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HE BEATLES - 비틀스는 어떻게 성공했나

1964년 2월이라고 하면 까마득한 옛날로 느껴질지도 모른다. 특히 당시를 살았던 사람의 경우엔 그런 느낌이 더할 듯하다. 그렇다면 ‘I Want to Hold Your Hand’ 도 입부의 파워 코드(루트와 완전 5도 위의 음정만으로 이뤄진 코드)를 들어보라. 번개처럼 마법이 내리치며 순식간에 우리를 그 시절로 이동시킨다. 당시 불과 5주 전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의 그림자에 덮여 있던 을씨년스러운 겨울에 빛을 밝힌 바로 그 마법이다.
50년 전 2월 비틀스는 ‘I Want to Hold Your Hand’를 타고 순풍에 돛단배처럼 미국에 안착했다. 비틀스의 미국 내 첫 1위 히트곡이었다(그뒤 26개곡이 더 음악 차트 정상에 오른다. 아직도 깨지지 않은 기록이다). 그 곡은 2월 1일 정상에 올라선 뒤 두 달 가까이 그 자리를 지켰다. 2012년 비틀스 음악과 관련상품 매출액이 7100만 달러에 달했다. 그 노래의 충격파가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며 신세대들을 집어삼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4년 2월 7일 존 레넌,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가 런던의 히드로 공항에서 팬암 101편에 올랐다. 그때만해도 그들이 어떤 환영을 받을지, 미국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나도 뒤에 남아 ‘사무실을 지키느라’ 그 여행에 동행하지 못했다).
영국 국내 팬들 사이에선 이미 비틀스 열풍(Beatlemania)이 절정에 달했다. 하지만 미국의 반응은 여전히 커다란 물음표였다. 1963년 내내 미국에선 비틀스가 거의 주목을 받지도 방송을 타지도 못했다. 일정 부분 소속 음반사가 홍보에 소극적이었던 탓이었다. 캐피털 레코드 경영진은 미국 시장에선 영국 가수들이 통하지 않는다고 판단해 그들을 완전히 무시했다(비틀스의 미국 내 음반 출시는 다른 레코드사로 떠넘겨졌다).
바로 그런 까닭에 히트곡에 관한 한 ‘I Want to Hold Your Hand’는 완전 대박이었다. 워싱턴 DC의 한 디스크자키가 그 음반을 몰래 입수해 방송했다. 덕분에 업계에 알려지기 전에 입소문을 타고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
내 친구이자 사장이며 같은 리버풀 출신인 브라이언 엡스타인을 포함해 어느 누구도 그 싱글이 미국에서 차트 1위에 오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분명 투어공연과 마케팅 캠페인으로 뒤를 받쳐야만 가능한 일이라고 여겼다. 엡스타인의 입장에서 비틀스의 미국 방문은 전적으로 미국시장에 교두보를 마련하려는 목적이었다.
TV출연과 콘서트를 통해 팬을 확보한다는 계획이었다. 어쨌든 영국에서도 비슷하게 고된 과정을 거친 참이었다. 비틀스는 독일 함부르크의 우중충한 클럽들(그리고 고향 리버풀의 캐번 클럽이라는 유난히 꾀죄죄한 곳)에서 오랫동안 활동했었다. 사운드를 갈고 닦으며 팬 기반을 구축했다.
엡스타인이 비틀스를 처음 목격한 건 1961월 11월 캐번에서의 점심시간 공연 때였다. 그 시절 내가 엡스타인에게 고용돼 운영하던 레코드점에 들락거리던 바로 그 청년들이었다. 나는 리버풀의 상점인 루이스에서 레코드 코너를 운영하던 중 엡스타인을 처음 만났었다. 그뒤 엡스타인 가족 소유의 넴스(NEMS) 운영을 맡았다. 트렌드를 앞서가는 더 큰 매장이었다. 그 곳에 비틀스가 자주 드나들었다.
