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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NOM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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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엔 솔로탈출 기원”…국민·하나·우리 ‘은행판 나는 솔로’ 개최 사연은?[김윤주의 금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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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은행 산업이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이같은 변화에는 디지털 전환·글로벌 확장 등 내부 목표는 물론, 주요국 금리인상 등 외부 요인도 영향을 끼칩니다. 업계 내에선 횡령, 채용 비리와 같은 다양한 사건들도 발생합니다. 다방면의 취재 중 알게 된 흥미로운 ‘금융 은행 동향’을 ‘김윤주의 금은동’ 코너를 통해 전달합니다. # “○○대리. ‘나는 솔로’ 한 번 나가보는 건 어때?” 지난 2일 한 은행 사무실에선 이 같은 얘기가 심심풀이 대화로 오갔다. 국민은행‧하나은행‧우리은행이 합심해 ‘은행판 나는 솔로’를 개최하자, 미혼 은행 직원들에게 행사 참여를 넌지시 권유하는 얘기들이 오갔다는 후문이다.3일 금융권에 따르면 국민은행‧하나은행‧우리은행은 이달 26일 서울 중구 을지로에 위치한 하나은행의 복합문화공간 H.art1에서 ‘나는 SOLO-대체 언제까지!’ 행사를 연다. 행사 참석 대상자는 3사의 은행 직원들이다. 은행별로 남자 5명, 여자 5명씩 총 30명이 행사에 참여한다. 이를 위해 각 은행은 내부적으로 신청자를 받아 이달 8일 참여 인원을 결정할 예정이다. 참여를 희망하는 직원은 자기소개서, MBTI, 취미, 지원동기 등을 제출해야 한다. 3사 공동으로 블라인드 평가를 통해 참가자를 선정한다. 당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9시까지 진행되는 행사에서는 ▲오티 자기소개 ▲첫인상투표 ▲팀 정하기 ▲팀별 활동(데이트코스 정하기) ▲점심식사&미션 ▲단체 레크레이션 ▲로테이션 미팅 ▲저녁식사 및 최종 매칭 등의 활동이 진행된다. 각 은행들은 결혼·출산장려 정책을 펼치고 있는데, 이 또한 해당 활동의 연장선상으로 풀이된다. 이번 행사에 참여하지 않은 신한은행은 자체적으로 사내 미팅 프로그램인 ‘슈퍼쏠로’를 진행하고 있다.은행들이 미혼남녀들의 맞선을 주선하는 것은 이례적이진 않다. 각 은행은 자산관리 부문 비재무서비스의 일환으로 맞선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은행은 지난해 10월 결혼정보회사인 가연결혼정보와 전략적 업무제휴 협약을 체결했다. 이들은 우리은행 자산관리 브랜드 ‘투체어스’(Two Chairs) 고객의 결혼 장려를 위해 손을 잡았다. 협약 이후 투체어스 익스클루시브(TWO CHAIRS EXCLUSIVE) 등급 고객 본인 또는 자녀를 대상으로 선착순 100명을 신청받아 가연결혼정보의 ‘프레스티지 특별서비스’를 제공했다.하나은행은 20여년 째 ‘단체맞선’ 행사를 진행 중이다. 매년 하나은행 프리미엄 자산관리 PB센터에 10명을 초청해 짝을 찾도록 돕는다. 또한 우수 고객 자녀들을 1대 1로 이어주는 자리를 수시로 만들고 있다.한 은행 관계자는 “타은행 직원들과 만남 자리를 주선해주는 회사의 신박한 복지에 젊은 직원들 사이에서도 관심이 많다”면서 “미혼 직원들이 인연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다”고 말했다.

2025.04.03 16:06

2분 소요
“저희 부부요? 은행 통해 만났죠” 은행들 ‘맞선 주선’ 나선 사연은[김윤주의 금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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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은행 산업이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이같은 변화에는 디지털 전환·글로벌 확장 등 내부 목표는 물론, 주요국 금리인상 등 외부 요인도 영향을 끼칩니다. 업계 내에선 횡령, 채용 비리와 같은 다양한 사건들도 발생합니다. 다방면의 취재 중 알게 된 흥미로운 ‘금융 은행 동향’을 ‘김윤주의 금은동’ 코너를 통해 전달합니다. 돈을 맡아주고, 돈을 빌려주던 예전의 그 은행이 아니다. 우리은행과 하나은행 등 일부 은행은 고액자산가를 대상으로 ‘맞선 주선’까지 하고 있다. 이처럼 은행들은 자산관리(WM) 분야 경쟁력 확보를 위해 비재무서비스 경쟁에 나섰다. 금융권에 따르면 우리은행은 지난 10일 가연결혼정보와 전략적 업무제휴 협약을 체결했다. 은행과 결혼정보회사의 이색 협약이 눈길을 끈다. 이들은 우리은행 투체어스(Two Chairs) 고객의 결혼 장려를 위해 손을 잡았다. 우리은행 투체어스는 프라이빗뱅커(PB)를 비롯해 자산가 고객에게 일대일 맞춤형 자산관리 서비스를 제공하는 브랜드다.먼저 우리은행은 투체어스 익스클루시브(TWO CHAIRS EXCLUSIVE) 등급 고객 본인 또는 자녀를 대상으로 선착순 100명을 신청받아 가연결혼정보의 ‘프레스티지 특별서비스’를 제공한다. 관련 내용이 알려지자, 투체어스 고객 사이에선 ‘결혼 컨설팅 서비스를 신청할 수 있냐’는 문의가 끊이지 않고 있다는 후문이다. 우리은행은 아직 해당 서비스를 위한 업무협약만 체결한 상태로 서비스를 개시하지는 않았다. 가연은 VIP 전담 매니저를 배정한다. 또한 신청한 고객의 성향·이성상 등 정보를 기반으로 전담매니저의 맞춤형 관리 매칭시스템과 AI 추천을 활용해 적합한 상대를 추천한다. 가연은 미팅파티 초대, 호텔 레스토랑 식사권 제공 등 프레스티지 회원만을 위한 전용 이벤트도 활용할 계획이다. 또한 1년간 결혼을 전제로 한 만남의 기회를 제공할 예정이다.우리은행 관계자는 “우리은행 투체어스 고객에게 기존의 1대 1 맞춤형 자산관리 서비스는 물론 일상생활에서도 유익하고 특별한 서비스로 고객 만족도를 높이고자 한다”며 “이번에 준비한 특별한 서비스를 통해 ‘우리’라는 이름으로 함께할 수 있는 소중한 인연을 만나길 바란다”고 말했다.은행권에선 하나은행의 맞선 행사도 잘 알려져 있다. 하나은행은 20여년 째 ‘단체맞선’ 행사를 진행 중이다. 매년 하나은행 프리미엄 자산관리 PB센터에 10명을 초청해 짝을 찾도록 돕는다. 또한 우수 고객 자녀들을 1대 1로 이어주는 자리를 수시로 만들고 있다. 행사에 참여한 손님들 중 연인이 돼 장성한 자녀를 둔 부부도 있으며, 연인이 되지 않더라도 한번 모인 사람들은 커뮤니티를 꾸려 지속적으로 교류한다는 후문이다. 하나은행 관계자는 “맞선 참여자들이 일회적인 만남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기존 커뮤니티에 추가되어 당연 멤버로 결합한다”며 “그 안에서 또 다른 이성 상대를 찾을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고 말했다. 이어 “커뮤니티를 한 번 만든 이후에도, 해당 커뮤니티가 이어지도록 퀄리티나 수준을 높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들을 지속하고 있다”고 설명했다.은행들이 이같은 이색 서비스를 내놓은 이유는 비이자이익의 핵심인 자산관리 분야에서 추가 성장 기회를 엿봤기 때문이다. ‘리치 고객’의 예치금 규모와 투자상품 가입 금액은 일반고객 대비 크고, 은행이 얻는 수수료 수익 또한 짭짤하다. 이에 은행들은 단순 재무서비스를 뛰어 넘어 고객들의 생애주기에 연결된 비재무서비스까지 제공하며, 고객 발길을 붙잡고 있다. 한 은행의 WM 담당자는 “비이자이익이 중요하고 그 중요성이 점점 더 커지고 있는 건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이라면서 “하지만 고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비이자이익이라는 것은 애초에 있을 수가 없다”고 강조했다. 이어 “은행들은 손님을 모을 수 있는 전략을 비재무적인 영역에 찾고 있다”고 설명했다.

2024.10.25 07:01

3분 소요
김영훈 하나은행 자산관리그룹장 “커뮤니티 맛집이라 불러주세요”[이코노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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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가들이 모여 소통하는 사랑방, 자산가가 되기를 꿈꾸는 공간. 이 곳은 바로 하나은행 자산관리(WM) 서비스가 이뤄지는 곳을 소개하는 말이다. 해당 공간에서 김영훈 하나은행 자산관리그룹장을 만나 추후 하나은행 WM 사업의 방향성에 대해 들어봤다.‘자산관리명가’ 하나은행에서 “꿈꾸고 향유하세요” 지난 5월 28일 서울 중구에 위치한 하나은행 본점을 찾았다. 1층 로비 옆쪽 엘리베이터를 타고 7층 ‘뉴 시니어 라운지’까지 올라갔다. 보안이 삼엄하기로 소문난 금융사의 본점이지만 외부인인 본지 기자를 가로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의아했다. 이 의문점은 김영훈 그룹장과의 인터뷰가 끝나고서야 비로소 풀렸다. 김 그룹장은 하나은행의 자산관리그룹을 총괄하고 있다. 자산관리그룹은 ▲WM본부 ▲신탁사업본부 ▲투자상품본부 총 3개의 본부로 구성돼 있다. 그룹 내 약 180여명의 직원들이 자산관리의 선봉에 서서 업무를 담당하고 있으며, 300여명의 프라이빗뱅커(PB) 또한 그룹차원에서 관리한다. 김 그룹장은 “하나은행의 자산관리 역사는 국내 자산관리의 역사 그 자체”라고 소개했다. 하나은행은 1995년 맥킨지 PB 컨설팅을 통해 현대적 개념의 PB 비즈니스모델을 국내에 최초로 도입했다. 30여 년간 국내 자산관리 시장을 선도해온 하나은행은 최근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이날 김 그룹장과 만난 ‘뉴 시니어 라운지’ 공간 또한 기존에는 전산실이었다. 최근 해당 공간을 손님들을 위한 공간으로 리모델링했고, 6월 초 공개할 계획이다. 하나은행의 자산관리 손님들이 드나드는 공간에, 본지 기자가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던 이유는 김 그룹장의 사업 방향성에서 찾을 수 있었다. 김 그룹장은 ‘뉴시니어 라운지’에서 손님들이 상담을 받는 것은 물론, 커뮤니티 시설로 이용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했다. 김 그룹장은 “대부분의 자산관리 공간은 은행 직원이 꼭 동행해야 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하나은행의 WM 공간 개념은 ‘개방성’”이라면서 “자산 관리뿐만 아니라 자산 형성기에 있는 손님들도 중요한 미래 손님이고, 그분들 또한 편하게 방문해 WM 공간을 향유하고 꿈꿀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설명했다. 비이자이익 늘리려면…어차피 답은 ‘손님’최근 은행의 경쟁력은 ‘비이자이익’ 실적에서 크게 판가름 나고 있다. 이에 하나은행의 비이자이익 실적의 큰 축인 자산관리 부문도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다. 김 그룹장은 자산관리 비이자이익의 핵심은 ‘손님’이라고 강조했다.김 그룹장은 “비이자이익이 중요하고 그 중요성이 점점 더 커지고 있는 건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이라면서도 “하지만 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비이자이익이라는 것은 애초에 있을 수가 없다”고 강조했다. 특히 김 그룹장은 “그 중에서도 시니어 손님에 대한 자산관리, 대중 부유층을 위한 디지털 자산관리, 가문관리‧인생관리를 위한 패밀리 오피스 자산관리 중심의 서비스 제공에 좀 더 포커스를 두고 역량을 집중하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김 그룹장은 손님 증대의 답을 비재무 서비스에서 찾았다. 그는 “손님은 개별 금융사의 상품 판매 수준에 따른 차이를 별로 못느낀다”면서 “이제 자산 관리의 핵심은 손님이 얼마나 우리 공간에 머물게 하느냐”라고 말했다. 이어 “손님을 모을 수 있는 전략을 비재무적인 영역에 찾고 있으며, ‘자산관리’ 하면 생각나는 은행이 ‘하나은행’이 되도록 하는 것이 제 목표”라고 덧붙였다. “손님 잃었던 과거 경험에서 배운 것”‘자산관리그룹’이라는 부서명에서부터 돈·수익률과 같은 재무적인 요소가 절로 떠오르지만, 김 그룹장은 계속해서 ‘비재무’를 강조했다. 김 그룹장은 과거 직접 겪은 실패 사례에서 이같은 WM사업 방향성에 대한 힌트를 얻었다. 김 그룹장은 “2016년부터 2020년까지 홍콩에서 PB로 일할 당시 처음 잃었던 손님이 생각난다”며 “금액도 수백억대에 달한 큰 손님이었는데, 유럽계 PB 하우스로 옮기겠다고 연락이 왔다”면서 과거를 회상했다. 당시 유럽계 한 금융사는 아시아 최대 아트페어인 ‘아트바젤 홍콩’을 후원 중이었다. 이에 PB 손님에게 아트페어 ‘VIP프리뷰’라는 비재무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었다. 반면 한국계 은행들은 낮은 금리, 재무 상품 등에 집중하던 시기였다. 해외경험이 많은 자산가들은 이미 재무서비스를 넘어 비재무서비스에 대한 갈증이 있었던 것. 이같은 실패 경험은 김 그룹장에게 큰 교훈으로 다가왔다. 김 그룹장은 은행에서 재무·비재무 서비스를 모두 제공하는 유럽 금융사의 자산관리를 ‘가문관리형 PB’ 모델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하나은행 역시 현재는 가문관리형 PB 모델을 표방하고 있다”면서 “재무서비스는 한계가 존재하고 경쟁사에서도 따라하기가 쉽지만, 비재무적서비스는 창조·상상의 영역”이라고 설명했다.추후 김 그룹장은 하나은행이 ‘커뮤니티 맛집’으로 불렸으면 좋겠다는 솔직한 생각도 꺼내놨다. 김 그룹장은 “하나은행에 가면 내가 배울 수 있거나, 가고자 하는 방향을 미리 경험한 멘토가 손님으로 이미 있다”면서 “손님들 간의 주선자 역할을 하나은행이 할 수 있다”고 했다. 실제로 하나은행은 ‘아트뱅킹’이나 ‘맞선행사’ 등으로 모임을 주선하고 있다. 아트뱅킹 서비스는 금융권에서 하나은행만이 유일하게 제공하는 서비스다. 하나은행은 서울 을지로 소재의 폐쇄점포를 활용해 복합문화공간 겸 개방형 수장고인 하트원(H.art1)을 운영하며 다양한 미술품을 전시하고 있다. 또한 하나은행은 20여년 째 단체맞선 행사도 진행 중이다. 행사에 참여한 손님들 중 연인이 되어 장성한 자녀를 둔 부부도 있으며, 연인이 되지 않더라도 한번 모인 사람들은 커뮤니티를 꾸려 지속적으로 교류한다는 후문이다. “손님에게 만만하고 편한 존재가 되기를”하나은행은 끊임었이 새로운 시도에 나선다. 김 그룹장은 모든 금융사가 자산관리 분야의 경쟁자며, 배울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우리나라보다 앞서 노령화·고령화 사회에 도달한 일본에서 금융의 미래를 일부 찾겠다는 복안이다. 김 그룹장은 “일본의 신탁전문은행 스미트러스트와 전략적 협업을 통해 유산정리서비스를 국내에 처음 도입했고 이는 하나은행의 강점인 신탁과 결합해 시너지를 내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김 그룹장은 싱가포르 DBS은행의 디지털 자산관리 모델도 눈여겨 봤다. DBS은행의 인공지능(AI) 기반 로보어드바이저 투자서비스, 개인화된 투자 콘텐츠 제공 등을 참고했다. 이를 통해 하나은행은 AI 기반 자산관리 플랫폼인 ‘아이웰스’ 등 다양한 서비스를 개발할 수 있었다. 끝으로 김 그룹장은 “손님이 미래를 꿈꿀 때, 그 미래에 닿는 가장 빠르고 동시에 가장 쉬운 길을 찾도록 계속 고민하겠다”면서 “손님들이 언제나 찾을 수 있는 만만하고 편한 존재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2024.06.11 07:01

