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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NOM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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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락 구성이 혜자롭네”...편의점업계, ‘혼설족’도 챙긴다

유통

편의점업계가 혼설족 챙기기에 나섰다. 통계청에 따르면 1인 가구 비율(2023년 기준)은 35.5%로 집계됐다. 지난 2016년(27.9%)과 비교하면 7.6%p 늘었다. 1인 가구가 꾸준히 증가하면서 설 연휴를 혼자 보내는 사람들을 위해 CU·GS25·세븐일레븐 등 편의점들이 다양한 먹거리를 선보인다.28일 업계에 따르면 CU는 최근 총 11가지 음식이 담긴 알찬 구성의 도시락을 출시했다. 이 도시락은 전·잡채·나물·돼지불고기 등과 함께 후식 찹쌀떡까지 담긴 것이 특징이다.이에 앞서 CU는 ‘신년맞이 떡만둣국’을 선보이기도 했다. 해당 도시락은 달걀 지단과 소고기 고명을 올린 떡만둣국에 흰 쌀밥·깍두기·김치전·부추전 등 반찬이 담긴 알찬 구성으로 소비자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BGF리테일 간편식품팀 노수민 MD는 “명절 음식을 하나하나 준비하기 어려운 1~2인 가구를 위해 명절 간편식을 기획하게 됐다”며 “편의점 명절 간편식이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만큼 매해 알찬 구성의 도시락을 기획해 고객의 합리적인 소비를 도울 것”이라고 말했다. GS25는 혼설족을 위해 ‘혜자로운설명절도시락’을 선보였다. 해당 도시락은 궁중요리로 알려진 ‘구절판’을 콘셉트로 기획됐다. GS25는 명절 대표 요리 등 9개 메뉴를 선별해 가로·세로 3칸씩 총 9칸으로 나눈 특별 용기에 담았다.한 종류의 밥과 다양한 반찬을 곁들이는 일반적인 도시락 구성과 다르다는 점도 특징이다. GS25는 불고기·너비아니·모둠전·3색 나물 등 설날 대표 음식 6종과 전복톳밥·흑미밥·김치볶음밥 등 밥 메뉴를 무려 3종까지 늘려 차별화된 도시락을 만들었다.새로운 먹는 재미와 취식 만족도 등을 한층 더 높이고자 반찬과 함께 밥 메뉴까지 다양화하는 도시락 구성 전략을 혜자로운설명절도시락을 통해 처음 선보이게 됐다는 게 GS25 측 설명이다.안진웅 GS25 도시락 MD는 “매년 선보이는 명절 도시락의 관심도가 지속 커짐에 따라 역대급 구성의 혜자로운설명절도시락을 선보이게 됐다”며 “명절 연휴 기간 편의점을 방문하는 고객 수요를 분석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상품, 서비스 준비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세븐일레븐도 혼설족을 잡기 위한 도시락 경쟁에 뛰어들었다. 이 회사가 최근 선보인 설 명절 도시락은 ‘안유성 명장 마늘갈비정식’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대한민국 제16대 조리 명장인 안유성 셰프와 세븐일레븐이 손을 잡았다.해당 도시락은 안유성 명장이 운영하는 ‘장수회관’의 시그니처 메뉴인 ‘마늘양념갈비’를 메인으로 한다. 하얀 백미밥에 마늘갈비·고기산적·계란구이·모둠전 4종·나물볶음 등이 조합돼 설 명절 분위기를 물씬 느낄 수 있다.매 명절마다 출시한 도시락 중에 스타 셰프와 협업해 맛과 품질을 강화한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라는 게 세븐일레븐 측 설명이다.세븐일레븐은 ‘신년운세떡만둣국’과 ‘세븐셀렉트 우리쌀사골떡국’도 명절 간편식으로 함께 선보였다. 구수한 사골 국물을 기반으로 국내산 햅쌀로만 100% 제조된 쫄깃쫄깃한 식감의 떡이 담겼다. 상온 보관이 가능하고 전자레인지 조리없이 뜨거운 물만 부어 간편하게 조리할 수 있다.유은미 세븐일레븐 푸드팀 MD는 “역대급 연휴 기간인 만큼 혼설족들을 위해 안유성 명장과 손잡고 명절 도시락을 구성했다”며 “도시락 하나에 최대한 많은 명절 음식을 담고자 했으니, 설 명절 도시락을 든든하게 맛 보시고 풍성한 설날 보내길 바란다”고 말했다.

2025.01.28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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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명은 나의 힘’…한국의 에디슨, 전파통신 명장이 일거리 사이트를 만든 이유는[대한민국 명장]

