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술성 전달하려면 마케팅도 잘해야”
권투시합의 난타전처럼 ‘마구 두드린다’는 뜻에서 제목을 붙였다는 비언어극(non-verbal performance) ‘난타’가 뉴욕 브로드웨이 공연을 성공리에 마쳤다. ‘난타’는 올 한 해 매출액 100억원을 내다보는 거대한 문화상품으로 성장했다. ‘난타 주식회사’의 CEO격인 송승환 PMC 대표를 찾았다. 아역배우 출신의 연기자 송승환은 이제 공연, 음악, 영화를 망라하는 문화상품 전문 기획사 대표로 우뚝 섰다.
송승환 대표에게 뉴욕 공연은 남다른 감회가 있었을 것이다. 그는 1980년대 미국 유학 시절부터 브로드웨이 공연을 꿈꿔 왔기 때문이다.
“1985년부터 88년까지 미국 유학 시절에, 아니 유학이라기보다는 세상 구경을 하러 갔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입니다만, 많은 공연을 봤습니다. ‘캐츠’, ‘레미제라블’ 등을 관람하면서 한국 연극을 브로드웨이에 올릴 수는 없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가 97년에 ‘난타’를 제작해서 국내에서 처음 공연을 했는데 반응이 좋았습니다.
99년에는 에든버러 공연페스티벌에서 좋은 평을 받았고, 이번에 브로드웨이 뉴빅토리 극장에 올리게 된 것입니다. 공연이 끝난 후 ‘이제 작은 꿈을 이루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가장 걱정스러웠던 것은 뉴욕 타임스의 평이었는데 다행히 호평을 받았습니다.”
뉴욕 타임스는 “한국에서 롱런을 했던 대중적인 쇼 ‘난타’가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만일 연극사에서 키친-싱크 드라마(Kitchen-Sink Drama)를 기록하게 된다면, ‘쿠킹(cookin·난타의 영어제목)’은 키친-싱크 코미디로 충분한 자격이 있을 것이다…‘쿠킹’은 (사람들의 마음에) 상당한 진동을 발산하고 있다”라고 썼다.
이처럼 ‘난타’가 세계 속의 모든 사람들을 공감하게 한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세계인이 공감하기 위해서는 우선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야 했습니다. 그래서 비언어극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자본이 취약하기 때문에 무엇보다 아이디어가 중요하며, 한국적인 독특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물놀이의 비트와 리듬을 바탕에 두었습니다. 주방과 음식, 요리사의 의상은 세계 공통이지만, 요리사들 간의 위계질서와 같은 것은 우리 문화의 독특함으로 강조했습니다. 배경 속에 천하대장군 등을 설정하기도 해서 보편성과 독특함을 동시에 보여주려 했던 것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자아낸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난타’의 리듬 자체가 세계 공통적으로 호소력을 가졌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중에서도 사물놀이의 리듬과 비트가 갖는 한국적 특성은 무엇이었을까.
“어느 나라 리듬이든지 격렬해질 때 듣는 사람에게 카타르시스를 주게 됩니다. 특히 우리 사물놀이의 휘모리 장단(매우 빠른 8박)은 아주 빠른 템포로 진행될 때 나름대로의 독특함과 후련함을 동시에 제공하기도 하지요. 사물놀이 공연을 본 외국 사람들은 어떻게 박자를 그렇게까지 세밀하게 쪼갤 수 있느냐라는 말들을 하곤 합니다. 일례로 일본의 음악은 도와 같다고나 할까요. 한번 ‘둥--’ 소리를 내고 한참 있다가 다시 ‘둥--’ 소리가 이어집니다. ”
15년 만에 이룬 브로드웨이 공연의 꿈
클라이맥스에 이르면서 정신없이 두드려대는 음들의 연속에서 후련함이 배가되고, 리듬 자체에 몰입하게 되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순간을 말하는 것 같다. 그런데 난타의 또 다른 장점 중 하나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다. 리듬과 비트로 인해 신명이 나기도 하지만,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 관객들을 지루하지 않게 만들기도 한다. 드라마 작가가 따로 있는지 궁금했다.
“고정작가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외국 연출가에게 보여주고 몇 단계에 걸친 업그레이드 과정을 거쳤습니다. 외국에서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쇼닥터(Show Doctor)라고 하는데, 3명의 쇼닥터에게 보여주고 수정을 하기도 했습니다.”
부엌 자체를 사회의 축소판으로 보고, 그곳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애정 그 밖의 음식과 주방기구들로 사회적 풍자나 비판을 담은 극을 만들 생각은 없는지 물어보았다.