5분 소요
[혼돈의 중남미 어디로] 남미 좌우파 정권 치열한 대립 양상

산업 일반

모랄레스 전 볼리비아 대통령 사임 두고 갈등… 칠레·볼리비아 이어 니카라과 정세 급변 가능성 라틴 아메리카가 요동치고 있다. 일당독재 국가를 제외하고 중남미 좌파 지도자 중 최장 기간 권좌를 지켜온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이 부정선거 문제로 촉발된 대규모 시위 사태로 11월 10일 사임하고 이튿날 멕시코로 망명했다. 중남미의 민주주의와 경제 성장의 모범국이었던 칠레는 지하철 요금 30페소(50원) 인상에 따른 대규모 시위사태로 11월 16~17일로 예정됐던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취소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 모랄레스, 좌파의 희망에서 장기 집권 모략가로 2006년 1월 볼리비아에서 원주민 최초로 대통령에 오른 사회주의운동당의 에보 모랄레스는 ‘남미 좌파 정치의 희망’에서 ‘장기 집권 음모가’로 변질됐다가 결국 권좌에서 물러났다. 모랄레스는 대선 조작 논란으로 수도 라파스를 중심으로 대규모 시위 사태가 발생한 지 3주 만인 11월 10일 스스로 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모랄레스의 퇴진은 윌리엄스 칼리만 군 최고사령관과 쿠리 칼데론 경찰청장이 시위를 진압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대통령 사임을 요구한 다음날 발표됐다. 모랄레스는 사임 발표 후 텐트에서 지내는 사진을 공개했지만 다음날 멕시코 군용기를 타고 멕시코로 망명했다. 그는 “더욱 강해져서 돌아오겠다”며 “신자유주의자들이 권력을 잡으려고 군대와 손잡고 민주주의 정권을 억압했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사임이 ‘쿠데타 때문’이라고 표현했다.멕시코 정부는 “모랄레스가 전화로 망명을 신청해 이를 받아들였다”고 공개하고 “(볼리비아) 군이 헌법을 위반해 대통령 사임을 요구한 것은 정권에 대한 테러”라고 주장했다. 아르헨티나의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대통령 당선인(12월 10일 취임 예정)과 11월 8일 석방된 룰라 이그나시우 다시우바 전 브라질 대통령을 비롯한 좌파 지도자들은 모랄레스의 사임 사태를 “쿠데타”라고 주장했다.페르난데스는 지난 10월 27일 아르헨티나 대선에서 승리해 4년 만에 페론주의 정당인 ‘정의당’의 좌파 포퓰리즘 정권을 복원했다. 룰라는 뇌물과 돈세탁 혐의로 2017년 7월 1심 재판에서 9년 6개월, 지난해 1월 2심 재판에서 12년 1개월 징역형을 각각 선고받고 지난해 4월 7일 수감됐다. 하지만 연방대법원이 2심 재판의 유죄 판결만으로 피고인을 수감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11월 7일 판단하면서 룰라는 580일 만에 석방됐다. 공산주의 일당독재 국가인 쿠바의 미겔 디아스카넬 국가평의회 의장과 두 명의 대통령이 존재하는 베네수엘라의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도 같은 주장을 펴며 모랄레스를 응원했다.모랄레스는 아무런 수습책 없이 혼란의 볼리비아만 남기고 망명을 떠났다. 그가 사임을 발표한 날 대통령직 승계 1순위인 부통령은 물론 2순위인 상원의장도 물러났으며, 3순위인 하원 의장도 승계를 고사해 권력 공백 상태에 빠졌다. 그러자 모랄레스가 속한 집권 여당인 사회주의 운동당(MAS)의 불참 속에 야당 소속 자지네 아녜스 하원부의장이 11월 13일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임시 대통령을 맡았다. 임시정부는 대선 재선거를 실시할 것이라고 선언했다.볼리비아 사태의 발단은 10월 20일 치러진 대선·총선의 부정선거 시비다. 현직인 모랄레스는 유효표의 47.08%를 득표해 36.51%를 득표한 2위 카를로스 메사(시민공동체) 후보보다 10%포인트 이상 득표한 것으로 나타났다. 볼리비아 대선은 1차 투표 1, 2위 득표자가 결선투표를 치르지만 격차가 10% 포인트 이상인 경우 결선투표 없이 1위 득표자의 당선을 선언한다. 문제는 중간 집계에서 격차가 10% 미만이었던 것이 최종 발표에서 10% 이상으로 발표되면서 많은 사람이 석연치 않다고 생각하게 됐다는 점이다.거기에 선거를 감시했던 미주기구(OAS)가 이번 선거를 조작과 결과 바꾸기, 날조가 횡행한 부정선거라고 선언하고 재선거를 권고하면서 사태에 기름을 부었다. OAS는 1948년 창설된 중남미 지역의 협의기구로 현재 35국이 가입하고 있으며 미국 워싱턴에 본부가 있다. 이번 대선에선 한국계 이민 출신인 정치현 후보는 우파 기독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8.78%를 득표해 3위에 올랐다. 우파 민주사회운동의 오스카 안텔로 후보가 4.24% 득표로 4위에 올랐다. 만일 결선투표를 치렀으면 야당 세력의 합종연행으로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규모 항의시위가 터지고 이를 통제하지 못한 모랄레스는 퇴진과 망명을 선택한 셈이다. 결국 모랄레스의 퇴진은 남미의 좌우파 정권 간의 대립까지 부르고 있다.이번 사태의 바탕엔 볼리비아 정치의 대결 구도가 자리 잡고 있다. 모랄레스가 1998년 창당해 그가 대통령에 오른 2006년 1월부터 집권당으로 자리 잡은 사회주의 운동당(MAS)은 좌파 포퓰리즘 정당이자 원주민 정당으로 분류된다. 지지자들은 당 이름의 약자를 따서 마시스타스로 불린다. 볼리비아는 1150만 인구의 68%가 백인과 원주민의 혼혈인 메스티조이고, 20%가 18개 이상의 언어를 쓰는 원주민이 차지한다. 백인은 5%, 아프리카계는 1% 수준이다. ━ 국민투표 결과조차 무시한 안하무인의 태도 남미 최초의 원주민 출신 대통령인 모랄레스는 바로 이 원주민들과 빈민, 그리고 좌파의 지지를 권력 기반으로 삼았다. 모랄레스는 2005년 자신이 주도했던 가스산업 국유화 요구 시위 사태로 정국이 혼란한 상태에서 2006년 1월 정권을 쥐었다. 당시 민족주의·포퓰리즘 정당인 민족혁명운동당은 시위 사태로 직격탄을 맞았다. 곤살로 산체스 데 로사다(2002년 8월~2003년 10월 재임) 대통령과 이를 승계한 부통령 카를로스 메사(2003년 10월~2005년 6월)가 줄줄이 사임하고 대법관 출신 에두아르도 로드리게스(2005년 6월~2006년 1월)가 세 번째 승계자로 간신히 남은 임기를 채웠다. 모랄레스는 자신이 주도한 시위 사태로 정치권이 무력해진 권력 공백 상태에서 2005년 12월 치러진 대선에서 53.74%를 득표해 28.59%를 얻은 보수정당인 민주사회세력 소속 호르헤 키로가 전 대통령을 상대로 압승을 거뒀다.모랄레스는 취임 후 남미 2위의 매장량을 자랑하는 천연가스 등 에너지 기업에 대한 세금을 높이고 광산·전기·통신·철도 등을 국영화해 얻은 재원을 빈민과 원주민 복지 향상에 투입하는 정책을 폈다. 취임 당시 전체 인구의 16%에 이르던 문맹을 퇴치하는 사업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성장과 복지를 동시에 추구한 정치인으로도 통했다. 미국이 주도한 ‘마약과의 전쟁’에 맞선다며 코카인 원료인 코카잎 재배자의 권리를 옹호하기도 했다. 지지층인 원주민의 권리를 고려한 조치다.이처럼 모랄레스는 남미 대륙의 첫 인디오 출신 대통령으로 인권정치를 앞세우며 기대를 모았으나 장기 집권에 골몰하다 결국 추락하기에 이르렀다. 모랄레스는 자신이 추구하는 정책이 ‘정의’라며 이를 실천하기 위해선 더 긴 임기가 필요하다고 내세우며 장기 집권을 시도해왔지만 민주적·절차적 정당성을 훼손한다는 지적을 받아왔다.모랄레스는 결국 장기 집권 욕심에 국민투표 결과조차 무시하는 안하무인의 태도를 보였다. 그는 2017년 2월 대통령 임기 제한 폐지안을 담은 국민투표에서 51대 49로 패배했다. 하지만 그해 11월 순응적인 헌법재판소로부터 “임기 제한은 위헌”이라는 판결을 받아내고 올해 4선에 도전했다. 민주주의를 주장하며 집권했지만 권력에 취하자 노골적으로 장기 집권 의도를 드러냈다. 대선 전부터 이에 반발하는 국민이 시위를 벌였지만 모랄레스는 귀를 막았다가 결국 대선 부정 시비로 권좌에서 밀려났다. 모랄레스가 물러나자 원주민이 중심이 된 지지자들이 맞시위를 벌였지만 혼란만 초래하고 있을 뿐 상황을 역전하기에 역부족이다. ━ 경제와 민주화 모범국 칠레의 급변사태 칠레 사태도 전 세계에 충격을 주고 있다. 한때 경제 발전과 민주화 모두에서 남미의 모범이던 칠레가 11월 16~17일 세계 21개국 정상이 참여해 수도 산티아고에서 열릴 예정이던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시위 사태로 취소했다. 칠레의 세비스티안 피녜라 대통령은 10월 30일 APEC 정상회의 취소를 발표하면서 미국과 중국의 무역합의와 문재인 대통령의 중남미 순방을 비롯한 다양한 글로벌 외교 일정이 꼬이게 됐다.칠레가 야심차게 준비해왔던 다자외교 행사를 취소할 정도로 급박한 형편이 된 외형적인 이유는 지하철 요금 인상에 따른 국민들의 시위사태였다. 10월 25일 건국 이래 최대 규모인 120만 명이 수도 산티아고에 몰리고 사망자가 20명에 이르는 등 칠레는 민란 수준의 통제불능 시위사태를 겪었다.그 배경을 살펴보면 ‘고인물 권력’을 지적할 수 있다. 칠레는 1970년 살바도르 아옌데(1970~1973년)가 대통령에 당선하면서 남미에서 민주선거로 집권한 첫 좌파 정권을 수립했지만 1973년 아우구스토 피노체트(73~81 군사정권, 81~89 권위주의 민간정부 대통령)가 쿠데타로 이를 전복했다. 하지만 칠레 국민은 끈질긴 투쟁으로 1989년 피노체트 정권을 몰아내고 민주화를 이뤘으며 이후 안정과 민주화, 경제 성장을 구가해왔다. 문제는 2006년 이후 좌우파 회전문 권력으로 부정부패와 정권의 독선을 감시할 건전한 비판 세력이 없었다는 점이다. 칠레는 대통령이 중임은 할 수 있지만 연임은 할 수 없다. 한 정치인이 대통령을 연속 두 차례 지낼 수는 없지만, 한 임기를 쉬면 그 다음 선거에 다시 나올 수 있다. 칠레에선 이 제도를 이용해 좌우파에서 같은 인물이 대통령을 번갈아 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좌파에선 미셸 바첼렛(2006~2010년, 2014~2018년 재임), 우파에선 세바스티안 피녜라(2010~2014년, 2018년~현직)가 이렇게 대통령을 맡아왔다. 그러자 문제가 발생했다. 유권자를 겁내지 않는 고인물 권력층이 형성됐으며, ‘우리끼리 정치’ ‘그들만의 정치’가 판치기 시작했다. 피녜라의 우파 정권의 경우 지난 정권의 마지막 법무장관이 현 정권에서 외무장관 맡는 등 좁은 인재풀에 고위 공직이 기득권층의 자리 돌리기로 메워지고 있다. 결국 정치는 소수 엘리트 정권의 파당정치에 빠졌고, 정치와 정책은 진영 논리에 빠졌다. 이들은 정치인과 대중 간의 괴리를 불러왔다.결국 이번 시위 사태를 부른 지하철 요금 인상은 도화선일 뿐 실제 원인은 대중과 좌우 기득권층의 해묵은 대립인 셈이다. 지하철 요금 인상에 항의하는 시위가 발생하자 칠레 경제 장관이 “조조할인을 이용하라”고 막말을 하면서 사태에 기름을 부은 것도 민심과 동떨어진 ‘그들만의 권력’의 실체를 보여준 사례로 지목된다. 결국 국민을 겁내지 않고고 쉽게 권력을 차지한 정치인들이 국민의 목소리 듣지 않고 자신들이 잘 하고 있다고 착각하다 끝내 분노한 대중으로부터 대규모 시위라는 강펀치를 맞은 셈이다. 결국 APEC 취소에 이른 칠레 민란 배경은 ‘고인물 권력’인 셈이다. ━ 혁명가가 권력욕의 화신으로 중남미 급변사태의 다음 차례는 니카라과의 다니엘 오르테가 대통령일 가능성이 크다. 오르테가는 니카라과의 좌파정당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NL)을 이끌고 2007년 1월부터 장기 집권하고 있다. 오르테가는 친미 소모사 족벌정권을 몰아낸 1979년 니카라과 혁명의 지도자로 1979~1985년 국가재건위 의장에 이어 1985~1990년 대통령을 지냈지만 재선에 실패한 후 17년간 야당 지도자로 있다가 2007년 다시 권력을 움켜쥐었다. 재집권 후 그는 국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빈민층의 국민의 의료·교육·대출 ·사회복지 접근성을 확대하는 정책으로 주목받았다. 반미정책을 추구하는 중남미 지도자와의 연대도 강화했다.쿠바에서 마르크스 레닌주의와 게릴라 교육 받은 후 1979년 혁명으로 친미 소모사 족벌정권을 전복시켜 좌파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일당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포기하고 다당제 민주사회주의자로 정치적 입장을 바꿨지만 2007년 재집권하자 장기 집권에 혈안이 되고 있다. 2014년 1월 의회에서 헌법을 개정해 대통령 임기 제한을 폐지했다. 2017년 4기 취임 후에는 과거 산디니스타 게릴라 활동을 함께했던 부인 로사리오 무리요를 부통령에 앉히고 권한을 몰아주고 있다. 좌파 게릴라 운동으로 족벌정치를 무너뜨렸던 오르테가가 이젠 권력을 사유화하며 ‘붉은 족벌정치’를 확대하는 어이없는 상황이다. 남미 반독재의 아이콘이 권력욕의 화신으로 변질된 셈이다. 중남미 피플파워의 다음 대상이 오르테가가 될 가능성이 큰 이유다.이처럼 중남미는 좌파, 우파 할 것 없이 고장 난 정치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중요한 것은 좌우가 아니라 국민임을 다시 한번 일깨운다. 좌우할 것 없이 권력은 국민에서 나온다는 평범한 진리를 잊고 정의를 독점하려는 권력층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2019.11.16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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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공산당은 중매쟁이?

