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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NOM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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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대교 붕괴 참사 30주기…위령탑 이전 실현은?

정책이슈

성수대교 붕괴 사고가 30주기를 맞는 가운데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위령탑의 접근성이 떨어져 이전을 논의하고 있지만 진척이 없는 상황이다. 성수대교 붕괴사고는 30년 전인 1994년 10월 21일 오전 7시 40분께 발생했다. 성수대교 상부가 무너지며 당시 등교 중이던 무학여고 학생 8명 포함 시민 32명이 사망하고 17명이 다쳤다.이에 서울시가 성수대교 사고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사고 3년 만인 1997년 10월 21일 위령탑을 조성했다.21일 서울시와 성동구에 따르면 성수대교 인근 북단 IC 주변에 위치한 위령탑은 현재 걸어서 갈 수 없다. 버스 등 대중교통으로도 접근할 수 없다.건립 당시에는 걸어서 갈 수 있었지만 2005년부터 보행길이 끊겼다. 서울 성동구 금호동 방면에서 강변북로 진입·출입을 위한 램프가 설치되면서다. 또 위령탑과 주차장을 잇는 짧은 횡단보도 에도 신호등이 없다.접근성이 떨어지다보니 유족 측은 9월 서울시에 서울숲으로 위령탑 이전을 제안했다. 이전이 어려울 경우 주차시설 개선, 교통 안전시설을 보완해달라고 제안했다.하지만 실현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서울시 관계자는 "최근 구청을 통해 유족분들과 해당 사안을 논의했으나, 서울숲 쪽에서 반대하는 입장이라 이전이 쉽지 않다"며 "다른 제안을 수용해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횡단보도가 눈에 잘 띄도록 LED(발광 다이오드) 횡단보도로 바꾸는 등 적극 지원할 계획"이라고 말했다.한편 성동구는 이날 희생자 위령탑에서 합동 위령제를 열 방침이다. 서울시는 28일까지 위령탑 인근 주차장에서 임시 이동 화장실을 둔다.

2024.10.21 14:27

1분 소요
‘4억6000만원’에 팔린 박수근 ‘노상’…후끈 달아오른 케이옥션 ‘새해 두번째 경매’ [가봤어요]

산업 일반

“4억6000, 4억6000, 4억6000. 땅땅땅. 낙찰입니다”한국 근대 미술의 자존심, 박수근 화백의 ‘노상’이 경매 현장에서 4억6000만원에 팔렸다. 작품이 낙찰을 확정짓는 순간, 박수가 쏟아졌다. 현장 입찰자뿐 아니라 서면, 전화, 온라인 창구를 통해 실시간으로 경매에 임하던 컬렉터들까지, 한마음으로 주인을 찾아간 작품에 축하를 전했다.지난 22일 오후 4시, 서울시 신사동에 위치한 케이옥션 본사에서는 올해 두번째 오프라인 경매가 개최됐다. 회화 작품부터 서예, 민속품까지 포괄해 총 78점(45억원어치)이 출품됐다. 이번 경매는 박수근을 비롯한 윤형근, 이우환, 박서보 등 ‘블루칩 작가’들의 작품을 중심으로 꾸려졌으며 이성자, 천경자, 최욱경과 같은 여성 작가들, 야요이 쿠사마, 데이비드 호크니 등 해외 미술작가들도 함께 구성됐다. 박수근·김인승 등 ‘근대 미술사’ 족적 남긴 작품들 수요 돋보여 이번 경매 대표작인 박수근 ‘노상’은 4억6000만원에 낙찰됐다. 해당 작품은 주요 전시 이력만 수 차례로, 프리뷰 때부터 큰 관심을 모았다. 지난 1995년 갤러리현대에 ≪박수근 30주기 기념전≫을 시작으로 ▲1999년 호암갤러리 ≪우리들의 화가 박수근≫展 ▲2010년 ≪박수근 45주기 기념전-국민화가 박수근≫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 ≪박수근: 봄을 기다리는 나목≫까지 박수근을 대표하는 전시에 모두 소개된 바 있다.박수근 작가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6.25 전쟁을 겪어 폐허가 된 창신동에서 남은 일생을 보냈다. 그래서인지 박수근은 함께 암울한 시대를 보낸 장터의 사람들을 애정 어린 눈길로 화폭에 담아내곤 했다. 이번 출품작 ‘노상’은 삶의 고난과 역경 가운데 변치 않고 지속된 창작열과, 자신만의 토속적인 기법을 개발한 박수근의 예술혼이 가득 담겨 있다. ‘노상’이라는 제목에서도 엿보이듯, 박수근은 종종 바깥 공간을 배경 삼아 그림을 그렸다. 단순히 길을 걷는 사람부터 시장에서 물건을 파는 사람들, 그림을 그리는 소녀와 거리를 뛰노는 아이들까지. 박수근이 살았던 전후 시대, 작가와 사람들에게 노상은 바로 삶의 터전이자 휴식 공간이었고, 또 만남과 쉼의 장소였다. 김인승 ‘무희’ 역시 낙찰액 3100만원을 기록하며 1300만~4000만원 선으로 설정했던 추정가 상단에 낙찰됐다. 이 작품은 김인승 작가의 주요 소재인 여성 무용수를 그린 작품이다. 차분하고 잔잔한 붓질로 단정한 형태를 표현했으며, 그윽하고 은은한 색조가 김인승의 아카데믹한 화풍을 잘 드러낸다. 김인승의 초기 여성인물화 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미술사적 의미가 커, 작품의 가치 제고를 견인한 것으로 풀이된다. 김인승 작가는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한국 서양화 1세대 화가’로, 한국 근대화단에서 전형적 화풍을 구축한 대표적 작가로 평가받는다. 대상을 면밀하게 관찰해 정확하게 화면 위에 표현하고, 이에 주관을 가미했다. 이로써 새로운 리얼리즘의 표현을 시도했다는 점이 특징으로 꼽힌다. 가격 허들 낮춘 종이 작품 인기…여성작가 ‘이성자’ 작품은 아쉽게 유찰 블루칩 작가들의 작품을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에 접할 수 있는 ‘종이’ 작품도 좋은 낙찰률을 보였다. 종이에 유채로 그린 윤형근의 ‘무제’(1986)는 6800만원, 한지에 혼합 재료로 그린 김환기의 ‘무제’(1970)는 7500만원, 종이에 수채로 그린 이우환의 ‘조응’(1936)은 3800만원에 낙찰됐다.특히 김환기의 뉴욕시대 1970년 작품 ‘무제’에서는 후기 전면점화로 바뀌어가면서 작가가 시도한 여러 조형 실험을 확인해볼 수 있다. 깊고 신비한 색감의 푸른색을 사용해 서정 세계를 심화시켰으며, 자연 풍경이 점·선·면으로 구성된 조형적 요소로 발전하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 또 이성자, 천경자, 최욱경 등 주요 여성 작가들의 작품도 눈에 띄었다. 한국의 이미지들을 서양의 추상사조에 접목시킨 이성자, 전통 한국화를 벗어나 독보적인 채색화풍을 구축한 천경자, 독자적인 추상세계를 구축한 최욱경은 모두 한국 화단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한 여성 작가들이다. 하지만 이성자의 ‘Le Temps Sans Obstacle’은 아쉽게 유찰됐다. 이 작품은 그의 60년 작품 인생 중 1960년대 ‘여성과 대지’ 시기의 연작이다. 유년 시기의 아련한 기억을 비롯해, 이별한 자식에 대한 그리움을 반원, 네모, 원, 세모 등 추상 기호들로 빚어낸 작품이다. 작품의 제목 역시 직역하면 ‘장애물 없는 시간’을 뜻한다. 케이옥션 관계자는 “지난 3개월간의 성과치를 비교했을 때, 낙찰률이 상당히 높았다”며 “유찰이 거의 없었고, 대부분의 작품이 낙찰돼 분위기가 아주 좋은 편”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글로벌 자산 시장이 조금씩 살아나고, 금리 인상 기조가 더 악화되지 않으리란 기대감이 경매 활성화에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며 “미술 경매 열기가 앞으로 더욱 더 회복될 수 있으리란 가능성을 보여줬다”고 덧붙였다.