산업 일반

그들은 남들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묵묵히 한 자리에서 15년 이상 일했다. 분야도 다양하다. 한복생산부터 제빵·금형·석공예·용접 등 한국 사회가 움직이는 데 꼭 필요한 것들이지만 흔히 말하는 3D 업종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들은 일이 어려워도 편법 대신 원칙에 충실하면서 자신의 맡은 바를 끝까지 해낸 장인들이다. 그들에게 한국 사회는 '대한민국 명장'이라는 명예로운 타이틀을 기꺼이 부여했다. ‘이코노미스트’는 창간 40주년을 맞이해 꽃보다 아름다운 명장의 인생사를 담은 '대한민국 명장' 시리즈를 시작한다. 대한민국 명장은 고용노동부가 고시한 38개 분야 92개 직종에서 최고 수준의 숙련기술을 보유한 이들 중에서 중에서 대통령 명의로 선정된 기능인을 말한다. 지금까지 699명이 대한민국 명장으로 선정됐다. <편집자주>정석영 전파통신 명장은 70이 넘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눈에 총기가 가득했다. 전파통신 명장이자 정보통신 기술사인 그는 ‘발명왕’으로도 유명하다. 지금도 계속해서 신기술에 도전하고 있다. 최근에는 2025년 상반기 오픈을 목표로 ‘일잡이넷’이라는 일거리, 일자리 및 아이디어 거래를 포괄하는 종합 플랫폼을 개발 중이다.정 명장은 과거 구룡포수산고등학교 어로항해과를 졸업했다. 당시에는 취직반과 진학반이 존재했다. 정 명장은 취직반에서 높은 성적을 받았다. 그는 “출신학교에서 어로항해과 졸업생은 학교장 추천으로 해외 참치잡이 원양어선 견습항해사로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홀로 계신 노모를 두고 3~4년씩 바다를 떠도는 일을 택할 수는 없었다”며 “담임선생님의 안내로 인천의 한 개인기업에 취직하게 됐고 우여곡절 끝에 어업용 전자·통신장비를 수리하는 기술자의 길을 걷게 됐다”고 말했다.수협중앙회 입사 후 시스템 개선정 명장은 낮에 일하면서도 밤에는 해외 현장기술자들이 저술한 기술서적을 찾아 읽었다. 주경야독이었다. 고교 시절 학습 경험이 유저 특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돼 빠른 기간 내에 ‘해양+전자+통신’ 융합기술자로 자리 잡게 된다. 원서로 기술을 배우고 장비를 수리하던 입직 초기의 이론·실무 경험은 여러 선진국 기술들을 이해하고 나아가서는 세계 최고성능을 추구하는 발명 마인드로 이어지는 동기가 됐다. 1975년부터 1979년까지 군복무를 거쳐 속초에서 부산으로 옮겨가면서 새로운 문물과 환경을 접하며 실력을 쌓았다. 1979년 당시 통신기술자들이 선망하던 수협중앙회 어업통신부에 공채 1위로 입사했다. 당시 수협중앙회 어업통신부는 바다에서 조업하고 있는 어선들의 안전 여부를 무선통신으로 관장하는 곳으로 국고보조를 100% 받는 공익기관이었다. 당시 직원 300명은 주요 항구 40개소의 어업무선국에 분산 근무했다.정 명장은 “첫 부임지는 울릉도 소재 울릉어업무선국이고 울릉도 관내 어선의 무전기를 수리해 주는 것이 직무였는데, 그에 그치지 않고 ▲집어등 발전기 ▲어군탐지기 ▲레이다 등 어로·항해용 전자장비까지 해결해주며 인기리에 3년여 간 근무했다”고 말했다. 정 명장은 울릉어업무선국 3년의 근무를 마친 뒤 ▲감포(3년) ▲구룡포(3년) ▲속초(3년) 어업무선국을 차례로 거치며 본연의 직무 외에도 인근 어업무선국들의 해묵은 기술적 문제를 해결하는 해결사 역할을 했다. 문제 해결 능력이 본부에 알려지면서 1991년 서울로 발탁돼 전국을 무대로 시스템을 개량해보라는 임무를 받게 됐다. 이 임무가 기술인으로 도약하는 시발점이 됐다.수협중앙회에 재직하며 발명가로서의 꿈도 키워나갔다. 35세에 시작한 발명은 전문기술인로의 활동과 궤를 같이하는 취미 겸 특기가 됐다. ▲1986년~1992년 승용차 유리문의 원터치 스위치 ▲1991년~1992년 자동차의 음주운전 예방 장치 ▲1991년~1993년 보일러의 실내온도 조절 장치 등을 발명했다. 정 명장은 168여 개를 발명한 지금도 신기술을 지속적으로 발명하고 있다. 인정교과서인 ‘특허법 일반’과, 시판용 ‘현장발명’을 집필 출판해 학생과 기술인들에게 창의력을 전파하고 있다.수협중앙회에서도 창의적인 업무해결 능력을 선보였다. 당시의 어업무선국은 은행 창구처럼 각 지역 무선국 직원들이 통신장비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바다에 있는 어선과 1대1로 통화하는 무선전화 운용방식이었다. 당연히 도서벽지에 사람이 상주해서 운용해야 하는 불편이 따랐다. 이를 혁신할 방안이 무선국 무인 원격운용 방안이지만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처럼 누구도 엄두를 내지 못하는 때에 1991년 본부로 발탁돼 개량 임무를 받게 됐다.정 명장은 “본부 근무 이듬해 어업무선국 무인 원격제어시스템 개발계획을 수립하고 시중 업체를 물색하게 됐다”며 “하지만 오직 하나 참여한 미국 하니웰사가 1국당 당시 돈으로 4억원이 필요하다는 견적을 제시하기에 예산절감 방안으로 시스템을 직접 설계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설계서를 기준으로 국내 업체와 협동 개발하는 방안을 제시해 다시 견적을 받은 결과 소요예산은 1억원으로 줄어들었고, 이에 당해연도 시범구축을 거쳐서 1997년까지 대상 20개소 전체를 무인화하는 기술적 대성공을 이뤘다”고 했다. 이를 통해 직원들의 근무생활 불편은 없어지고 300명의 정원을 137명으로 대대적 감축하는 경영개선계획이 만들어지게 됐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디지털 시스템 개발도 진행했다. 무인 원격제어시스템은 콜센터처럼 먼 장소에서 중앙집중제어 방식으로 여러 지역의 어업무선국 통신장비를 운용하는 시스템이다. 그러나 아날로그 통신방식은 24시간 불침번으로 근무해야 하는 불편을 해결할 수는 없고, 심야에는 자칫 중요한 조난사고 청취를 놓칠 수도 있다.정 명장이 1997년 국민제안 한 ‘어업정보통신시스템’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발명이었다. 정 명장은 직접 1997 정보화지원사업 공모과제로 해당 발명을 출품했다. 결과는 전국 150개 과제 중 1위였다. 이를 통해 실행기관으로 수협중앙회가 지명됐고 국고보조금 3억원을 받자 비로소 내부에서 반응하기 시작했다. 예산이 확보되자 전문업체를 이끌어 시범시스템을 개발하면서 한편으로는 기술사로 자격을 한 단계로 업그레이드하여 대외 활동 기반을 마련했다. 어선의 위치와 조업상황이 데이터베이스에 자동으로 축적되는 것이 확인되자 어업무선국은 어업정보통신국으로 개명되고 그에 맞는 부서 기능이 재편됐다. 어업정보통신시스템은 부실한 어획통계를 보완할 수 있는 획기적 기술로 평가받았다. 어업정보통신본부, 어업정보통신국이라는 명칭과 자동위치보고를 통한 어선조업상황DB 빅데이터는 그렇게 시작됐다. 그 후 후배들이 이어받아 현재 어업정보통신 종합관제시스템으로 발전했다. 정 명장은 지난 2006년 명장에 선정됐다. 개인발명이 포함된 무인 원격제어시스템으로는 당시 1년 예산 120억원 중 40%를 절감하는 효과를 얻은 것이 주효했다. 그는 “도입 13년 후 수협감사실로부터 1112명의 인력과 800억원 상당의 누적 절감 효과가 있음을 객관적으로 확인했다”며 “이에 대한민국명장 선정공고에 즈음해 수협중앙회장이 직접 추천했고 고용노동부 주관의 공개선정 절차로 2006년 대한민국명장에 선정됐다”고 말했다.정 명장은 명장에 선정된 이후에도 왕성한 활동력을 보여줬다. 2010년 대한민국명장회 감사로 선출된 후 회계·업무·공약 감사를 포괄하는 종합감사보고서 포맷을 만들어 정착시켰다. 회장과 2인의 감사를 동시에 선출하던 감사선출제도를 1년에 감사 1인씩 번갈아 선출하도록 감사 임기를 조정했다. 이를 통해 신임회장이 바뀌어도 중요업무는 연속되고 공약 이행이 중시되는 체제로 정작시켰다. 부회장 재직 시에는 직무발명위원회를 창설하고 그 활동 규정을 정관에 명시했다. 산업현장교수의 기업기술지원 직무범위에 현장발명 지원이 포함되도록 제도적으로 연계시켰다.2017년부터 2021년까지는 대한민국명장 심사위원에 위촉되고, 그 기간 중 2년은 위원장 역할을 맡았다. 위원장 시절에 스펙 위주로 정량 평가하던 서류심사에 성과반영을 위한 정성지표를 추가하도록 제언했다. 이를 통해 훌륭한 대상자가 면접심사 이전에 탈락하는 일이 없도록 한 것이다. 분야별 1인으로 제한했던 명장 선정 인원을 직종별 1인으로 약 3배 확대하도록 제언했다. 연간 7명 수준으로 감소했던 대한민국명장 최종 선정 인원을 13명 수준으로 늘어나도록 했다.명장 선정 이후에도 왕성한 활동2012년부터 2024년까지는 전국 20여 중소기업 현장에서 기업 맞춤형으로 현장발명 38건을 발굴 및 제공하는 기부 활동을 진행했다. 지원받은 기업 중 하나인 ㈜카네비컴은 현장발명 발굴기법과 맞춤형 직무발명 규정을 전수받은 결과 이제는 스스로 특허 50여 개를 보유할만큼 자립했고 이를 기반으로 연중 국책연구과제를 10개나 동시에 수행할 정도로 성장했다. 정 명장은 2018년부터 2020년까지 상장회사를 포함한 다수 기업 컨소시엄이 국가지원으로 태양광 관련 기술을 개발하는 연구개발(R&D) 과제에서 총괄연구책임자로 활동했다. 고도화를 위한 다음 단계에서 국가지원이 끊기고 코로나19 여파로 연구원 모두가 해체되자 이를 이어받아 2024년까지 ASIC 부품 형태로 고도화된 스마트파워펌프(SPP) 개발을 완료했다. SPP는 기존 태양광 모듈 면적을 30% 줄이더라도 발전 능력이 유지되도록 자동 제어한다. ▲롤링 ▲피칭 ▲방향 선회 및 터널 통과 등 복잡한 환경으로 시시각각 변하는 자동차에서도 태양광 발전이 가능하게 하는 초고속 제어 기술이 특징이다. 최근에는 창업 일선에서도 활약하고 있다. 정 명장은 “비록 자신이 창작한 기술이라도 기술유출 당사자는 엄한 처벌이 가해진다”며 “반면에 기술을 유출하지 않을 때의 보상은 경시되고 있다. 2017년 비록 늦깎이 창업이지만, 창업의 동기는 이런 창작자에 대한 보완적 대안을 마련하겠다는 취지”라고 말했다.정 명장이 창업한 ‘일잡이’라는 회사명은 창의력이 중시되는 일의 길라잡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비즈니스 모델은 스마트 파워 펌프(SPP)가 적용된 태양광 모듈용 전자장치(MLPE), 기술지식 서비스 및 창의력 기반으로 일거리 수요·공급을 매칭하는 인터넷 플랫폼 서비스다. 그는 “일잡이는 수익금의 30%를 참여기술자 보상에 할당하고 있어 기술인재들과 신구세대가 연합해 공동 번영을 위해 나아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밝혔다.최근 정 명장이 상당한 공을 들이고 있는 활동은 창의력 중심의 ‘일잡이넷’ 개발이다. 2025년 상반기 오픈을 목표로 개발중인 일잡이넷은 일거리, 일자리 및 아이디어 거래를 포괄하는 종합 플랫폼이다. 6개 특허로 비즈니스 모델을 뒷받침한다. 일거리에 해당하는 도급거래 사이트는 창의적 기업을 우대하는 서비스다. 예를 들어 특허권을 가진 업체가 입찰에 참여하면 특허기술의 유사도에 따라 특허 배지 마크를 표시한다. 마크 등급을 참조하면 우위 확보 또는 분쟁을 예방할 수 있다. 종합 플랫폼 ‘일잡이넷’ 도전아이디어 풀은 창의적인 일반인을 위한 서비스다. 일자리 구인구직 서비스와 결합, 기업과 개인의 인재 매칭을 도와준다. 예를 들어 아이디어 풀에 아이디어를 등록하면 발명자(제안자)는 열람료를 받을 수 있고, 만약 그가 구직자라면 이력서에 아이디어 배지를 표시하면서 기업이 인재를 영입하고자 할 때 열람할 수 있도록 링크한다. 일잡이넷에는 특허제품이나 장인 작품의 갤러리를 마련하는 한편, NCS 기반의 문답식 직무발명 판별 프로그램을 통해 숙련 기술인이 정년퇴직 이후에도 멘토로 활동할 무대를 제공할 계획이다.정 명장은 과거 대기업들과의 기술분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고 밝혔다. 그는 “정직하지 못한 공학인이 남의 것을 모방한 결과물을 두고 기업이 대리전을 벌이는 것이 특허분쟁”이라며 “아이러니하게도 40여건의 특허소송을 치르면서 극한 상황까지 갔던 경험은 정년퇴직 후 산업현장 교수로 독특한 업역을 개척하는 데 도움이 됐다”며 “전국 1500여 명의 대한민국산업현장교수 중 연속 6년간 1위로 평가받으면서 활동하게 하는 자산이 됐다”고 했다. 그는 “이번 서비스 플랫폼을 구축 완료해 후대에 넘겨주는 것이 목표”라고 덧붙였다.

