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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 밑창에 숨겨 온 금괴가 장사 밑천

신발 밑창에 숨겨 온 금괴가 장사 밑천

▎외환위기 당시 금 모으기 운동.

▎외환위기 당시 금 모으기 운동.

지난해 북한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평양에서 묘향산으로 가는데 청천강에 접어들면서 특이한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강 이곳 저곳이 공사장처럼 마구 파헤쳐져 있는 것이다. 주변에서 사람들이 무언가 나르며 열심히 움직이는 것이 흥미로웠다. 잠깐 차가 서는 동안 물가로 내려가 문제의 웅덩이를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은 사금을 채취한 흔적이었다.

청천강에서 사금을 채취할 수 있는 것은 조금만 북쪽으로 올라가면 한반도 대표 금맥이라 할 수 있는 운산을 만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10억 달러를 투자하면 북한이 중동에 미사일 판매를 중단한다는 조건으로 협상이 오가기도 한 세계 금광업계가 주목하는 곳이다. 한반도에서 금 투자는 이렇듯 강변의 사금채취로 시작됐다.

근대화가 시작되면서 금광 채굴권이라는 금 투자 상품이 본격 데뷔하게 된다. 그런데 왜 하필 금인가? 미국인 레이 헌트가 이를 잘 설명해 준다. 1897년 500만 달러를 모아 평안북도 운산에 동양금광회사를 세운 그는 1939년 일본에 회사를 매각할 때까지 42년 동안 6000만 달러의 수익을 냈다.

829명 주주가 가장 큰 수혜자였다. 이들이 큰 수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운산군 일대의 채광권을 독점했기 때문이다. 그 지분의 대가는 단돈 3만 달러였다. 일제시기에도 ‘노다지 바람’은 계속됐다. 광권이 투자상품으로 큰 인기를 끌자 이를 사고팔아 돈을 버는 졸부들이 등장했다.

혹자는 1930년대를 황금광 시대라고 부른다. 이런 열기는 한반도 국토의 70%를 금광으로 탈바꿈시켰다. 5년 만에 금광 수가 10배가 됐고, 1939년의 한반도 금 생산량은 31t으로 세계 5위를 기록했다. 이전에는 금광 사업하는 사람을 미쳤다고 했으나 이때는 금광 사업을 하지 않는 사람이 미친 사람일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해방 이후 월남한 사람들은 금붙이에 유난히 애착을 보였다. 아이들 신발 밑창에 금괴를 숨겨 무수한 검문소를 통과하고 남쪽으로 건너와 이를 되팔아 남한에서 재기한 이도 있었다. 특히 평안도 출신 월남민들은 금붙이를 판 자금력을 바탕으로 현재의 남대문시장에 뿌리를 내리고 미군 용품을 사들이며 자리를 잡았다.

한국전쟁 이후 원화의 역사는 화폐개혁의 역사다. 말이 화폐개혁이지 원화가치를 폭락시켜 깊숙이 곤두박질치게 했다. 자고 나면 가격이 배로 뛰는 인플레이션을 잡으려고 정부는 화폐개혁을 단행하곤 했는데 통화개혁 조짐이 있을 때마다 첫 번째 투자 대상으로 꼽힌 것이 금이다.



1939년 한반도 금 생산량 세계 5위

한번은 화폐개혁 발표 이틀 전 한국은행 업무부장의 부인이 5000만원어치 금붙이를 사재기하다 수사기관에 적발됐다. 대박의 꿈에 젖어 파렴치한 행위를 저지른 그를 사회는 민족의 반역자로 몰았다. 금붙이가 투자 대상으로서의 존재를 확고히 한 사건이다.

이후 고도성장기에 금괴는 재산 상속·증여 수단으로 많이 이용됐다. 특히 1990년대 들어 금괴 거래가 부쩍 늘었는데, 그전에 고소득층이 부의 축적 수단으로 사용한 증권, 금융채 등 이른바 ‘묻지마 채권’에 투자할 길이 막혀서다.

정부가 부동산과 채권을 상속할 때 세금을 무겁게 물리자 자산가들은 금괴를 변칙수단으로 이용했다. 이때 가장 많이 거래된 것이 순금 1㎏짜리 금괴(골드 바)였다. 현금으로 사면 기록을 남기지 않아도 돼 세금을 물지 않고 막대한 재산을 상속·증여할 수 있었다. 금 투자가 투자상품으로 다시 빛을 발한 것은 1997년 외환위기가 발생해 금값이 폭등했을 때다.