“공연은 논리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이고 즉흥적인 것이며, 또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적인 메시지를 찾아내는 것은 평론가들의 몫이지요. 코미디로 카타르시스를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에요.”
카타르시스를 통해 후련함을 주고 갈등을 해결하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사회적 기능이 된다는 의미인 것 같다. 그런데 난타가 이번 뉴욕 공연에서 성공을 거둔 배경에는 마케팅 측면의 역할이 컸을 것이라 생각된다. 특히 브로드웨이 아시아(Broadway Asia Company)라는 기획사가 이번 공연의 파트너였는데, 그들의 마케팅 전략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무엇이었는지 물어 보았다.
“같이 일을 하면서 느꼈던 가장 큰 점은 우리가 너무 서두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브로드웨이에 가기 전에 우선 에든버러 공연페스티벌에서 객관적인 평가를 받자는 것부터 요구했습니다. 그런 후에 세계 시장을 순회하면서 수정과 준비를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반응을 축적해 브로드웨이로 가자는 얘기였지요. 그래서 에든버러 공연페스티벌에 참가해서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때도 우리는 바로 뉴욕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빨리 가는 것보다 브로드웨이에서 어떤 평을 받느냐, 어떻게 하면 공연이 오래 지속되도록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점들은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의 전략은 국내와 해외 공연을 병행하자는 것이었는데, 그것이 적중하기도 했습니다. 국내에 난타 전용관이 있고 그곳의 고정수입이 있어 느긋해질 수도 있었구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난 송승환 대표는 아역배우 출신이다. 8세 때인 1965년부터 연기생활을 했으며, 한국외대를 졸업한 후에는 ‘76소극장’을 통해 연극배우로서 자신의 연기세계를 넓혀 가기도 했다. 연극 ‘에쿠우스’로 백상연기대상을 수상했고, 그 후 돌연 3년간의 미국 유학 길에 올랐으며, 귀국 후에는 ‘환퍼포먼스’를 창단해 98년 동아연극상 작품상을 수상한 ‘남자충동’과 같은 연극들을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7억원을 들여 제작한 대형 뮤지컬 ‘고래사냥’의 실패 후 시작한 난타는 그에게 있어서 배수진과 같았다고 한다. 그 ‘난타’가 호암아트홀에서의 초연 이후 국내 공연사상 최초 최고의 기록을 갱신하면서 자신감을 얻었다. 그가 험난한 공연기획의 길을 택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아주 어려서부터 배우 생활을 했습니다. 배우라는 직업이 만족스럽긴 했지만, 캐스팅되어야 하고 연출자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는 점에서 수동적이라는 것이 공연기획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였습니다. 능동적인 일을 해보고 싶었고,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 자신이 녹아들어가는 체험을 해보고 싶기도 했구요. 미국에 다녀온 후 그런 생각을 보다 구체화하게 되었지요. 사실 80년대 초 우리 공연 현실은 볼거리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군사정권하에서 여러 가지 통제가 있기도 했구요. 미국으로 가게 된 동기 중의 하나가 국내에서 못 보는 외화와 공연을 실컷 보고 생각을 넓히겠다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경험을 하고 나니까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절실해졌지요.”
그렇다고 해도 70년대부터 연극운동을 해왔고, 순수예술을 지향하는 배우의 길을 가고 있던 사람이 과연 난타와 같은 상업적인 공연을 기획하면서 개인적 갈등은 없었을지 무척 궁금했다.
“그런 갈등은 20대 때에 미리 겪었다고 생각합니다. 76소극장 시절 그곳에는 다른 분야의 예술가들도 있었고, 예술지상주의와 같은 입장을 지향했었습니다. 그때의 갈등과 고민은 TV 출연이었는데, 너무 상업적이지 않는가 라는 점에서였지요. 에쿠우스를 하면서 당시 쇼프로그램인 ‘젊음의 행진’ 사회를 보기도 했었어요. TV에서 돈을 벌어서 연극에 쏟아 넣기도 했지요. 그러면서 일찍부터 상업성보다는 마케팅의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관객이 연극의 3대 요소 중 하나인데, 관객이 없는 연극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서서히 갖기 시작했지요. 이런 과정을 겪었기에 난타로 갈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마케팅이나 상업성이 예술성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또 다양한 연령층과 사회계층을 위해 문화의 다양성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90년대 후반의 대표적 성공작으로 떠오른 난타가 벌어준 돈도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형편은 많이 좋아졌지요. 반지하 셋방에서 시작한 PMC 사무실이 이제는 광화문의 번듯한 빌딩으로 옮겨 자리잡았으니까요. 올해 국내외 공연 입장료와 개런티, 캐릭터 판매수입 등 난타 관련 매출이 100억원대에 이를 전망입니다. 그러나 돈 걱정 없이 새로운 공연을 기획해 나가기에는 넉넉한 수입은 아니지요.”