2023.02.26 08:00

4분 소요
“우리는 앞을 향해 나아가는 탐험가”

산업 일반

8년 만에 새 정규 앨범 낸 메탈리카의 리더 제임스 헷필드에게 제작 과정에 얽힌 이야기와 음악에 대한 철학을 듣는다 미국의 헤비메탈 밴드 메탈리카는 1980년대에 전성기를 맞았다. 단 5년 사이에 그룹의 가장 성공적인 앨범 중 4개가 발표됐다. 하지만 그 후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지난 15년 동안 정규 앨범이 3개밖에 안 나왔고 최신 앨범 ‘Hardwired...to Self-Destruct’는 전작 ‘Death Magnetic’(2008) 이후 8년이나 지난 뒤에 발표됐다. 지난 2월 12일 이 밴드는 그래미 시상식에서 ‘Hardwired...to Self-Destruct’ 수록곡 중 일부를 공연했다. 뉴스위크가 메탈리카의 리더이자 기타리스트인 제임스 헷필드를 만나 ‘Hardwired...to Self-Destruct’의 제작 과정, 가장 좋아하는 앨범, 드럼 연주의 꿈 등에 관해 들었다.‘Hardwired...to Self-Destruct’ 제작 기간 내내 멤버들이 똘똘 뭉쳐 지냈는데 오랫동안 함께하는 데서 오는 이점이 있을 것 같다.물론이다. 울리히(드러머 라스 울리히)와 나는 35년째 결혼생활을 하다 보니 서로 아주 잘 안다. 서로를 좋아하면서도 못 견뎌 한다. 이제 서로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됐다. 그는 가족을 빼놓고 내가 가장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이다. 그가 ‘하나, 둘, 셋’ 하고 숫자를 세면 어느새 우리 두 사람이 같은 곡을 연주하기 시작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런 일이 어떻게, 또 왜 일어나는지 모르지만 울리히와 나 사이엔 어떤 에너지 같은 게 흐른다. 우리는 서로의 한계를 알고 더 발전할 수 있도록 자극을 준다. 그는 내게 리프(반복악절)와 보컬, 난 그에게 드럼 연주에 관한 의견을 내놓는다. 내가 드러머를 꿈꿨지만 되지 못했듯이 그도 한때 기타리스트와 보컬리스트를 꿈꿨다.리프를 작곡할 때 규칙 같은 게 있나?멤버들이 공유하는 리프 파일이 있다. 누가 올린 것인지 이름도 써놓지 않고 그저 그중에서 가장 좋은 걸 골라 쓴다. 이번 앨범이 이전과 다른 점은 프로듀서 릭 루빈이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루빈은 우리 음악을 들어보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이건 좋고 저건 좋지 않다, 저건 더 넣고 이건 빼면 좋겠다”는 식으로 의견을 말해줬었다. 하지만 이번엔 우리끼리 즉흥 연주를 하면서 좋은 걸 택했다.기타리스트 커크 해밋은 휴대전화에 리프를 많이 넣어 뒀는데 잃어버렸다고 들었다. 그 때문에 손실이 컸나?아주 좋은 리프들이 들어 있었을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예전에 해밋이 작곡한 리프가 쓰인 노래들이 있다. 그중엔 좋은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었다.당신은 처음부터 작사를 도맡다시피 했는데.가사에 나의 사랑과 두려움, 증오와 의문을 녹여 넣는다. ‘St. Anger’(2003년 정규 앨범)만 빼고 모든 곡의 가사를 내가 썼다. ‘St. Anger’ 제작 당시는 우리 인생에서 특별한 시기였다. 모든 멤버가 안정을 찾았던 터라 밴드에 전념하고 결과를 지켜보기로 했다. 성과가 매우 좋았다.‘Hardwired’에서 당신은 ‘모든 게 엉망진창이야, 더럽게 재수가 없군(We’re so fucked, shit out of luck)’이라고 노래한다. 무엇에 관한 노래인가?뭐라고 생각하나?미국 사회의 현 상황?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구나 살다 보면 모든 게 엉망이라고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그런 상황에 대입하면 된다. 내 생각엔 세상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부모의 시각이다. 세상을 바라보면서 ‘맙소사, 내가 어린아이가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야’라고 생각하는 건 어느 세대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Hardwired’는 헤비메탈의 몇몇 거장에게 경의를 표한다. 딜럭스 에디션에는 2014년 ‘Ronnie James Dio-This Is Your Life’ 헌정 앨범에 실렸던 ‘Ronnie Rising Medley’가 수록됐다. 또 모터헤드의 레미 킬미스터에 관한 노래 ‘Murder One’도 실렸던데.누구에게나 멘토가 있다. 우리는 멘토를 필요로 한다. 적어도 난 그렇다. 난 존경할 만한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들을 따라잡으려 노력하고 그들에게 배우고 싶다. 로니 제임스 디오의 부인 웬디가 우리에게 헌정 앨범 ‘This Is Your Life’에 참여해 달라고 요청해 흔쾌히 수락했다. 우리는 리메이크 곡을 불러본 경험이 있다. ‘Ronnie Rising Medley’에 우리가 좋아하는 디오의 곡을 모두 담았다. 그런 노래를 부르는 건 내게 큰 도전이며 성장에 도움이 된다. 나를 가로막는다고 생각하는 한계를 무너뜨리는데 좋다.킬미스터는 헤비메탈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대부이자 배의 선장 같은 존재였다. 우린 그가 영원히 살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언젠가 끝이 있으리라는 건 알았지만 그런 날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 모터헤드가 없었다면 메탈리카도 없다. 우린 킬미스터와 즉흥연주를 하곤 했다. 그는 아주 다정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모터헤드의 노래 여러 곡을 리메이크했다. 알다시피 모터헤드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유감스런 일이다. 하지만 킬미스터는 우리 데뷔 앨범 ‘Kill ‘Em All’(1983)에 실린 ‘Whiplash’를 리메이크해 그래미상을 받았다. 그 노래는 원래 킬미스터에게 영감을 받아서 쓴 곡인데 그가 그 곡으로 그래미상을 받다니 정말 멋졌다. 기타리스트로서는 누구에게 영향을 받았나?난 드럼 연주도 좋아해서 기타를 드럼 삼아 타악기처럼 연주한다. 말하자면 리듬을 매우 중시하는 리듬 기타리스트다. AC/DC의 맬콤 영 등 훌륭한 리듬 기타리스트들의 영향을 받았다. 스콜피언스의 창단 멤버 루돌프 솅커와 나는 조니 라몬이 오른손 다운 피킹의 거장이라고 생각한다. 난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또 리프의 음악성은 리프의 거장으로 불릴 만한 토니 아이오미에게서 배웠다.새 앨범에서 리듬 기타리스트로서 해밋의 리드 기타와 어떻게 하모니를 이루나?해밋은 훌륭한 리드 기타리스트다. 나도 그처럼 기타를 잘 치면 좋겠지만 역부족이다. 그래서 난 리듬 기타리스트로서 최선을 다한다. 또 보컬리스트로서 멜로디를 사랑한다. UFO의 멤버이자 솔로 아티스트인 미하엘 솅커는 멜로디에 관한 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기타리스트다. 난 늘 하모니를 생각하고 해밋은 솔로를 중시한다. 그의 솔로는 사운드가 꽤 과장됐다. 리허설 때면 난 그에게 “솔로 연주 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아느냐?”고 묻곤 한다. 해밋은 그런 건 안중에 없다. 그는 소음을 좋아하고 그것을 실험한다. 그래서 우리는 잘 맞는다.‘Hardwired’의 녹음은 순조롭게 진행됐나? 멤버들 사이에 큰 싸움은 없었나?없었다. 하지만 창조적인 사람들은 예민해서 쉽게 삐치는 경향이 있다.1980년대에 메탈리카는 단 5년 사이에 ‘Master of Puppets’(1986)를 포함해 4개의 기념비적인 앨범을 내놨는데.달리 할 일이 없던 젊은 시절에는 음악이 곧 인생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가정과 자녀 등 신경 쓸 일이 늘어났다. 그 시절에도 순회공연을 했지만 ‘Black Album’(1991) 이후처럼 집중적으로 하진 않았다. 예를 들어 당시엔 순회공연을 3년 동안 계속하는 일은 없었다. 그 당시에 가정을 이루지 않았던 멤버들이 스튜디오에서 살다시피 하며 작업을 했다. 게다가 1980년대는 헤비메탈의 전성기였다. 빅4(메탈리카, 슬레이어, 앤스랙스, 메가데스) 외에도 많은 밴드가 건전한 경쟁을 벌였다.메탈리카 앨범 중 가장 좋아하는 것은?‘Ride the Lightning’(1984)을 아주 좋아한다. 멤버들이 믹싱 작업에 참여한 최초의 앨범이라서 그런 듯하다. 전작 ‘Kill ‘Em All’에 수록된 곡도 모두 멤버들이 작곡했지만 밴드 결성 이후 처음 몇 년 동안 클럽에서 연주했던 곡들이었다. 당시 우리는 녹음실에 들어가 그 곡들을 녹음했을 뿐 믹싱 등 제반 작업에 참여하는 건 허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Ride the Lightning’을 제작할 때는 우리에게 “스튜디오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라”고 말하는 매니저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제작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지난해 9월 27일 미국 뉴욕의 웹스터 홀에서 열린 버튼(메탈리카의 베이스주자였던 클리프 버튼)의 30주기 추모 콘서트에서 ‘Moth Into Flame’을 연주한 것이 ‘Hardwired’ 수록곡 최초의 라이브 공연이었다. 버튼의 음악은 당신의 음악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버튼이 내게 심어준 하모니의 씨앗은 잊을 수가 없다. 그는 씬 리지의 열렬한 팬이었다. 우리는 과장된 펑크록을 연주했으며 그는 나보다 음악성이 뛰어났다. 버튼은 전문대학에서 음악이론을 공부했고 다양한 음악을 좋아했다. 그의 베이스 연주와 독특한 사운드는 여전히 팬과 동료들의 마음 속에 살아 있다. 트루질로(베이스 주자 로버트 트루질로)는 그를 매우 존경한다.새 앨범 중에는 메탈리카 초기의 스래시메탈(시끄러운 록 음악의 일종)을 연상시키는 리프가 있는데.노래가 짧고 달콤하며 속도감이 있고 방향성이 분명하다는 점에서 확실히 그렇다. 이번엔 8년 만에 정규 앨범을 내다 보니 기타 레이어링과 하모니, 멜로디와 스피드에 대한 감각이 떨어졌다. 그래서 ‘Kill ‘Em All’의 단순성과 ‘The Black Album’의 깊이를 가져오고 싶었다. 사람들이 “이번 앨범은 이런저런 것들을 연상시킨다”고 말하는 건 좋지만 우리에겐 그저 메탈리카의 새로운 앨범일 뿐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앞을 향해 나아가는 탐험가다. 더 나은 앨범, 더 멋진 리프, 더 마음에 와 닿는 가사, 더 훌륭한 연주를 위해 노력할 뿐이다.- 제프 펄라 뉴스위크 기자