국제 이슈

독신자에게 가정 꾸리도록 장려하는 것이 이젠 가족의 일이 아니라 국가의 중점 정책으로 떠올라 결혼을 재촉하는 부모의 압박보다 로맨틱한 기분을 싹 가시게 만드는 게 또 있을까? 없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있다. 국가가 나서서 결혼하라고 법석을 떠는 것이다. 8월에 있는 중국 명절 칠석절(음력 7월 7일, 견우와 직녀가 하늘의 오작교에서 만나는 날로 ‘정인절’이라고도 불린다)은 중국의 발렌타인데이다. 선남선녀가 서로 연인을 구하거나 부모의 감시 아래 교제하며 그날을 보내는 게 마땅하지만 거기에 중국을 통치하는 공산당까지 끼어들었다.중국에선 이제 혼기가 찬 남녀에게 가정을 꾸리라고 잔소리하는 것이 가족의 문제만이 아니라 국가의 중점 정책으로 부상했다. 중국은 급속한 인구 증가를 막기 위해 1979년 ‘한 자녀 정책’을 강제로 시행했다. 하지만 출산률이 급속히 낮아지면서 세계에서 고령화가 가장 빠른 나라 중 하나가 됐다. 급기야 중국 정부는 2016년 ‘한 자녀 정책’은 폐지했다. 이제 중국의 모든 부모는 2명의 자녀를 가질 수 있다. 그런데도 출산율은 좀처럼 회복될 조짐을 보이지 않는다. 최근 유엔은 60세 이상인 중국인의 수가 2050년이면 4억40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다. 미국 인구보다 많아진다는 뜻이다.그러면서 노동시장이 위축됐다. 2014년 중국 국가통계국은 중국 본토의 생산가능 인구가 9억1580만 명으로 전년 대비 400만 명이 줄었다고 발표했다. 이런 경제적 우려는 젊은이의 결혼, 더 중요하게는 출산을 장려하는 사회 분위기를 통해 완화할 수 있다고 중국은 생각한다.특히 공산당 지도부는 남겨진 남성과 여성을 뜻하는 ‘잉여남’과 ‘잉여녀’의 중매에 적극 나선다. 30세 이상의 독신남성과 27세 이상의 독신여성을 중국 당국은 흔히 그렇게 부른다. 지난해 6월 중국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은 저장성에서 독신남녀 10만 명을 위한 집단 스피드데이팅(한 장소에서 자리를 옮겨가며 주어진 시간 동안 이성과 대화를 나눈 뒤 서로 마음에 드는 상대를 찾는 방식의 미팅) 행사를 주최했다. 중화전국부녀연합회도 간쑤성에서 비슷한 행사를 열었다.관영 언론은 주로 두려움을 부추기는 방식으로 정부의 노력에 힘을 보탠다. 2014년 환구시보는 남아선호 사상에 따른 성비 불균형으로 이젠 남성이 스스로 불필요한 존재처럼 느낀다며 ‘편향된 성비와 결혼에 대한 높은 기대치로 독신남성이 쓰레기 취급을 받는다’고 보도했다.그해 중국 국가통계국은 2020년이 되면 24~40세 연령층에서 남성이 여성보다 3000만 명이나 더 많아질 것으로 추정했다. 인민일보는 ‘혼기를 넘긴 독신남성이 늘면서 사회적 불안이 커진다’고 지적했다. 또 독신여성에겐 ‘잉여녀’가 될 위험이 크다는 경고가 나왔다.중국에서 부모가 독신인 자녀에게 결혼하라고 압박하는 것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영국 런던대학 SOAS 중국연구소의 류제위 부소장은 뉴스위크에 “중국에선 모두가 반드시 결혼해야 한다는 것이 사회적인 기대”라고 설명했다. “그것이 일반적인 추세이며 당연시되는 관행이다. 자녀가 20대 말에도 독신이라면 부모가 걱정하는 것이 당연하다.”상하이 런민공원에선 매 주말 정오부터 오후 5시까지 결혼시장이 선다. 수천 명의 부모가 자녀에게 적합한 배우자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를 갖고 그곳을 찾는다. 그들은 아들이나 딸의 인적 사항(사진·나이·키·소득·학력·띠·가훈·성격 등)을 적어 게시판에 붙인다. 조건이 맞으면 양측 부모가 서로 만나본 뒤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될 때 자녀의 만남을 주선한다.정부까지 나서서 결혼을 밀어붙이면서 베이징과 상하이 같은 도시에선 집단으로 맞선을 보는 행사가 자주 열린다. 결혼을 목표로 하는 독신남녀 수천 명이 공원이나 스타디움에 모여 배우자감을 찾는다. 중국판 온라인 데이팅 사이트 ‘탄탄’처럼 2015년 차오톈톈이 만든 ‘Hire Me Plz’도 인기다. 독신자가 저녁 식사나 모임에 데려가기 위해 임시 여자친구나 남자친구를 고용할 수 있는 서비스다. 요금을 내면 어떤 행사든 곧바로 데려갈 수 있는 짝을 고용할 수 있다. 이 서비스에서 성매매는 안 된다. 중국에선 매춘이 불법이다.춘절 등의 명절엔 사용자가 급증한다(물론 요금도 더 비싸다). 지난 1월 차오는 “우리 플랫폼에서 1000명 이상이 춘절 연휴 동안 고용 가능한 데이트 상대로 신청했다”고 말했다. 그는 데이트 상대 대여 산업이 2022년이면 수십억 달러 규모의 시장으로 성장할 것으로 기대한다.광저우 출신 세실리아 차오(25)는 자신의 세대엔 결혼 압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중국인은 늘 일만 하면서 또래와 어울려 놀 시간이 없어 서로 사귈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줘야 한다. 또 외출을 싫어하고 그냥 집에 있고 싶어 하는 젊은이도 있다. 그런 이들은 제3자가 나서서 이성 친구를 소개해줄 필요가 있다.”톈진 출신인 자오쉐웨이(20)는 사교행사에 참석하기보다 집에서 인터넷을 검색하고 컴퓨터 게임을 하는 또래들이 갈수록 많아진다고 뉴스위크에 말했다. “사람들은 대개 결혼하려고 데이트한다. 하지만 지금은 결혼을 꺼리는 젊은이가 더 많다. 가정을 꾸려야 하는 부담이 크고 자녀 양육비가 많이 들기 때문이다.”중국인은 이제 두 자녀까지 합법적으로 가질 수 있지만 가정을 꾸리는 비용이 많이 들어 자녀를 더 가질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하는 경우가 많다. 2015년 중국 사회과학원은 자녀 1명을 16세까지 키우는 데 드는 평균 비용이 7만1644달러(약 8000만원)라고 추산했다. 중국(본토 기준)의 일인당 연간 가처분 소득이 3212달러(약 360만원)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너무 큰 부담이다.결혼하라는 사회적 압력이 늘어나고 있지만 통계 수치는 여전히 우려스럽다. 중국 당국에 따르면 조이혼율(당해 연도의 인구 1000명 당 이혼 건수)이 2006~2016년 1.46건에서 3건으로 두 배로 늘었다. 2016년 이혼한 부부는 420만 쌍이었다(전년 대비 8.3% 증가).홍콩의 사회학자인 샌디 토 신치는 사람들의 태도 변화로 그런 추세가 나타난다고 분석했다. “여성이 갈수록 불만족스러운 결혼을 참지 못하는 경향을 보이면서 이혼율이 높아진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고 경제적으로 남편에게 의존하지 않게 된 것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이제 그들은 결혼생활이 힘들면 참지 않고 이혼할 수 있다.”그로 인해 새로운 칠석절 전통이 생길 수 있다. 과거엔 칠석절이 되면 중국의 젊은 여성이 종이로 만든 제물을 태워 소원을 빌었다. 하지만 이젠 그들이 혼인증명서를 태우며 정부의 기대를 잿더미로 만들지 모른다.- 크리스티나 자오 뉴스위크 기자

2018.10.08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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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되는 브라질의 비극] 호세프 탄핵 주도한 테메르 탄핵 위기

