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아닌 하나’ 대만·중국 애증의 70년 [채인택 글로벌 인사이트] - 이코노미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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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아닌 하나’ 대만·중국 애증의 70년 [채인택 글로벌 인사이트]

‘하나의 중국’ 개념에 구두 합의했지만
공산·민주 진영간 정치적 충돌 평행선

 
 
중국의 정치적 압박이 가중되는 가운데 차이잉원 대만 총통이 지난 6월 타오위안 군사 기지를 방문해 대전차 로켓 장치를 살펴보고 있다. [사진 대만총통부]

중국의 정치적 압박이 가중되는 가운데 차이잉원 대만 총통이 지난 6월 타오위안 군사 기지를 방문해 대전차 로켓 장치를 살펴보고 있다. [사진 대만총통부]

 
중국군은 대만의 서쪽 바다인 대만해협에는 다연장 로켓포를 발사했으며, 동쪽 바다로는 미사일을 발사해 대만 상공을 넘어갔다. 일부 미사일은 대만 동쪽 오키나와 주변에 있는 일본의 배타적경제수역(EEZ)에 낙하해 일본이 항의했다.  
 
중국은 미국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에 미국이 아닌 대만에 분풀이한 셈이다. 아울러 이런 군사작전으로 대만의 국제교역을 언제라도 막을 수 있음을 보여줬다. 이를 계기로 중국과 대만의 오랜 애증 관계를 알아본다.  
 
대만은 한국의 3분의 1 정도인 3만6197㎢의 면적에 인구 2341만 명이 거주한다. 작은 나라이지만 대만 경제는 만만치 않은 실력을 보여준다. 대만은 국제통화기금(IMF) 2022년 전망치로 국내총생산(GDP)이 명목 금액 기준 8412억 달러(세계 21위), 구매력 기준(PPP)으로는 1조6037억 달러(19위)다. 명목 금액 기준 1조8046억 달러(12위), PPP로 2조7358억 달러(14위)인 한국의 절반 정도의 경제력이다.  
 
1인당 GDP는 명목 금액 기준으로 3만6051달러(37위)로 3만4994달러(38위)인 한국을 넘어섰다. PPP 기준으로는 6만8730달러(14위)로 5만3051달러(30위)인 한국을 한참 넘어섰다. 뿐만 아니라 네덜란드(6만8572달러)‧독일(6만3271달러)‧스웨덴(6만2926달러)‧호주(6만1941달러)‧벨기에(6만1941달러)‧캐나다(5만7812달러)‧프랑스(5만6036달러)‧영국(5만5301달러) 등 쟁쟁한 서구 선진국보다 많다.  
 
대만은 최근 경제성적표를 보자. 2020년 3.36%, 2021년 6.57%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으며, 2022년 전망치도 3.91%다. 인플레율은 2022년 7월 전망치로 3% 수준으로 안정적이다. 우등생의 성적표가 아닐 수 없다. 중요한 점은 2016년 대만 독립파로 분류되는 민진당의 차이잉원(蔡英文) 총통이 취임한 이래 중국이 끊임없이 경제제재와 압박을 가하는 와중에도 대만이 이런 경제성장을 거뒀다는 사실이다.  
 
그런 대만은 지난 70년 이상 중국과 애증의 관계를 반복해왔다. 대만의 공식국호인 중화민국은 1911년 중국의 국부 쑨원(孫文)이 신해혁명으로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세운 중국 최초의 공화국이다. 1949년 들어선 공산정권인 중화인민공화국과 뿌리를 달리한다.  
 
중화민국은 군벌 지배 등 복잡한 시기를 거쳐 1926~28년 장제스(蔣介石)가 북벌로 군벌세력을 타도하고 중국을 재통일한 뒤 중국국민당이 일당독재를 하면서 중국 전체를 사실상 지배했다. 하지만 국민당 정권은 항일전쟁 시기를 거치면서 세력이 커진 중국공산당에 밀려 내전에 패배하고, 1949년 7월 국부천대(國府遷臺)라는 이름으로 대만으로 본거지를 옮겼다. 국민당은 1949년 5월 20일 계엄령을 선포하고 대만을 철권 통치했으며, 계엄령은 1987년 7월 15일까지 이어져 세계 최장의 기록을 세웠다. 국공내전 말기인 1947년 2월 28일부터 5월 16일까지 민간인 학살인 2‧28 사건이 벌어져 어두운 역사로 기록됐다.  
 