2017.02.27 11:46

6분 소요
존 레넌의 또 다른 유산

산업 일반

▎1964년 2월 7일 처음 뉴욕을 방문한 비틀스. 요즘 존 레넌 추모 열기가 뜨겁다. 비틀스의 멤버였던 레넌은 1980년 12월 8일 암살당했다. 40회 생일이 지난 지 불과 몇 주 만이었다. 올해는 레넌의 탄생 70주년과 사망 30주기가 되는 특별한 해다. 그래서 지난 몇 달 동안 이 전설적인 팝스타를 추모하는 다큐멘터리와 음반, 전기영화, 전시회 등이 쏟아져 나왔다. 처음엔 이런 추모 작품들이 레넌의 음악과 관련해 새로운 뭔가를 밝혀줄지 모른다는 기대를 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분명해지는 사실이 있다. 이 추모 열기의 핵심 요소는 ‘Imagine’ 등 대표곡의 리마스터링(remastering) 음반이 아닌 레넌의 명성 그 자체라는 점이다. 그 명성은 결국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지만 지금도 이렇게 대대적인 추모 행사를 이끌어낼 만큼 여전히 대단하며 돈벌이가 된다.이 추모 열기는 지난세기의 가장 혁신적인 뮤지션 중 한 명인 레넌이 명성이라는 측면에서도 선구자였음을 상기시켜준다. 그는 명성을 얻으려 애썼고 그에 관해 논평했다. 또 그것을 이용했고 그것으로부터 도망쳤으며 결국 자신이 쌓은 엄청난 명성에 희생됐다. 그러면서 그는 스타라는 자리가 의미하는 바와 그 영향력의 개념을 확장시켰다. 레넌과 그의 부인 오노 요코는 레넌이 세상을 떠나기 3일 전 대중음악 전문잡지 롤링스톤지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삶이 곧 우리의 예술이다.” 리얼리티 TV 프로그램이 생겨나기 전이었던 그 시기엔 참신한 생각이었다. 각종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판치는 요즘 레넌의 명성이 주는 교훈을 곱씹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비틀스 초창기에 레넌은 리버풀과 함부르크의 구중중한 지하 분장실에서 동료들과 미래의 희망을 주고받으며 기분을 북돋우곤 했다. 그가 “우린 어디로 가지, 친구들?”이라고 물으면 폴(매카트니)과 조지(해리슨), 링고(스타)는 이렇게 대답했다. “팝 음악계의 최정상이지, 조니!” 그들은 2년도 안 돼 그 자리에 올랐다. 문제는 그 ‘최정상(toppermost: 엘비스 프레슬리가 올랐던 자리보다 더 높은 곳으로 정의된다)’이 세상에서 가장 기분 좋고 쾌적한 자리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레넌은 미국 시카고에서 공연하던 도중 객석에서 날아온 신발에 머리를 얻어맞았다. 스페인 마드리드에선 비틀스 공연을 보려고 몰려든 팬들 사이에서 소동이 벌어지자 경찰이 곤봉을 들고 진압했다. 링고는 유대인이 아닌데도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반(反)유대 세력으로부터 살해 협박을 받기도 했다. 비틀스가 워싱턴의 주미 영국대사관을 방문했을 땐 한 외교관이 기념으로 가지겠다면서 링고의 머리카락 일부를 잘랐다. 이들의 공연이 열릴 때마다 기적의 치유를 바라는 신체장애자들이 휠체어에 타거나 산소 텐트를 쓴 채 무대 뒤로 몰려왔다. 호주 멜버른에선 리버풀에서 온 한 남자가 비틀스가 체류하던 호텔의 배수관을 타고 8층까지 기어올라 레넌의 방 창문을 두드렸다. 레넌은 그 남자를 방안으로 들어오도록 해 술 한잔을 대접했지만 그의 지나친 행동을 섬뜩하게 생각했다. 레넌은 1965년 한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언젠가 비행기 사고를 당하거나 어떤 정신 나간 사람의 총에 맞아 죽을 것 같다.” 이들이 느끼는 신변의 위협은 요즘 세계적으로 인기가 높은 캐나다 출신의 팝 가수 저스틴 비버(16)의 경우보다 훨씬 더 근거가 있었다.이런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레넌은 빈정대는 듯한 말투와 태도를 자신의 방어수단으로 삼았다. 그것은 그의 매력이기도 했다. 레넌은 처음부터 자신의 명성에서 한 발짝 떨어져서 그것을 재미있는 듯 지켜봤다. 그리고 그 새로운 형태의 광적인 명성을 분석하고 조롱했다. 비틀스는 1963년 ‘로열 버라이어티 퍼포먼스’(영국 왕실의 연례 문화행사)에서 여왕 모후(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어머니)를 위해 공연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레넌은 그 요청에 응했지만 왕실 일가를 향해 과장되게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으며 관객에게 박수 대신 “몸에 치장한 보석을 흔들어 소리를 내달라”고 요청했다. 1964년 뉴욕을 방문한 비틀스는 JFK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열린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빈정거리는 투로 대답했다. 레넌이 이끄는 자기홍보 풍자극이었다고 할까?기자: 노래 한 곡 불러주시겠습니까?레넌: 돈부터 내면 부르죠.기자: 비틀스의 음악은 팬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까?레넌: 우리가 그걸 알면 또 다른 그룹을 결성해 매니저 노릇을 하겠죠.다른 멤버들은 그저 우스꽝스러운 말 한두 마디 던지는 데서 그쳤지만 레넌의 경우는 좀 더 심각했다. 그는 비틀스를 마케팅 수단에 불과하다고 무시하는 비판 세력과 그들의 모습만 봐도 비명을 지르며 환호하는 팬들을 동시에 조롱했다. 레넌은 호텔 발코니에서 히틀러를 흉내내기도 하고(콧수염을 쓰다듬고 오른손을 위로 쭉 뻗으며 인사했다), 비틀스가 “예수보다 더 인기가 좋아졌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의 이런 행동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하나였다. “명성은 우스꽝스러운 것이며, 난 그것이 왜 우스운지 잘 안다”는 것이었다. 프랭크 시내트라, 매릴린 먼로, 엘비스 프레슬리 등 레넌 이전의 대스타들은 대중문화가 그들에게 맡긴 역할에 충실했다. 하지만 레넌은 그 역할에서 자주 벗어났다. 그래서 사람들은 스타로서의 레넌과 개인으로서의 레넌을 따로 떼어 생각하기 시작했다. 레넌은 유명하다는 사실 자체로 유명한 최초의 스타였다.스타로서 자신의 위치를 인류학적으로 분석하려는 레넌의 태도는 1967년 자기지시적인(self-referential) 경향이 두드러지는 노래들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I Am the Walrus’의 가사에선 그보다 불과 3개월 앞서 발표된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가 언급된다. 또 ‘Glass Onion’은 곡 전체가 거의 비틀스의 다른 노래들에 대한 암시로 이뤄졌다. ‘The Ballad of John and Yoko’에선 자신과 오노의 신혼여행을 예수의 시련과 환난에 비유했다. 또 비틀스 해체 직후 발표된 ‘God’(팝송 사상 뮤지션의 자만심이 가장 강하게 느껴지는 곡인 듯하다)에서 레넌은 비틀스의 “꿈 제조기”였던 자신이 “존”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선언했다. 