2024.12.2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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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도배 고수들 꺾은 명장…“해외로 K-인테리어 전파하고파”[대한민국 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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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남들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묵묵히 한 자리에서 15년 이상 일했다. 분야도 다양하다. 한복생산부터 제빵·금형·석공예·용접 등 한국 사회가 움직이는 데 꼭 필요한 것들이지만 흔히 말하는 3D 업종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들은 일이 어려워도 편법 대신 원칙에 충실하면서 자신의 맡은 바를 끝까지 해낸 장인들이다. 그들에게 한국 사회는 ‘대한민국 명장’이라는 명예로운 타이틀을 기꺼이 부여했다. 는 창간 40주년을 맞이해 꽃보다 아름다운 명장의 인생사를 담은 ‘대한민국 명장’ 시리즈를 시작한다. 대한민국 명장은 고용노동부가 고시한 38개 분야 92개 직종에서 최고 수준의 숙련기술을 보유한 이들 중에서 대통령 명의로 선정된 기능인을 말한다. 지금까지 712명이 대한민국 명장으로 선정됐다. 주(住)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세 가지 요소 중 하나다. 이중에서도 주거의 주춧돌이 되는 도배는 실내 건축의 첫 단추이자 공간의 성격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다. 벽을 보호하기도 하고, 방습·방풍·방음 등의 기능도 수행한다. 도배를 단순히 벽지를 붙이는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많지만, 실제로는 계획 단계부터 세심한 준비와 숙련된 기술이 요구되는 고도의 작업이다. 국내 도배 산업을 이끌어 온 한 사람이 있다. 평생 도배공으로 살아온 ‘도배 명장’ 신호현씨는 48년 경력을 지닌 ‘도배의 신’으로 불린다. 60대인 그는 도배에만 50여 년의 시간을 쏟아부었다. 그는 고용노동부와 한국산업인력공단이 선정하는 대한민국 명장 실내 건축 분야에 지난 2015년 이름을 올리며 ‘도배 명장 1호’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한 분야에서 한 우물만 파며 성공을 이룬 그는 도배에 대한 자부심도 확고했다. 명장으로서 그는 이제 도배 인재 양성을 사명으로 여기고 대한민국 도배 기술 발전을 위해 아낌없이 나누고자 한다.방황하던 청년, 우연히 마주한 도배신 명장이 도배의 길에 들어선 것은 16세 때인 1976년. 학교를 그만두고 방황 중이었던 그는 우연히 도배를 접했고 이후 술값을 벌고자 이 세계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이게 됐다. “팔자인 것 같아요. 도배를 시작하고 나니 당구나 볼링치는 것도 재미없고, 도배에 빠져들게 됐죠. 마음이 차분해진달까. 수양하는 느낌도 들고, 절제도 되고. 유흥비, 용돈을 벌 겸해서 현장에 가기 시작했죠. 열여섯에 배워서 열일곱에 대장이 됐어요. 할아버지뻘 되는 분들에게 작업 지시를 하고, 제가 생각해도 당찼어요.”손재주가 좋았던 신 명장은 고향인 광주에서 금세 일인자의 자리에 올랐다. 1등이 되기까지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루 일을 끝내고도 현장에 남아 시공법이나 벽지에 대한 연구를 하며 도배에 대한 열정을 이어갔다. “혼자서 천장 10~20m를 도배했어요. 원래 서너 명이 붙는 작업인데, 혼자서 벽지를 발랐죠. 체력이나 손 감각이 겸비돼야 해요. 실력이 좋아지기 위해 별 노력을 다했어요. 혼자서 2~3일간 내 체력의 한계는 어디까지인지, 가장 높고 긴 천장을 어떻게 바를 수 있는지, 혹한의 추위를 견뎌보는 등 테스트했죠. 남들이 보면 미쳤다고 했을 거예요.” 이후 3~4년간 전국을 돌며 실력자들과 대결을 펼쳤다. 이를 ‘타짜 도배’라고 한다. 배낭 하나만 메고 전국을 돌며 신 명장은 전국구 도배 명인이 됐다.“전국을 돌아다니며 도배 고수를 깼어요. 지역이 대전이면 대전에 가서 이곳에서 제일 도배 잘하는 분을 찾아 그분의 현장에 가서 시합을 요청하는 거죠. 어린애가 오니까 ‘저리 가라’고 내쫓기도 했어요. 몇 날 며칠을 빈정대면 응해주더라고요. 결국 제가 다 이겼어요. 기술 세계에서는 기술이 최고면 ‘어른’인 거예요. 대결을 통해 이론과 기술을 습득하고, 또 이동하고, 그렇게 기술을 쌓아갔습니다.”도배 훈련을 독하게 하고, 전국을 다니며 대결을 펼친 신 명장이다. 어렸던 그에게 도배는 어떤 존재였을까. 여러 복합적인 요인이 있었지만, 일종의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한 수양의 수단이기도 했다.“어떤 일에 있어서 지는 걸 싫어하고,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근성이 있어요. 하지만 어린 나이에 울분도 있었던 것 같아요. 학교에서 사고를 치고 결국 안 다니게 됐고, 이러한 상황을 반전시키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죠. 도배를 하지 않았다면 거칠게 살다가 문제를 크게 일으켰을 것 같기도 해요. 근데 이게 도배로 순화가 되더라고요.”열정으로 이룬 명장의 자리 도배 외길을 걸어온 신 명장은 2015년 대한민국 명장으로 선정되면서 그 이력에 정점을 찍었다. 대한민국 명장은 고용노동부와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 15년 이상 산업현장에서 관련 직종에 종사한 최고의 숙련 기술을 보유한 기술자에게 수여되며, 실내 건축 분야에서 도배사로서 이 상을 거머쥔 건 신 명장이 최초다. 신 명장이 명장의 자리에 오르기 전까지 도배 분야에서 명장제도는 전무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신 명장 외에 도배 분야의 명장은 탄생하지 않고 있다.“실내 건축 인테리어가 국내에 도입된 지 50~60년이에요. 그런데도 이전엔 명장 제도가 없었죠. 그래서 직접 노동부에 베이커리, 미용 분야는 명장이 있는데 실내 건축 쪽엔 왜 없냐고 지속적으로 건의하기도 했어요. 결국 실내 건축 분야의 종목이 만들어졌어요. 명장이 되는 과정은 정말 어려워요. 수백 명이 지원했고, 이들이 6개월 동안 서바이벌 게임을 거쳐야 하죠. 서류·자격증·사회봉사·기술 수준·수상 이력·사회 기여도 등 모든 걸 합산해요. ‘기술이 좋다’는 수준으로는 안 돼요. 어디서도 보지 못한 신기를 보여줘야 해요. 세 명이 최종까지 올라갔는데, 일용직 도배사인 제가 된 거죠. 직업적 열정을 높이 봐준 것 같아요.” 명장이 되고 나서 느끼는 책임감이나 부담감도 있었을 것이다. 신 명장에게 명장이 되고 난 이후에 달라진 점이 있는지 물었다.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어요. 사람들이 명장이라 하면 거리감을 두려고 해요. 너무 어려워하는 게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관계성이 어려워지더라고요. 가까이 있던 사람들도 떠나기도 하고요. 수준이 너무 높아진 거죠. 좋은 점은 아무래도 국가가 인정했기 때문에 사람들도 인정을 할 수밖에 없죠.”신 명장의 이력은 명장의 수식어에 걸맞게 화려하다. 1977년 국회의사당 도배를 맡은 데 이어 청와대 영빈관·삼청각·국립박물관 등이 그의 손을 거쳤다. 뿐만 아니라 기업 총수 및 연예인들의 집을 수없이 작업했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자택을 시공할 때의 에피소드도 들려줬다. “유명인들의 자택을 시공하게 되면서 입소문을 탔어요. 일반 고객들과 도배 콘셉트가 조금 다르긴 하죠. 침실은 어둡게 하고, 단조롭지 않아요. 요즘은 많이들 차분하게 하죠. 정주영 회장 자택을 작업할 땐 ‘좋은 벽지를 쓰지 말라’고 했어요. 워낙 검소한 분이잖아요. 아파트 현장에서 남은 벽지 재고를 발라달라고 하셨죠. 회장님이 마음에 든다고 하셨어요. 물론 기업 총수들마다 성향은 다 달라요. 고급스럽게 하거나 아주 싸게 서민적으로 해달라는 분도 있고요.”“도배 문화 발전에 앞장…인식 바꾸고파”구로에 위치한 그의 작업실은 그가 운영하는 회사의 사무실이기도 하다. 전국 도배시공연합체 ‘도배의 민족’을 운영하는 동시에 그가 도배에 사용해온 도구들이 사무실을 가득 채우고 있다. 롤러·칼·망치·붓 등 100가지가 넘는 공구들 모두 그의 손을 거쳐 탄생했다. “현장에 있다고 해서 무조건 거칠고 지저분한 공구를 사용하는 건 아니에요. 공구에 공예적 요소를 가미해서 제가 직접 만들고 있어요. 예쁘게 만들면 일도 허투루 하지 않을 것 아니에요?(웃음) 같이 일하는 직원들에게도 복장에 신경 쓰라고 해요. 너무 지저분하게 다니지 말라고요. 외적인 것뿐만 아니라 내적으로도 교양을 쌓으면 좋죠. 도배사들에 대한 편견이나 인식이 변화하길 바랍니다.”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도배 명장이지만 그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개발하기 위해 새로운 콘텐츠를 늘 공부하고, 받아들이고 훈련한다. 그는 이제 국내의 도배 문화의 정착과 도배 산업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들을 준비 중이다. “명장이 되고 나서는 현실에 안주하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너무 힘들게 달려왔으니까 명장이 되고 난 후에는 안주형으로 돌아서 버린 거죠. 저는 명장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생각했어요. 또 명장이 되고 난 이후에도 해야 할 일이 많이 있더라고요. 낙후된 도배 산업을 끌어올려야 하기 때문에 이제 시작이고, 또 고생 시작인 거죠.”신 명장은 현재 국내 도배 산업의 기반 조성에 앞장서고 있다. 역사에 비해 도배 산업이 낙후되어 있고, 인식 또한 저평가된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까지 도배 기술 서적 5권을 집필, 출간해 시공법 매뉴얼화에 나섰다. “후배들에게 제 기술을 전수하고 떠나고 싶어요. 후학들은 선진화된 도배를 했으면 좋겠죠. 그래서 제가 기초 디딤돌은 만들어놓고 가야 하지 않나 싶어요. 도배는 정직하고, 노력한 만큼 얻어요. 고전적인 기술로는 이 바닥에서 경쟁력이 뒤떨어져요. 기술을 발전시켜야 나아갈 수 있죠. 도배하면서 습득한 기술을 글로 정리해 체계화한 게 제가 출판한 책들이에요. 중구난방인 시공법을 매뉴얼화해서 선진 기술이 정착되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또 후에는 도배 박물관을 짓는 게 신 명장의 꿈이다. 이미 30년 전부터 개설 계획을 세우며 자료도 대거 수집한 상태다. “제 오랜 꿈인 도배 박물관을 준비 중이에요. 과거에 사용했던 벽지와 갖가지 공구 등 600여 점을 보관하고 있죠. 지방이나 제주도에 가면 다양한 분야의 박물관이 있잖아요. 학술의 시작은 박물관에서부터잖아요. 도배 학술의 기본이 있어야 되겠다 싶어 생각하게 된 거죠. 이때까지 돈 벌어서 이곳에 다 투자했어요.”해외 진출도 계획 중이다. 앞서 아르헨티나와 미국·프랑스에 있는 한국문화원의 도배를 직접 담당했고 태국·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에는 도배 공법을 전수하기도 했다.“현재 모 기업과 MOU 체결 단계까지 간 상태예요. K-푸드, K-팝이 유행인 것처럼 해외에서도 K-인테리어에 대한 관심이 높아요. 산업 연수생들을 우리나라로 들여서 명장인 제가 교육하고, 그들이 돌아가서 K-인테리어를 전파하고. 또 우리나라 청년들이 해외에 나가서 도배일을 할 수 있도록 서포트하려고 해요. 후배들이 제 기술을 잘 배워서 제2·3의 명장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2024.12.15 10:00

7분 소요
‘유일무이’ 양복장이 명장 전병원 “뒤늦게 경제학 전공한 이유는요”[대한민국 명장]