산업 일반

브라질 최대 육류가공 업체 뇌물 스캔들로 타격... 세계 8위 경제대국 위상 흔들 한때 세계 7위의 경제 규모를 자랑하던 브라질이 한없이 무너지고 있다. 브라질의 경제성장률은 2015년 마이너스 3.8%, 지난해에는 마이너스 3.6%로 역성장했다. 세계경제가 풀리고 있다고 해도 브라질은 예외다. 브라질 올림픽 특수로 인한 경제성장 효과도 거의 누리지 못했다. 올해 겨우 플러스 성장을 회복해 0.5% 성장을 이룰 전망이다. 경제 규모도 세계 8위로 회복하고 1인당 국내총생산(GDP)도 1만 달러대로 복구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서민들의 체감 경기는 여전히 얼어붙었다는 게 현지 언론의 보도다.경제 수준이나 경기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터져 나오는 사회적 불만이다. 경제적 불평등을 나타내는 지니계수는 0.49로 세계 최하 수준이다. 심각한 빈부격차가 있다는 이야기다. 빈곤선 이하에서 허덕이는 극빈층은 전체 인구의 15.2%에 이른다. 실업률은 2017년 3월 통계로 13.7%나 된다. 사업하기 쉬운 국가 순위에선 123위로 바닥권이다. 부패와 비상식적인 규제가 만연하다는 이야기다. 경제 규모가 부끄러울 정도다. 2억 명이나 되는 인구, 광활한 국토에, 지구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천연자원을 보유하고 있다는 자원대국답지 않다.그 배경에는 정치적 불안정이 도사리고 있다. 정치가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는 셈이다. 미셰우 테메르(77) 브라질 대통령은 현재 비리 의혹으로 조사를 받을 예정이다. 연정에 참여했던 전당들도 줄줄이 이탈하고 있다. 야당은 사퇴를 요구하고 있으며 탄핵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테메르는 2011년 1월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의 연정 파트너이자 러닝메이트로 부통령에 취임했지만 지난해 호세프의 탄핵을 주도했다. 지난해 8월 호세프가 예산 사용과 관련한 불법행위로 탄핵 당하자 테메르가 자리를 승계해 잔여임기를 채우고 있다. 만일 메테르가 탄핵을 당하면 ‘탄핵 당한 대통령을 승계한 대통령이 또 탄핵 당하는’ 첫 사례가 된다.테메르는 브라질 최대 육류가공 업체 JBS가 정치인 1829명에게 뇌물을 제공했다는 관계자의 법원 증언 기록이 공개되면서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다. JBS 측이 뇌물을 제공했다고 밝힌 정치인 중에 테메르가 포함됐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탄핵을 당한 지우마 호세프와 국민의 존경을 받아온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전 대통령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의 정치 혐오를 부르기에 충분한 상황이다. 물론 이들은 JBS로부터 뇌물을 받은 적이 없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법원 증언 기록이 공개되면서 상황은 급물살을 타고 있다. 이미 테메르의 측근들도 줄줄이 체포되고 있다. ━ 극에 달한 브라질 국민의 분노 JBS 사건은 브라질 최대의 식품 스캔들에 이어 터진 것이어서 국민의 분노는 극에 달하고 있다. 브라질 연방경찰은 지난 3월 17일 세계 최대 쇠고기 수출회사인 JBS와 닭고기 수출업체인 BRF를 포함한 대형 육가공회사들이 농업부의 위생검역 관리들을 매수해 유통기한이 지난 상한 고기를 유통시켰다고 밝혔다. 소시지를 비롯한 일부 가공육류 제품에 들어가면 안되는 돼지 머리와 같은 다른 부위가 혼입됐으며 일부 제품에는 골판지도 검출된 것으로 드러났다. 상한 쇠고기의 냄새를 없애기 위해 산성용액에 육류를 담그기도 한 것으로 밝혀졌다. 더욱 문제는 상한 육류의 대부분이 해외에 수출됐다는 점이다. 브라질은 세계 최고의 쇠고기 수출국이다. 특히 중국과 홍콩이 소비하는 쇠고기의 35%, 닭고기의 17%가 브라질을 중심으로 한 남미산이어서 이번 스캔들은 전 세계에 충격을 줬다. 이 사건은 브라질의 국가 이미지와 신용도를 결정적으로 떨어뜨리는 악재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브라질 경제의 5.5%, 고용의 13.3%를 차지하는 농축산업에도 타격이 불가피하다. 브라질을 휘청거리게 한 대형 식품 비리의 몸통인 JBS가 테메르 대통령을 포함한 정치인에게 뇌물을 준 혐의는 그야말로 ‘국기문란급’이다.테메르는 지난달 29일 연방대법원이 그에 대한 부패 의혹 조사 요청을 승인하자 외신 기자회견을 열고 “브라질은 경기 침체에서 벗어났으며 나는 진군을 멈추지 않겠다”라고 말했다. 그는 “브라질이 긴 경기침체에서 벗어났음을 보여주는 경제지표가 곧 발표될 것”이라며 “브라질의 미래를 위해 연금과 노동 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겠다”고 했다. 테메르의 회견 하루 전에 엔리케 메이렐리스 재무장관은 1분기 GDP 성장률이 전 분기 대비 0.7~0.8%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경제가 회복되고 있다는 점을 내세워 사태를 정면 돌파하겠다는 ‘꼼수’가 엿보인다는 평이다. ━ 정면돌파 시도하는 테메르 대통령 테메르는 이날 회견에서 내년 연말까지로 예정된 임기를 채우겠다고 밝혔다. 정치컨설팅 업체 유라시아그룹은 테메르의 탄핵 가능성이 70% 정도라고 전망하고 테메르는 의회에서 다른 정당에 당근을 제공하면서 지지파를 확보하려고 할 것으로 예상했다. 정치적 술수에 강한 테메르의 성향으로 볼 때 지지 세력을 모아 위기를 돌파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그의 정치적 이력을 볼 때 손잡기를 꺼리는 정파도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중도 우파인 브라질민주운동당 소속인 그는 중도 좌파인 노동자당과 연정을 구성해 호세프 대통령의 러닝메이트로 2010년 대선에 출마해 당선했다. 하지만 나중에 탄핵을 주도하면서 ‘호세프의 등에 칼을 꽂은 정치적 암살자’나 ‘배신자’라는 평가도 받고 있다. 테메르는 상파울루대 법학과를 마치고 상파울루 가톨릭주교대에서 법학 박사를 받은 변호사 출신이다. 독특한 것은 그가 중동계라는 점이다. 부모가 1925년에 레바논에서 브라질로 이주했다. 레바논은 현재도 인구의 절반 정도가 기독교도이며 중동국가 중 가장 기독교도가 많은 나라로 통한다. 레바논에는 다양한 종파의 기독교가 존재하는데 테메르는 마론 전례 가톨릭교도 집안 출신이다.테메르는 2016년 5월 12일 호세프가 브라질 상원이 탄핵 심판에 착수하면서 직무가 정지되자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아 그해 8월 5일에 열린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하계 올림픽 개막식에서 개회 선언을 했다. 당시 브라질을 찾았던 북한의 최용해를 만나기도 했다.브라질은 사실 온갖 시련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뚝심의 나라다. 1500년 포르투갈인이 들어오면서 시작된 이 나라의 근·현대사는 기네스북에 오르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의 온갖 기묘한 사건으로 가득하다. 가장 놀라운 것이 식민지 중 유일하게 본국 수도를 유치했다는 점이다. 1808년 영국의 동맹이던 포르투갈 왕국은 프랑스 나폴레옹 황제가 침공해오자 수도를 리스본에서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로 임시 이전했다. 당시 군주는 정신질환을 앓던 마리아 1세(1734~1816, 재위 1777~1816) 여왕이었는데 아들 주앙(1767~1826)이 1799년부터 섭정 왕자로서 통치하고 있었다. 주앙은 영국이 나폴레옹을 물리치자 귀환했지만 나폴레옹이 엘바섬을 탈출하자 또다시 대서양을 건넜다. 1815년 아예 나라 이름을 ‘포르투갈-브라질-알가르베스 연합왕국’으로 바꾸고 리우데자네이루를 정식 수도로 삼았다(알가르베스는 포르투갈 남부지방). 브라질은 식민지가 아닌 연합왕국의 중심지가 됐다. 주앙은 1816년 모친이 세상을 떠나자 브라질에서 주앙 6세로 즉위했다.주앙 6세는 1820년 본국에서 자유주의자 혁명이 일어나자 돌아가서 이를 진압했다. 뒤에 남아 브라질 섭정을 맡은 아들 페드루는 1822년 독립을 선언하고 브라질 제국을 세워 초대 황제에 올랐다. 부왕과 달리 자유주의를 옹호했던 그는 의회를 만들고 입헌군주제를 받아들였으며 1824년 헌법도 반포했다. 브라질은 남미 대륙에서 처음으로 군주국으로 독립한 것은 물론 ‘제국’이라는 이름을 붙인 유일한 나라가 됐다. 1825년 주앙 6세도 독립을 승인했다. 브라질 제국은 2대 69년간 유지되다 1889년 군사쿠데타로 무너져 ‘브라질 합중공화국(Republic of the United States of Brazil)’으로 바뀌었다. 1967년부터는 브라질 연방공화국(Federative Republic of Brazil)으로 이름이 바뀌어 지금에 이른다.문제는 브라질 공화국의 시작이 남미를 괴롭힌 쿠데타와 군부 독재로 시작됐다는 점이다. 1930년 쿠데타로 집권한 제툴리우 바르가스(1882~1954)는 상징적인 인물이다. 1930~45년 대통령을 지내면서 경제 성장을 이뤄 인기가 높았으며 축구로 국민 통합을 시도했다. 1935년 공산 쿠데타, 1938년 파시스트 쿠데타 기도를 물리쳤다. 좌우 모두 그에 맞선 셈이다.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는 말처럼 1945년 또 다른 쿠데타로 밀려났다. 쿠데타로 일어선 자, 쿠데타로 망한 셈이다. 바르가스는 정치적인 오뚝이였다. 1950년 최초로 치러진 민주 선거에서 민선 1호 대통령에 당선한 것이다. 쿠데타 주역이 쿠데타로 쫓겨났다가 민주선거로 민선 1호 대통령이 된 것은 브라질 정치의 불가사의다. 더욱 극적인 것은 풍운아 바르가스의 운영이다. 바르가스는 1954년 경제난과 측근 비리로 사임 압박을 받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브라질 경제발전을 이끌어 대중의 인기를 한몸에 얻었지만 경제난 속에서 인기도 함께 잃은 대통령이다. 브라질 역사만큼 바르가스의 삶도 극적이다.1964년에는 카스텔로 브랑코 장군이 쿠데타로 집권해 다시 군사독재가 시작됐다. 정권의 성격은 친미반공, 외국자본 환영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하지만 무능하고 비도적적이며 국민의 뜻을 외면한 군부독재는 지지를 잃고 스스로 무너졌다. 군사정권은 1985년 끝나고 정권이 민정으로 이양돼 현재에 이른다. 2003년에는 노동자 출신의 노동운동가 룰라가 첫 좌파 대통령으로 대통령에 당선했다. 룰라는 이전의 우파 정권이 마련한 경제개발정책을 계승한 뒤 이를 잘 이끌어 브라질을 세계적인 고도성장 국가의 반열에 올려놨다. 좌파 대통령이 경제 부흥과 서장을 주도한 것이다. 성장을 통해 빈민을 줄이는 정책을 펼쳤다. 민주주의를 되찾은 뒤 나라가 안정적인 발전을 하게 됐다는 평가다. 브라질이 세계 7위의 경제 대국이 된 것은 이 당시의 활력에 힘입은 것으로 평가된다. 브라질을 포함해 고도경제성장을 하는 유망 경제국가를 말하는 브릭스(BRICs)라는 용어도 이때 등장했다. 브라질에 러시아, 인도, 중국의 머리글자를 합친 단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합치기도 한다. ━ 온갖 시련에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브라질 2011년부터는 후계자인 호세프가 이끌다가 탄핵을 당했다. 탄핵을 주도한 테메르는 지금 비리 스캔들에 휘말려 자신이 탄핵 당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브라질 역사는 언제나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국민은 항상 이를 극복했다. 문제는 언제, 어떻게 하느냐다. 주목할 점은 브라질이 대표적인 다문화 국가라는 점이다. 브랑쿠라고 불리는 백인이 47.7%로 가장 많지만 파르두라고 불리는 혼혈인, 또는 갈색인종도 43.1%로 비슷한 비율이다. 네그루라고 불리는 흑인이 7.6%이고, 노랗다 또는 황인종이라는 뜻의 아마렐루라고 불리는 동아시아계도 0.4%가 있다. 일본과 한국에서 이민을 많이 간 나라이기도 하다. 일본의 프로레슬러로 1976년 프로권투 챔피언 무함마드 알리와 대결해서 유명해진 안토니오 이노키도 브라질 이민 출신이다. 한국 이민자를 포함해 다양한 인종이 서로 공존하며 화합의 문화를 만들어온 브라질이 정치적인 안정과 경제적인 부흥을 이룰 수 있을지 전 세계가 눈여겨보고 있다.

2017.06.04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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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겹게 내딛은 첫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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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끔찍한 전망이군요.” 김상협 카이스트 초빙교수는 연사들이 발표를 끝낼 때마다 연신 되풀이해 말했다. 지난 10월 21일 매일경제가 주최한 제16회 세계지식포럼 ‘인구절벽, 글로벌 경제 대침체 도화선 될까’ 세션에서다. 인구학자 해리 덴트, 메릴랜드대학 에우헤니아 칼나이 교수, 연세대 한준 교수가 연사로 나서 ‘인구절벽’ 현상에 대한 의견을 발표했다.김 교수의 말대로 그들의 전망은 하나 같이 암울했다. 세계는 인구절벽에 직면해 있으며 추락은 이미 시작됐다는 것이다. 인구절벽이란 말은 덴트가 처음으로 공론화한 개념이다. 인구 집단의 규모가 정점에 달했다가 급격히 하락하면서 경제가 크게 위축되는 현상을 일컫는다. 대표적인 사례는 베이비붐 세대다. 전후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경제 발전과 소비 증가가 동시에 일어났지만, 이 세대가 노년기에 접어들자 그동안 쌓아놓은 경제 구조는 감당하기 어려울 지경에 이르렀다. “베이비붐 세대가 만든 거품이 이제 꺼지기 시작했다”고 덴트는 말했다.전후 일본 사회는 인구절벽의 파괴력을 여실히 보여준다. 덴트에 따르면 일본은 “인구절벽에서 추락한 첫 사례”다. 일본은 베이비붐 세대의 소비가 절정에 달했던 1980년대를 지나 인구절벽에 도달했다. 1950년대에 걸쳐 출산율이 절반 가까이 줄어드는 바람에 베이비붐 세대의 뒤를 이을 소비자가 부족했던 탓이다. 일본은 이후 20여 년 동안 경기침체를 겪으면서도 이렇다 할 인구 정책을 내놓지 못했고, 그 결과 인구와 출산율이 동반 하락했다. “일본은 죽어가고 있다”고 덴트는 단언했다.남의 일이 아니다. 덴트는 “한국도 그 뒤를 따르고 있다”며 “한국 베이비붐 세대가 본격적으로 은퇴를 맞이할 2018년이면 한국도 장기적인 경기 침체에 접어든다”고 전망했다. 부동산부터 내수 소비·취업률 등 한국의 주요 경제 지표가 서서히 하락하는 것이 그 조짐이다. 아직 희망은 있다. 덴트는 한국에 “2~3년 시간이 남아 있다”며 “지금부터라도 인구절벽 시대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한국인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한국은 수년 전부터 출산율을 높여 인구절벽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한국 정부가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를 설치한 것은 2005년이다. 2006년엔 제1차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을 발표했다. 이 보고서에서 정부는 ‘베이비붐 세대가 노인연령에 진입하고 초저출산 세대가 가임연령에 도달하는 2020년 이후’ 고령화가 가속될 것이며 2018년을 정점으로 인구가 감소하리라는 계산을 이미 마쳤다. 2011년에는 제1차 계획의 성과와 한계를 바탕으로 제2차 계획을 내놓았다. 모두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다. 한국의 출산율은 2005년 1.08에서 2014년 1.21로 등락을 반복하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저 수준에 머물렀다.1·2차 기본 계획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모두 결혼한 가정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이다. 제1차 계획 보고서는 저출산의 원인을 “사회·경제적 환경과 가치관의 변화에 따른 결혼연령 상승과 자녀 출산 기피”로 지목했다. 문제가 되는 사회·경제적 환경으로는 불안정한 고용요건과 여성의 경제활동 지원 미비·육아인프라 부족 및 양육비 증가가 꼽혔다. 제2차 계획 보고서 역시 출산 기피 원인을 “1차 기본계획 수립 당시와 유사”하다고 분석했다. 정부의 대책은 기혼 부부의 출산을 가로막는 사회·경제적 환경 개선에 집중됐다.이번엔 조금 다른 듯하다. 지난 10월 18일 정부가 발표한 제3차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 시안에선 심지어 절박감마저 느껴진다. 정부는 저출산의 핵심 원인으로 만혼과 비혼을 지적하며 “결혼하기 좋은 여건”을 조성하는 데 주력하겠다고 밝혔다. 정부가 나서서 단체 맞선 프로그램을 마련해 비혼 남녀가 만나는 장을 마련하겠다는 계획도 있었다. 새누리당은 결혼 연령을 앞당기자는 차원에서 초등학교 입학 연령을 만 5세로 낮추고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를 현행 6년제에서 5년제로 줄이는 방안까지 제시했다. 그 밖에 비혼·동거가구 차별 금지법 제정과 가족관계등록법 개정, 다문화가족 및 입양가족 지원 확대 등 “다양한 가족에 대한 지지 강화”도 포함됐다. 기혼 부부에 초점을 맞추던 과거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단체 맞선부터 학제개편이라는 초강수를 동원해 초혼 연령을 낮추겠다는 발상에 일리가 아주 없는 건 아니다.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매우 낮은 편이지만, 결혼 직후에 해당하는 30~34세 인구의 출산율은 예외다. 이 연령집단의 출산율은 113.8로 한국보다 합계출산율이 높은 미국(100.8), 일본(100.5), 터키(101)보다 높다. 결혼한 가정은 사회·경제적 상황이 어렵고 양육비 부담이 높더라도 자녀를 충분히 낳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러니 이 연령 집단을 중심으로 출산 장려책을 펼친 지난 정책들은 사실상 잘못된 과녁을 겨냥했던 셈이다.문제는 나머지 연령대다. 30~34세를 제외한 모든 구간의 출산율은 심각하게 낮다. 한때 가장 출산율이 높던 25~29세 구간의 2014년 출산율은 63.4로 터키(135)의 절반도 되지 못할 뿐 아니라 초저출산국가로 꼽히는 일본(84.8)보다 낮다. 20~24세 구간의 경우 13.1로 호주(51.6)의 4분의 1, 일본(29.7)의 절반 수준이다.이 같은 결과는 높은 초혼 연령만이 출산율 증가의 원인은 아님을 보여준다. 초혼 연령이 높아지는 추세는 여성의 사회진출 증가와 맞물린 전 세계적 현상이다. 2013년 미국 여성의 평균 초혼 연령은 27세로 1990년 23세보다 4년이나 늦다. 그럼에도 평균 초혼 연령보다 낮은 20~24세 구간 출산율은 한국보다 6배 높은 79다. 비혼 여성의 출산이 이 구간 출산율에 크게 기여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수치다.한국보다 선진국이거나 경제 규모가 비슷한 중진국을 보면 비혼 여성의 출산이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하다. 미국에선 전체 출산의 40.3%(2014년), 호주에선 33.4%(2007년)가 비혼 여성의 몫이었다. 젊은 층으로 가면 이 비율은 한층 늘어난다. 존스홉킨스대학의 2011년 조사에 따르면 미국 밀레니엄 세대(26~31세) 중 출산 경험이 있는 여성의 64%가 혼외 출산을 겪었다. 이에 비해 한국의 비혼 여성이 전체 출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2013년 기준 1.9%에 불과하다. 한국과 함께 초저출산 국가로 꼽히는 일본 역시 2008년 기준 2.1%로 낮은 비율을 보였다.가장 좋은 방법은 결혼을 장려해 비혼모를 줄이고 초혼 연령을 낮추는 것이지만, 말처럼 쉽지는 않다. 세계 어느 국가에서도 성공한 사례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미국은 1996년 클린턴 정부 시절부터 결혼 장려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2002년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클린턴 정부의 뒤를 이어 저소득층 비혼 커플을 지원하는 ‘튼튼한 가정 세우기(BSF)’ 프로젝트를 실시했지만 성과는 없었다. 3년 뒤 BSF 프로젝트의 혜택을 받은 커플과 그렇지 않은 커플의 애착도·동거율·혼인율을 조사한 결과 두 집단 사이에 차이는 거의 없었다. 오히려 헤어지거나 동거를 그만둔 커플은 BSF 집단쪽에 더 많았다.결혼 연령을 가능한 낮추돼 다양한 가족 형태를 받아들이자는 3차 계획의 방향성은 그래서 적절하다. 문제는 사회의 인식이다. 윤홍식 인하대 행정학과 교수는 10월 19일 열린 ‘제3차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 공청회가 끝난 후 “저출산·고령화 대책은 사회적 합의가 필수적인데, 현 정부가 얼마나 의지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지적했다. 일부 보수 단체는 벌써부터 강한 반발에 나섰다. 한국교회언론회는 22일 성명을 통해 “출산·양육비 과다, 살인적인 교육비, 취업난, 주거난 같은 근본적인 문제는 도외시하고 엉뚱하게 혼외아를 통해 출산율을 높이겠다는 것은 한국을 비윤리 국가로 만들겠다는 나쁜 발상”이라고 비판했다.김영철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은 저출산에 대응하려면 “결혼과 출산에 대한 사회·문화적 토대가 보다 개방적으로 재조정될 필요가 있다”며 비혼율의 상승과 비혼 인구의 증가 추세에 맞춰 혼외출산에 대한 인식을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혼외출산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심각한 수준이다. 혼외출산한 비혼모들은 사회적 편견으로 어려움을 겪을 뿐만 아니라, 취업이나 일상적인 경제활동에 있어서도 차별과 불이익에 시달리고 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소가 2010년 내놓은 ‘인공임신중절 실태와 정책과제’ 보고서의 조사 결과에서 전체 비혼모의 89%는 비혼모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이 심각하다고 응답했다.- 이기준 뉴스위크 한국판 기자