그는 비틀스의 해체를 슬퍼하는 팬들에게 “꿈은 끝났다”, “그냥 그런 채로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가사에서 뮤지션의 자만심이 자주 드러나는 팝송에서도 이렇게 이기적인 경우는 보기 드물다. 만약 레넌이 아닌 다른 가수가 이런 식으로 자신의 명성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노래를 불렀다면 참아주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레넌의 명성은 그 규모와 범위가 남달랐다. 중요한 건 바로 그 점이다. 명성이 레넌의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컸기 때문에 그의 예술의 일부가 될 수밖에 없었다.돌이켜보면 삶을 예술에, 또 예술을 삶에 녹아들게 했던 레넌은 선견지명이 뛰어났던 듯하다. 요즘은 그런 방식이 스타의 필수조건이 됐기 때문이다. 린지 로한은 한때 훌륭한 배우를 꿈꿨을지 모르지만 그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스크린 밖의 현실 속에 있었다. 감옥을 제 집 드나들 듯하며 끊임없이 타블로이드판 신문에 소재를 제공하는 스캔들 메이커가 그 역할이다. 요즘 대중을 사로잡는 스타 중엔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통해 처음 알려졌거나, 그런 프로그램에 출연해 더 유명해진 경우가 많다. 제시카 심슨과 ‘아메리칸 아이돌’이 배출해낸 스타들, 수전 보일 등이 그 예다. 최근 MTV의 최고 인기 프로그램 ‘더 힐스(The Hills)’는 이 프로에 출연해 유명해진 로스앤젤레스 젊은이들의 시끌벅적한 일상을 보여주는 리얼리티쇼다. 래퍼이자 프로듀서인 칸예 웨스트도 트위터에 자신의 명성에 대한 논평을 끊임없이 올린다.레넌을 당대의 패리스 힐튼이었다고 말하긴 어렵다. 하지만 자신의 명성을 작품 소재로 삼고 그것을 자신의 뜻대로 이용했다는 점에서 오늘날 패리스 힐튼 같은 인물이 탄생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을 준 듯하다. 레넌은 솔로 앨범 ‘Two Virgins’의 커버에 자신과 오노의 누드 사진을 실었고, 자신의 얼굴을 슬로 모션으로 찍은 52분짜리 영화 ‘Film No. 5’를 발표했다. 또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한 기자회견에선 부부가 함께 커다란 가방 안에 몸을 숨긴 채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기도 했다. 이런 행동은 패리스 힐튼이 리얼리티쇼 ‘심플 라이프(The Simple Life)’에서 보여준 행동과 기본적으로 맥을 같이 한다. 자신의 명성을 홍보 수단 겸 작품 소재로 삼았다는 점에서 그렇다. 레넌과 오노의 기이한 행동 중 단연 기지가 돋보이는 사례가 하나 있다. 그들은 암스테르담과 몬트리올에서 자신들의 신혼여행 호텔 방에 기자들을 불러모아 놓고 2주일 동안 평화에 관해서만 말했다. 이들의 행동은 곧 매스 미디어 시대에 유명인사가 주도하는 행동주의의 표본으로 자리 잡았다. 1980년 레넌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신혼여행은 어차피 세간의 관심거리가 되리란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우리는 그 기회를 이용해 (평화를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로 했다.” 앤절리나 졸리와 브래드 피트는 아프리카 나미비아에서 딸 샤일로를 낳았다. 당연히 파파라치가 모여들었고 졸리 부부는 갓 태어난 딸의 사진을 판매한 수익금을 그 지역의 자선단체에 기부했다. 레넌과 오노 부부를 연상케 하는 행동이었다.레넌은 1975년 데이비드 보위와 함께 만든 노래 ‘Fame’에서 명성의 부작용을 경고한 직후 유명인사가 아닌 보통사람처럼(아니면 적어도 자신이 생각하는 그들의 생활방식으로) 살 때가 됐다고 판단했다. 레넌이 명성과 함께 해온 긴 세월 중 가장 극적인 순간이었다. 그는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뉴욕 맨해튼의 다코타 아파트에서 오노와 갓 태어난 아들 션과 함께 조용히 살았다. 평론가 데이비드 헤이두는 그 시절 레넌의 생활을 “지나치리만큼 평범한 성인의 생활”이었다고 말했다. 레넌은 바깥일을 오노에게 맡긴 채 집에서 빵을 굽고 아들을 데리고 센트럴 파크를 산책했다. 심지어 빙 크로스비의 음반을 듣기도 했다.당시 레넌은 자신이 ‘하워드 가르보와 그레타 휴스’(하워드 휴스와 그레타 가르보를 익살 맞게 표현한 말)의 시기로 접어들었다고 농담했다. 가르보와 휴스는 노이로제 때문에 대중 앞에서 모습을 감췄지만 레넌은 스스로 그런 생활을 택했다. 그것은 가정생활에 전념하겠다는 일종의 선언으로 남성 록스타의 전형으로 간주되던 그의 이미지와 너무도 동떨어졌기 때문에 놀라웠다. 1980년 레넌은 이렇게 말했다. “남자다운 로큰롤 가수로서 존경받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난 최근 전업주부 남편으로 살았고 그 사실이 자랑스럽다.” 하지만 레넌은 활동을 완전히 중단하진 않았다. 회전목마처럼 돌고 도는 명성의 굴레에서 벗어나겠다는 결심을 표현한 노래(‘Watching the Wheels’)를 작곡했고, 그 곡이 담긴 컴백 앨범(‘Double Fantasy’)을 대대적인 홍보와 함께 발표했다. 존 레넌에게 은퇴란 자신과 명성의 관계를 재검토하는 또 다른 시도였을 뿐이다. 레넌이 마크 데이비드 채프먼의 총탄에 맞아 사망하는 바람에 이 컴백 앨범은 그의 유작이 됐다. 레넌은 명성 추구의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탁월한 재주가 있었지만 결국 그 때문에 죽음에 이르렀다. 그는 매스 미디어가 사람을 얼마나 유명하게 만들 수 있는지 보여줬다. 채프먼은 지난 9월 가석방 청문회에서 “존 레넌을 죽이면 나 자신이 중요한 사람이 될 줄 알았다”고 말했다. 그는 세간의 주목을 끌어 한순간에 명성(또는 악명)을 얻고자 했다. 이런 종류의 명성은 바로 레넌에게서 시작됐다.하지만 지금 와서 볼 때 수많은 기념비적 노래 이외에 레넌이 남긴 가장 두드러진 유산은 그가 쌓은 엄청난 명성이 아닐까 싶다. 그는 이 새로운 형태의 엄청난 명성을 분석하고 지배했으며 그것을 기능화했다. 레넌 이전에 명성은 음반 판매나 영화 흥행에 성공한 스타에게 주어지는 일종의 보상이었다. 하지만 레넌 이후에 명성은 하나의 도구가 됐다. 마치 연주자가 재량대로 연주하는 악기 같은 존재가 됐다. 1968년 레넌은 이렇게 말했다. “이제 우리는 명성이라는 훌륭한 도구를 얻었다. 앞으로 그 도구를 최대한 이용할 생각이다.” 요즘은 생활과 예술의 경계선이 매우 모호하고, 대중의 눈과 귀는 과거 어느 때보다 더 열려 있다. 그래서 너도나도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킬 기회를 노린다. 하지만 레넌의 삶과 죽음은 그가 음악을 시작하면서부터 비극적인 죽음을 맞기까지 끈질기게 그를 따라다녔던 한 가지 질문이 우리 모두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한다. “명성의 의미와 목적은 과연 뭘까?”번역·정경희