산업 일반

어머니 손에 이끌려 봉제 기술을 배우게 된 중학생 소년이 있다. 또래 친구들처럼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싶었던 이 소년은 현재 “양복 만드는 일이 천직”이라고 말하는 베테랑 ‘양복장이’가 됐다. 가을 정취가 물씬 느껴지던 지난 11월. 광주 동구에 위치한 ‘전병원양복점’에서 전병원 사장을 만나 중학생 소년이 국가가 인정한 최고의 ‘양복장이’가 되기까지의 스토리를 들어봤다. “기술자는 밥 안 굶는다”던 어머니 권유로 시작한 일‘멋쟁이 신사’. 양복점 문을 열고 들어오는 전 사장의 모습을 보고 처음 떠오른 단어다. 전 사장은 이날 스트라이프 패턴의 셔츠와 재킷을 매치한 차림새로 등장했다. 60대 남성이 시도하기 쉽지 않은 청록색 넥타이로 과감한 포인트도 줬다. 양복점 사장님다운 남다른 패션 센스라고 느껴졌다. 특히 이날의 착장에서 눈에 띄었던 것은 양복 재킷 왼쪽 옷깃에서 반짝이는 ‘대한민국명장 뱃지’였다. ‘대한민국명장 제586호’는 전병원 사장을 대표하는 수식어다. 전 사장은 7전8기(七顚八起)의 8번째 도전 끝에 이같은 영예를 이뤘다. 전 사장은 호남지역 최초이자 유일한 패션디자인 부문 명장(名匠)이다.전 사장은 “처음에는 대한민국명장 양장 직종이었으나 2011년 통폐합 돼 패션디자인 명장으로 바뀌었다”면서 “2011년에 바뀌고 난 뒤 대한민국 명장 패션디자인 직종에서는 유일무이한 명장”이라고 설명했다. 전 사장이 날 때부터 명장이었던 것은 아닐 터. 그가 처음 ‘양복장이’의 길로 들어서게 된 계기가 궁금해졌다. 전 사장은 “전남 영광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에서 중학교를 다니다가, 상급학교에 갈 수 없는 가정환경이었다”면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어머니의 권유로 양복업에 입문하게 됐다”고 설명했다.이어 그는 “어머니가 현명하셨다. 어머니 나름대로 발품을 팔아 자동차‧철공소‧자동차 정비업소‧이발소 등 어린나이의 아들이 기술을 배울 수 있는 곳을 살피다가 양복점에서 일을 배우게 하셨다”고 말했다. 이어 전 사장은 “당시 어머니는 ‘기술자는 부자는 못돼도 밥은 안 굶는다’고 했다”며 과거를 회상했다. 기술 몽땅 알려준 감사한 스승님전 사장은 좋은 스승을 만난 것도 인생에 있어 큰 행운이었다고 말한다. 봉제 기술을 터득하고, 사업체를 차리기 위해선 재단‧영업 등 수련해야할 것들이 많았다. 이에 전 사장은 군대를 다녀온 뒤 재단을 배웠다. 전 사장은 “처음 재단을 배웠던 선생님이 저에게 몽땅 기술을 전수해줬다”면서 “그 선생님이 본인의 스승님께 배운 것들을 정리한 스케치를 줬고, 기술을 전수해준것뿐 아니라 자신의 자리까지 물려줬다”고 말했다. 광주 충장로 메인 거리에서 재단사가 되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다. 최소 5년의 기간이 걸리는 과정이다. 하지만 전 사장은 선생님의 자리를 그대로 물려받아 1년반만에 ‘충장로 재단사’라는 칭호를 얻었다.호남지역에선 광주 충장로가 최고의 상가다. 서울로 치면 종로나 명동과 같은 중심지다. 충장로는 모두가 선망하는 지역으로, 이곳에서 일하면 최고의 기술을 가진 사람으로 통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전 사장은 “큰 나무 그늘에 큰 인물이 나온다고 생각한다”면서 “선생님들이 최고의 기술을 가졌기 때문에 저 또한 열정과 기술을 접목해서 발전할 수 있었고, 지금도 선생님들을 떠올리면 굉장히 감사하다”고 말했다. 기술연마 자극 준 ‘울퉁불퉁 몸매’ 고객전 사장은 1972년 처음으로 양복 관련 기술을 배웠고, 올해로 53년이 됐다. 그간 다사다난한 일이 있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다고 한다. 전 사장이 기술연마에 더욱 정진하도록 자극을 준 고객과의 일화다. 전 사장이 ‘충장로 재단사’ 라는 칭호로 활동한지 6개월 정도 됐을 때다. 전 사장은 보디빌딩 선수의 옷을 만들게 됐다. 울퉁불퉁한 근육과 굴곡이 많은 몸매에 맞는 옷을 만드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어렵게 양복을 만들어 냈는데, 손님의 몸에 제대로 맞지 않는 것이었다.이런저런 핑계를 대던 전 사장에게 그 손님은 “내가 체격이 평범하면 기성복을 사 입지 왜 여기 왔겠냐, 당신은 기술자의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당시 전 사장은 충격과 함께 깨우침을 얻었다. 이에 ‘기술로서 답해야 한다’는 말을 좌우명처럼 삼고, 마음을 다잡아 실력 향상에 매진할 수 있었다. 경제학 전공한 독특한 이력…양복시장 접목 과거 고등학교 진학을 하지 못한 것에 아쉬움이 있던 전 사장은 뒤늦게 통신고등학교와 방송통신대학교를 졸업했다. 특히 눈길이 가는 이력은 대학에서 경제학과를 전공했다는 사실이다. 그가 이 같은 이력을 외부에서 말하면 ‘왜 패션 디자인을 전공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받는다고 한다. 전 사장은 어린나이에 막연히 돈을 벌고 싶었고, 부자 되는 것이 꿈이었다. 이에 경제학과를 전공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경제변동론 배우면서 어려울 때 어떻게 대처해야하고, 장사가 잘 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터득했다. 덕분에 양복점 운영을 하면서 지금까지 큰 어려움 없이 헤쳐 왔다고 말한다. 과거 전 사장이 처음 양복점을 오픈했을 때는 문전성시를 이뤘다. 한 달에 주문량이 180벌, 하루에 제일 많이 맡을 때가 35벌까지 였다. 당시 전 사장은 오전 7~8시에 출근해 자정이 넘어 퇴근하기 일쑤였다. 현재는 주문량이 많이 줄었다. 한 달에 15~30벌 정도 주문을 받는다. 양복 주문이 줄어드 것은 맞춤양복에 대한 선호도가 과거와 달라졌기 때문이다. 전 사장은 우리나라 경기 상황에 따라 국민들의 신체 변화가 생기고, 이에 따라 양복 시장도 변화하기에 기술 연구가 지속적으로 필요하다고도 강조했다. 그는 “해방 이후 1960년~1970년대는 신체 노동을 하다 보니 등이 굽은 사람이 많다”며 “국민소득이 1만 달러 이하일 때는 신체적 노동을 많이 필요로 해, 등이 굽은 체형이 많다”고 설명했다. 또 그는 “1970년~1980년대 가면서는 조금 여유가 생겨 등이 굽고 배가 나온 S자 체형이 나온다”며 “국민소득이 1만~1만5000달러부터는 양복을 입기 시작하며, 1만5000~2만 달러면 중산층이 생기고 백화점이 생기고 맞춤복에서 기성복으로 트렌드가 바뀐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 시기가 1990년대로, 기성복이 대중화가 되고 맞춤 양복이 쇠퇴기로 빠졌다”고 설명했다. 전 사장은 그 시대 경제 상황와 생활양식에 따라 소비습관과 체형이 달라지기 때문에 이에 맞는 패턴도 기술 연구를 해야만 따라갈 수가 있다고 설명한다. 이를 위해 경제학을 공부가큰 도움이 됐다는 것이다. 전 사장은 이어 다시 맞춤양복의 시대가 다가올 것이라고도 전망했다. 전 사장은 “국민소득 4만 달러 시대에 간다고 하는데, 이때는 남들과는 차별화가 시작된다”며 “국민소득 4만 달러 시대가 오면 맞춤 양복이 개별화되는 시대가 서서히 돌아오고 있다”고 했다. 패션디자인 명장이 말하는 옷 잘 입는 노하우어머니 손에 이끌려 봉제일을 배웠던 중학생 소년은 2014년 국가가 인정한 ‘대한민국명장’이 됐다. 전 사장은 이 과정에서 희생할 수 밖에 없었던 가족들에 대한 고마움도 잊지 않았다. 전 사장은 “내가 명장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희생했던 가족들이 있었던 덕분”이라며 “명장이 되고 나니 딸·아들도 ‘우리아빠 명장이야’라고 자랑을 하더라, 명장 칭호는 가족들 희생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패션디자인 분야 최고에 오른 전 사장이 말하는 옷 잘 입는 노하우에 대해서도 궁금해졌다. 이에 대해 전 사장은 “옷 잘 입는 방법은 딱 한 가지, 거울 앞에 매일 서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요즘 젊은 사람들은 ‘퍼스널 컬러’에 따라 자기 피부와 자기에게 잘 맞는 색상을 찾아가려고 한다”며 “그런 옷을 입고 거울 앞에서 포즈와 표정을 지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 사장은 아직도 양복 만드는 일이 재밌다고 말한다. 그는 “예전에는 백화점 쇼핑을 많이 했고, 최근에는 충장로를 거닐면서 젊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 거리에 가서 요즘 옷 트렌드를 살핀다”며 “TV에 나오는 패션쇼, 패션 전문 프로그램 등으로 트렌드를 읽는다”고 했다. 이어 전 사장은 “양복 만드는 일이 적성에 잘 맞고 다시 선택하더라도 양복 만드는 일을 선택할 것”이라며 “상상력이 많은 편이라, 창의적으로 생각한 아이디어를 옷에 접목 시키며 트렌드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재밌다”고 했다. 이어 “고객들이 내가 만든 옷을 입고 만족하는 모습에서 보람을 느끼며, 다시 태어나도 양복 만드는 일을 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그는 앞으로 전병원양복점에서 만들어진 양복은 ‘명품(名品) 양복’이라고 불렸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전했다. 전 사장은 “내가 만든 양복이 ‘명장이 만든 명품’이라고 불렸으면 좋겠다”면서 “유명 브랜드의 옷이 아니라도 사고 싶고, 입고 싶고,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은 옷이 명품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2024.12.02 10:35

6분 소요
경북 사과, 대한민국 대표 과일 등극...

