼 평가 요소를 미리 알고 회사를 경영했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후회도 해보지만 되돌릴 수 없다.

24년, 그의 회사가 성장하는 동안 함께했던 동료도 여럿이다. 자산운용사의 ‘M&A’는 사람을 보고 하는 것이기에 이탈하는 직원이 없다는 점도 평가 받을 만하다. 16년을 같이 일한 박종학 CIO를 비롯해, 길게는 21년 짧게는 10년 이상 근무한 직원이 6명을 넘는다. 곽태선 대표는 말한다. “이들 중에 우리 회사 차기 대표와 차차기 대표가 나올 때까지 내가 열심히 뛰겠다”고. 고객과의 약속을 지키고 직원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사업하는 재미라고 했다. 고객을 우선하는 경영철학은 내부고객의 만족도에서부터 시작된다. 근속년수는 이를 표현할 수 있는 좋은 수치다.

곽태선 대표의 ‘더디 가도 원칙을 지키는 투자’와 ‘사람 아끼는 경영’은 그의 성장과정과 닮아 있다. 곽 대표는 스스로 ‘늦된 인생’이라고 말한다. 미국생활 초기인 중학교 1학년 무렵, 그는 영어를 익히는데 급급했고, 영어가 익숙해질 즈음에는 역사 공부가 발목을 잡았다. 역사책을 통째로 외우며 미국 친구들의 뒤를 부지런히 따라갔다. 미국 이민 세대들이 그랬듯이 소수민족 시민으로 존경 받으며 쉽게 자리잡을 수 있는 의사나 변호사가 되라는 부모님의 뜻도 별다른 거부없이 받아들였다.

“자기 자신의 목표가 뚜렷했던 친구들에 비하면 저는 열심히 공부한 것도 아니다”며 곽 대표는 하버드 로스쿨 시절을 회상했다. 미국인도 어려워하는 변호사 자격을 이민자 출신이 취득하기까지는 어려움이 많았다. 하루에 300쪽 넘게 책을 읽었고, 주말에도 하루에 4시간씩만 자며 공부에 매달렸다.
 변호사에서 애널리스트로, 한국에 돌아오다
곽 대표는 미 콜롬비아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 하버드 로스쿨 법학 박사 과정을 마치고 쿠더트브러더스 법률사무소 변호사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다. 1988년 베어링증권 조사부에 입사한 뒤 4년 간 리서치 팀을 총괄하며 기업 분석 및 탐방을 다녔다고 했다. 변호사에서 애널리스트로 전환점을 찍은 것이다. 17년 만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한국 금융시장의 발전에 조금이라도 기여하겠다’는 꿈을 키워나갔다.