2010.12.14 15:38

8분 소요
역샌드위치론 ‘긍정의 힘’ 이어간다

산업 일반

▎이원수(뉴욕타임스 소속 국제시사만화가) ■ 내후년 국산 전기차 量産?국산 전기자동차 시대가 앞당겨지려나? 정부가 내후년(2011년)에 국산 전기차가 양산될 수 있도록 강력한 정책지원에 나선다. 세계 전기차 시장이 예상보다 빨리 형성되고 있다고 판단, 양산 시기를 2013년에서 2년 앞당겼다. 지식경제부는 8일 경기도 화성 현대·기아차 기술연구소에서 열린 제33차 비상경제대책회의에서 ‘전기차 활성화 방안’을 내놓았다.2015년 세계 전기차 시장의 10%를 차지하며, 2020년 소형차의 10% 이상을 전기차로 보급하겠다는 야무진 목표를 담았다. 글로벌 전기차 4대 강국을 선점하고, 나아가 세계 자동차 1등 생산국이 되겠다는 포부다. 이미 일본 미쓰비시가 지난 7월 세계 최초의 전기차 양산 모델인 아이미브(i-MiEV)를 출시했다. 미국 GM과 중국 비야디(比亞迪·BYD)도 내년 전기차를 내놓을 태세. 각축전은 치열하다.회의를 주재한 이명박 대통령은 “세계는 지금 새로운 자동차 전쟁 시대”라며 “R&D 예산의 효과적 배분을 통해 집중 지원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부는 내년 11월 한국에서 열리는 G20 정상회의 행사차량 일부를 전기차로 대신할 방침이다.회의장 인근에 전기차 견본 전시관을 운영해 대내외 홍보에도 주력할 계획. 전기차 핵심부품 기술개발에 2012년 말까지 한시적으로 R&D 세액공제 혜택을 주는 방안도 추진된다. 내연기관 자동차에 대한 전기차 개조를 허용하고, 전기차 구매 세제지원 방안도 2011년 말 이후 마련키로 했다.■ 역대 최대 ‘부산 영화제’ 개막 세계적 영화제의 하나로 자리 잡은 제14회 부산국제영화제(PIFF)가 8일 개막됐다. 예산과 상영작 수 등에서 역대 최대 규모. 해운대 수영만 요트경기장 야외상영장에서 열린 개막식을 시작으로 16일까지 9일간 진행된다. 개막식 사회는 영화배우 장미희·김윤석이 맡았다.개막 행사에는 120여 명의 국내 유명 배우를 비롯해 ‘뉴 커런츠’ 부문 심사위원장인 프랑스의 장 자크 베넥스 감독 등 20여 명의 해외 게스트가 참석했다. 개막식의 야외상영장 좌석 5000개는 게스트와 관람객들로 가득 찼고, 식장 밖 시민 2000여 명도 축제 현장을 지켰다. 상영작은 모두 70개국 355편. 남포동과 해운대 일대에서 상영된다.세계 최초 상영작(월드 프리미어)만 98편에 달한다. 폐막작은 첸 쿠오푸 감독(중국)의 ‘바람의 소리’. 최고 화제작은 이병헌·조쉬 하트넷·기무라 다쿠야 등 한·미·일 인기스타 3명이 출연하는 ‘나는 비와 함께 간다’이다. 예매 38초 만에 매진됐다. ‘바보들의 행진’ ‘화분’의 고 하길종 감독 30주기 회고전, 올해 타계한 ‘오발탄’의 유현목 감독 추모전도 열린다.■ WBC 준우승 포상금 법정 공방국민적 감동 끝에 찾아온 씁쓸한 뒷맛-. 우승 못지않게 큰 감동을 안겨줬던 지난 3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준우승. 그렇지만 WBC 국가대표 선수들과 한국야구위원회(KBO)가 준우승 포상금을 놓고 법정 공방까지 벌이게 돼 뒷맛이 개운치 않다. 손민한 등 WBC 출전 선수 28명은 6일 법무법인을 통해 서울중앙지법에 소장을 제출했다.소장을 통해 이들은 ‘WBC 출전 및 준우승 상금 등이 모두 300만 달러(약 35억원)에 달하므로 미국 세금을 제하더라도 1인당 9222만원은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KBO의 생각은 많이 다르다. WBC로부터 받는 300만 달러(대회출전비 100만, 상금 100만, 수익금 분배금 100만) 중 상금 100만 달러(세후 72만5000달러)만 선수단 몫으로 인정해 1인당 3200만원 정도를 주기로 결정한 바 있다.

2009.10.12 10:44

3분 소요
‘홍색 관광객’들의 대장정

산업 일반

마오쩌둥 30주기 맞아 혁명 사적지 찾는 중국인들 줄잇지만 그의 정치 유산은 아직도 금기시 중국 장시(江西)성의 산악 휴양지 징강산(井岡山)에 관광객들이 모여든다. 1934~36년의 전설적인 장정이 시작되기 전 마오쩌둥(毛澤東)의 본거지였던 곳이다. 어떤 이들은 기념관에 장례식 때 쓰는 흰 화환을 놓고, 또 어떤 이들은 마오가 쓰던 딱딱한 나무침대 위에 담배를 던진다. 골초였던 위대한 조타수 마오에게 바치는 제물이다. 요즘 징강산에는 마오의 사망 30주기(9월 9일)를 맞아 엄숙한 당 간부들 대신 돈을 물 쓰듯 하는 중국의 여피족이 모여든다. 이들 이른바 ‘홍색(紅色) 관광객’들은 공산당의 전시 기지가 있던 산시(陝西)성 옌안(延安)부터 1935년 마오가 당의 지도권을 획득한 구이저우(貴州)성 쭌이(遵義)까지 중국 전역의 공산혁명 사적지로 모여든다. 그들은 붉은 깃발을 흔들고 고구마죽과 들풀 등 당시 공산당원들이 먹던 음식을 먹는다. 징강산에서는 광둥(廣東)성에 있는 한 무역회사의 공산당 간사가 20여 명의 사원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으면서 모두 ‘승리’라고 외치라고 부추기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마오쩌둥 캐릭터의 마케팅은 인정 많은 아저씨처럼 푸근한 모습으로 손을 흔드는 그의 모습이 그려진 자명종 시계가 홍콩의 길거리 시장에 등장한 이후 수년 동안 지속돼 왔다. 그러나 아직 그의 정치적 유산은 수용되지 못하고 있다. 81년 공산당은 30년에 걸친 마오의 집권기에 대한 평가를 모호한 통계에 의존해 ‘잘한 일 70%, 잘못한 일 30%’라고 내렸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그 기간에 행해진 잔학행위에 관한 심각한 토론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요즘 평범한 중국 국민 중에는 49년 홍군이 국민당군에 승리한 직후부터 마오의 정책이 잘못되기 시작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늘어난다. 즉 훌륭한 마오의 시대는 그의 성인기의 절반도 채 안 된다는 말이다. “마오가 49년에 사망했다면 전 세계가 그를 영웅으로 기억했을 것”이라고 마오의 번역가였으며 중국 본토에서 35년 동안 산 중국 전문가 시드니 리텐버그(85)는 말했다. “하지만 마오는 권력 때문에 심하게 부패했다. 너무 오래 살았다.” 다음달이면 종결 70주년을 맞는 장정이 요즘 중국에서 왜 그렇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말이다. 결국 30년대는 훌륭한 마오의 시대였다. 그리고 장정에 얽힌 이야기는 “공산당의 수많은 신화 중에서 아직도 감동을 주는 이야기로 남아 있다”고 장정에 관한 유명한 책의 공동저자 브라이튼 앤드루 매케웬은 말했다. 홍군은 적의 매복 기습과 혹독한 날씨에 맞서 싸우면서 험한 산길과 늪을 행군해 1만2500km를 후퇴하는 동안 10만 명 중 4000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요즘 새롭게 자신감을 찾은 중국인들이 조국에 자긍심을 가질 방도를 모색하면서 장정을 중국의 위대한 승리로, 그리고 개인적 삶의 투쟁에 관한 은유로 보는 사람이 많아졌다. “모든 사람의 개인적인 장정을 역사적인 장정에 비교할 수 있다”고 베이징의 한 장정 관련 작품 전문 화랑의 큐레이터 루지에는 말했다. 이런 시류에 발맞춰 중국 정부는 마오와는 거의 상관없는 현대적 특색을 갖춘 10여 곳의 ‘홍색 관광지’를 개발했다. 징강산 관광지는 아름다운 산의 경치와 대나무 숲을 볼거리로 내세운다. “우리 관광사업은 홍색(공산혁명 사적지)과 녹색(자연)을 겸비했다”고 지방정부 관리 장후아는 말했다. 장정의 전설적인 전투지인 스촨(四川)성의 루딩차오(盧定橋)에서는 관광객들이 돈을 내고 홍군 군복을 입고 기념사진을 찍고, 물살이 거센 강에서 거대한 보트를 타고 급류타기를 즐긴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그 시기의 역사가 너무 자세하게 파헤쳐질까 우려한다. 교육당국은 최근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마오에 관한 언급을 한 군데만(예절에 관한 장에서) 남겨놓고 모두 빼버렸다. 사회주의(마오가 수백만 명의 인명을 대가로 추구한 유토피아의 꿈)에 관한 내용은 단 하나의 짧은 장으로 축소시켰다. 징강산에서 마오의 라이터와 조각품을 파는 한 상인은 당국이 최근 자신이 팔던 DVD의 판매를 금지했다고 말했다. 마오가 주도했던 피로 물든 문화혁명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민감한 정치적 내용 때문에 더 이상 못 판다”고 그녀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지난 9월 8일 밤에는 ‘태양은 가장 붉고, 마오 주석이 가장 친하다’는 제목의 콘서트가 열려 마오의 서거를 기렸다. 그러나 막상 사망 당일인 9월 9일에는 공식 행사가 거의 없었다. 중국의 지도자들이 잔혹했던 마오의 자취를 직시하지 못한다는 점은 그들이 자신들의 잔인성 또한 직시하지 못함을 말해준다. 일례로 89년 친민주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한 천안문사건에 관한 깊이 있는 논의는 아직도 금기시된다. ‘빙점(氷點 ·공산주의청년단 기관지인 중국청년보의 주간부록)’의 전 주필 리다퉁(李大同)은 “ 덩샤오핑(鄧小平)과 그 이후의 지도자들이 마오의 잔혹한 행위를 부정한다면, 중국의 정치체제와 일당통치 또한 부정한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중국 정권은 가능한 한 마오와 거리를 두는 편이 좋을 듯하다.