전시

경북 사과가 대한민국 최고 품질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경북도는 21일 서울 양재동 aT센터에서 열린 2024 대한민국 대표 과일 선발대회에서 포항 태산농원의 서상욱 대표가 전체 대상을 수상했다고 밝혔다.농림축산식품부가 주최하고 한국과수농협연합회가 주관하는 이번 대회에서 경북도는 대상을 포함해 다수의 수상자를 배출했다. 우수상은 김종원(의성, 복숭아 장호원·황도), 장려상은 김진만(봉화, 사과 감홍), 이정복(문경, 사과 후지), 손종학(경산, 포도 흑보석), 특별상은 배주한(청송, 사과 후지)이 차지했다.이날 대상을 수상한 서상욱 대표는 2024년 정부 산업포장, 2022년 경북 농업명장과 2020년 경북농어업인대상 전체 대상 등 화려한 수상 이력을 자랑한다. 서 대표는 이탈리아, 일본, 뉴질랜드 등 해외 견학과 마이스터 대학 수료 등 끊임없는 연구를 바탕으로, 지난 2017년부터 포항 죽장면에서 13ha의 과수원을 경영하며 그중 7ha를 다축형 사과원으로 조성해 경영 중이다.다축형 재배법은 한 나무에 두 개 이상의 줄기를 키워 나무의 키를 작게 하고 가지를 짧게 유지하며 평면 형태로 수형을 조성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광 투과율을 높여 고품질 과일을 생산하는 동시에 노동력을 절감하고 기계화 작업이 용이해 경쟁력을 갖춘 기술로 평가받고 있다.한편, 경북도는 지난 9월 25일 포항 태산농원에서 열린 '경상북도 사과 산업 대전환 선포식'에서 2030년까지 6,000ha 규모의 '경북형 평면 사과원'을 조성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기존 방추형 재배에서 초밀식형과 다축형을 결합한 평면 재배로 전환해 생산성을 극대화하려는 계획이다. 현재 경북에는 약 618ha 규모의 평면 사과원이 조성돼 있다.김주령 경북도 농축산유통국장은 "경북은 대한민국 최대 과수 주산지로서 품질과 생산성을 모두 잡아 국가를 넘어 세계 과일 시장에서도 경쟁력을 갖출 것"이라며, "경북 사과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과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지속적인 지원과 노력을 이어가겠다"고 밝혔다.홍성철 기자 thor0108@edaily.co.kr

2024.11.21 17:03

2분 소요

전시

경북 문경시는 지난 19일 도자기명장 심사위원회를 열고, 관문요의 김종필 작가와 가은요의 박연태 작가를 새로운 도자기명장으로 선정했다.문경시는 지난 2017년 도자기명장 선정 조례를 제정한 이후, 전통 찻사발의 본고장으로서의 위상을 지키고 도자문화 예술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해 도자기명장을 선정해오고 있다. 2017년 월봉요 오정택, 황담요 김억주를 시작으로, 2018년 방문요 유태근, 2019년 도광요 김경선까지 총 4명의 명장이 선정됐다.올해는 도예 분야의 전문가 5인으로 구성된 심사위원회가 도자경력과 거주기간 등 자격요건을 충족하는 후보들을 대상으로 서류 및 현장 심사를 진행했다. 김종필 작가는 관문요를 운영하며 제13회 전국찻사발공모대전 대상 수상 경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박연태 작가는 가은요를 운영하며 제10회 대한민국분청도자공모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하는 등 문경 도자산업의 위상을 높였다. 신현국 문경시장은 "이번 심사위원회를 통해 명장으로 선정된 작가분들에게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새롭게 선정된 명장분들을 통해 한층 더 발전된 문경시 도예산업을 기대한다"고 말했다.홍성철 기자 thor0108@edaily.co.kr

2024.11.20 18:48

1분 소요
지하철 뚫고 인천문학경기장 땅 다진 ‘발파왕’...광산에서 도심 발파까지 [대한민국 명장]

산업 일반

그들은 남들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묵묵히 한 자리에서 15년 이상 일했다. 분야도 다양하다. 한복생산부터 제빵·금형·석공예·용접 등 한국 사회가 움직이는 데 꼭 필요한 것들이지만 흔히 말하는 3D 업종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들은 일이 어려워도 편법 대신 원칙에 충실하면서 자신의 맡은 바를 끝까지 해낸 장인들이다. 그들에게 한국 사회는 ‘대한민국 명장’이라는 명예로운 타이틀을 기꺼이 부여했다. ‘이코노미스트’는 창간 40주년을 맞이해 꽃보다 아름다운 명장의 인생사를 담은 ‘대한민국 명장’ 시리즈를 시작한다. 대한민국 명장은 고용노동부가 고시한 38개 분야 92개 직종에서 최고 수준의 숙련기술을 보유한 이들 중에서 대통령 명의로 선정된 기능인을 말한다. 지금까지 712명이 대한민국 명장으로 선정됐다. “단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어요. 명장이 된 지금도 매일 안전만 생각할 뿐이에요. 마음 편한 순간은 있죠. 직원들 한 명도 다치지 않고, 안전하게 하루 일과를 끝내고 집에 가는 길이지요. 하지만 그다음 날 현장에 오면 또다시 긴장을 늦출 수 없죠. 이게 제 지나온 삶이자 현재의 삶의 모습입니다.(웃음)”대한민국 명장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쥔 명장을 만나기 전, 기술적 노련함과 대한민국 최고라는 자부심 넘치는 다소 거만하면서도 자신만만한 모습을 상상했다. 하지만 이코노미스트가 지난달 경기도 부천에서 만난 배상훈 대한민국 명장은 모든 예상을 뒤엎는 인물이었다. 인터뷰 내내 겸손함과 자신의 맡은 일에 대한 신중함, 그리고 단단한 책임감을 보여줬다. 전국 암반을 꿰뚫고 있다는 그는 마치 그가 평생을 다뤄온 커다랗고 듬직한 모습의 바위처럼 보였다. 국내 최고 화약 전문가인 배상훈 명장은 대한민국 정부가 인정한 유일한 화약 취급 분야의 명장이다. 40여 년간 발파 공사를 해온 그는 현재 발파와 토목공사를 전문으로 하는 ‘에스에이치엠엔씨’를 운영하고 있다. 환갑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강원도 현장을 직접 찾아 공사를 진행한다는 배 명장을 어렵게 만났다.광산에서 지하철, 월드컵경기장까지 발파 배 명장의 별명은 ‘자격증 부자’. 기술사 자격증부터 기사 자격증까지 그가 보유하고 있는 자격증만 총 10개가 넘는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을 있게 한 힘이 바로 실력을 입증하는 자격증이라고 자부한다. 대중적이지 않은 이 일을 처음 접하게 된 것도 그가 1976년에 처음 획득한 광산보안기능사 자격증 덕분이었다. 강원도 태백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의 아버지는 광부셨다. 그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보며, 탄광에서 전문적으로 일할 수 있는 자격증 공부를 자연스럽게 접하게 됐다. 대학에 들어가 공부한 그는 20대 초반에 광산보안기능사의 화약 분야, 발파 분야, 갱내 분야, 갱외 분야 등 총 네 가지 자격증을 모두 획득하고 이 자격증으로 병역특례를 적용받아 탄광에서 일을 처음 시작하게 됐다. 자격증을 갖춰야만 할 수 있는 발파 작업을 이때부터 시작했다. 5년 만에 갱장으로 승진하며 승승장구했지만 1993년 석탄산업합리화 조치로 그가 일하던 탄광이 문을 닫고, 일자리까지 잃게 됐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고향을 떠나 수도권으로 상경을 결정한 그는 버스 기사부터 해보지 않은 일이 없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가 지닌 자격증이 그의 새로운 일자리를 찾게 했다. 