난타 같은 성공사례를 이어가기 위해 우리 문화환경에서 개선해야 할 점은 무엇일까.
난타 연간 매출 100억원대, 후속작으로 ‘UFO’ 준비
“우리 문화환경에서 제일 큰 문제는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문화도 교육이라는 것입니다. 강요가 아니라 어려서부터 문화적 경험을 하게 하는 교육이 있어야 하고, 습관을 형성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술보다는 연극 한 편을 보고, 베토벤의 음악 한 곡을 들으면서 풀어야겠다는 생각이 떠오르도록 했으면 합니다.”
입시 위주의 교육이 우리 아이들의 감성을 황폐화시켜 놓고 있다는 말로 들린다. 그 점은 필자가 공감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우리 어렸을 때만 해도 아동극이나 교회 성극·학예회·글짓기 대회와 같은 것들이 많아서 문화체험을 해볼 기회가 있었는데, 지금은 너무 입시위주의 교육이 되고 있어 아쉽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감수성이 예민한 고등학교 시절에 한국단편문학선과 같은 것을 다 읽어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요즘은 그럴 여유가 없는 것 같습니다. 공급의 측면에서도 문제는 있습니다. 아동극이 어린이날을 전후해서 몇 편만 제작된다는 현실도 문제입니다.”
전인교육을 위해 시작한 고교평준화니까 지금까지 소홀히 해온 감성교육과 문화의 수요자를 길러내는 교육이 되었으면 한다. 그렇지만 문화의 공급 측면도 같이 변화해야만 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문화 공급자의 길을 걷고 있는 송 대표의 계획을 물어 보았다.
“난타가 두드리는 것으로 이루어진 비언어극이라면, ‘UFO’는 춤동작만으로 이루어진 비언어극입니다. 이미 공연을 한 번 했는데, 이것을 다시 다듬어서 무대에 올릴 생각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창작뮤지컬이 성공할 수 있는 시대가 올 것이라 생각하고 그에 대비한 작품들도 구상해나가려 합니다.”
그는 연기자이기에 문화의 공급적 측면을 잘 알았을 것이고, 난타 공연으로 문화 수요자들의 요구도 잘 알게 됐을 것이다. 이런 공급과 수요가 부합할 때 하나의 문화상품으로 경쟁력과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이 아닐까.
송승환 대표에게 뉴욕 공연은 남다른 감회가 있었을 것이다. 그는 1980년대 미국 유학 시절부터 브로드웨이 공연을 꿈꿔 왔기 때문이다.
“1985년부터 88년까지 미국 유학 시절에, 아니 유학이라기보다는 세상 구경을 하러 갔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입니다만, 많은 공연을 봤습니다. ‘캐츠’, ‘레미제라블’ 등을 관람하면서 한국 연극을 브로드웨이에 올릴 수는 없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가 97년에 ‘난타’를 제작해서 국내에서 처음 공연을 했는데 반응이 좋았습니다.
99년에는 에든버러 공연페스티벌에서 좋은 평을 받았고, 이번에 브로드웨이 뉴빅토리 극장에 올리게 된 것입니다. 공연이 끝난 후 ‘이제 작은 꿈을 이루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가장 걱정스러웠던 것은 뉴욕 타임스의 평이었는데 다행히 호평을 받았습니다.”
뉴욕 타임스는 “한국에서 롱런을 했던 대중적인 쇼 ‘난타’가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만일 연극사에서 키친-싱크 드라마(Kitchen-Sink Drama)를 기록하게 된다면, ‘쿠킹(cookin·난타의 영어제목)’은 키친-싱크 코미디로 충분한 자격이 있을 것이다…‘쿠킹’은 (사람들의 마음에) 상당한 진동을 발산하고 있다”라고 썼다.
이처럼 ‘난타’가 세계 속의 모든 사람들을 공감하게 한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세계인이 공감하기 위해서는 우선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야 했습니다. 그래서 비언어극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자본이 취약하기 때문에 무엇보다 아이디어가 중요하며, 한국적인 독특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물놀이의 비트와 리듬을 바탕에 두었습니다. 주방과 음식, 요리사의 의상은 세계 공통이지만, 요리사들 간의 위계질서와 같은 것은 우리 문화의 독특함으로 강조했습니다. 배경 속에 천하대장군 등을 설정하기도 해서 보편성과 독특함을 동시에 보여주려 했던 것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자아낸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난타’의 리듬 자체가 세계 공통적으로 호소력을 가졌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중에서도 사물놀이의 리듬과 비트가 갖는 한국적 특성은 무엇이었을까.