2006.09.19 14:39

4분 소요
[특별인터뷰]최신원 SKC 회장…“서로 도움   된다면 分家 논의할 것”

산업 일반

최신원 SKC 회장. 최신원 회장의 집무실은 선친인 고 최종건 회장의 방을 반(半)쯤 옮겨놓은 듯하다. 최종건 회장의 초상화부터 사진·명패 등이 가지런히 정리돼 있다. “형제간 협의를 거쳐 서로에게 도움이 되고 힘이 되는 방향이라면 그룹의 분가(分家)를 논의하겠다.” SK그룹에서 분가 얘기가 나왔다. ‘형제간의 충분한 협의’ ‘SK네트웍스 정상화’ 같은 전제조건이 붙어 있지만 분가가 거론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최종건 SK 창업주의 차남인 최신원(52) SKC 회장은 「이코노미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서로 잘 알고 잘 할 수 있는 사업 부문을 중심으로 분가가 이뤄져야 할 것”이라며 “다만 그 시기와 방법 등에 대해서는 형제들간의 충분한 협의, 그룹의 경영사정 등이 감안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SK그룹 오너경영인 가운데 분가에 대한 소견을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어서 재계에 파장이 예상된다. 인터뷰는 지난 5월27일 서울 을지로 내외빌딩에 있는 SK텔레시스 회장실에서 2시간가량 진행됐다. 그동안 최회장은 언론이나 재계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밖으로 나서기보다는 신중하게 생각하는 스타일이지요. 저희 집안 형제들이 대개 비슷합니다. 전문경영인에게 회사 경영에 대한 권한을 대폭 위임하고 있습니다.” 현재 맡고 있는 회사 경영은 어떻습니까. “아시다시피 SKC과 SK텔레시스의 경영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SKC의 2차전지 사업과 이동통신 단말기 관련 제조사업, 그리고 SK텔레시스의 이동통신 장비사업에 특히 관심이 많습니다.” 먼저 SK유통을 맡았다가 2000년 초 SKC로 옮겼는 데요. “1997년 말 고 최종현 회장께서 부르더니 ‘SK유통을 맡아보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속으로 ‘찬스다’고 생각했지요. 개인적으로 83년부터 선경인더스트리 뉴욕사무소에 근무하면서 매년 라스베이거스 컴덱스쇼에 참가해 정보기술(IT)의 신조류를 공부하고 있었거든요. 그 자리에서 ‘예 알겠습니다’고 대답했지요. 97년 매출 5,600억원 하던 이 회사를 98년 1조3,000억원, 99년 2조4,000억원짜리 회사로 키웠습니다. 계열사 가운데 SK텔레콤 다음으로 성적이 좋았어요.” 이 회사는 곧 SK글로벌(현 SK네트웍스)에 합병되지요. “그게 99년 말입니다. 당시 SK글로벌 유동성 문제가 터지자 그룹에서 찾아왔어요. ‘SK글로벌을 회생시키기 위해서는 SK유통과 합병시켜야 한다’고 하더군요. 고민이 많았지만 가족 협의를 거쳐 SK유통을 포기했습니다. 그 다음에 SKC로 옮겨 왔지요.” 일부에서는 회장께서 보여준 경영실적에 대해 특별한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크게 개의치 않습니다. 기업 최고경영자의 능력이란 것은 결국 결과가 말해주는 것이니까요. 개인적으로 기업활동에 나선 것이 6년밖에 안 됩니다. 이전에는 그럴 기회가 없었습니다. SK유통과 SKC 모두 내가 맡고부터 훨씬 좋은 실적을 내고 있어요. ‘2타수 2안타’인데 무슨 말이 필요합니까.” 여기서 ‘그럴 기회가 없었다’는 말은 손길승 전 SK 회장이 자신의 길을 가로막았다는 뜻이다. 손 전 회장은 최회장에게 하나의 장벽이었다. 최회장은 “알게 모르게 손회장의 견제를 받아야 했다”고 털어놓았다. 특히 그는 최종건 창업회장 평전 발간기념식 때가 가장 섭섭했다고 말했다. 최회장은 지난해 11월 최종건 회장 30주기에 맞춰 평전을 펴낸 바 있다. “발간 기념식을 알리는 초청장까지 보낸 상태였는데 날짜를 연기하자는 겁니다. 지금은 때가 아니라면서…. 그래서 내가 말했지요. ‘제사도 연기하느냐’고. 결국 뒤로 물러납디다.” 지금은 손 전 회장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손회장이 구속 상태인 사실을 감안한 듯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지금은 내가 더 편한 사람 아닙니까. 능력이 많은 분인데….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그러나 비즈니스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덕과 신의입니다. 손회장은 덕이 부족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전문경영인 얘기는 자연스럽게 표문수 전 SK텔레콤 사장 쪽으로 흘렀다. 표 전 사장은 SK텔레콤의 산 증인이기도 하지만 최회장에게는 “벌말(경기도 수원)에서 같이 자란 고종사촌 동생”이기도 하다. 지금도 최회장은 표 전 사장을 ‘아영아’ ‘문수야’라고 부른다. 아영은 표 전 사장 장녀의 이름이다. 표 전 사장 얘기가 나오자 최회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사진을 한장 가지고 왔다. 프랑스 앵발리드박물관에서 두 사람이 천진난만하게 웃는 모습이었다. 표 전 사장은 선글라스를 머리 위에 얹은 것이 걱정 하나 없이 휴가를 즐기는 얼굴이었다. 최회장은 지난 3월 독일 하노버에서 열린 ‘세빗’(CeBIT) 전시회를 마치고 유럽을 여행할 때라고 소개했다. 표 전 사장이 SK텔레콤 사장직에서 물러난 지 한 달도 안 지난 때였다. “위로도 할 겸, 전자박람회도 둘러볼 겸 다녀왔지요. 당시 결정(3월 SK텔레콤 주총에서 최태원 오너 일가가 퇴진한 사실을 일컫는다)은 최태원 회장이 그룹의 발전을 위해 심사숙고한 끝에 내린 결정으로 이해합니다. 다만 통신업계 전문경영인으로서 자질과 능력이 검증된 ‘장수’(將帥)가 일찍 물러난 점은 매우 안타깝지요.” 최회장은 표 전 사장에 대해 “나중에 꼭 같이 일해보고 싶은 사람”이라는 말을 몇 번이나 강조했다. “시련 컸던 만큼 福도 많을 것” 지난해는 SK가 창립 50주년을 맞는 의미 있는 해였다. 한편으론 소버린과의 경영권 분쟁, SK네트웍스 분식과 최태원 회장 구속, 대선 비자금 파문 등으로 모진 시련을 겪은 시기이기도 하다. “지난해 이후 일어난 일련의 사태를 통해 많은 것을 느끼게 됐습니다. 특히 형님이 돌아가신 후 갑자기 집안의 윗사람 역할을 맡게 됐는데…. 그룹의 어른으로서 불행한 사태를 막기 위해서라도 좀더 적극적으로 나섰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후회도 했지요.” 