그는 지하철 공사 전문인 표준개발에 발파 작업을 담당하는 화약주임으로 취직하게 됐다. 지금의 지하철 남성역, 강남역 등 서울의 주요 지하철역을 건설할 때 그가 함께했다. 이때 그가 익힌 기술은 도심지에서 발파하는 ‘정밀발파’이다. 광범위한 지역을 발파하는 광산과 달리, 지하철역 건설을 위한 발파는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이뤄지는 발파로 세밀한 계산을 필요로 한다. 특히 건물이 세워지고 사람 그리고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 아래 길을 뚫어야 하기 때문에 한 치의 실수가 있으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는 “발파 지역의 암반특징을 공부하고 발파 안전 지역을 아주 촘촘하게 계산하며 공사를 진행했지요”며 “도심발파는 광활한 광산에서 진행하는 발파 보다 고도화된 기술이 필요했기에 더욱 긴장했어요”라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이 때문에 우리나라 발파 기술이 세계 1등이라고 자신했다. “세계적으로 발파 기술이 높은 나라는 호주, 중국 등을 꼽는데 이들은 모두 거대한 규모의 발파를 주로 하는 국가들입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도심발파 즉 정밀발파 기술까지 뛰어난 경우예요. 이 때문에 저는 우리나라 화약 취급 능력이 세계 1등이라고 자부합니다.(웃음)” 인천월드컵경기장 설립 현장의 발파 총 책임자 이후 그는 발파 기술 실력을 인정받아 극동건설에 입사하게 된다. 이곳에서 그는 ‘극한의 발파 공사 현장’을 경험했다고 말한다. 바로 과거에는 인천월드컵경기장이었던 지금의 인천문학경기장 설립 현장이다. 2002년 대한민국 월드컵 개최에 앞서 계획된 당시 인천월드컵경기장은 문학산 기슭을 폭파하고 경기장을 지어야 했기 때문에 지역 주민들의 설립 반대 여론이 컸다. 이때부터 공사 현장은 곧 시민들의 시위, 민원들로 늘 시끄러웠다. 배 명장은 당시를 회고하며 말했다. “당시 화약 분야 총 책임자였는데 매일이 민원과의 전쟁이었습니다. 특히 월드컵이라는 커다란 기한이 있었기 때문에 공사를 지체하면 안되는 상황이라 더 힘들었어요. 또 한 번에 발파할 수 있는 공간에 대한 법적 규제도 있기 때문에, 한쪽에서는 발파를 진행하고 바로 옆에서는 시멘트를 바르는 등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어려움이 많았던 만큼 기억도 가장 크고 가장 애정이 가는 공사 현장으로 기억됩니다. 지금까지도 인천문학경기장을 볼 때마다 뿌듯합니다.”또 그는 당시 공사 현장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이야기 해줬다. 인천월드컵경기장 설립 당시 발파하며 생긴 돌들이 바로 옆에 위치한 송도의 피복석으로 전달됐다는 것. 송도는 매립지 특성상 조류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피복석이 필요했고, 이때 배 명장이 발파한 돌들이 사용된 것이다. 또 피복석 활용을 위해 발파에도 추가적인 기술이 들어갔다. 피복석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크기가 1m 이상인 커다란 돌이 나와야 했다. 이때 배 명장은 발파 후 자잘한 크기의 돌이 아닌, 피복석과 같은 커다란 돌들이 나올 수 있는 암발파공법을 개발하고 특허까지 냈다. 극동건설에서 토목부장까지 일한 그는 퇴사를 결심하고 2001년에 발파, 토목공사 전문기업 에스에이치엠엔씨를 설립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하기에 일에 대한 책임감과 신중함이 더욱 커졌다고 말했다. “저는 아직까지 직접 현장을 가는 기술자입니다. 다른 발파기업 대표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점일 것이에요. 현재 주중에는 강원도에서 지내는 이유가 이 때문이에요. 저는 현장에서 직접 눈으로 보고 제가 직접 확인해야 마음이 편해집니다. 또 현장이 있어야 제가 일을 할 수 있기에, 저는 현장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지금까지 발파키를 직접 누르고 발파 현장에서 직원들과 안전을 챙긴다는 그는 관련 기술에 대한 공부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최근 그는 인하대 토목공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의 박사 논문 주제는 ‘노래하는 발파공법’. 현장에서 발파할 때마다 ‘발파 소음을 해결하는 방법은 없을까’를 고민하다 연구를 시작하게 됐다. 배 명장은 설명했다. “전자뇌관으로 리듬감을 주는 것을 고안했습니다. 발파를 하면 펑~하고 큰 소음이 나지만, 전자뇌관을 도입하면 발파하는 순간부터 소음이 마치 노래 소리처럼 나오게 됩니다. 발파하는 현장에서 굉음이 아니라 친숙한 학교종이 땡땡땡~과 같은 동요가 나오니 모두가 웃음 짓게 되지요.(웃음) 이 같은 기술을 개발해 박사 학위도 받고 특허도 냈답니다.” 이 외에도 그가 지닌 특허는 다양하다. 그는 도심지 근접 발파를 위한 ‘정밀 진동제어 발파공법’, 대형 선박이 항만에 들어올 수 있도록 섬이나 암초 등을 쉽고 경제적으로 발파하는 ‘해수면 암버럭 매립 및 암성토구간에서의 천공발파공법’ 등을 개발했다. 또 자신만의 사업을 진행하며 그가 놓치지 않는 것은 ‘후배 전문가 양성’이다. 그는 한 기업이 대표이사이자 대한민국산업현장 교수단 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현재는 대한민국의 화약 취급 분야의 유일한 명장이지만, 그는 앞으로 그와 같은 발파 분야의 후배 전문가가 양성되길 바란다. 특히 그가 강조하는 것은 자격증. 그가 운영하는 기업의 직원이 자격증을 취득하면 상금으로 30만원씩을 지급하는 것도 자격증을 지닌 인재를 키우기 위함이다. 배 명장은 말했다. “저는 발파와 관련해서는 가장 아랫 단계의 자격증부터 가장 윗 단계의 자격증까지 층층이 모두 취득했다. 꾸준히 공부하면 가능한 일이다. 자격증을 갖추고 자신만의 능력을 키운다면 최고의 전문가가 될 수 있다.”그가 사랑하는 건설 제1공정, 발파 마지막으로 그는 그가 발파 작업을 사랑하는 이유에 대해 말했다. “건설 현장에서 암(돌)이 있다면 발파는 가장 처음 진행되는 즉 제1공정입니다. 공사의 시작인 것이죠. 발파키를 누르고 펑~터지면 단 몇 초만에 작업이 모두 끝나는 것 같지만, 발파 공사는 적게는 2년 많게는 4~5년씩 걸리는 세밀한 작업이지요. 특히 암석의 종류에 따른 각 특성과 지역별 암반에 대해서도 꿰뚫고 있어야 해요. 암석의 종류에 따라 화약 양과 매립 각도가 달라지기 때문이죠. 발파 전문인이 있어야 하는 이유지요. 그만큼 아무나 할 수 없는, 전문가의 영역이기에 책임감이 큰 일입니다. 발파는 저를 지금까지 움직이게 하고, 공부하게 하고, 현장에서는 긴장하게 하는 제 삶의 원동력입니다.”40여 년 동안 발파를 해온 그는 앞으로의 꿈에 대해 이렇게 웃으며 말했다. “대한민국 명장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인정받은 기분이었어요. 이보다 더 기쁜 일은 없을 것 같아요. 더 바라는 게 있다면 거창한 꿈이 아닌,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안전하게 공사가 끝나는 것입니다. 명색에 대한민국 명장인데 사고 나면 안되겠지요? 더 책임감을 갖고 현장에서 뛰고 있습니다.(웃음)”