그 매장에서 비틀스 멤버들을 개별적으로 만났었다. 그들은 내 또래였으며 항상 주위를 배회했다. 새로 매장에 들어온 따끈따끈한 최신 로큰롤 레코드를 공짜로 듣기 위해서였다. 나는 그들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그들이 진지하고 정중하고 정말로 음악에 미쳐 있었기 때문이었다(위키피디아에선 그들이 넴스 매장의 ‘단골 고객’이라고 소개했다. 이는 그들이 실제로 음반을 구입했다는 잘못된 인상을 준다).
훗날 언론에 실린 그들의 성격 묘사는 상당히 들어맞았다. 레넌은 장난꾸러기였으며 엘비스에 푹 빠진 로커였다. 매카트니는 상냥하고 열성적이었다. 그리고 리틀 리처드를 매우 좋아했다. 그의 전매특허인 하울링 창법을 자기 것으로 완성했다. 해리슨은 익살꾼으로 대단히 웃겼으며 칼 퍼킨스의 팬이었다. 링고 스타 이전의 드러머 피트 베스트는 미남에 특징없는 인물이었다.
엡스타인이 그들을 발견한 직후 숨을 헐떡이며 나를 끌고간 곳은 캐번이었다. 그곳의 무대에서 바로 이 아이들(모두 21세 이하였다. 해리슨은 겨우 18세였다)을 보고는 놀랍고도 반가웠다. 그들이 미국에 상륙하기까지 2년 남짓한 세월이 걸렸다. 부단한 노력과 고생으로 점철된 기간이었다.
캐번 시절 비틀스는 여전히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에너지와 흡인력은 부인할 수 없었다. 엡스타인이 그들의 비즈니스 측면을 관장했다. 그들의 건달 같은 스타일과 무대 매너가 프로다워지기 시작했다. 맞춤 정장과 노래 후의 정중한 인사가 모두 그의 연출이었다.
엡스타인 아래서 비틀스의 비즈니스 측면도 더 조직적이 됐다. 무대와 보수가 모두 한 단계 높아졌다. 그는 무엇보다도 비틀스를 팔로폰 레코드에서 일하던 조지 마틴의 눈에 들게 했다. 팔로폰은 EMI 산하의 음반사였다(비틀스가 EMI에 앞서 영국 내 여러 레코드사에서 퇴짜를 맞은 일은 유명하다. EMI에서도 여러 명의 제작자에게 문전박대를 당하던 중 마틴이 마지못해 그들을 받아줬다).
1962년 10월 5일 EMI가 ‘Love Me Do’를 출시했다. 레넌과 매카트니의 자작곡으로 링고 스타가 타악기 반주를 넣었다. 마틴이 제작을 맡았다. 마틴은 그뒤로 비틀스가 음악활동을 끝낼 때까지 계속해 협력자가 된다. 그 곡은 음악 차트에서 17위까지 올랐다. 당시 영국의 대다수 가수들이 전문 작곡가의 곡을 받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눈부신 성과였다. 비틀스에게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확신을 EMI 음반사에 심어줬다.
이때부터 비틀매니아로 알려진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1963년 2월 영국에서 ‘Please Please Me’가 1위를 차지했다. ‘From Me to You’와 ‘She Loves You’가 그 뒤를 이었다. 이 곡들이 히트하면서 동시에 쉴 틈 없는 라이브 공연, 라디오 방송과 전국 TV 출연 공세가 논스톱으로 이어졌다. 영국 슈퍼스타 지위를 확고히 다지는 계기가 됐다. 그것은 1963년 11월 4일 런던 프린스 오브 웨일즈 극장에서 TV 중계된 역사적인 공연으로 절정에 달했다.