1950년 6‧25전쟁 당시 북한 정권을 돕기 위해 인민지원군이라는 이름으로 한반도에 파병하느라 대만 침공 기회를 놓친 중국은 끊임없이 대만을 군사적으로 위협했다. 1954년 대만이 중국과 공동방위협정을 추진하자 중국은 그해 9월 3일부터 이듬해 5월 1일까지 대만이 영유하고 있는 진먼다오(金門島)와 마쭈(馬祖) 열도를 포격했다. 진먼다오는 본토인 푸젠(福建) 성에서 1.8㎞ 떨어졌고, 마쭈 열도는 67㎞ 거리에 있다. 대만은 미국과 54년 12월 공동방위협정을 맺었다. 대만에선 9‧3 포격전, 국제적으로는 제1차 대만해협 위기로 불리는 사건이다.  
 
1958년 8월 23일부터 10월 5일까지 중국은 진먼다오에 50만 발의 포탄을 쏘았다. 대만에선 8‧23 포격전, 국제적으로는 제2차 대만해협 위기로 불리는 군사적 충돌이다. 대만도 항공기를 동원해 푸젠 성 샤먼(廈門)역을 파괴하는 등 반격했다.  
 
고(故) 리덩후이 전 대만 총통. [AP=연합뉴스]

고(故) 리덩후이 전 대만 총통. [AP=연합뉴스]

중국, 시장경제 앞세워 대만 관계 열었으나

이 포격은 중국이 진먼다오를 시작으로 대만을 공격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된다. 중국은 1953년 7월 6‧25전쟁이 정전되자 120만 명에 이르는 파병 병력을 55년까지 재건과 농업지원을 위한 15개 사단 25만 명만 남기고 철수시켰다. (완전 철수는 북‧중 관계가 악화한 1958년) 중국은 귀환 병력을 바탕으로 1955~56년에 걸쳐 대만 맞은편 동남부 지역에 군사용 철도‧도로를 건설하고 여섯 군데에 군용 비행장을 세우는 등 대만 침공을 준비한 것으로 관측된다. 중국은 소련으로부터 기술 지원과 면허를 받아 미그-17 전투기를 J-5라는 이름으로 국내 생산했다.  
 
이런 상황에서 시작된 공세적인 포격은 그해 10월 5일에 끝났다. 대만이 진먼다오를 국방과 자존심의 상징으로 삼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면 포격을 중단한 뒤에도 중국은 정기적으로 진먼다오를 포격했으며 이는 중국이 미국과 수교한 1979년 1월 1일까지 약 21년 동안 이어졌다. 1971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중화민국이 맡던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지위를 계승하고, 대만을 유엔에서 축출한 뒤에도 포격은 계속 이어졌다.    
 
이렇게 대립하던 중국이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내세우며 경제발전에 나서면서 대만과의 관계도 해빙 바람이 불었다. 개혁 개방으로 대만의 경제 노하우를 습득할 필요를 느끼면서 진먼다오 포격도 중단했다. 중국의 대만 압박은 정치적이면서도 경제적인 성격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치에서 경제로 차츰 무게 중심이 바뀌어왔다는 평가도 가능하다. 중국이 그때그때 정치적인 내부 필요성에 따라 대만을 하나의 핑곗거리로 활용해왔다고 볼 수도 있다.  
 
중국은 소련과 동유럽의 공산 세력이 무너진 이듬해인 1992년 11월 홍콩에서 대만의 해협교류기금회(海基會)와 중국의 해협양안관계협회(海峽會)가 ‘하나의 중국’ 개념에 구두로 합의하면서 교류의 물꼬가 트였다. 이른바 ‘92공식(公識‧Consensus)’으로 불리는 개념이다.  
 