2015.11.09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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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ISCOPE BIRTHRATE - “데이트 주선합니다. 아이 낳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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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부, 출산율 급락으로 인구・노동력 문제 심각하자 출산 유도에 발벗고 나서 일본 정부가 급락하는 출산율을 돌려 놓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맞선과 이성만남 서비스에 뒷돈을 대주며 더 많은 젊은이들이 결혼해 아기를 낳도록 장려한다. 지방 당국에선 ‘콘카츠(婚活)’ 파티를 열어 독신자들끼리 만나 어울릴 수 있도록 주선한다. 티켓을 구입한 뒤 주점과 식당에서 만나 술과 음식을 먹고 마실 수 있다.아베 신조 총리가 이끄는 정부는 그 프로그램에 30억 엔을 배정했다. 현 회계연도 중 출산율을 높이려는 취지다. 블룸버그의 보도에 따르면 일본의 출산율이 60년 전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인구감소는 노동력 약화를 초래한다고 분석가들은 우려한다. 그뿐 아니라 청년층에 더 큰 경제적 부담을 지우게 된다. 급속히 고령화하는 부모와 조부모 세대의 막대한 건강관리 비용을 그들이 떠맡아야 하기 때문이다.2012년 시점 기준으로 일본 여성의 평균 출산율이 1.41명에 그쳤다. 안정적인 인구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대체율(replacement rate) 2.1명을 크게 밑돌았다. 아베가 이끄는 보수 민족주의 성향의 자민당 소속 고이케 유리코 의원의 지적이다. 일본의 출산율은 1974년 이후 2명 수준을 넘지 못했다.현재의 추세대로라면 2050년에는 노인 한 명 당 그들을 부양할 근로자가 1.3명에 그치게 된다. 현재의 2.6명에서 절반으로 줄어드는 셈이다. 2026년에는 사회보장 비용이 GDP의 24.4%까지 상승할 전망이라고 일본 후생노동성이 추산했다. 2012 회계연도의 22.8%에서 1.6% 포인트 늘어난 수치다.“이번이 이 문제에 대한 조치를 취할 마지막 기회다.” 도쿄 서쪽으로 800여㎞ 떨어진 고치현의 오자키 마사나오 지사가 말했다. “미래에 젊은 근로자들이 그처럼 막대한 부담을 감당할 수 있을지 크게 우려된다.” 도쿄에 있는 주오 대학의 야마다 마사히로 사회학 교수는 일본 인구의 미래에 관해 더 암울한 전망을 내놓았다. “출산율 하락이 필시 일본 경제에 아주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야마다가 블룸버그에 말했다. “일본의 사회보장 시스템이 아마도 붕괴될 듯하다.”출산장려 프로그램에 배정된 예산은 1년치에 불과하다. 따라서 지방 당국자들은 중앙 정부에 더 장기적인 대책을 원한다. 수십 년 동안 진행된 인구통계 트렌드에 대처하는 방안을 요구한다. 일본의 앞에 놓인 과제는 극복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서방 국가에서와 마찬가지로 일본인들은 결혼을 늦게 하고 젊은 여성들은 일을 우선시하며 결혼과 출산을 미룬다.지난 25년간 일본의 발목을 잡았던 경기침체도 결혼과 출산 의욕을 꺾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이 있다. 일본은 지난 40년 동안 극적인 변화를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도덕적 전통은 변함이 없다. 예컨대 일본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일본 아동 중 혼외출산 비율이 2%에 불과하다. 반면 미국의 경우엔 41%에 달한다.한편 일본 인구의 감소세는 계속된다. 2013년 일본의 신생아 수는 103만 명에 그쳤다. 2060년에는 현재 인구 1억2700만 중 3분의 1이 감소할지 모른다. 일본 국립사회보장·인구문제연구소의 분석이다. 2110년에는 일본인구가 4290만 명으로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1912년 인구 5000만 명보다도 적어지게 된다. 정부가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2013년에만 25만명이나 감소했다.일본의 미래 인구위기가 도쿄 대도시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살펴 보자. 도쿄 인구가 향후 90년 동안 반토막 나게 된다고 한 지방정부가 보고서에서 경고했다. 그때가 되면 시민의 절반 가까이(46%)가 65세 정년을 넘게 된다. 일본 인구가 급속히 고령화하며 의료관리와 예산지원을 확대해야 하는 추세를 뒷받침한다(현재 도쿄의 고령자 비율은 5분의 1선이다). 그 보고서는 도쿄도청의 의뢰로 시 당국자와 학자들이 공동 작성했다. 2010년 1316만 명을 기록했던 도쿄 인구가 (2020년 1335만 명으로 정점에 이른 뒤) 2100년에는 대략 713만 명으로 급락한다고 예상한다.이는 2100년 도쿄 인구가 1940년과 같은 수준이 된다는 의미다. “가장 출산율이 높은 해에도 인구가 감소하며 지방 정부들이 심각한 재정압박에 직면하게 된다”고 보고서는 지적했다. “따라서 하락하는 출산율을 끌어올려 고령자 대상의 사회보장수단을 강하기 위한 대책마련이 중요해지게 된다.”일본 정책연구대학원대학의 마츠타니 아키히코 명예교수는 일본 교도통신사에 이렇게 말했다. “도쿄에 집중된 노동인구가 급속도 고령화하게 된다. 개도국 경제가 계속 성장할 경우 도쿄 대기업들의 국제적인 경쟁력은 곤두박질 치게 된다.” “일본과 같은 규모와 비중을 가진 나라가 이 같은 인구 문제에 직면하는 상황을 이제껏 본 적이 없다.” 워싱턴 DC에 있는 노동·고용 컨설팅 업체 웰치 컨설팅의 선임 경제전문가 스티 브로나스 박사가 말했다. “단순히 일본 전체 인구가 감소하게되는 문제뿐이 아니다. 중요한 문제는 전체 인구 대비 노동력 규모가 감소하게 된다는 사실이다.”젊은 독신자들의 만남과 데이트를 장려하는 방법 외에 도쿄 당국이 인구증가를 위해 시도하려는 또 다른 방법은 이민 확대다. 일본이 연간 20만 명의 이민 유입을 허용할지 모른다고 지난 2월 한국의 조선일보가 보도했다. 이 같은 정책을 실시하면 2110년에는 일본 인구가 1억1400만 명에 달하게 된다고 일본 당국은 예상한다. 일본은 수십 년 동안 제한적인 이민법을 유지해 왔다. 하지만 지금은 간호사와 건설 근로자 등 외국인 숙련 근로자가 필요할 뿐 아니라 인구도 충원해야 한다.그러나 이민유입 확대도 정답이 아닐지 모른다. ‘진짜 인구폭탄(The Real Population Bomb: Megacities, Global Security & the Map of the Future)’의 저자인 피터 H 리오타 박사가 2012년 경고했다. “당장 이민을 허용하는 방법이 가장 손쉬운 해결책으로 보일 듯하다”고 그가 말했다. “그러나 이 같은 해법은 절대 효과가 없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 일본은 유아독존의 문화다. 미국이나 인도와 달리 폭넓은 문화적 다양성을 통합할 수 없다.”

2014.04.28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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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지간해선 흔들리지 않는다”