엘리자베스 여왕 모후와 마거릿 공주가 지켜보는 가운데 비틀스가 ‘로열버라이어티 쇼’의 주인공이 됐다. 거기서 언제나 언변 좋은 이간질꾼인 존 레넌이 유명한 말을 했다. “저가석 관객들은 박수를 쳐주시겠어요? 그리고 나머지는 보석 장신구만 딸랑딸랑 흔들어주시면 돼요.” 한 마디로 그들은 1960년 비틀스로서 함께 공연을 시작했을 때부터 1963년 영국에서 ‘하루아침에’ 슈퍼스타가 될 때까지 엄청난 땀방울을 흘렸다. 엡스타인은 이 같은 경험에 근거해 미국 공략의 기본 구상을 마련했다.
1963년 말 그는 유명한 버라이어티쇼 진행자 에드 설리번과 계약을 맺었다. 비틀스가 미국을 방문해서 미국 TV 최초로 라이브 공연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비틀스는 1964년 그 쇼에서 3회 공연하며 주빈 대접을 받게 된다. 무명 가수로선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엡스타인과 설리번의 공이었다.
그러나 설리번에게는 인재와 대중적 취향을 귀신같이 찾아내는 재주가 있었다. 소문에 따르면 그는 그 얼마 전 영국을 방문했다가 비틀매니아를 목격했다고 한다. 뉴욕으로 가기 위해 히드로 공항을 통과할 때 마침 비틀스가 스웨덴에서 귀국하는 길이었다.
팬들이 귀따가운 비명소리로 그들을 맞았다. 1963년 후반 미국 언론에선 비틀스를 풋내기 그룹으로 일축했다. 하지만 설리번은 금방 물건임을 직감했다. 설리번과 엡스타인 모두 비틀스가 에드 설리번 쇼 무대 출연의 여세를 몰아 미국 시장을 파고 들리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엡스타인은 미국 방문 자체가 모험적이고 계산된 도박이라고 여겼다. 1963년 가을 조지 해리슨이 일리노이주와 뉴욕을 방문하긴 했다(그뒤 그는 “아무도 우리를 모르더라”며 탄식했다). 그밖에는 비틀스 중 누구도 미국을 방문한 적이 없었다.
미국 방문이 더더욱 그들을 떨리게 한데는 이유가 있었다. 미국은 그들이 존경하는 영웅들의 고향이자 그들이 떠받드는 음악의 발상지였기 때문이다. 엘비스, 버디 홀리, 에벌리 브러더스, 리틀 리처드…. 실제로 1964년 2월까지 미국은 로큰롤의 세계적인 흐름을 선도했다. 미국은 모두를 가진 곳이었다.
엡스타인은 설리번 출연계약을 지렛대 삼아 캐피털 레코드의 최고경영진을 찾아가 그 미국 레코드 회사와 계약을 따냈다. 투어 공연 중 비틀스를 미국 시장에 알리기 위한 홍보예산을 배정하겠다는 약속도 받아냈다.
미국 DJ들이 불법 유출된 ‘I Want to Hold Your Hand’ 음반을 방송하고 있었다. 캐피털 레코드의 변호사들은 그것을 막지 못했다. 그리고 홍보에 도움이 된다는 명분으로 단속을 완화했다. 대신 그 싱글음반을 예정보다 앞당겨 1963년 12월 26일 발매했다. 레코드는 발매 3일 만에 25만 장이 팔렸다. 1964년 1월 10일에는 음반판매 100만 장을 돌파했다. 출시 후 3주도 안 돼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랐다. 정말로 경이적인 속도였다. 비틀스가 미국에 첫발을 내딛기 몇 주 전이었다.
사실상 엡스타인이 미국시장 침략을 위해 구상했던 장기 공성전 전략은 무용지물이 됐다. 영국에서 흘린 오랜 세월의 땀방울과 음악의 강점이 이미 미국의 교두보를 물렁하게 만들었다. 몇 주도 안돼 비틀매니아가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라디오 방송국들은 그들의 음악을 거의 논스톱으로 계속 돌렸다. 십대 팬들은 캐피털 레코드의 과대선전에 넘어가 비틀스 가발을 착용했다. 미국 각지의 자동차마다 “비틀스가 온다”고 알리는 범퍼 스티커가 부착됐다.