하나의 중국이란 개념에는 인식을 함께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각자 해석한다며 ‘하나의 중국, 각자 해석(一個中國各自表述)’으로도 부른다. ‘원칙’이라고 칭하면 반드시 지켜야 하며 변경에 어렵다는 부담이 있고, ‘정책’이라고 부르면 대만을 국가나 정부로 인정하는 것이 되므로 ‘92공식’이란 이름이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중국은 그 뒤 대만의 역대 정권에 ‘92공식’의 재확인을 계속 요구해왔다.  
 
대만은 장기 집권을 해온 장제스 총통이 1975년 세상을 떠나자 아들인 장징궈(蔣經國)가 1978~1988년 집권했으며, 장징궈 총통의 사망으로 리덩후이(李登輝) 부총통이 뒤를 이었다. 리덩후이는 장제스나 장징궈처럼 1945년 이후 본토에서 이주한 외성인이 아니라 그 전부터 대만에 정착해 살고 있던 한족을 가리키는 내성인으로는 처음 총통에 올랐다.  
 
여기서 대만인의 내부 구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만인은 명나라 말기와 청나라 초기 본토에서 이주한 한족인 내성인 85%와 국공내전 이후 옮겨온 외성인12%, 그리고 오래전부터 살고 있던 오스트로네시아어족 원주민 2.38%로 이뤄졌다.  
 
공식적으로 16개 부족이 존재하는 선주민들은 한족과 인종과 언어 풍습에서 확연히 구분된다. 과거 산지동포‧산지족 등으로 불렸으나 1994년대 부족의 요구에 따라 원주민족으로 고쳐 부르고 원주민위원회도 설치했다. 민주화의 영향이다.  
 
내성인은 1624~1662년 현재의 대만 타이난(臺南)에 잘린디아 성과 프로방시아 요새를 건설하고 대만을 지배한 네덜란드인들이 농장운용과 교역에 종사할 인력을 본토에서 데려오면서 이주가 늘었다. 당시에는 이전에 이 섬을 지난 포르투갈 선원에 의해 포르모사(아름다운 섬)로 불렸으며 서양에 그 이름으로 알려졌다.  
 
명나라가 무너지고 청나라가 중국 전역을 장악해가던 명‧청 교체기인 17세기에 푸젠 등에서 해상 세력을 이끌던 정성공((鄭成功‧1624~1664)이라는 인물이 1661년 병력을 이끌고 대만으로 건너와 이듬해 네덜란드 총독의 항복을 받고 몰아냈다. 대만 남부 타이중(臺中)에는 네덜란드인의 항복을 받는 정성공의 동상이 있으며, 그의 이름은 대만의 군함에도 붙어있다. 그의 동상은 지금은 츠칸러우(赤嵌樓)로 부르는 프로방시아 요새 자리에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왼쪽)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AFP=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왼쪽)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AFP=연합뉴스]

대만의 민주화·친미 강화에 압박 나선 중국

정성공은 일본과 중국 사이의 무역에 종사하던 중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정성공과 그의 후손들은 동녕왕국(東寧王國)을 세워 1361~1383년 통치하다 청나라에 흡수됐다. 이를 계기로 한족들이 대거 대만에 몰려와 정착했다. 대만은 이를 대만 근대사의 시초로 보고 이곳을 관광지로 꾸며놓았다. 대만은 17세기까지 중국의 일부가 아니고 별도의 지역이었던 역사가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1988~1990년 장징궈의 남은 임기 동안 재임한 뒤 1990년 6년 임기의 총통에 오른 리덩후이는 민주화 작업에 나섰다. 리덩후이는 헌법을 고쳐 총통 직선제를 실시하고 임기도 6년에서 4년으로 줄였다. 국민당의 리덩후이는 첫 총통 직선에서 당선해 1996~2000년 재임했다. 2020년 7월 30일 세상을 떠난 리덩후이 총통은 대만 민주화의 아버지로 통한다.  
 