산업 일반

지난 밤 호프 솔로는 한두 시간 밖에 못 잤다. 어쩌면 그 때문일지 모른다. 아니면 배가 고파서일까? 시애틀 발 야간 비행편에 탑승한 뒤(since boarding a red-eye) 그녀가 먹은 음식이라곤 샐러드 한 입이 전부다.멤피스에서 3시간 동안 중간 기착(layover)하는 비행편이다. 그러고 보니 와인으로 만든 미모사 칵테일 탓일 가능성도 있다. 두 잔이나 마셨다. 한 번은 오늘 아침 플로리다 주 탬파에 도착한 뒤 PR 매니저의 호텔에서, 또 한 번은 불과 몇 시간 전 이곳 크라운 플라자에서다.어쩌면 그 모두가 원인일 수도, 또는 전부 아무런 관계도 없을지 모른다(Maybe it’s all of that. Maybe it’s none of that). 호프는 키 175cm에 몸무게 68kg이다. 밝고 푸른 눈에 영화배우 제니퍼 카펜터 같은 외모를 가졌다. 다만 그녀를 확대 복사한 듯 당당한 골격 구조를 지녔다. 어쨌든 그런 호프가 갈수록 긴장하는 빛이 역력하다(is getting pretty intense).오늘은 원래 쉬는 날이었다(was supposed to be her day off). 2012 런던 올림픽에 출전하기 전 마지막 휴가를 받았다. 72시간 뒤 호프는 애비 웜바크, 알렉스 모건을 비롯해 미국 여자축구 대표팀 선수들과 함께 잉글랜드를 향해 떠난다. 올림픽의 거대한 소용돌이가 그들을 기다린다(the vast swirling vortex of the Games awaits them). 경기, 미디어, 카메라 플래시, 팬들…. 여자 프로 축구 리그가 지난 5월 중단되는 등 최근 미국리그는 지리멸렬한 상태다(With the latest American league in shambles).미국 여자축구 대표팀은 2008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다. 이번에는 챔피언 방어전 격이다. 또한 지난 여름 월드컵 결승에서의 석패를 설욕해야 한다(avenge last summer’s narrow World Cup loss). 선수들에게는 큰 부담이다. 체력·근성·경험으로 일본의 테크닉, 브라질과 프랑스의 우아하고 창의적인 플레이에 맞선다.호프는 미국 여자축구의 얼굴이자 일명세계 최고의 여자 수문장이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올림픽 직전의 마지막 토요일을 푹신한 소파에 몸을 던지고 휴식을 취하거나, 스파에서 찜질을 하거나, 태국식 팟타이(볶음 쌀국수) 요리를 즐기며(scarfing a final plate of pad thai) 보내지 않는다. 대신 4060여km를 날아 플로리다를 찾았다. 건강체조 DVD 광고를 촬영하고 시사잡지 사진 촬영을 하기 위해서다.이 달로 31세가 되는 호프에게 이는 모두 현대 여자 축구선수에게 주어진 역할의 일부일 뿐이다. “프로미식축구 선수는 광고 출연을 하지 않아도(never has to do any endorsements) 문제 없다”고 호프가 말했다. 그녀는 게토레이 음료, 뱅크 오브 아메리카, 심플 스킨케어 상품 등의 광고 모델이다. 오는 8월에는 자서전도 펴낸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여유가 없다(it doesn’t workthat way for us). 내가 축구선수로 받는 연봉으로는 남들처럼 먹고 사는 정도에 그친다(My soccer salary would only make me an average living). 따라서 항상 어린 소녀들만 상대로 마케팅을 할 수는 없다. 일반대중에도 티켓을 팔기 시작해야 한다.중년 남성,그리고 각계각층의 사람들에게(To all walks of life) 말이다. 따지고 보면(At the end ofthe day) 이 한심한 사진촬영도 여자축구를 더 많이 알리고, 더 큰 계약을 따내고, 우리를 남자 선수들과 동등한 수준으로 올려놓으려는(putting ourselves on the same level as the men) 목적이다.”그래서 호프는 크라운 플라자의 트레저아일랜드 볼룸에서 포즈를 취한다. 그녀가 뛰어오르면서 공을 차는 모습을 촬영하는 작업이다. 하지만 그녀가 시선을 카메라 렌즈에 고정시키고 얼굴도 그렇게 앵글이 잡혀야 한다. 그리고 양 팔과 다리는 일종의 우아한 공간기하학적 형태를 이뤄야 한다(her various limbs arrayed into some sort of elegant airborne geometry).하지만 막상 해보니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한 시간 정도 뒤 그녀는 물병을 집어 던지고는 양 다리 사이에 공을 내려놓고 드리블하기 시작한다. “누가 코치를 좀 해줘요.” 그녀가 소리쳤다. 아무 대꾸도 없다. “좋아.” 이번에는 자신에게 말한다. “내 스스로 알아서 해결해야겠어.”이어 공을 던져주자 뒤로 물러났다가 앞으로 튀어 오르면서 걷어찬다. 공은 사진가 한명의 조명을 향해 날아간다. 전구가 깨지고 조명장치가 넘어진다.모두가 어색하게 웃는다. 조수들이 황급하게 뒷수습을 한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네요(I’m totally speechless right now).” 호프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말했다.“값비싼 장비 같은 건 아니죠?”어쩌면 잠이나 배고픔 또는 칵테일 때문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호프가 대책 없는 사고뭉치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Maybe it’s just that Hope Solo can’t help it). 대책 없이 곤란한 상황을 자초하고(Can’t help getting into tricky situations), 대책 없이 그런 상황에 뛰어들며, 그 과정에서 대책 없이 약간의 난장판을 만들기 때문일지도 모른다.우리가 정말로 응원하는 운동선수들(The athletes we really root for), 우리가 꿈꾸고 애착을 가지며 모든 경기를 녹화하는 선수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대체로 두 부류로 나뉜다. 첫째는 수퍼맨이다. 다른 어떤 호모 사피엔스도 흉내낼 수 없는 경기력을 보여줘 사람들의 찬사를 자아내는 무결점의 돌연변이들이다(the flawless freak who earns our admiration by doing things no other Homo sapiens can do).현재의 미국 올림픽 대표팀에선 아마 수영의 귀재(the aquatic demigod) 마이클 펠프스가 대표적인 예일 듯하다. 펠프스는 지구상에서 둘째가 돼서 서러워 해본 경험이 없다(has never known the feeling of being the secondfastest swimmer on earth). 그의 천재성은 10세 때 드러났다. 15세 때 자신의 첫 세계기록을 경신했다. 그런 흠잡을 데 없는 외계인,우리와는 전혀 다른 사람의 경기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전율을 느낀다(It’s thrilling to watch such an immaculate alien at work).둘째 유형은 다르다. 생존자라고 불러야 할까? 불굴의 노력으로 정상을 향해 기어오르는 너무나도 인간적인 선수들이다(the all-too-human athletes whose every achievement is an uphill battle). 쉽게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항상 뭔가 잘못 된다. 그들의 노력은 우리 삶의 몸부림을 연상시킨다. 그들의 성공은 우리가 최선을 다할 때 어떤 일을 이룰 수 있는지 상상력을 불어넣는다(their successes inspire us to imagine what we could be at our best).호프 솔로는 미국 대표팀에서 가장 감동적인 생존자일지도 모른다(might be the most compelling survivor). 그녀의 경력은 눈물을 자아내는(tear-jerking) 인간 드라마다. 올림픽의 중요한 순간에 TV에서 항상 방영하는 휴먼 스토리 동영상을 그대로 복제한 듯하다(was reverse-engineered). 전과자 아버지는 일찍이 가족 곁을 떠났다가 호프와 오빠를 납치한 죄로 감방살이를 했다.그 뒤 노숙자로 전락해 살인 용의자가 됐다.호프는 스트라이커에서 수문장으로의 원치 않는 변신에 적응하는 데 여러 해가 걸렸다. 2007년 월드컵의 중요한 경기 전 감독이 무슨 영문에선지 그녀를 벤치에 앉혔다.미국은 그 경기에서 4대0으로 패했다. 그녀가 기자들에게 자신이라면 “그 골들을 막아냈을 것(would have made those saves)”이라고 말한 뒤 출장정지 처분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팀에서 따돌림당했고 그로 인해 우울증까지 걸렸다. 2011년에는 선수생활을 접어야 할지도 모르는 어깨 부상을 당해 복잡한 수술을 받았다.몇 개월 동안 뼈를 깎는 재활을 거쳤다(months of grueling rehab). 리얼리티 쇼 ‘스타와 춤을(Dancing With the Stars)’에서 남자 파트너가 카메라 앞에서 그녀를 거칠게 대해 여성 시청자들의 공분을 샀다. 끝으로 이달 초 약물검사 결과 그녀에게서 금지 이뇨약품(a banned diuretic)이 검출됐다. 그녀가 의사에게서 처방 받은 생리통약(prescription menstrualcramp medicine) 성분이라는 사실이 당국에 의해 밝혀지지 않았다면 런던 올림픽 출전이 금지될 뻔했다.“뜻하지 않은 실수를 했다(made an honest mistake). 나는 운동선수로서 부끄러울 게 없다는 데 큰 자부심을 느낀다”고 호프가 말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그라운드 안팎에서 많은 시련을 겪었다(I’ve been through so much on and off the field).하지만 난관에 직면할 때마다 그것을 이겨내고 정복할 수 있었다. 덕분에 선수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상당한 내공이 쌓였다(that’s what gives me strength as a playerand as a person). 요즘엔 어지간해선 나를흔들지 못한다(takes a lot to rattle me these days).”신비주의에 기대려는 건 아니다(Not to get mystical or anything). 하지만 미국 전체가 갈수록 흔들리는 느낌이다. 이런 때 호프같은 생존자가 올림픽에서 미국의 분신으로 활약한다면(to have a survivor like Solo as our avatar at the Olympics) 분명 특이한 의미가 있을 듯하다. 어쩌면 펠프스의 시대도 갔을지 모른다. 미국은 사실상 어느 한나라가 지배할 수 없는 글로벌화된 게임에서 경쟁하고 있다. 원하는 만큼 소득을 벌어들이지 못한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여성들이 동등한 대접을 받게 하려고 애쓴다.개인에게 최선의 결과와 팀에 최선인 것 사이에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한다. 그런 점에서 호프도 마찬가지다.문제는 아무튼 그녀, 그리고 미국이 여전히 세계무대에서 승리할 수 있느냐는 점이다.나는 크라운 플라자의 객실에서 그녀를 마주 보고 앉았다. 실은 둘 사이에 메이컵 아티스트가 웅크리고 앉아 그녀의 얼굴 화장을 하고 있지만 말이다. 호프의 미모사 칵테일 잔이 이제 거의 비었다. 그녀에게는 그 술잔이 제법 어울리는 듯하다. 시애틀의 파티 프로모터 아드리안 갈라비즈와 데이트를 하고, 2008년 올림픽 때 유명인사와 잠자리를 같이 하고(bedded a celebrity),다음날 출연한 TV 프로그램 투데이쇼에서 “술 취한(그녀의 표현)” 듯 보이고, 시애틀 자택에서 밤샘 피클볼(pickleball, 배드민턴·테니스·탁구의 요소를 결합한 라켓 스포츠) 대회를 벌인 그녀에게는 말이다.호프가 아버지 이야기를 꺼내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마지막 눈을 감는 순간까지 자신의 비밀을 말하지 않았다(kept his secrets and went to the grave with them)”고 그녀가 말했다. “살아가는 동안 자식들에게 자신의 참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순간이 분명 있었을 텐데. 하지만 그 순간은 오지 않았다.”그녀의 아버지 제프리 존 솔로는 뉴욕 브롱크스에서 이탈리아계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친구들은 그를 제리 또는 조니라고불렀다. 어떤 이유에선지 호프를 비롯한 자식들에게는 토니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그는 어린 시절 “위탁양육 가정에서 위탁가정으로” 전전했다. 베트남전 참전 후 솔로는 보스턴을 거쳐 시애틀의 작은 교외로 이주했다.그 과정에서 제2의 사회보장 번호를 취득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는지 호프는 지금도 확실히 모른다. “증인보호 프로그램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Possibly the witness-protection program)”고 그녀가 말했다. “아버지와 같은 대도시 남자가 숨진 채 발견될 만한 동네가 결코 아니었다(It was the kind of town a big-city guy like him would never be caught dead in).”아버지는 워싱턴주 리치랜드에 있는 핸포드 핵시설에서 일하는 환경학자와 결혼했다. 몇 년 뒤 호프가 태어났다. 호프가 어렸을 때는 아버지가 가족의 곁을 지켰다(stuck around for Hope’s childhood). 그녀의 축구 팀 코치로 일하고 아내 주디가 가족을 부양할 동안 여기저기 일자리를 전전했다.하지만 “아버지는 일상의 단조로움을 무서워했다(the daily monotony of life scared him)”고 호프가 말했다. 그녀가 일곱 살이 됐을 때 부모가 이혼했다.그 다음 해가 호프의 소녀 시절 마지막 남은 아버지의 기억이다. 어느 날 아버지가 리치랜드에 다시 나타났다. 호프와 오빠 마커스를 인근에서 열리는 야구경기에 데려가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그 뒤 아버지는 계속 차를 달려서 산들을 넘어 시애틀에 도착했다”고 그녀가 돌이켰다. “수영장이 딸린 호텔방을 얻었다. 인생이란 이렇게 사는 거구나 싶었다(We felt like we were living the life).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더니 아버지가내게 말했다. ‘아가야, 엄마가 방금 전화했다. 3일만 더 여유를 주겠다는구나.’ 나는‘전화 벨이 울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뭔가 잘못됐음을 직감했다(knew that something wasn’t right).”하루 이틀 뒤 시애틀 시내의 한 은행에서 경찰 특별기동대가 아버지를 포위하더니“그를 경찰차 뒷좌석에 밀어 넣은 뒤 끌고가 버렸다(put him in the back of a police car,and hauled him off).”“우리 남매는 대도시의 거리에 둘만 남아 무서움에 떨었다”고 그녀는 돌이켰다. 얼마 안돼 아동보호국 직원들이 나타났으며 조금 뒤에는 엄마도 도착했다. 하지만 호프는 엄마가 당국에 신고한 일을 용서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기억한다(I remember not talking to her the whole ride home)”고 그녀가 말했다. “아빠가 감옥에 들어갔다. 어린 나는 혼란에 빠졌다.”호프가 아버지를 다시 만날 때까지 1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시애틀 공원에서 우연히 다리를 절며 지나가는 사람을 목격했다.반바지, 문신, 이탈리아계의 얼굴 윤곽이 유난히 낯익었다. “그가 내게서 멀어져 갔기 때문에 뒤를 쫓아갔다”고 호프가 말했다. 두사람은 재회했다. 호프가 워싱턴대 축구팀에 들어가 시애틀로 이주한 뒤 아버지는 그녀의 모든 경기를 관전했다. 딸의 경기를 보려고 몇 km를 걸어 다녔다.그녀는 숲 속에 있는 아버지의 녹색 텐트로 햄버거와 치즈를 가져갔다. 아버지가 호주머니에 음식을 우겨 넣거나 그의 코트에서 냄새가 날 때도 창피해 하지 않고 받아들이려 노력했다(learned not to be embarrassed when he wore a smelly coat or filled his pockets with food).하지만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은 더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일찍이 우리 가족에게 일어난 가장 해괴한 사건이었다(the most bizarre thing our family had ever been through)”고 호프가 말했다. 2001년 1월 4일, 마이크 에머트라는 부동산 중개인이 커클랜드 파크플레이스 쇼핑 센터에 도착했다. 그리고 주택 원매자를 자동차에 태워(picked up a prospective home buyer) 매물로 나온 인근의 고급 부동산으로 데려갔다.그 뒤 두 시간도 안돼 욕조 속에 얼굴을 처박고 숨진 채 발견됐다(was discovered face down in the bathtub). 그의 몸에는 칼에 찔린 자국이 19 군데나 됐다. 며칠 안돼 경찰은 제프리 존 솔로를 이 사건의 ‘용의자(person of interest)’로 지목했다.솔로는 처음부터 혐의를 부인했다(denied any wrongdoing). 2001년 1월 9일 시애틀의 온라인 매체 포스트-인텔리전서에 “나는 살인자가 아니다”고 말했다. 하지만 또한 “착한 사람”도 아니라고 자인했다.“5년 동안 거리에서 생활했으며” “많은 여성을 이용했고” “교도소를 다녀왔다.” 그에게는 사기, 강도, 범죄음모, 위조, 절도, 폭파위협 등의 전과가 있었다. 리치랜드에서 거주하는 “가족의 한 지인(associate of the family)”은 솔로의 말을 뒷받침했다. “요주의 인물(He’s bad news)”이라고 그는 말했다. “12년동안 아이들에게 거짓말을 했다.”몇 달 뒤 경찰은 솔로를 용의선상에서 제외했다(cleared Solo’s name). 그의 알리바이가 성립됐다(his alibi checked out).하지만 오랫동안 그의 범죄 의혹은 가시지 않았다.2011년에야 수사관들은 마침내 에머트의 살인 혐의로 한 전과자를 체포했다(그가 솔로에게 혐의를 덮어씌웠을지도 모른다). 호프는 아버지가 겪은 불행에 관해 이야기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아버지를 “가슴 속에 사랑이 넘쳤던 길 잃은 영혼(a lost soul with so much love in his heart)”으로 묘사했다.