누구보다도 비틀스 자신들이 더 놀랐다. 광란의 환영 열기 속에 미국에 도착한 4일 뒤 존 레넌이 한 미국 기자에게 말했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처음부터 우리를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치 몇 년 전부터 봐온 것처럼 모두가 우리를 아는 듯하다. 기분이 너무 좋다!”
1964년 2월 9일의 에드 설리번 쇼 출연은 무명의 비틀스가 새 싱글을 알리는 무대로 엡스타인이 계획한 것이었다. 대신 전무후무한 미디어 이벤트가 됐다. 미국 전체 인구 중 5분의 2가량(7300만 명)이 그날 밤 그들의 공연을 지켜봤다. 미국 TV프로그램 사상 최고의 시청률이었다.
비틀스는 그날 밤 두 차례 공연을 했다. ‘All My Loving’으로 시작해 ‘I Want to Hold Your Hand’로 마무리했다. 미국에서 비틀스 매니아의 신호탄 역할을 한 열정적인 기타 연주와 아찔한 열정을 과시하는 무대였다.
나는 리버풀에서 그 광경을 지켜봤다. 한편으로는 뿌듯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실감 나지 않았다. 그들과 함께 음악활동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비틀스에서 이탈한 느낌이 들었다. 외부인의 관점에서 비틀스를 보게 됐다. 그주 엡스타인으로부터 가끔씩 전화를 받았을 뿐 수많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팬으로서 그리고 목격자로서 비틀스를 지켜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우리 모두에게 일대변화가 일어났음이 분명했다. 그 뒤로 나는 소용돌이의 한복판에 서게 됐다. 레넌·매카트니·해리슨·스타 그리고 1970년 비틀스가 해체될 때까지 그들 곁에서 함께 일한 운영 및 순회공연 스태프의 소규모 ‘가족’과 함께 말이다. 나는 곧 런던으로 이주해 1967년 엡스타인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의 보좌관 겸 최측근으로 곁을 지켰다. 그때부터 비틀스의 일상적인 비즈니스 문제에 더 깊숙이 관여하게 됐다.

50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1964년 2월의 일들이 꿈만 같다. ‘I Want to Hold Your Hand’의 뒤를 이은 비틀스의 모든 노래처럼 그 순간은 시작이면서 동시에 끝이었다. 그때까지 일이 진행되던 방식의 끝이면서 동시에 완전히 새로운 변화의 시작이었다.
언젠가 비틀스는 평생에 한번 보는 재능과 타이밍의 기막히게 절묘한 결합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재능은 물론 확연히 드러났으며 또한 수없이 확인됐다. 레넌과 매카트니의 결합은 팝송의 작곡 작업에는 과분할 정도였다. 천재적인 창의력이 넘쳐 흘렀다.
그러나 타이밍도 비틀스 현상에 못지 않게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미국은 케네디 암살 이후 절망에 빠져 있었다. 한 인간뿐아니라 그가 구현한 젊음의 종언 앞에서 망연자실한 상태였다. 바로 그 현장에 비틀스가 도착했다. 그들의 장발 머리, 뻔뻔함, 사운드 모두가 완전히 새로웠다. 케네디가 시작한 1950년대 스타일 및 관습과의 세대간 단절 작업에 마지막 대못을 박았다. 그리고 1960년대의 창의적이고 반문화적인 요소들을 풀어 놓았다.
그 순간엔 음악적으로도 행운이 따랐다. 엘비스는 군 제대 후론 잠잠했다. 처크 베리와 제리 리 루이스는 불타고 남은 재에 지나지 않았다. 버디 홀랜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1950년대 말과 60년대 초 히트곡 차트를 휩쓸었던 파비안, 프랭키 애벌론, 바비 리델 같은 십대 아이돌들은 한물간 스타였다. 팝음악 세계는 새로운 스타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비틀스 자신들도 운이 좋았다. 외부와 교류가 많던 항구를 통해 더 넓은 세계로 연결된 노동자 계급 도시에서 성장했다. 리버풀에선 미국의 최신 로큰롤 레코드를 엡스타인 소유의 음반점 등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다. 미국을 제외하고는 극소수에게만 허용된 문화적 이점을 레넌·매카트니·해리슨·스타는 누렸다.