역사학도 출신으로서 남다른 시장 예지력이 있었던 것일까? 그는 미래에는 아시아에 기회가 더 많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국은 1970년대에 전성기를 지나 빈부격차, 종교, 인종 등의 사회 문제가 대두되며 성장이 더딜 것으로 판단한 것. 곽 대표가 한국으로 돌아온 두 번째 이유다. “아시아는 기회의 땅입니다. 베어링도 그룹 차원에서 아시아 시장에 관심이 많습니다. 아시아 시장의 GDP는 성장하는 만큼 시가총액에 반영되지 않지요. 미국은 GDP 규모에 비해 시가총액이 차지하는 비중이 월등히 높은 편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아시아 시장이 늘 저평가됐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한국 생활은 그렇게 시작됐다. 미국처럼 운전석 옆 좌석을 상석으로 알고 있었기에 한국에서도 귀한 고객에게 옆 좌석을 권했다가 괜한 오해를 사기도 했다. 한국말은 서툴고 비즈니스 편지 쓰는 것도 어눌했다. 우선 일선 기업체의 비서와 소통이 원활하지 못했기에 CEO와의 만남은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그 흔한 학연, 지연, 혈연 하나 없이 비즈니스 네트워크를 만드는 일은 그에게 난제 중 난제였다. 엄숙한 분위기에서 저녁을 먹다가 술자리에서 갑작스레 풀어지는 한국 특유의 문화는 아직도 낯설다. 고향을 따져봐도, 출신학교를 꼽아봐도 아무런 공통점이 없었다. 한국의 드라마나 연예계 화제가 나와도 모르기는 매한가지였다. 한국인인 그가 정작 한국에서 아웃사이더라는 느낌을 지우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였을까? 곽 대표의 비즈니스는 임원이 아닌, 평직원과 비서직 사원에서부터 시작됐다. 하지만 조금 친해졌다 싶으면 타 부서로 발령 나는 바람에 당장 비즈니스로는 연결되지 못했다. 그러나 기회는 짧게는 10년, 길게는 20년쯤 후에 오기도 한다. 평직원이 임원이 되어 돌아오는 것이다. 결과로만 보면 그게 더 좋았다. 학연과 지연으로 포장된 관계가 아닌, 진짜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리한 비즈니스가 없었으니 불필요한 ‘민원’을 해결할 일도 없었다.
 고지식하리만큼 원칙적인 비즈니스
변호사 출신답게 그의 비즈니스는 고지식하리만큼 원칙적이다. 단기에 높을 수익률을 내서 수탁고를 늘리려 하지 않고 장기적으로 운용해 고객에게 좋은 성과로 되돌려 주었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위험하지만 수익률이 좋은 대우 채권을 사자는 유혹을 뿌리쳤다. 2003년에도 거품 많은 카드회사들의 채권을 담지 않아 리스크를 피했다. 이로 인해 단기적인 영업에는 차질이 있었지만 큰 리스크는 모두 피해갈 수 있었다. 1997년 IMF 당시에는 외국 투자자들에게 한국 상황이 좋지 않으니 투자금을 회수하라고 권유했다. 회사는 수탁고가 바닥나 위기였지만 그는 이렇게 고객의 손실부터 우선 막았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이 곽 대표가 기관 투자자에게 ‘신뢰’를 얻는 계기가 됐음은 물론이다.

IMF 당시 그는 직원들과 투자 공부를 열심히 했다. 수탁고가 거의 없어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가겠다는 직원도 없었으니 회사 대표로서 부담도 엄청났다. 그 무렵, 12명 직원의 월급을 주려면 눈물이 나올 정도로 힘들었다. 하지만 그는 그 와중에도 직원들을 홍콩과 런던에 연수를 보냈다. 그 자신은 투자 리포트를 쓰거나, M&A를 성사시키며 1년을 버텼다.

내실을 다지며 위기를 극복한 곽 대표는 2002년, 국내 최초 ‘고배당 펀드’를 출시하며 리테일 시장에 이름을 알렸다. 당시 소프트클로징(신규 판매 중단)을 할 정도로 시장의 주목을 받았다. 설정된 지 13년 된 ‘베어링 고배당 주식형 펀드’는 누적 수익률 337%(A클래스 기준)로, 코스피 대비 204% 초과한 수익률을 기록하고 있다. 수익률과 수탁고가 꾸준히 늘어나는 상승 곡선은 곽태선 대표의 인생 그래프와 비슷하다.

곽태선 대표에게 추천 펀드를 물어보았다. 그는 보수적인 성향의 투자자에게는 ‘베어링 고배당 40 플러스 채권혼합 펀드’를, 공격적인 투자자에게는 ‘베어링 코리아 셀렉트 펀드’와 ‘베어링 차이나 셀렉트 펀드’를 추천했다.

은퇴 후에는 국내에 살고 있는 외국인을 돕거나 통일시대를 대비하고 싶다는 곽 대표. “주식이 폭락하면 채권이 오르고 달러가 오르지만 영원히 오르지 않듯이, 이머징 마켓도 기회가 올 것”이라며 “우리 인생도 힘든 때를 겪으면 반드시 웃는 날이 온다”고 했다.

- 글 김성숙 포브스코리아 기자·사진 홍승모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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