하지만 항상 토니 또는 조니 또는 제리 솔로에 관해 더 깊이 알고 싶었다고 그녀는 말한다. 호프의 잡초 같은 생명력과 추진력은 아버지가 살았던 인생에 대한 반작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그녀는 인생의 역경에 정복당하기보다 그것을 극복하겠다고 오래 전에 다짐한 듯했다.호프는 2007년 봄 아버지의 뉴욕 방문을 주선했다. 마침내 딸이 국가대표로 뛰는 모습을 지켜보게 된 것이다. 시간이 허용된다면 어쩌면 그녀를 브롱크스로 데려가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줬을지도 모른다. 호프가 첫 월드컵에 출전하기 몇 달 전이었다. 그녀는 미국 프로농구 챔피언십 경기 관람차 클리블랜드에 있었다. 그들은 전화통화를 했다.“NBA 결승전 때 아버지 선물로 모자를 샀다고 말했다(I told him I’d gotten him a hat from the finals)”고 호프가 돌이켰다. “이번에는 모자를 써야 한다고 다짐을 받아냈다. 아버지는 때가 타지 않도록 모자를 비닐에 싸서 옷장 선반에 고이 모셔두곤 했기 때문이다(because he used to put his hats onhis shelf, in plastic, so they wouldn’tget dirty). 호텔에 가서 다시 전화를 하겠다고 말했다.” 잠시 침묵이 흐른다.“그 뒤 뉴욕으로 돌아가선 전화를 하지 않았다.” 얼마 뒤 그녀 방의 전화가 울렸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메시지였다.호프는 아주 어릴 때부터 축구로 자신의 감정을 발산했다(For as long as she can remember, soccer has been Solo’s outlet). 멀리 떨어진 아버지와 가까워지고 아버지에게 없는 힘을 보여주는 한 방편이었다.“12살 때 선생님이 커서 무엇이 되고 싶은지를 주제로(about what you want to be when you grow up) 글을 써오라는 숙제를 내줬다”고 마침내 메이크업이 끝나갈 무렵 그녀가 말했다. “나는 행간을 넓게 띄워 대문자로 ‘어른이 되면 프로축구선수가 되겠다’고 썼다. 당시에는 여자프로축구 같은 게 없다는 사실은 내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호프는 초반엔 잘 나갔다(Solo’s early career was golden). 쉬는 시간에 “상급반 남학생들과 함께 노는 유일한 여자아이”였다. 프로미식축구팀 LA 레이더스의 추리닝 상의를 벗거나 뒤로 가지런히 묶은 꽁지머리를 푸는 법이 거의 없었다. “나는 여자아이들에겐 별로 인기가 없었다(I wasn’t too popular with the girls). 걔들은 한쪽에서 …뭔가 다른 놀이를 했다”고 말하며 그녀가 웃었다. “어떤 놀이를 했는지도 나는 모른다.”호프의 선머슴 같은 훈련방식은 곧 진가를 나타냈다(Solo’s tomboy training soon paid off). 리치랜드 고등학교 팀 소속으로 109골을 기록하며 두 차례나 미국 최우수 공격수로 선정됐다. 그녀는 “여자아이처럼 노는 법”을 한 번도 배우지 못했다.또한 수문장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따라서 워싱턴대 레슬리 골리모어 감독이 그녀를 골키퍼로 기용하려 했을 때 호프는 선뜻 응하지 않았다.“어떤 아이를 부모가 골 문에 세우려 할까(Who do parents put in goal)?” 호프가 말했다. “뚱뚱한 아이다. 잘 뛰지 못하는 아이.”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에서 골리모어는 그녀를 고집했다.호프의 시야가 넓고 공을 다루는 능력이 뛰어나 흔히 골 네트 앞을 지키는 다른 2류 선수들보다 잘 해내리라는 걸(would elevate her above the second-rate players who were usually parked in net) 그녀는 알았다. “같은 나이의 대다수 아이들이 막지 못하는 슛도 호프는 처낼 수 있었다”고 골리모어가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킥 능력, 움직임도 중요했다. 그녀는 내가 본 최고의 선수중 한 명이었다.”호프는 워싱턴대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녀의 아버지가 이 지역에 있었다”고 갤리모어가 돌이켰다. 하지만 스트라이커였던 그녀가 수문장 역할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여러 해가 걸렸다. “팀원들과 함께 비행기에 탔을 때 누군가 ‘골키퍼는 누구지?’ 하고 물었다”고 호프가 말했다. “나는 말 그대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정말 싫었다.비참했다. 필드에서 뛰게 해달라고 졸랐다.” 그러나 그녀답게 호프는 자신을 부단히 채찍질해(true to form,Solo pushed herself) “몸 상태를 최고로 만들고 어떤 일에서나 최고가 됐다(to be the first in fitness, the first in everything).” 그리고 졸업할 무렵에는 미국의 정상급 대학생 골키퍼가 됐다.무엇이 호프를 그렇게 탁월한 수문장으로 만들었을까? 일면 그것은 포워드로서 그녀를 돋보이게 만든 것과 같은 강점이었다(was the same strengths that had distinguished her as a forward). 그녀는 강하고 정확한 발을 가졌다. 이는 공을 55~75m까지 멀리 차보내 빠른 역습을 펼칠 수 있다는(could trigger a sudden counterattack) 의미다. 그녀는 드리블과 볼 배분에도 뛰어났다.덕분에 전방 공격수에게 공을 찔러 넣어주는 일종의 미식축구 쿼터백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자기 진영에서 불필요하게 적의 압박을 받지 않고 곧바로 공격을 전개하도록 한다(avoiding pressure in the backfield and setting up runs). 공중 볼을 잡는(pull balls out of the air) 데도 공격수 경험이 도움이 됐다(호프의 장기다).크로스를 예측하는 일은 수문장이나 스트라이커 모두에게 크게 다르지 않다. 단지 입장만 바뀔 뿐이다.동시에 호프는 “슛을 막아낼 뿐 아니라 조직적으로 움직여 아예 슛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 법도 배웠다(learning not just to be the shot stopper, but to prevent shots altogether by organizing her defense)”고 골리모어가 말했다.호프는 대학 졸업 후 2년 만에 올림픽 대표로 처음 선발됐다.2007년 중국 월드컵까지는 만사형통이었다(Everything was going right). 대회 초반은 순조로웠다. 처음 네 경기 중 세 번을 무실점으로 막았다(recorded shutouts).아버지를 잃은 슬픔이 아직 가시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숙적 브라질과 중요한 준결승 경기를 앞둔 전 날이었다. 팀의 저녁 식사자리에서 그레그 라이언 감독이 그녀를 자기 방으로 호출했다. “나는 금세 속이 뒤집히는 듯한 느낌이었다(instantly got a pit in my stomach)”고 호프가 말했다.“음식이 먹히지 않아 접시를 밀어냈다.” 라이언은 호프에게 나쁜 소식을 전했다. 그녀를 벤치에 앉히고 노장인 브라이애나 스커리를 대신 기용한다는 내용이었다(he was benching her in favor of veteran keeper Briana Scurry).라이언은 공식적으로는 브라질의 공격적인 스트라이커들을 차단하는 데 필요한 빠른 반사동작은(making the rapid-fire reflex saves required to stymie Brazil’s aggressive strikers) 스커리가 더 낫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호프로선 납득이 가지 않는 해명이었다(wasn’t convinced). “자신의 방에서 감독님은 변명에 변명을 거듭했다”고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솔직히 그가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조차 몰랐다.이유가 계속 바뀌었다.”스커리가 네 골을 내줄 동안 호프는 그라운드 밖에서 울분을 삭여야 했다(As Scurrysurrendered four goals, Solo sulked on thesidelines). “나는 아버지를 위해 뛰었다. 마치 다른 에너지가 샘솟는 듯 감정과 열정이 흘러 넘쳤다”고 그녀가 말했다.“내 인생 최대의 경기에서 벤치를 지키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never imagined that I’d sit on the bench for the biggest game of my career).” 경기 후 기자의 질문을 받았을 때 호프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했다. “잘못된 결정이었다. 축구를 아는 사람이라면누구나 뻔히 알 만한 사실(anybody knows anything about the game knows that)”이라고 그녀가 말했다.“나라면 그 골들을 막아냈을 것이라고 의심하지 않는다.” 이번 사진작업의 야외촬영을 위해 탬파의 알론조 고등학교로 이동할 때 지금도 그렇게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그녀는 잘라 말했다. 많은 축구 팬도 그녀와 생각이 같다. 하지만 2007년 당시 호프의 낙담한 팀 동료들은 그런 가정에는 관심이 없었다(Solo’s crestfallen teammates didn’t care about the hypotheticals). 스타수문장의 행동에 충격을 받은 라이언 감독은 호프에게 출장정지 처분을 내리고 혼자 시애틀로 돌려보냈다.라이언은 결국 해임됐다(was eventuallysacked). 스웨덴 프로 선수 출신의 후임 감독 피아 순드하게는 호프의 대표팀 복귀를 요청했다. 하지만 호프는 그 스캔들로 상처를 받았다. “나는 엿 같은 기분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축구를 하는 의미가 없는 듯했다”고 그녀가 말했다. “내 안에서 열정이 빠져나갔다(My passion was stripped).집에 혼자 틀어박혀 지냈다. 전화도 받지 않았다.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한 번은 팀 동료들이 엘리베이터에 그녀와 같이 타기를 거부했다. 또 다음 번에는 미국 국가를 부르는 동안 운동장에 나오지 말고 통로에서 혼자 서있으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마치 내가 미국인으로선 부족하다는 듯이 말이다.” 그녀의 말이다.호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알론조 고등학교의 텅 빈 야구장을 응시했다. “나는 오랫동안 그 한심한 팀 내 인기 경쟁을 계속해야 하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고 이윽고 그녀가 말을 이었다. “나는 그냥 선수로 경쟁하고 싶었다(just wanted to be an athlete and compete). ‘나를 싫어한다 해도 상관 없다. 축구가 내 일이니까.’나는 내 방에 처박혀 지내곤 했다. 팀원들과 쇼핑도, 볼링 파티에도 가지 않았다. 그러면 그들은 항상 수군거렸다. ‘호프는 자기가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팀 플레이어가 아니다.’ 나는 단지 개인 시간을 갖고 싶을 뿐이었다.”순드하게 밑에서 상황이 많이 좋아졌다고 호프는 말한다. 2007년 이후 그녀의 성적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66경기 중 단 3패만 기록했으며 허용한 골(29)보다 무실점경기가 더 많았다. 2008년 올림픽 결승전때 그녀의 팔뚝 방어야말로 미국이 금메달을 차지한 최대 이유 중 하나였다. 그리고 2011년 월드컵 브라질과의 대전에서 그녀의 다이빙 블로킹이 없었다면 미국은 결승전에 진출하지 못했다.그 9개월 전 호프는오른쪽 어깨의 치명적인 관절와순(어깨뼈를 둘러싼 섬유질 연골) 파열(labral tear)을 치료하는 수술을 받았다. 그녀가 운동을 계속하는 게 기적이었다. 게다가 호프는 마침내 동료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함께 어울리는 요령을 배웠다고 한다(she’s finally figured out how to motivate and mesh with her teammates). “여자 선수들은 다소 민감하고 감정적이 되는 경향이 있다.내어조는 항상 그들과 어긋났다”고 그녀가 털어놓았다. “지금은 90% 정도는 수비수들의 비위를 맞춰준다(kiss my defenders’asses 90 percent of the time). 그래야 그들의 엉덩이를 걷어찰 때 제대로 반응한다(so they’ll respond when I’m kicking their asses). 사람들의 성격을 파악해야 했다. 내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하지만 호프는 지금도 때때로 자신의 스포츠 그리고 자신과 같은 여성들 사이에서 이방인처럼 느끼기도 한다(can still sometimes feel like an outsider). 남자 선수들이라면 2007년 월드컵 이후 그녀의 동료들처럼 반응했겠느냐고 묻자 호프는 몇 초동안 고개를 돌려 반대편을 응시한다. “물론 달랐을 것”이라며 다시 입을 연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부드러워져 있었다.“남자 선수들이라면 로커룸에서 두어 번 몸싸움을 했을지 모른다. 어쩌면 ‘엿먹어, 자식아’라고 욕하면서. 하지만 개인적인 인신공격은 하지 않았을 성싶다. 그리고 분명 모두가 유명선수의 행동을 따라 하는 이런 골목대장 놀이는 하지 않는다(there definitely wouldn’t have been this follow-the-leader thing). 우리는 프로 선수들이다.경기에서의 승리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다시 탬파의 알론조 고등학교. 오후의 폭풍우 구름이 수명을 다한 전등처럼 번 쩍인다(the afternoon storm clouds are flickering like faulty lightbulbs). 사진촬영 작업이 끝나려는 참이다. 호프와 마지막 몇분의 대화를 기다릴 동안 그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wonder what to make of her).그녀는 다른 여자선수들과 얼마든지 다르게 행동할 생각이 있는 반항적인 디바일까? 아니면 그녀로선 한번도 자연스럽게 찾아온 적이 없는 인정과 리더십 역할을 갈구하는 걸까(does she crave the kind of acceptance—and the kind of leadership role—that has never come naturally to her)?사실은 호프 자신도 아직 그 답을 모르는 듯하다(is still figuring it out). 리얼리티쇼 ‘스타와 춤을’에 출연했을 때를 돌아보자. 녹화된 리허설 도중 솔로의 전문댄서 파트너 막심 크메르코프스키가 크게 짜증을 내며 그녀를 난폭하게 다루기 시작했다(got so frustrated that he started pushing her around). 언제나 선머슴 같은 호프는 처음에는 그의 행동을 용인하는 듯했다.“그가 나를 거칠게 대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나를 보고 싶어하지 않을 것(You wouldn’t want to see me if he wasn’t tough on me)”이라고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대신 시청자들이 들고 일어났다. 그러자 호프도 가만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realized that she had to speak out). “시청자는 ‘어떻게 여성, 부당한 대우를 받는 여성의 입장을 대변하지 않는가’ 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호프가 회고했다.“나는 그들을 달래며 항상 그런 사람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겠다고 약속했다.” 며칠 뒤 그녀는 그 프로의 진행자 라이언 시크레스트에게 자신은 “강하고 독립적인 여성이며 그냥 좌시하지않겠다(would never just let go unnoticed)”고 말했다.호프가 마침내 내 피크닉 테이블에 다시 나타났을 때 그녀의 머리카락은 헝클어지고 흰색 민소매 상의는 땀과 먼지로 얼룩졌다. 사진작가는 경기 후와 성관계 후를 연관지으려고 의도한 룩(외양)이라고 말했다(a look that’s meant to blur the line between postgame and postcoital).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생각하는지 호프에게 물었다.“재미있는 질문”이라고 그녀가 말했다. “나는 ‘팻말을 들고 다니자’는 식의 페미니스트는 아니다. 나는 여권운동가가 아니며 나를 그렇게 생각한 적도 없다. 하지만 많은 여자 선수가다른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아 그래요, 연봉을 삭감할게요’ ‘건강보험 없이 프로축구 경기를 할게요’라는 말을 한다고 생각한다.나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게 전부가 아니라고 항상 말한다. 무엇보다 먼저 운동선수로서 자신을 돌봐야 한다. 다음 세대를 위해 축구를 발전시켜야 한다. 그건 여자들에게는 때로는 힘든 일이다. 그런 점에선 내가 페미니스트인 듯하다.”올림픽에 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호프가 테이블에서 일어날 때 물었다. 거기서 런던 올림픽은 어떤 역할을 하나? “간단하다.”호프가 대답했다. “우리가 우승하면 평생의 팬을 얻게 된다.” 못하면? “우리 모두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게 된다.”그 말을 끝으로 호프는 떠나갔다(Hope Solo is off). 플로리다의 밤 속으로, 그리고 대서양을 건너. 승리를 위해 뛰어야 하는 또 다른 경기, 증명해야 할 다른 명제가 항상 기다리기 때문이다(There’s always another game to win, and something else to prove)