미국 매스미디어의 성격변화도 그들의 성공에 날개를 달아줬다. 1960년대 초 언론 및 광고 회사를 이끌던 정장 차림의 경영자들은 대체로 당시의 지배적 문화사조를 반영해 조화를 추구했다. 그러나 미디어는 케네디 암살 이후 슬픔에 빠진 미국에 색다른 변화를 주려 했다. 그리고 다름아닌 월터 크롱카이트도 비틀스가 미국을 위한 원기회복제라고 CBS를 설득했다.
1963년 12월 중순 영국의 비틀스 현상에 관한 4분짜리 동영상을 미국 시청자들에게 보여줬다. 미국 매체도 결국에는 비틀스 현상의 힘에 굴복해 태도를 바꿨다. 비틀스의 도착을 다룬 모든 ‘성인’ 라디오, TV, 신문 보도가 극도로 찬양 일색이었다.
기자들은 비틀스에 대해서는 전혀 감이 없었다. 비틀스가 그런 점을 잘 보여줬다. 특히 존 F 케네디 공항의 팬암 터미널에서 가진 기자회견이 대표적이었다. 그들은 웃기고 무정부적이고 매력적인 태도를 드러냈다. 기자: “한 정신분석의가 최근 당신들은 영국판 엘비스 프레슬리 무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링고 스타(엘비스처럼 다리를 흔들며):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지금 비틀스의 미국 방문을 생각하니 가슴이 뜨거워진다. 그들에게는 활력 넘치고 경이로운 시기였다. 그들은 대단히 젊었다. 그들 앞에 점령해야 할 창의적이고 상업적인 땅이 펼쳐졌으며 그들은 점령했다.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앨범이 발매되기까지 3년의 세월이 남아있었다. 새 세상이 활짝 열렸다.
더 큰 성공을 거두면서 그들의 세계는 물론 더 작아지게 된다. 대중을 두려워하고 맹목적인 추종자들과 거리를 두게 된다. 내부세계로 눈을 돌려 명상과 영성에 몰두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에는 순회공연을 완전히 중단한다. 1964년 2월 미국에 첫 발을 내디딘 사랑스러운 더벅머리 4인의 행복한 얼굴에는 이 같은 불안이나 피로감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미국의 비틀스를 향한 러브 스토리의 사운드트랙이 ‘I Want to Hold Your Hand’로 시작됐다면 그 최초의 잊혀지지 않는 시각적 배경은 뉴욕시였다. 2월 7일 JFK 공항에서 그들을 맞이한 4000명의 팬들, 뉴욕시의 플라자 호텔과 센트럴 파크에서 사진작가 해리 벤슨 등이 촬영한 그들의 사진들. 뉴욕시는 비틀스에 관한 우리 모두의 기억 속에 아로새겨져 있다.
내 사무실은 플라자 호텔에서 몇 블럭거리에 있다. 매일 걸어서 센트럴 파크를 통과해 센트럴파크웨스트의 집으로 귀가한다. 우리 집은 센트럴파크웨스트의 다코타 빌딩 바로 옆에 있다(다코타는 비틀스가 살았을 뿐 아니라 암살 당한 곳으로 유명하다). 그 짧은 여로에 비틀스 스토리의 모든 굴곡이 담겨 있다. 기쁨 그리고 슬픔의 이야기다. 그러나 존 레넌의 노래 ‘In My Life’에 빗대 말하면 그 모두가 내게는 사랑스러운추억이다.
- 필자 피터 브라운은 비틀스의 매니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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