“어느 나라 리듬이든지 격렬해질 때 듣는 사람에게 카타르시스를 주게 됩니다. 특히 우리 사물놀이의 휘모리 장단(매우 빠른 8박)은 아주 빠른 템포로 진행될 때 나름대로의 독특함과 후련함을 동시에 제공하기도 하지요. 사물놀이 공연을 본 외국 사람들은 어떻게 박자를 그렇게까지 세밀하게 쪼갤 수 있느냐라는 말들을 하곤 합니다. 일례로 일본의 음악은 도와 같다고나 할까요. 한번 ‘둥--’ 소리를 내고 한참 있다가 다시 ‘둥--’ 소리가 이어집니다. ”
15년 만에 이룬 브로드웨이 공연의 꿈
클라이맥스에 이르면서 정신없이 두드려대는 음들의 연속에서 후련함이 배가되고, 리듬 자체에 몰입하게 되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순간을 말하는 것 같다. 그런데 난타의 또 다른 장점 중 하나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다. 리듬과 비트로 인해 신명이 나기도 하지만,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 관객들을 지루하지 않게 만들기도 한다. 드라마 작가가 따로 있는지 궁금했다.
“고정작가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외국 연출가에게 보여주고 몇 단계에 걸친 업그레이드 과정을 거쳤습니다. 외국에서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쇼닥터(Show Doctor)라고 하는데, 3명의 쇼닥터에게 보여주고 수정을 하기도 했습니다.”
부엌 자체를 사회의 축소판으로 보고, 그곳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애정 그 밖의 음식과 주방기구들로 사회적 풍자나 비판을 담은 극을 만들 생각은 없는지 물어보았다.
“공연은 논리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이고 즉흥적인 것이며, 또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적인 메시지를 찾아내는 것은 평론가들의 몫이지요. 코미디로 카타르시스를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에요.”
카타르시스를 통해 후련함을 주고 갈등을 해결하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사회적 기능이 된다는 의미인 것 같다. 그런데 난타가 이번 뉴욕 공연에서 성공을 거둔 배경에는 마케팅 측면의 역할이 컸을 것이라 생각된다. 특히 브로드웨이 아시아(Broadway Asia Company)라는 기획사가 이번 공연의 파트너였는데, 그들의 마케팅 전략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무엇이었는지 물어 보았다.
“같이 일을 하면서 느꼈던 가장 큰 점은 우리가 너무 서두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브로드웨이에 가기 전에 우선 에든버러 공연페스티벌에서 객관적인 평가를 받자는 것부터 요구했습니다. 그런 후에 세계 시장을 순회하면서 수정과 준비를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반응을 축적해 브로드웨이로 가자는 얘기였지요. 그래서 에든버러 공연페스티벌에 참가해서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때도 우리는 바로 뉴욕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빨리 가는 것보다 브로드웨이에서 어떤 평을 받느냐, 어떻게 하면 공연이 오래 지속되도록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점들은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의 전략은 국내와 해외 공연을 병행하자는 것이었는데, 그것이 적중하기도 했습니다. 국내에 난타 전용관이 있고 그곳의 고정수입이 있어 느긋해질 수도 있었구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난 송승환 대표는 아역배우 출신이다. 8세 때인 1965년부터 연기생활을 했으며, 한국외대를 졸업한 후에는 ‘76소극장’을 통해 연극배우로서 자신의 연기세계를 넓혀 가기도 했다. 연극 ‘에쿠우스’로 백상연기대상을 수상했고, 그 후 돌연 3년간의 미국 유학 길에 올랐으며, 귀국 후에는 ‘환퍼포먼스’를 창단해 98년 동아연극상 작품상을 수상한 ‘남자충동’과 같은 연극들을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7억원을 들여 제작한 대형 뮤지컬 ‘고래사냥’의 실패 후 시작한 난타는 그에게 있어서 배수진과 같았다고 한다. 그 ‘난타’가 호암아트홀에서의 초연 이후 국내 공연사상 최초 최고의 기록을 갱신하면서 자신감을 얻었다. 그가 험난한 공연기획의 길을 택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아주 어려서부터 배우 생활을 했습니다. 배우라는 직업이 만족스럽긴 했지만, 캐스팅되어야 하고 연출자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는 점에서 수동적이라는 것이 공연기획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였습니다. 능동적인 일을 해보고 싶었고,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 자신이 녹아들어가는 체험을 해보고 싶기도 했구요. 미국에 다녀온 후 그런 생각을 보다 구체화하게 되었지요. 사실 80년대 초 우리 공연 현실은 볼거리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군사정권하에서 여러 가지 통제가 있기도 했구요. 미국으로 가게 된 동기 중의 하나가 국내에서 못 보는 외화와 공연을 실컷 보고 생각을 넓히겠다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경험을 하고 나니까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절실해졌지요.”