상처가 아물면서 SK는 최태원 친정체제를 강화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친정체제를 강화하면서 상처를 치유하고 있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최근 최태원 SK㈜ 회장은 ‘뉴SK’를 내걸면서 대내외 행보를 활발히 하고 있다. ‘뉴SK’ 기치 아래 최태원 회장 친정체제가 가동되고 있는데, 어떻게 보십니까? “시련이 컸었던 만큼 복(福)도 많아야지요. 이런 시련이 최태원 회장으로선 그룹을 이끌어가는데 자양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회장의 활발한 활동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형제간에 불협화음은 없습니까. “최태원 회장이 그룹 경영과 관련해 일을 잘 하고 있고, 내가 옆에서 나서면 모양이 좋지 않을 것 같아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룹 경영 전반에 대해서는 최태원 회장이 잘 알아서 처리하고 있습니다. 나는 보이지 않게 돕고 싶어요. 이번에 SK케미칼 주식을 사들인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그룹의 경영권을 방어하자는 차원이지요. 최태원 회장이 나의 지원이 필요한 경우 언제든 적극적으로 나설 생각입니다.” SK는 굵직한 현안을 가족 모임을 통해 결정한다고 들었습니다. 가족 모임은 어떻게 하십니까. “집안에 제사가 많아요. 1년에 10번이니까 거의 한달에 한번꼴이지요. 형님이 돌아가셨지만 언제나 서초동 형수님 댁에 모이는데, 해외 출장이 있는 경우를 빼고는 거의 100% 출석합니다. 제사를 모시는 자리가 가족 모임이라고 보면 됩니다.” 선친의 유작(遺作)이라고 할 수 있는 워커힐호텔에 대해 관심이 많다고 알고 있습니다. “워커힐은 고 최종건 회장께서 마지막으로 인수한 기업입니다. 호텔을 인수한 것이 73년 3월인데 선친께서는 같은 해 11월에 돌아가셨습니다. 아쉽게도 향후 경영이나 비전 등의 밑그림조차 그리지 못하셨지요. 그러다 보니 자식 된 입장에서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 워커힐은 SK네트웍스 정상화를 위해 최태원 회장이 사재를 출연함으로써 매각이 진행 중입니다. 우연하게도 선친의 ‘마지막 사업’이 30년 후 그룹의 최대 현안인 SK네트웍스의 위기 극복을 위한 대안이 된 것입니다. 「삼국지」에 보면 ‘죽은 제갈량이 산 중달을 물리친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제갈량이 죽음까지 염두에 두고 일을 계획했다는 것인데, 워커힐에 이 비유가 딱 들어맞는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직접 워커힐을 인수해 경영할 의지가 있으신 건가요? “독자적으로 인수하기에는 여러 가지 걸림돌이 있습니다. 그러나 워커힐에 대해 나와 뜻을 같이하는 곳이 있다면 협의해 볼 수 있으며, 좋은 방향을 찾아나갈 수 있다고 봅니다.” 채권단 측 일각에서는 최태원 회장 일가에는 팔 수 없다는 의견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시각의 차이 아닌가요. 채권단은 워커힐 매각을 통해 궁극적으로 SK네트웍스의 정상화를 이루는 것이 목적입니다. 당사자인 워커힐 임직원 등은 가급적이면 향후 성장 가능성이 높은 곳에 매각되는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삼성·현대를 비롯해 한진·동양 등에서 분가가 이뤄졌습니다. 2세대로 넘어오면서 분가는 기업사(史)에서 자연스런 것으로 이해됩니다. “반면에 두산 같은 경우도 있잖습니까. 100년 넘게 기업을 경영해 오면서 분가라는 말이 한번도 나온 적이 없어요. 지적한 대로 분가는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기다려주세요. 편안하게 일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그룹에 걱정이 없을 때 나오는 거지요.” “분가는 協力으로 가는 것” 이 말씀은 소버린 사태가 진정되고 SK네트웍스가 정상화되면 분가할 수 있다는 의미로 들립니다. “최씨 형제간의 분가 이야기가 거론된 것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지요. 최종건 회장이 돌아가셨을 때부터 조심스럽게 이런 얘기가 나왔고, 최종현 회장이 작고한 후부터는 재계에 단골로 나돌던 얘기입니다. 나는 ‘모든 것이 마땅히 그래야 할 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논에 모를 심어야 하는데 주변에서 모내기를 한다고 무작정 따라나설 수는 없는 것 아닌가요.” 이야기는 또 길어졌다. 최회장은 “분가는 서로에게 도움이 되고 힘이 될 수 있는 모습으로 진행돼야지, 부담을 줘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잘 알고 잘 할 수 있는 사업 부문을 중심으로 이뤄져야 할 것입니다. 그 시기와 방법 등에 대해서는 저희 형제들간의 충분한 협의, 그리고 그룹의 내부 경영사정 등을 감안해야 할 것입니다.” 인터뷰 내내 최회장은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협력’을 강조했다. 그는 “분가가 협력으로 가는 것”이라며 “또 이 문제로 형제들이 갈등을 겪지는 않을 것이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죽은 제갈량이 산 중달을 물리치는 것보다 더 어려울지 모른다. SK그룹은 고 최종건 회장이 지난 1953년 적산기업이었던 선경직물을 인수해 오늘에 이른 기업이다. 73년 최회장이 작고하면서 동생인 최종현 회장이 그룹을 물려받은 후 SK㈜·SK텔레콤 인수를 통해 재계 4위권으로 키웠다. 최종건 회장은 모두 7남매를 두었는데 최신원 SKC 회장은 차남이다. 그러나 지난 2000년 장남인 최윤원 전 SK케미칼 회장이 작고하면서부터 ‘원’(源) 자 돌림 형제들의 장자 역할을 하고 있다. 최회장에 대해 세간에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주로 미국지사에 근무하거나 사장보좌역을 지냈기 때문이다. CEO로서 본격적인 그룹 경영에 뛰어든 것은 6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최회장의 말대로 그가 맡은 SK유통·SKC 등은 양호한 실적을 올리고 있다. 겉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실속을 챙기는 스타일이다. 기부금을 낼 때도 ‘최신원 SKC 회장’이 아니라 ‘을지로 최신원’이라는 이름을 고집할 만큼 소박한 성격이다. ‘선경최종건장학회’를 만드는 등 선친의 유훈을 잇는 사업에도 관심이 많다. 1952년 수원 生 배문고·경희대 법학과 卒 88년 美 브랜다이스대학 경영학과 卒 88년 선경인더스트리 이사 94년 선경인더스트리 경영기획실 전무 94년 선경 사장보좌 겸 해외담당 전무 96년 선경 사장보좌 겸 직물·정보통신 부사장 98년 SK유통 대표이사 부회장 2000년∼現 SKC·SK텔레시스 대표이사 회장