2024.11.1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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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대 연봉 포기했다...“남은 생은 용접 후배 양성” [대한민국 명장]

유통

그들은 남들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묵묵히 한 자리에서 15년 이상 일했다. 분야도 다양하다. 한복생산부터 제빵·금형·석공예·용접 등 한국 사회가 움직이는 데 꼭 필요한 것들이지만 흔히 말하는 3D 업종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들은 일이 어려워도 편법 대신 원칙에 충실하면서 자신의 맡은 바를 끝까지 해낸 장인들이다. 그들에게 한국 사회는 ‘대한민국 명장’이라는 명예로운 타이틀을 기꺼이 부여했다. 는 창간 40주년을 맞이해 꽃보다 아름다운 명장의 인생사를 담은 ‘대한민국 명장’ 시리즈를 시작한다. 대한민국 명장은 고용노동부가 고시한 38개 분야 92개 직종에서 최고 수준의 숙련기술을 보유한 이들 중에서 대통령 명의로 선정된 기능인을 말한다. 지금까지 712명이 대한민국 명장으로 선정됐다. ‘용접’(鎔接)은 고도의 전열 또는 가스열로 두 개의 금속을 접합하는 행위를 말한다. 용접 작업자는 위험에 노출돼 있다. 항상 강한 빛, 열과 싸워야 한다. 용접 과정에서 나오는 유해 가스 등은 작업자의 건강을 위협한다. 사람들이 용접을 3D(더럽고(dirty)·힘들고(difficult)·위험한(dangerous)) 업종이라고 일컫는 이유다.하지만 용접은 기계산업에서 절대로 빠질 수 없는 분야다. 산업 현장에 몸을 담았던 사람들은 용접이 제조업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일의 마무리를 완벽하게 끝낸다는 뜻)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한국폴리텍대학 울산캠퍼스에서 만난 진윤근 선박건조 부문 명장도 ‘용접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했다.‘3D’라 불리는 용접...뿌리산업의 기초진 명장은 “용접을 하면서 화상도 입은 적이 많다. 현장에서 일을 하던 중 튄 불꽃으로 인해 동맥이 터진 적도 있었다. 이때 손목에 시계를 차지 못하는 트라우마가 생기기도 했다”며 “용접은 힘들고, 어렵고, 지저분하다”고 말했다.그러면서 “힘들고 어렵지만 용접이라는 기술은 기능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대형 구조물 화재를 보면 용접으로 인한 경우가 많다. 용접이 잘못되면 배가 침몰하거나 운항 불능 상태에 빠지기도 한다. 결국 용접은 제조업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다. 뿌리산업의 기초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고 덧붙였다.진 명장은 선박건조 용접 부문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인물이다. 그는 2013년 최연소 대한민국 명장 타이틀을 획득한 인물이다. 당시 진 명장의 나이는 만 40세로 어린 편이었다. 어떻게 이른 나이에 명장이 될 수 있었을까. 그의 이력을 보면 바로 수긍이 된다. 1989년 19세의 나이로 현대중공업(HD현대중공업)에 입사해 대한민국 명장이 되기까지 진 명장이 선박건조 분야에서 용접을 하며 몸담은 시간은 20년이 훌쩍 넘는다.진 명장은 일과 배움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고 한다. 그는 1990년 울산과학대 야간대학 기계과에 입학해 일과 학업을 병행했다. 그렇게 18년 만인 37세 나이로 울산대 공학석사 학위까지 취득했다. 그는 “자기개발 목적으로 현재 박사 과정까지 밟고 있다”고 귀띔했다. 일에 대한 진 명장의 열정은 산업 현장에 몸담으며 이뤄낸 성과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선박 자동용접 장치와 용접 재료 등을 개발해 조선 공정의 생산성 및 품질을 끌어올리는 데 일조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진 명장은 곡선으로 움직이는 ‘자동 판계용접 장치’와 수직 용접 시 용융금속의 흘림을 막는 ‘받침쇠’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이를 통해 용접의 정확도를 높이고 후처리 과정을 단축시켰다.한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진 명장. 그가 용접을 접하게 된 계기는 ‘가난’ 때문이었다. 그는 15살 어린 나이에 처음 철공소로 들어가 용접을 배웠다. 돈이 필요해서였다. 2남 6녀 중 막내로 태어난 진 명장은 “시골에 살았는데 어릴 적 집이 너무 가난했고,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이 가득했다”며 “주변에 있던 동네 아저씨들이나 삼촌이 해외를 다녀오면 논과 소를 샀다. 저분들은 무슨 일을 할까 궁금해 물어보면 배관 용접 등을 한다고 했다. 그래서 기술을 배워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용접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고 회상했다.용접에 대한 아무런 배경지식이 없었던 진 명장은 배우겠다는 일념 하나로 무작정 가출까지 했다고 한다. 그만큼 절실했던 것이다. 그는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뭘까 고민하다 가출까지 하게 됐다. 그 시기가 중학교 2학년 방학 때였다”며 “무작정 용접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게 발판이 돼 고등학교도 특성화고로 진학하게 됐다”고 말했다.진 명장이 용접을 평생의 업으로 삼아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특성화고에 진학한 이후다. 주변인들의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한다. 진 명장은 “특성화고에 입학한 뒤 그 안에서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뭔지 찾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기능훈련반에 들어가게 됐다”며 “단순 용접, 배관 용접, 철골 구조물 용접 등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선배님, 선생님의 가르침으로 다양한 것을 경험하면서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배관 용접이라고 판단했다. 그렇게 기능올림픽 전국대회에서 메달도 수상했다”고 설명했다.진 명장은 전국대회 수상을 발판 삼아 세계대회까지 출전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이는 그가 산업현장으로 진입하는 계기가 됐다. 진 명장은 “세계대회 출전이 좌절된 뒤 현대중공업 기술교육원에 입사해 방위산업체에서 근무하게 됐다”며 “선배들에게 혹독한 겨울, 여름철 무더운 날씨에도 블록 밑에서 용접을 배웠다”고 말했다. 그래도 진 명장은 현재 용접에 대한 인식과 기술 환경이 많이 좋아졌다고 했다. 그는 “다들 용접을 3D 업종이라고 말하지만 지금은 용접이라는 트렌드가 많이 선진화됐고 기술적으로 진보됐다”며 “로봇 용접과 캐리지 용접 그리고 자동 로봇 등 많은 분야가 생겼다”고 설명했다.우리는 기술의 발달로 로봇이 용접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는 사람이 더 이상 용접을 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일 수 있다. 하지만 진 명장은 이를 부정했다. 그는 “기술이 발전해도 용접 분야에서는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진 명장은 “뿌리산업의 기초가 되는 것은 전부 정보통신기술(IT)로 인해 진화하고 자동화가 되고 있다”며 “그러나 용접은 유일하게 로봇이 사람을 대체할 수 없는 기술”이라고 자신했다.그러면서 “진 명장은 “비행기, 상선, LNG 운반선 등 대형 구조물 화재 사고를 보면 용접에 의한 중대재해가 많다. 사람의 미세한 손기술은 로봇이 따라갈 수 없다. 용접의 자동화가 이뤄진다고 해도 모든 것을 커버할 수 없다. 전체의 10%는 결국 사람이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잘나가던 용접 전문가...돌연 현장 떠났다진 명장은 현대중공업에서 승승장구했다. 그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억대 연봉을 받았다. 일부 직원에게만 제공됐다는 500원짜리 지폐도 받은 그다. 조선소 건설을 위한 투자금 유치를 위해 영국에서 500원짜리 지폐를 내민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의 일화는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그렇게 회사에서 인정을 받던 진 명장은 돌연 산업 현장을 떠났다. 약 2년 전, 그가 용접일을 시작한지 34년 10개월이 지난 시점이다. 진 명장이 회사를 떠난 이유는 ‘미래 세대’를 위해서다.진 명장은 “40년 넘게 일기를 쓰고 있는데 이 과정을 통해 생각을 정리하고 계획과 목표를 세운다”며 “지금껏 5개년 계획을 짜서 목표를 달성해 왔다. 여기에는 향후에 후배 양성을 하고 싶다는 계획도 담겨 있다. 이 계획을 실천에 옮긴 것”이라고 설명했다.사실 진 명장은 산업 현장에 있을 때부터 후배 양성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그는 “2008년부터 지역에 있는 특성화고, 중소기업 등에서 지도교사 봉사활동을 했다”며 “15년 넘게 봉사활동을 하면서 학생들에게 본인의 성장 가능성에 주목하라고 얘기해 왔다”고 말했다.회사 관계자와 동료들은 현장의 핵심 기술인이었던 진 명장의 퇴사를 말렸다고 한다. 하지만 어떤 말도 그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진 명장은 “회사는 말렸지만, 나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며 “교수직은 회사보다 연봉이 적었다. 그러나 돈은 문제가 아니었다. 돈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진 명장은 2023년부터 한국폴리텍대학 울산캠퍼스 에너지산업설비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학생을 가르치고 싶다는 생각은 나의 오랜 꿈이었다”며 “우연히 채용 공고가 나온 것을 보고 지원했다. 그렇게 아이들을 가르치게 됐다”고 설명했다.산업 현장에서 30년 넘게 일한 전문 기술인이지만, 진 명장에게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은 아직도 어렵다. 그는 “처음에는 적응이 쉽지 않았다. 직장은 수직적인데, 학교는 수평적”이라며 “이제 4학기째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약 35년의 세월을 2년 만에 극복하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그러면서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질 것 같다. 현장에서 선배들은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이곳에서는 나 혼자가 아닌, 협업해야 한다는 것을 계속 배운다. 나 역시 노력하고 있고, 학교에서도 배려를 해준다. 요즘은 선생이라는 것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고 덧붙였다.진 명장은 기술인을 꿈꾸는 후배들이 올바른 길로 나아가길 바란다고 했다. 그는 “예전보다 환경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용접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며 “개인적으로 5개년 계획을 세 번 세우라고 조언한다”고 말했다.또한 진 명장은 “처음 5년 동안 원하는 일을 해봐라. 그리고 이게 아니다 싶으면 빨리 방향을 바꿔야 한다. 만약 첫 5개년 계획을 성공적으로 실천했다면 그다음 5년, 즉 10년 차 때 구체적인 꿈을 세워야 한다”고 덧붙였다.진 명장은 어릴 때 진로를 정하는 게 가장 좋다고 했다. 그는 “20대에 진로를 빨리 정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며 “그렇게 5개년 계획을 세 차례 세운 뒤 모두 달성하면 우수숙련기술인 또는 명장이 될 것이다”라고 조언했다. 다만 그는 “자신의 체질과 일이 안 맞을 수 있다. 그러니 남들이 한다고 무조건 따라서 하려고 하지는 말아라”라고 덧붙였다. 진 명장은 또 “공부를 절대 게을리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용접을 잘하려면 화학과 물리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기능장, 기술사 등을 취득할 정도로 이 분야의 전문가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그러면서 “전문적인 지식을 습득하면서도 놓지 말아야 하는 것이 기초다. 항상 기초에 충실해야 한다. 우리가 잘 아는 로마의 콜로세움이나 중국 만리장성 등도 결국 기초가 튼튼하기 때문에 현존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억대 연봉, 대한민국 명장, 대학 교수 등 다양한 삶을 살고 있는 진 명장. 제3자의 입장에서는 모든 것을 이룬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진 명장에게는 또 다른 꿈이 있었다.진 명장은 “후배 명장을 만들고 싶다. 올해도 선박건조 용접 분야에 명장 후보가 있었지만, 최종 단계에서 결국 떨어져 아쉬웠다”며 “당장의 꿈은 후배 명장 육성”이라고 말했다.그러면서 “과거 현장에 있을 때 기술 교재를 집필한 적이 있다. 지금 1년째 나의 기술 노하우를 전수할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있어 여러 정보를 정리하는 단계다. 이런 것들을 통해 K-조선의 경쟁력을 키우고 싶다. 선배로서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후배를 양성하며 노력하다 보면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 후에 우리가 미국, 중국의 용접 인프라를 넘어설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고 덧붙였다.

2024.11.03 10:02

8분 소요
지역축제에 '흑백요리사'? 근데 '바가지'를 곁들인...

정책이슈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넷플릭스 요리경연프로그램 '흑백요리사' 셰프들의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광주김치축제'가 바가지 논란에 휩싸였다.광주시에 따르면 지난 18부터 20일까지 광주시청 광장에서 광주김치축제가 열렸다. '우주 최광(光) 김치파티'를 주제로 흑백요리사 셰프들의 요리 과정을 지켜보고 음식도 맛볼 수 있는 프로그램들이 진행됐다. 특히 최현석, 여경래, 파브리치오 페라리 셰프와 사찰음식 명장 정관 스님이 참석해 관심은 더욱 뜨거워졌다.이들 요리사는 대한민국 김치 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김치를 소재로 갓김치 간장게장 리조또, 대하 김치 통새우 고기찜, 맨드라미 백김치 묵밥, 갓 물김치 문어 냉파스타를 현장에서 직접 만들고 관람객들이 시식할 수 있게 했다.다만 일부 상점이 판매한 메뉴가 가격 대비 부실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온라인 커뮤니티 상에서 퍼지고 있는 한 사진에는 보쌈 고기 20점과 김치, 새우젓으로 구성된 음식의 가격이 3만원이라는 내용이 담겼다.해당 사진을 본 누리꾼들의 의견은 다양하게 갈리고 있다. 요즘 물가를 감안하면 적정한 가격이고, 천정부지로 치솟은 배추값 때문에 저 정도만 되도 적당하다는 주장이 보였다.반면 "이래서 축제를 안간다", "최근 몇몇 축제들이 바가지 요금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데, 유명 셰프들까지 초청했음에도 저렇게 파는 것은 생각이 없다"며 터무늬없는 가격이라는 반응도 보였다.주최 측에 따르면 김치축제 방문객은 약 6만8000여명이다. 4억100만원 상당의 김치가 판매됐고 30여종의 김치 요리 매출이 1억9000만원을 넘는 등 총 8억2000만원의 매출을 기록했다.이렇듯 국내 지역 축제를 둘러싼 '바가지 요금' 논란은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지난 4월 개최된 여의도 벚꽃축제에서도 음식이 가격에 비해 부실하다는 불만이 나왔고, 진해 군항제와 경주 벚꽃축제, 강원 홍천강 축제 등에서도 같은 논란이 있었다.이에 각 지자체들은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지역 이름을 건 대표적 축제들인 만큼 '가격 정찰제' 시행과 '외지 상인' 근절 등으로 방문객들의 신뢰를 얻겠다는 방침이다.

2024.10.24 16:09

2분 소요
‘국내 유일’ 환경 명장, 석촌호수를 ‘물맛 명소’로 탈바꿈시키다 [대한민국 명장]