한 국민당 리덩후이의 뒤를 이어 민진당의 천수이볜(陳水扁)이 야당 출신으론 처음으로 총통에 당선했다. 천수이볜은 재선에 성공해 2000~2008년 재임했다. 그의 뒤를 이어 국민당의 마잉주(馬英九)가 총통에 당선하고 재선까지 이어져 2008~2016년 재임했다.  
 
그뒤 민진당의 차이잉원(蔡英文) 총통이 2016년 5월 취임했으며 2020년 재선해 현재에 이른다.    
 
대만이 민주화되고 미국과 관계가 좋아지자 중국은 즉각 대만에 대한 압박에 나섰다. 중국은 1995년 7월 21일부터 1996년 3월 23일에는 제3차 대만해협 위기가 발생했다. 1995년 대만의 리덩후이(李登輝) 총통이 남미 순방 중 미국 코넬대 초청으로 방미해 ‘대만의 민주주의 경험’에 대해 연설하자 불만을 품은 미국이 대만해협에서 미사일을 시험 발사했다. 대만도 미국산 호크 미사일을 시험 발사하고 전투기를 출동시켰으며, 미국은 항공모함 니미츠 함과 순양함 벙커힐을 대만해협에 파견했다.    
 
2000~2008년 대만 독립 성향을 드러냈던 민진당 소속 천수이볜(陳水扁) 총통 집권기에 양안 관계는 얼어붙었다. 하지만 2008~2016년 국민당 소속 마잉주(馬英九) 총통 시절에는 다시 훈풍이 불었다. 2010년 사실상 ‘양안 자유무역협정(FTA)’인 경제협력기본협정(ECFA)을 체결했다. 양안 교역 규모는 2009년 1062억 달러에서 2014년 1983억 달러로 비약적으로 늘었다.  
 
이 과정에서 대만의 중국 의존도 심화한 것으로 평가된다. 중국은 대만의 중국 의존을 이용해 2016년 1월 대만 총통 선거에 독립을 주장하는 민진당 차이잉원 후보를 압박했다. 차이잉원 총통이 당선하자 중국은 단체관광객 송출을 중단하는 등 경제적 압박에 나섰다.  
 
중국 관광객 급감으로 어려움을 겪은 대만 여행업자들은 그해 9월 12일 타이베이의 총통부 앞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숙박업·관광버스업 종사자와 여행 가이드 등으로 이뤄진 13개 노조 단체 2만여 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차이 총통에게 중국 단체관광객 송출을 복원할 대책만 촉구한 것이 아니라 제3의 대안도 제시했다.  
 
줄어든 중국 단체관광객만큼 다른 나라 관광객을 늘릴 수 있도록 동남아 10개국에 대한 비자 면제 조치를 요청한 것이다. 동남아에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 중국 의존을 줄이는 신남방 정책의 일부다. 이는 대만의 장기적인 국가전략으로 자리 잡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도 중국은 수출상품 생산에 필요한 반도체 등 대만산 부품, 소재 수입과 인적 교류는 줄이지 못하고 있다. 경제 구조상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반도체 자립을 외치지만 시간이 필요한 상황이다. 미국은 첨단 반도체 제조에 필요한 장비 수출도 제한을 가할 태세다.  
 
이번 펠로시가 방문하자 중국이 대만에 가한 경제 보복은 일부 과일의 수입 금지가 핵심이었다. 중국의 한계이자, 대만의 긍지다. 대만 반도체의 힘이기도 하다. 세계 최대의 파운드리 업체인 TSMC와 3위인 UMC, 반도체 설계 분야 10대 기업 중 미디어텍·노바텍·리얼텍·하이맥스 등 4개 업체가 대만 기업일 정도다. 중국이 대만 침공과 흡수를 노린다는 관측이 끊이지 않는 경제적인 배경이기도 하다. 대만해협 위기를 심층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는 이유다.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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