2012.07.24 16:23

20분 소요
like something out of a spy thriller 격랑 속의 차분한 항해

산업 일반

게리 로크 신임 주중 미국대사, 중미 관계의 긴장 수위를 높인 천광청 사건 등에서 능숙한 외교 수완을 발휘한다지난 2월 6일 오후 게리 로크(62) 중국주재 미국 대사는 베이징 시내에서 미팅 중이었다. 그때 블랙베리 휴대전화에 긴급 e-메일이 도착했다. “대사관 비화통신(도청이 불가능한 통신) 구역으로 즉시 귀환 요망(Return to the embassy’s secure communications area immediately).” 로크대사는 급히 대사관으로 돌아갔다. 쓰촨(四川)성 청두(成都)의 미국 총영사관에 중국공안의 고위 관리가 들어와 신변 위험을 이유로 미국 망명을 요청했다는 놀라운 소식이었다.왕리쥔(王立軍) 충칭(重慶)시 부시장 겸공안국장은 조직범죄의 가차 없는 단속으로 중국의 ‘엘리엇 네스(금주법 시대의 마피아와 싸운 미 재무부 연방 수사관)’로 알려졌다. 그런 그가 자신의 과거 멘토였던 보시라이(薄熙來) 충칭시 당서기로부터 살해 위협을 받는다고 말했다. 보시라이와 그의 아내를 잘 알았던 영국인 사업가 닐 헤이우드의 독살 사건과 관련해 자신이 아는 게 너무 많기 때문이라는 설명이었다. “너무도 놀랍고 굉장한 폭로였다(fascinating, eyepopping revelations)”고 로크 대사가 뉴스위크 단독 인터뷰에서 돌이켰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아니 세상에! 이럴 수가!( My first reaction was ‘oh, my God, I mean OH,MY GOD!)’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그 후 120일간은 신임 주중대사 로크의 삶에서 말 그대로 역사적인 시점이었다(nothing short of historic). 왕리쥔 문제만이 아니었다. 시각장애인 인권운동가 천광청(陳光誠)의 대담무쌍한(daredevil) 탈출 후 얽힌 외교 문제도 해결해야 했다.중국 공산당 내의 보시라이 지위를 감안하면 왕리쥔이 미 영사관에 있다는 사실은 매우 민감한 문제였다(a delicate situation).엎친 데 덮친 격으로(upping the stakes) 보시라이는 왕리쥔이 미국인들에게 갔다는 사실을 알고 무장 공안들을 파견해 영사관을 에워쌌다. 그러나 왕리쥔은 항복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믿는 사람들을 불러 청두 미 총영사관에서 베이징으로 가는 길을 호위하게 했다. 현지 당서기인 보시라이와 그의 측근들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away from the clutches of the local party chief and his cronies).. “스파이 스릴러 같았다(It felt like something out of a spy thriller)”고 로크대사가 뉴스위크 인터뷰에서 말했다.그때부터 중국계 미국인인 로크 대사는 갈수록 기이해지는 사건의 중심에 서게 됐다. 왕리쥔이 미 영사관에 나타났을 때 로크는 부임한 지 6개월밖에 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고도의 외교 수완(the highest degree of diplomatic dexterity)을 발휘해야 했다.로크의 부친은 중국에서 미국으로 이민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 오마하 해변에서 싸웠다.로크는 참전용사 가족을 위한 공공주택에서 성장했다. 그 다음 예일과 보스턴 대학을 나와 검사로 활동한 뒤 정치에 입문했다. 워싱턴 주지사(미국 최초의 중국계 미국인 주지사였다)를 연임한 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상무장관에 발탁됐다. 그는 워싱턴 주지사로 일하던 1999생애 가장 큰 도전 중 하나를 만났다.워싱턴주 시애틀에서 열린 세계무역기구(WTO) 정상회의 때였다. 경찰이 시위대를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로크가 나서서 국가방위군을 불러 폭동 진압을 이끌었다(Locke took charge, called out the National Guard, and led the response that quelled the riots)”고 당시 그의 비서실장 조디어가 돌이켰다. “그는 차분하고 냉철하며 일을 성사시키는 데 전적으로 집중했다. 어려운 상황에서 사람들이 지도자에게 바라는 바로 그런 자질을 갖췄다(He was calm, cool, and extremely focused on getting it right—exactly what you want from a leader in a tough situation).”2003년 로크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국정연설 직후 민주당의 부시 비판을 대변하는 연설을 한 뒤 협박 e-메일을 받았고, FBI는 그의 암살 음모를 적발했다(백인 우월주의 단체의 한 회원이 로크의 주지사 사무실 안내 데스크까지 접근했다).“자녀들의 안전 때문에 너무도 섬뜩했다(It was very unnerving)”고 로크는 돌이켰다. “그 용의자는 소수민족 출신이 워싱턴주의 주지사라는 사실이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 게 분명했다(The guy evidently thought that it wasn’t appropriate for someone of a minority background to be the governor of Washington state).” 그는 신변 안전의 우려때문은 아니라고 말했지만 그 직후 정치를 잠시 쉬기로 결심하고 시애틀의 법률회사에서 중국 관련 일을 맡았다.로크는 힐러리 클린턴이 뉴욕주에서 상원의원에 출마했을 때 뉴욕의 대규모 중국계 미국인 모임에서 그녀를 소개하는 등 클린턴의 선거운동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클린턴의 2008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때는 그녀의 워싱턴주 선거대책 공동본부장을 맡았다. 그는 클린턴을 진정으로 존경하고 좋아하는 듯하다(his admiration and fondness for his boss appear genuine).클린턴을 이야기할 때 “영리하고 의지가 투철하다(sharp and strong-willed), 재미있다(funny), 너무 멋지다(incredible), 아주 놀랍다(amazing)” 등의 찬사를 자주 사용한다(뉴스위크의 인터뷰 도중에 로크는 클린턴과 관련한 민망스러운 순간도 돌이켰다. 그의 딸 에밀리가 태어난 직후 클린턴이 에밀리를 안았는데 에밀리가 클린턴의 정장 상의에 토했다고 한다).로크는 존 헌츠먼(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에 출마하려고 주중 대사직을 사임했다)의 후임자였다. 그는 주중 대사 임명이 비준되자 최근 세상을 떠난 아버지가 생각났다고 돌이켰다. “자기 아들이 미국의 대표로서 우리 선조들의 땅이며 그가 태어난 나라로 돌아가는 모습을 봤다면 얼마나 자랑스러웠을까(He would’ve been most proud to see his son return to the land of his birth, and of our ancestors, as a representative of the U.S.) 하는 생각에 무척 안타까웠다.”하지만 그는 아내 모나(시애틀의 NBC 지사에서 기자로 활동했다)와 세 자녀가 선조의 고향에 가서 그곳의 삶을 경험한다는 사실이 기뻤다. “우리 모두 신나는 모험이라고 생각했다.” 로크는 1988년 부모와 함께 처음 중국 을 찾았다. “중국의 농촌에 가보니 할아버지나 증조부의 시대로 돌아간 듯했다(In rural parts of China, it’s like stepping back into the era of my grandfather or greatgrandfather)” 고 그가 말했다.그러나 동시에 중국은 급속한 변화를 겪는 중이었다. 하늘을 찌르는 도시 스카이라인, 의복, 생활수준에서 변화가 확연했다. 세계의 경제 엔진으로서 중국은 현재 미국의 유일한 파트너 다. “닉슨의 첫 중국 방문, 또는 지미 카터 대통령의 대중국 국교정상화 이후 큰 진전이 있었다(We’ve come a long way since Nixon’ s first visit to China, or Carter’s reestablishment of diplomatic relations)”고 로크가 말했다.야심만만한 충칭시 당서기 보시라이가 연루된 센세이셔널한 살인사건은 로크가 대사로 부임한지 얼마 안 된 기간에 닥친 중미 외교 관계의 첫 시험대에 불과했다(just the first test of diplomatic relations during Locke’s young tenure). 두 달 반 뒤 훨씬 더 복잡한 천광청 사건이 터졌다. 지난 4월 천광청은 산둥(山東)성의 초법적인 가택연금에서 대담한 탈출에 성공했다. 그는 베이징으로 달아나 극적인 자동차 추격(a dramatic car chase) 후 미국 대사관으로 피신했다. 당시 인도네시아에서 휴가 중이던 로크는 다시 긴급한 외교 업무로 황급히 대사관에 복귀해야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문제가 훨씬 더 컸다(This time, though, the stakes were much higher).천광청은 탈출 당시 담을 넘다가 낙상으로 위장관 출혈(gastrointestinal bleeding)과 왼발 골절로 고통받았다. 그는 처음엔 중국을 떠날 생각이 아니었다. 다만 “정상적인삶(a normal life)”을 원한다고 그는 로크 대사에게 말했다. 공부할 기회를 얻고, 그리고 원자바오(溫家寶) 총리에게 자신의 편지를 전달하고 널리 공개하는 데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다. 로크는 그에게 기꺼이 도움을 주겠다고 동의했다.한 살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한 천광청은 표준 중국어(Mandarin)를 잘하는 미 국무부 직원에게 자신의 편지를 받아 적게 했다 (dictated)고 뉴스위크에 말했다.그 편지에서 천광청은 자기 가족들이 지방 관리들에게 받는 무자비한 박해를 중국 정부가 조사해 달라고 촉구했다. 미국 측은 그 편지를 원자바오 총리에게 전달했다 (중국 관리들은 그 편지나 내용에 관해 논평을 거부했다).왕리쥔의 이야기처럼 천광청의 이야기도 중앙 정부가 아니라 지방 관리들의 행태에 대한 고발이긴 했지만 천광청 사건은 중국과 미국 양측에 곤혹스러운 난제를 안겼다(Chen presented a conundrum for both Beijing and Washington). 당시 관리들은 그 다음주에 베이징에서 열릴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과 고위 중국 관리들의 연례 중미 전략경제대화를 준비하느라 바빴다.천광청이 미국 대사관으로 피신하기로 한 결정은 1989년의 사건들을 떠올리게 했다. 중국 정부가 톈안먼 광장의 시위대를 유혈 진압한 뒤 천체물리학자인 반체제 인사(dissident astrophysicist) 팡리즈(方勵之)와 그의 아내는 미국 대사관에서 1년 이상 지낸 뒤 미국으로 망명했다(지루한 협상 끝에 중국은 결국 그의 미국행을 묵인했다). 어떤 면에서는 천광청과 미국 관리들의 생각이 어긋났다. 천광청은 미국 대사관을 ‘해적방송(pirate radio, 현지에 파견된 한 미국 관리의 표현이다)’으로 사용해 자신이 처한 곤경을 널리 알리고 싶어했다(Chen wanted to blast out this plight).그러나 미국 측은 오래 전부터 계획된 전략대화에 먹구름을 드리운 이 문제를 신중하게 해결하려 했다 (the Americans wanted discreet resolution to an issue that now overshadowed longplanned-for talks). 천광청은 미국 대사관을 나가면 “극히 불안전하다”고 한 친구에게 말했으면서도 며칠 뒤 대사관을 떠나 베이징의 한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일단 대사관을 벗어나자 중국에 머무는데 자신감을 잃었다(he lost heart about his decision to stay in China). 미국인들로부터 차단되고 중국 공안에게 둘러싸이자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우려하기 시작했다. 그는 뉴스위크 기자에게 전화로 울먹이며 중미 전략경제대화가 끝나면 클린턴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떠나고 싶다고 말했다.그의 말이 중미 대화에 긴장의 수위를 더 높였다(His comments only added further tension to the talks). 특히 미국 측은 중국 정부를 상대로 그를 너무 강하게 옹호하기를 꺼렸다. 한 미국 관리는 뉴욕타임스 기자에게 이렇게 돌이켰다. “한 명 때문에 외교관계를 망치는 시절은 끝났다(The days of blowing up the relationship over a single guy are over).” 페리 링크 프린스턴대 동아시아 학과 명예교수는 같은 신문에 보낸 독자 편지에서 수년 동안 중미 외교의 발목을 잡았던 “심각한 오해(a serious misconception)”를 범해선 안 된다고 경고했다. “중국의 권력 남용에 저항하는 여러 다른 사람처럼 천광청은 ‘한 명’이 아니다(Chen Guangcheng, like other people who stand up to abuse in China, is not ‘a single guy’).그는 인권운동 으로 중국에 상당한 지지자가 있었다(Mr.Chen’s rights advocacy has earned him a considerable following in China). 지난달 그의 극적인 탈출 때문에 이제 그 지지자들이 수백 배로 늘었다(last month his dramatic escape expanded that following many hundreds of times).”그런데도 대화 첫 이틀 동안 클린턴은 천광청의 문제를 꺼내지 않았다(Clinton didn’t bring up Chen). 마침내 클린턴이 그 이야기를 꺼냈을 때 중국 측은 당연히 분노했다 (it ignited Chinese anger).그러나 로크 대사와 밥 왕 부대사가 천광청과 커트 캠벨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를 설득했고, 캠벨이 다시 중국 관리들과 대화하는 숨가쁜 협상끝에 결국 천광청 부부와 두 자녀의 5월 19일 미국행이 결정됐다.뉴욕대의 중국법 전문가로 천광청의 친구인 제롬 코헨 교수(뉴욕대 연구원 자리를 주선했다)는 로크 대사의 상황 처리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로크는 바지저고리가 아니다(Locke is not an empty suit). 그는 아주 진실된 사람이다(He’s very sincere).”로크는 채찍보다 당근을 선호하며 (prefers carrots to sticks) “언제나 상생의 길을 모색한다(always looking for the winwin)”고 코헨이 말했다. “상대방에게 얻는게 없고 당하기만 한다는 느낌을 줘선 절대 안 된다(You can’t let the other side see themselves getting nothing, getting beaten). 그러면 누가 다시 함께 일하려 하겠나?” 그러나 일부 관측통은 그런 긍정적인 낙관주의로 충분할지 의문을 표한다(But some observers wonder whether such cando optimism will be enough).천광청 등의 인권운동가들과 긴밀히 연락해 온 텍사스주의 기독교 인권옹호단체 대표인 밥 푸는 이렇게 말했다. “물론 로크 대사는 용기가 대단한 사람으로 배짱이 두둑하다 (Ambassador Locke has a lot of courage; he has guts). 그러나 그런 응급 처방은 단한 건의 문제에만 해당한다(But all theseemergency negotiations were about just one case). 그 문제가 해결된 뒤에는 중국 정부의 구태의연한 방식이 지속될 수 있다(After it’s resolved, the Chinese government’s old ways can continue). 전략적 게임은 변하지 않았다(The strategic game hasn’t changed).” 푸는 중국 당국이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보복할지(settle scores) 모른다고 걱정했다.지난주 천광청의 친형인 천광푸(陳光福)도 베이징에서 아들 천커구이(陳克貴)를 위한 변호사를 구하려고 감시를 받고 있던 마을을 탈출했다고 알려졌다. 그의 아들은 집안에 들이닥친 침입자들(사복 공안일 가능성이 크다)이 구타하자 부모를 보호하려고 칼을 들고 맞선 뒤 구속됐다. 미국 관리들도 중국 관리들과 마찬가지로 베이징의 미국 대사관이 반체제 인사들이 대거 서방으로 망명하는 발판(a springboard for a wave of dissidents going to the West)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천광청 사건에 논평을 요구하자 중국 외무부는 간단한 답변을 팩스로 보내왔다. “미국은이번 사건에서 진지하게 교훈을 얻어(the U.S. should seriously draw a lesson from this incident)” 중미 관계에 이익이 되도록(in the interest of Chinese-American relations)“정책과 행위를 재고해야 한다(rethink its policies and actions)”는 내용이었다.클린턴 국무장관은 “이런 사건이 다시 일어나기를 기대하지 않는다(I don’t anticipate seeing any case like this again)”는 표현으로 중국 정부를 안심시켰다. 로크가 주중 미국 대사로 처음 부임했을 때 중국의 소셜미디어 사이트에는 그의 소탈한 몸가짐을 칭찬하는 글이 가득 했다(Chinese social-media sites had been abuzz with comments about his unassuming demeanor). 직접 배낭을 메고 스타벅스 커피를 사는 그의 사진이 널리 퍼졌다. 그러나 천광청 사건 후 이제 관영 언론들은 그를 호의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Now, post-Chen, government-run papers paint a less flattering portrait). 베이징의 한 신문은 다음과 같은 비아냥으로 로크를 비난했다.“그가 비행기의 이코노미 클래스를 타고, 배낭을 직접 메고, 할인쿠폰으로 커피를 사고, 소탈한 사람인 체(putting on a charade of being a regular guy) 중국에 도착했지만 그 이래 우리가 본 사람은 언행이 신중한 주중 대사가 아니라 주제넘게 나서서 분란을 일으키는 전형적인 미국 정치인(a standardissue American politician ho goes out of his way to stir up conflict)이었다.”로크는 그런 모욕에도 침착했다(unruffled by the slights). 앞으로 닥칠 어려움에도 주눅 들지 않는(undaunted by any challenges ahead) 모습이었다.로크는 “시애틀의 WTO 폭동, 대규모 지진과 홍수, 산불 등 산전수전 다 겪었다(I’ve been through WTO riots in Seattle, massive earthquakes,major floods … forest fires)”고 말했다. “최대한 안정되고 차분해지려고 노력할 뿐이다(I just try to be as even-keeled and calm as possible).”

2012.06.28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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