당시 외환보유액이 바닥을 드러내 원화 가치가 폭락했다. 통화 가치의 폭락을 경험한 자산가들은 금 투자를 새롭게 주목하기 시작했다. 1999년 4월, 금 선물은 우리나라 최초의 원자재 선물로 상장됐다. 금 선물거래시장은 초기에 기관투자가들이 관심을 갖고 참여해 하루 평균 거래 대금이 한때 70억~80억원 규모였다.

같은 해 10월 국내 한 증권사가 재미있는 조사결과를 내놓았는데, 금이 1999년 3분기의 각종 투자상품 가운데 수익률이 가장 높았다는 보고였다. 23.4%를 기록해 주식·채권·예금 등 다른 투자상품을 제친 것. 그해 7월 1일 1돈쭝(3.75g)에 3만9700원이던 국내 순금 도매가가 국제적인 금값 상승으로 9월 30일에 4만9000원까지 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 현물에 대한 부가가치세 부과 등으로 2004년 이후 금 선물거래가 끊겼다. 시장에 유통되는 금괴 가운데 상당 부분이 밀반입된 것이어서 금 선물시장이 자리 잡기 어려웠다. 관세청이 적발한 밀수금괴 규모는 2005년 한 해 동안 613억5600만원에 달했다. 2008년 말, 2009년 초 이후 금 선물시장이 다시 활성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으나 금 선물이 투자상품으로 자리 잡는 데는 시간이 필요할 듯하다.

“지금 거의 6만원 가잖아. 너무 많이 올랐어. 상투야. 골드 바(금괴) 있으면 지금 파는 게 좋아.”

2003년 서울 종로3가 귀금속도매상가의 보석 매매상들이 나눈 대화다. 2002년 12월 초에 24K 순금 1돈쭝(3.75g)당 5만원 선을 오르내리던 금값은 2003년 9월 13일 도매 기준 5만5700원, 소매 시세는 5만9200원까지 치솟았다. 그러나 ‘금값이 상투’라는 이들의 생각은 틀렸다.

금 투자 시장은 새로운 황금기를 맞아 새로운 투자 상품을 내놓았다. 투자자들이 금 사재기에 나서고 금이 자산시장 최고의 투자수익 상품으로 각광받을 가능성을 점치는 사람들은 따로 있었다.



금 통장·금ETF 등 새로운 상품 인기그리고 시장에 선보인 상품이 금 투자를 쉽게 할 수 있게 한 금 통장이다. 신한은행이 2003년 11월 내놓은 ‘신한골드리슈 금적립’ 직접투자 상품은 통장에 금을 수시로 적립해 놓고 국제 금 시세에 따라 현금 또는 금 실물로 인출할 수 있다. 출시 당시 초저금리에 따른 포트폴리오 분산, 인플레이션 헤지를 위한 대안 재테크 투자상품으로 떠올랐다.

1g 이하 소량 단위로 매입·매도할 수 있고 금 실물에 투자할 때 생기는 분실 위험 부담도 없었다. 하지만 금 통장은 도입 초기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이 투자상품 거래량은 2004년 11월 634㎏(98억원)으로 최고를 기록한 후 2005년 4월에 126㎏(17억원)까지 하락했다. 2004년 12월 금을 적립한 투자자는 이때까지 8%의 손해를 봤다.

그러다 2007년 이후 글로벌 금융위기를 맞아 금 통장은 자산가들이 가장 선호하는 금 투자방법이 됐다. 월 평균 거래량이 2007년 963㎏에서 2008년에는 3681㎏으로 급증했다. 2009년 4월 9일에는 금 예금 통장인 ‘골드리슈’의 잔액이 6193㎏을 적립하는 기록을 세웠다. 원화로 환산하면 약 2330억원 수준이다.

미래에는 어떤 금 투자상품이 등장할까? 필자는 새로운 투자상품이 등장함과 동시에 투자상품이 과거로 회귀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전망한다. 세계적인 금 보관소로 알려진 미국의 낙스 요새에 가면 대형 금괴를 볼 수 있다. 과거 금본위제(화폐의 가치를 금의 가치로 나타내는 것) 시절 각국 중앙은행들이 보관한 금괴들이다.

중국 인민은행의 대형금괴 수집이 시발점이라면 한국은행도 그 뒤를 따를 것이다. 내년에는 금상장지수펀드(ETF) 같은 새로운 투자상품이 국내에 선보일 전망이다. 노다지를 캐기 위한 모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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