그렇다고 해도 70년대부터 연극운동을 해왔고, 순수예술을 지향하는 배우의 길을 가고 있던 사람이 과연 난타와 같은 상업적인 공연을 기획하면서 개인적 갈등은 없었을지 무척 궁금했다.
“그런 갈등은 20대 때에 미리 겪었다고 생각합니다. 76소극장 시절 그곳에는 다른 분야의 예술가들도 있었고, 예술지상주의와 같은 입장을 지향했었습니다. 그때의 갈등과 고민은 TV 출연이었는데, 너무 상업적이지 않는가 라는 점에서였지요. 에쿠우스를 하면서 당시 쇼프로그램인 ‘젊음의 행진’ 사회를 보기도 했었어요. TV에서 돈을 벌어서 연극에 쏟아 넣기도 했지요. 그러면서 일찍부터 상업성보다는 마케팅의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관객이 연극의 3대 요소 중 하나인데, 관객이 없는 연극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서서히 갖기 시작했지요. 이런 과정을 겪었기에 난타로 갈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마케팅이나 상업성이 예술성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또 다양한 연령층과 사회계층을 위해 문화의 다양성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90년대 후반의 대표적 성공작으로 떠오른 난타가 벌어준 돈도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형편은 많이 좋아졌지요. 반지하 셋방에서 시작한 PMC 사무실이 이제는 광화문의 번듯한 빌딩으로 옮겨 자리잡았으니까요. 올해 국내외 공연 입장료와 개런티, 캐릭터 판매수입 등 난타 관련 매출이 100억원대에 이를 전망입니다. 그러나 돈 걱정 없이 새로운 공연을 기획해 나가기에는 넉넉한 수입은 아니지요.”
난타 같은 성공사례를 이어가기 위해 우리 문화환경에서 개선해야 할 점은 무엇일까.
난타 연간 매출 100억원대, 후속작으로 ‘UFO’ 준비
“우리 문화환경에서 제일 큰 문제는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문화도 교육이라는 것입니다. 강요가 아니라 어려서부터 문화적 경험을 하게 하는 교육이 있어야 하고, 습관을 형성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술보다는 연극 한 편을 보고, 베토벤의 음악 한 곡을 들으면서 풀어야겠다는 생각이 떠오르도록 했으면 합니다.”
입시 위주의 교육이 우리 아이들의 감성을 황폐화시켜 놓고 있다는 말로 들린다. 그 점은 필자가 공감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우리 어렸을 때만 해도 아동극이나 교회 성극·학예회·글짓기 대회와 같은 것들이 많아서 문화체험을 해볼 기회가 있었는데, 지금은 너무 입시위주의 교육이 되고 있어 아쉽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감수성이 예민한 고등학교 시절에 한국단편문학선과 같은 것을 다 읽어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요즘은 그럴 여유가 없는 것 같습니다. 공급의 측면에서도 문제는 있습니다. 아동극이 어린이날을 전후해서 몇 편만 제작된다는 현실도 문제입니다.”
전인교육을 위해 시작한 고교평준화니까 지금까지 소홀히 해온 감성교육과 문화의 수요자를 길러내는 교육이 되었으면 한다. 그렇지만 문화의 공급 측면도 같이 변화해야만 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문화 공급자의 길을 걷고 있는 송 대표의 계획을 물어 보았다.
“난타가 두드리는 것으로 이루어진 비언어극이라면, ‘UFO’는 춤동작만으로 이루어진 비언어극입니다. 이미 공연을 한 번 했는데, 이것을 다시 다듬어서 무대에 올릴 생각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창작뮤지컬이 성공할 수 있는 시대가 올 것이라 생각하고 그에 대비한 작품들도 구상해나가려 합니다.”
그는 연기자이기에 문화의 공급적 측면을 잘 알았을 것이고, 난타 공연으로 문화 수요자들의 요구도 잘 알게 됐을 것이다. 이런 공급과 수요가 부합할 때 하나의 문화상품으로 경쟁력과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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