산업 일반

그들은 남들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묵묵히 한 자리에서 15년 이상 일했다. 분야도 다양하다. 한복생산부터 제빵·금형·석공예·용접 등 한국 사회가 움직이는 데 꼭 필요한 것들이지만 흔히 말하는 3D 업종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들은 일이 어려워도 편법 대신 원칙에 충실하면서 자신의 맡은 바를 끝까지 해낸 장인들이다. 그들에게 한국 사회는 ‘대한민국 명장’이라는 명예로운 타이틀을 기꺼이 부여했다. ‘이코노미스트’는 창간 40주년을 맞이해 꽃보다 아름다운 명장의 인생사를 담은 ‘대한민국 명장’ 시리즈를 시작한다. 대한민국 명장은 고용노동부가 고시한 38개 분야 92개 직종에서 최고 수준의 숙련기술을 보유한 이들 중에서 대통령 명의로 선정된 기능인을 말한다. 지금까지 712명이 대한민국 명장으로 선정됐다. 1986년부터 올해까지 712명의 대한민국 명장이 탄생했다. 각 분야와 직종마다 많게는 10명이 넘는 명장이 배출됐고, 적어도 2명 이상은 선정됐다. 그러나 ‘환경’ 직종은 지난 2010년 제491호 명장으로 선정된 류옥환 명장이 유일무이(唯一無二)하다.그도 그럴 것이 류 명장의 도전과 성취로 가득 차 있는 경력과 노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환경 명장으로서 수질·대기·폐기물·유독물질 관리 등 거의 모든 환경 분야에서 박학하다. 와 만난 류 명장은 스스로를 ‘노력파’라고 밝혔다. 수질환경기사·수질환경기사·폐기물처리기사 등 관련 자격증만 16개에 달한다.류 명장은 공업고등학교 화학공학과를 졸업하고 서울에 상경해 한일개발 석유사업부에 취업하며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는 “서울에서 학군사관(ROTC) 장교 훈련생들이 가방을 딱 들고, 모자를 딱 쓰고 다니는 것이 부러웠다”며 “이때 대학을 가야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낮에는 직장생활을 하고, 저녁에는 동양공업전문대학(현 동양미래대학교)을 다니면서 학업에 정진했다. 2년 동안 말 그대로 주경야독(晝耕夜讀)을 몸소 실천했다.노력파 류 명장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후 1985년 입사한 한국야쿠르트(현 에치와이)에서도 학업을 위한 정진은 계속됐다. 그는 “당시에는 4년제 대학을 나오면 8~10년이면 과장을 달았는데, 나는 전문대 나왔다고 10년이 돼도 진급이 안 됐다”며 “그래서 회사를 다니면서 야간에는 대전 한밭대를 다니면서 화학공학사를 취득했다”고 말했다. 실제 류 명장은 차근차근 진급하면서 기술부장 자리까지 올라갔다. 그는 “자신이 목표를 갖고 노력하면 안 되는 건 없다”고 강조했다.담당자 퇴직 ‘대타’에서 ‘전문가’로 거듭나다사실 류 명장은 처음부터 환경 분야를 목표로 일을 시작한 것은 아니다. 한국야쿠르트 논산공장에서 처음에는 환경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냉동 담당자를 맡았다. 그런데 입사 불과 3~4개월 만에 정수실에서 물 처리와 폐기물 관리 업무를 하던 선임자가 돌연 퇴직했다. 이때부터 류 명장의 환경 기술 경력이 시작됐다. 그는 “곧바로 대전충남환경기술인협회에 가입해 기술을 배우고 견학을 다녔다”며 “정수 분야 자격증이 없으니 자격증 취득을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고 말했다.그렇게 환경 기술에 조금씩 익숙해질 찰나인 1988년, 한국야쿠르트의 히트 상품인 ‘슈퍼100’이 탄생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큰 고비가 찾아왔다. 슈퍼100은 이전에는 없던 호상(밀가루풀 형태) 발효유로 고농도 제품이었다. 이런 제품을 갑자기 생산하다 보니 폐수 처리 기술과 지식이 없어 감당키 어려웠던 것. 하지만 류 명장은 수차례 실험과 테스트를 거치면서 기술을 습득해 나갔다. 이때 폐수 처리 정상·안정화에 성공하면서 류 명장은 환경 전문가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했다. 1991년에는 낙동강 페놀 유출 사건 이후 환경 문제가 대두되면서 류 명장도 환경 기술 관리 업무를 더욱 심도 있게 맡게 됐다. 류 명장은 “1990년대 당시 ‘환경친화기업’은 두산·삼성·현대 등 대기업들만 지정됐는데, 한국야쿠르트가 중견·중소기업으로서는 최초로 지정받도록 만들었다”며 “2010년 ‘녹색기업’으로 제도가 바뀐 뒤에도 3년마다 재심사를 거쳤는데, 재직 중 한 번도 재지정을 놓친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이 밖에도 류 명장은 ▲오염물질 10% 감축 운동 ▲환경 참여학교 운영 ▲1사 1하천 가꾸기 운동 등 같은 다양한 환경 활동을 펼쳤다. 류 명장은 “환경 관련 표창으로 대통령·국무총리·장관상은 6~7개 받았고, 시장·금강유역환경청상 등을 합치면 50개 이상이다”라며 “대전·충남·세종에서 환경 쪽으로는 내가 독보적인 존재다”라고 전했다.진짜 실력 발휘는 정년퇴직 후류 명장이 더욱이 대단한 건 1961년생으로 이미 환갑을 넘은 나이지만 여전히 ‘현역’이라는 점이다. 그는 지난 2020년 35년간 몸담았던 한국야쿠르트에서 정년퇴직했다. 퇴직 후 5개월가량 쉬었지만 ‘살아있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류 명장은 “쉬지 않고 일해와서 그런지 몰라도 일을 해야 만족감과 행복을 느끼는 사람임을 깨달았다”며 “다섯 달 동안 노는 것이 힘들었다. 다시 입사하니 확 살아있는 느낌을 받았다”고 웃었다.그런 그가 부푼 마음을 안고 재취업한 곳은 바로 ‘젠스’다. 젠스는 친환경 기술을 활용한 환경복원과 정화를 집중적으로 연구해 온 기업이다. 현재 수질·토양정화 분야에서 여러 지방자치단체와 기업으로부터 인지도를 쌓고 있으며, 나아가 농업·수산업 분야의 영업 기회도 창출하고 있다. 류 명장은 현재 젠스에서 생산본부장으로서 생산라인부터 기술 개발까지 전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류 명장이 젠스에 와 수행한 프로젝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서울 송파 석촌호수 정화 작업이다. 젠스는 롯데·송파구청과 2021년 8월부터 수질 개선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젠스는 광촉매를 활용한 친환경 공법으로 기초 수질을 향상하고, 녹조 형성을 억제해 석촌호수의 탁도와 청정도를 개선했다.광촉매는 말 그대로 빛을 받아 반응 속도를 변화시키거나 반응을 개선하는 물질로 젠스 제품의 근간이자 핵심이다. 염소나 오존보다 산화력이 높아 살균력이 뛰어나다는 특징이 있다. 이에 대기정화·수질정화·탈취·항균 등에 탁월하게 작용한다. 반(半)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석촌호수 프로젝트의 결과는 놀라웠다. 석촌호수 투명도는 0.6m에서 최대 2m까지 증가했고, 전체적인 수질을 기존 3급수에서 2급수 이상으로 끌어올렸다. 2급수는 목욕이나 수영을 할 수 있는 수준으로 열을 가해 끓이거나 약품 처리하면 식수로도 사용할 수 있다.이 점을 활용해 롯데는 이듬해인 2022년 8월 ‘롯데 아쿠아슬론’ 대회를 시작했다. 올해까지 3회째를 맞이한 롯데 아쿠아슬론은 석촌호수 수영과 롯데월드타워 수직 마라톤 ‘스카이런’을 결합한 대회다. 철인들 사이에서 ‘석촌호수 물맛이 좋다’고 입소문이 날 정도니 류 명장의 실력과 노하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셈이다.류 명장과 젠스는 수질정화제뿐 아니라 ▲농업비료 ▲수산양식업 ▲악취저감제 등 다양한 제품을 만들고 있다. 류 명장은 “젠스가 설립한 지 4년이 되면서 이제 안정기에 접어들었다”며 “여러 지자체나 기업에서 요청이 오면 테스트를 진행하고 무상으로 공급해 주고 있으며, 효율이 검증되면 유상으로 판매하면서 사업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고 설명했다.다만 류 명장은 현재 광촉매가 수처리제 등록 항목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점은 애로사항이라고 밝혔다. 수처리제란 자연 상태의 물을 정수 또는 소독하거나 먹는물 공급시설의 산화방지 등을 위하여 첨가하는 제제다. 그는 “젠스 제품은 수처리제로써 효율이 굉장히 좋지만, 등록 항목이 없어 아쉽다”며 “환경부에 광촉매 제품을 잘 설명하고 등록할 수 있는 요건을 만들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후배들, 환경 명장 되려면 실적 갖춰야”이렇게 자신의 업에 자부심을 느끼는 류 명장도 제2, 제3의 환경 명장이 탄생하지 않는 것에는 아쉬움을 표했다. 그는 “현재 제조업체의 경우 수질 담당자, 대기 담당자, 폐기 담당자 등 담당자들이 별도로 관리를 하고 있다”며 “이 때문에 나처럼 수질·대기·폐기물·위험물·고압가스·전기 등 전체적으로 아우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많지는 않다”고 설명했다.더 큰 문제는 명장이 될 만한 실적과 커리어가 충분한 후배들이 적다는 점이다. 류 명장은 “직접 명장 심사를 가보면 특허·논문·저서·봉사·수상 등 실적이 빈약한 경우가 많다”며 “내 수준보다는 많이 떨어진다”고 솔직한 생각을 밝혔다. 이어 그는 “환경 분야 종사자들이 회사에서 시키는 것, 법적인 것만 하려고 하면 안 된다”며 “최대한 본인이 노력해서 원가 절감도 하고 오염 물질도 줄여보는 등 개선 실적을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했다.하지만 류 명장은 환경 분야가 결코 쉬운 분야가 아니라며 ‘젊은 피’ 유입을 위해서는 강력한 인센티브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환경 분야도 일종의 3D(Difficult·Dirty·Dangerous) 업종이기 때문에 다른 직종과 동일한 급여를 선정하는 게 아니라 보너스를 주는 식의 더 나은 근무 요건을 만들어줘야 한다”며 “빠른 진급이나 급여 체계 개선 등의 유인책이 있어야 하는 게 맞다”고 강조했다. “70세까지 환경 생태 복원 위해 힘쓰겠다”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류 명장은 자신은 ‘행복하다’고 고백했다. 전문 지식과 기술이 있다 보니 60대에 정년퇴직하고도 원하는 만큼 직장생활을 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류 명장은 “젠스에 입사할 때 대표가 ‘언제까지 근무하고 싶냐’고 물었을 때 ‘내가 체력이 되면 70세까지는 하고 싶다’고 답했다”며 “60세가 넘어서도 일을 한다는 것보다 더 행복한 것은 어디에도 없다”고 말했다.그렇다면 그가 최종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목표는 무엇일까. 류 명장은 앞으로도 환경 생태 복원에 집중해, 강과 호수에서 녹조 문제를 해결하고 깨끗한 담수 환경을 만들어가겠다는 의지를 밝혔다.류 명장은 “담수에 녹조가 안 생기고 발생이 됐으면 제거를 해서 사람들이 많이 놀러 가고 즐길 수 있는 장소로 만드는 게 즐거움이다”라며 “그런 환경을 만들기 위해 젠스에서의 남은 몇 년 동안 관리 기술을 최대한 표준화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그렇게 해야만 우리나라 강, 댐, 호수 등을 외국 사람들이 와서 볼 때도 ‘한국은 진짜 물 관리를 잘하는 나라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끝으로 류 명장은 국내 환경 분야에서 악취 처리가 완전히 표준화되지는 않은 점에 대해서도 짚었다. 그는 “수질·대기·폐기물은 체계적으로 선진국 수준에 올라섰다”면서도 “악취 문제만큼은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국가적으로 악취 분야에 시설·장비 현대화와 신기술 개발·도입을 통해 악취 없는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중점을 둘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2024.10.20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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