2004.05.28 00:00

7분 소요
“SK의 분가는 절대 없다”

산업 일반

최신원 회장은 SK그룹의 창업주인 최종건 회장의 둘째 아들이자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사촌형이다. 언론을 꺼리는 그가 사진 기자를 대동한 인터뷰에 응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창업주 아들’로서, 그리고 ‘SKC 회장’이란 CEO로서 그의 솔직담백한 인생유전 이야기를 들어봤다. SK그룹의 맏형격인 최신원(51) 회장은 좀처럼 외부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지난 1년여 동안 SK그룹이 소버린과의 경영권 분쟁, 최태원 회장 구속, 대선 비자금 파동 등 갖은 풍파를 겪는 와중에서도 최 회장은 공식 석상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런 그가 지난 11월 선친이자 SK그룹의 창업주인 고(故) 최종건 회장의 평전 를 3년간의 준비 끝에 펴내고, 기자와 단독으로 만났다. 일반인들에게 다소 생소한 SK 창업주에 대한 평가를 제대로 받고 싶었다는 게 그의 바람이다. 서울 중구 을지로의 최 회장 집무실에 들어서자 은은한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왔다. 사무실 한가운데 놓인 탁자엔 ‘마음을 다스리는 글’이란 경구가 쓰여진 종이가 놓여 있다. 최 회장은 “요즘처럼 편안할 때가 없다”며 말문을 열었다. “지난 11월로 아버님이 돌아가신 지 30년이 됐습니다. 제가 평전을 기획한 것은 자식된 도리로서 선친에 대한 평가를 제대로 받고 싶어서입니다. 선친은 SK를 창업하셨지만 아직 일반인들에게 생소한 편이죠. 평전을 내자 누구보다 어머니가 좋아하시더군요. 저 역시 가슴 속에 있던 응어리를 푼 것 같습니다.” 최종건 회장은 SK의 전신인 선경의 창업주다. 1973년 폐암으로 세상을 떠난 그는 동생인 고 최종현 회장에게 그룹을 물려줬다. 최신원 회장은 최종건 회장의 둘째 아들이자 최태원 회장의 사촌형이다. SK그룹은 현재 최종현 회장의 두 아들인 최태원 회장과 최재원 SK텔레콤 부사장, 그리고 최종건 회장의 두 아들인 최신원 회장과 최창원 SK케미칼 부사장 등 최씨 형제들이 움직이고 있다. 최신원 회장은 친형 최윤원 씨가 지난 2000년 세상을 떠나면서 현재 SK그룹에서 맏형 역할을 해오고 있다. 집안 대소사를 직접 챙기며 사촌간의 우애를 다지고 있다. 그룹이 내우외환을 모두 털지 못한 상황에서 창업주의 평전을 내놓은 것도 그런 배경에서다. 2003년 2월 최태원 회장이 구속된 뒤 세간에서는 사촌 형제 간 갈등설이 불거지곤 했다. 지금도 일각에선 ‘이러다 SK가 쪼개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가시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최 회장은 “선친이 작은 아버님(최종현 회장)에게 남긴 유언이 가족간 단합”이라며 “이번 평전의 출판으로 사촌간 우애가 더 깊어지는 계기가 됐다”고 소문을 일축했다. 그는 이어 “우리는 비록 사촌간이지만 친형제나 다름 없다”며 “아버님이 돌아가시자 작은 아버님은 ‘이제 내 자식은 3명이 아니라 조카 7명을 포함해 10명’이라고 했다”고 덧붙였다. 또 “집안에 제사가 많지만 해외 출장을 빼곤 모두 참석해야 하는 게 불문율”이라며 “그만큼 자주 만나기 때문에 서로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 없는 사이”라며 웃었다. 그의 말처럼 사촌 형제간 우애는 남다른 모습이다. 2003년 11월 10일 워커힐호텔에서 열린 출판 기념회 자리에서는 최태원 회장이 직접 축사를 했다. 보석으로 석방된 뒤 가진 첫 공식행사였다. 최 회장은 현재 SK의 상황에 대해서도 낙관적이다. 그는 “SK는 설립 초기부터 숱한 위기를 겪는 등 굴곡이 심했다”며 “하지만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위기관리가 뛰어난 기업으로 성장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지금은 SK가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머지않아 이겨낼 것”이라며 “새해에는 좋은 일이 많을 것”이라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곧잘 나도는 계열 분리에 대한 그의 입장도 분명하다. 흩어지면 죽고 뭉치면 산다는 것. 최 회장은 “지금 나의 책임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맏형으로서의 역할”이라며 “SK는 앞으로도 하나로 간다는 데 형제들도 이미 뜻을 모은 상태”라고 밝혔다. “워커힐 되찾고 싶어” 그래서인지 최 회장은 선친과 사촌들과의 추억이 많은 워커힐호텔에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다. 워커힐호텔은 최종건 회장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 마지막으로 인수한 사업체다. 최 회장은 “워커힐호텔은 선친의 유작”이라며 “개인적으로 워커힐 호텔을 되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강한 애착을 보였다. 최씨 일가와 워커힐호텔의 인연은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2년 정부 관광사업의 일환으로 건설된 워커힐호텔은 교통부 산하 국제관광공사가 운영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출범 뒤 10년 동안 적자에 허덕이자 73년 초 정부가 워커힐을 SK(옛 선경개발)에 매각했다. 최종건 회장은 워커힐 인수로 사업의 전환점을 마련하려고 했다. 당시 섬유회사로만 알려져 있던 선경은 호텔사업에 뛰어들면서 사업의 외연과 기업 이미지를 바꿀 수 있었던 것. 하지만 최종건 회장은 워커힐을 인수한 그 해 11월에 세상을 떠났다. 최 회장은 “워커힐 사랑은 누구보다 각별하다”며 “선친뿐 아니라 가족들과의 추억도 많은 곳”이라고 말했다. 현재 워커힐호텔은 SK네트웍스(옛 SK글로벌) 채권단이 관리하고 있다. 지난 3월 SK네트웍스의 분식회계 파문으로 구속된 최태원 회장이 사태 해결을 위해 자신이 갖고 있던 호텔 지분 40.7% 등을 채권단에 담보로 제공하면서다. 채권단 측은 최태원 회장의 경영권과 관계 없는 워커힐호텔을 매각한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재계 일각에서는 최씨 일가의 애착이 이처럼 큰 워커힐호텔에 대해 SK가 재매입에 나설 것이란 관측도 나오고 있다. 최 회장이 인터뷰 내내 강조한 또 다른 내용은 ‘최종건 회장의 창업주 정신’이다. 그는 “선친은 강하고 무서운 분이었다”며 “그래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나와 형님 모두 해병대에 자원입대했을 정도”라고 회고했다. 그는 이어 “선친은 경영자로서 앞을 내다볼 줄 알았고, 일단 결심을 하면 공격적으로 나섰다”고 설명했다. 최 회장 역시 선친의 경영 안목을 이어 받았다. 지지부진하던 SKC의 실적이 크게 호전된 게 좋은 사례다. 그는 2000년에 SKC 회장으로 부임하자마자 SKC의 천안 공장을 방문했다. 당시 천안 공장은 비디오 테이프와 콤팩트 디스크(CD) 등을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주력 제품인 비디오 테이프의 경쟁력이 날로 떨어지면서 적자만 쌓이는 실정이었다. 최 회장은 단호했다. 그는 천안 공장에 들어서자마자 직원들에게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고 밝혔다. 그리고선 천안공장을 2차전지와 휴대전화 단말기 등을 만드는 첨단 공장으로 바꿀 계획을 세웠다. 최 회장은 비디오 테이프 등 기존 생산 라인을 중국 공장으로 옮겼다. 대신 그 자리엔 휴대전화 ·2차전지 ·초박막액정표시장치(TFT-LCD)필름 등의 생산 라인을 구축했다. 이 공장은 2002년 흑자로 돌아섰고, 2003년에는 SKC의 전체 매출액의 절반 이상을 올리는 알짜 사업장으로 변신했다. 비디오 테이프 생산업체에서 정보통신업체로 변신한 SKC의 사례는 SK그룹뿐만 아니라 재계에서도 화젯거리가 됐다. 최 회장은 사회 사업에서도 선친의 가르침을 이어가고 있다. 최 회장은 “선친은 언제나 돈을 버는 것보다 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쳤다”고 말했다. 그런 영향으로 최 회장은 사회 사업에 열심이다. 특히 회사 돈이 아닌 자신의 돈으로 남을 돕는다. 그는 “수재의연금 등을 낼 때 ‘SK 최신원’이 아닌 ‘을지로 최신원’으로 한다”고 밝혔다. 그는 “어차피 세상을 떠날 때는 빈손으로 가는 것 아니냐”고 덧붙였다. 최 회장은 선친의 30주기를 맞아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담연(湛然)장학재단’을 세운다. 담연은 최종건 회장의 호다. 장학재단은 최씨 가족의 사재와 평전 수익금으로 운영된다. 최종건 평전, 어떤 내용 담고 있나 잿더미에서 일군 SK의 신화 ‘1953년 4월,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선경직물의 공장 앞에 건장한 한 청년이 서 있었다. 전쟁 전 선경직물 공장은 청년의 모든 꿈이었다. 그 청년은 혼자 삽을 들고 잿더미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청년의 뜨거운 열정은 많은 사람들에게 전염되기 시작했다. 혼자서 잿더미 속을 파헤치는 그의 주변으로 벽돌을 만드는 사람이 생기고, 목수가 생기고, 미장공이 생겼다. 그리고 2개월 만에 공장 안엔 4대의 직기가 조립됐다.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만들어진 이 4대의 직기가 지금의 SK 신화를 만들어내는 씨앗이 됐다. ’ SK의 임직원들 사이에서 구전으로 전해오는 창업주 최종건 회장의 이야기다. 공격 경영으로 정면 승부하라. 과거 재벌들의 전기가 창업주를 영웅으로 만드는 데 반해 이 책은 재미있고 편하게 읽히는 매력이 있다. 설립 초기 선경의 파트너였던 일본 데이진(帝人) 그룹 관계자들을 포함해 최종건 회장과 관련된 200여 명의 인터뷰로 만들어졌다. 사실에 기인해서 최대한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도록 노력한 흔적이 돋보인다. 또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SK의 전신 선경의 태동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책을 펼치면 골목대장이었던 최종건 회장의 소학교 시절 이야기부터, 1970년대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생산체제를 갖추게 된 그룹 이야기가 숨가쁘게 진행된다. 당시 친형제처럼 지내던 조선일보 방일영 사장을 통해 외화를 빌리게 된 에피소드, 박정희 대통령을 통해 워커힐호텔을 인수하게 된 배경, 임종 직전까지 놓치지 않았던 석유 사업의 야망 등 최종건 회장의 도전과 열정을 느낄 수 있다. 특히 국내에 ‘화이버스코프’라는 암진단 기계가 없어 나중에서야 폐암 말기 선고를 받게 된 일화는 감동을 자아낸다. 최종건 회장은 나중에 그 기계를 외국에서 직접 구입해 병원에 기증하면서 “나는 이미 늦었지만 나와 같은 병에 걸려 고통받는 다른 환자들을 위해 기증한다”고 말할 정도로 죽음 앞에서 초연한 모습을 보여줬다. 최신원 회장은 “자료를 찾고 인터뷰를 해서 책이 나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제대로 된 평전을 내자는 게 신념이었다”며 “회사 내부적으로 사정이 안 좋았는데 직원들에게도 자신감을 심어주게 된 계기가 된 것 같다”고 밝혔다.

2004.01.08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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