듀앤 클래리지에 따르면 레이건 행정부는 카터 대통령 임기가 끝날 때까지 이란에 억류됐던 미국인 인질의 석방을 막았다고 한다. 사실일까? 1979년 테헤란 주재 미국대사관에 난입한 이란의 과격파 학생들이 미국인 인질의 눈을 가린 채 끌고 다녔다(위). 전 CIA 중남미 국장 듀앤 클래리지(오른쪽).지난봄, 출간 계획 중인 내 책 ‘스파이에게 당하다: CIA는 어떻게 언론을 조작하고 할리우드를 속였는가(Spooked: How the CIT Manipulates the Media and Hoodwinks Hollywood)’를 위해 국가안보 기자, 전직 CIA 요원과 인터뷰하려고 미국 워싱턴 DC에서 일주일을 보냈다. 당시 연락했던 사람 중 한 명이 지난 4월 9일 암으로 사망한 듀앤 클래리지였다. 첩보 능력으로 유명했지만 사파리 복장에 시가를 물고 다니는 모습으로도 많이 알려졌던 ‘듀이’는 전직 CIA 중남미 국장이자 1980년대 CIA 대테러센터 창립 리더이기도 했다. 그는 레이건 정부가 이란 무기 불법판매 이익으로 니카라과 반군을 지원한 ‘이란-콘트라 스캔들’에서 가장 이름을 많이 알렸다. 1991년 클래리지는 이란-콘트라 사건에서 그가 했던 역할에 관해 의회에서 위증한 혐의로 기소됐지만, 다음 해 다른 정보원 5명과 함께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의 사면을 받아 석방됐다.
2006년 나는 이후 영화로 제작된 책 ‘킬 더 메신저’를 출간했다. 클래리지가 CIA에 몸담고 있던 시절, CIA의 마약 거래 연루 사건을 파고든 책이다. 그래서 그가 나와는 인터뷰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전설의 스파이 대부는 구글을 애용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인터뷰 요청 이메일을 보내고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정중하게 인터뷰를 수락하는 답장이 왔다.
그래서 나는 지난해 만우절, 클래리지가 있는 미국 버지니아 북부의 한 은퇴자 주거단지를 찾았다. 붉은 색 운동복에 테니스 슈즈를 신은 그는 클럽하우스의 작은 원목 테이블 앞에 앉아 편안한 모습으로 나를 맞았다. 그곳에서 우리는 그의 마지막이 될 심층 인터뷰를 가졌다. 4시간이 넘게 이어진 인터뷰는 이탈리아식 수프와 레드와인을 마시며 정점을 이뤘고, 나는 그의 인생 스토리를 들을 수 있었다. 컬럼비아대학 교수로부터 CIA 채용 제의를 받고 네팔과 인도, 터키, 이탈리아 등지로 파견돼 일하며 비밀에 싸인 조직에서 어떻게 차근차근 사다리를 밟고 올라갔는지 들었다. 클래리지는 스파이 기술에 관해 어떤 공식 훈련도 받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대신, 모든 필요한 지식은 알렉산더 푸트의 저서 ‘스파이 편람’에서 얻었다. “실제 첩보활동에 필요한 모든 지식이 거기 들어있다”고 그는 말했다.
1960년대 초반 클래리지는 인도에서 마오쩌둥의 사상을 따랐던 마드라스의 작은 신문사 편집장에게 ‘베이징에서 온 메시지’를 전달하며 속였다고 말했다. “그를 조금씩 좌파 쪽으로 밀어서 인도 당국이 그를 주목하게 만들었다”고 클래리지는 말했다. 1965년 1월 인도 정부의 탄압이 시작됐고, 마드라스에 있는 많은 공산주의 사상가들이 구속됐다. 클래리지가 속인 편집장도 함께 구속됐다. “그 신문사 때문에 단속이 시작된 것으로 들었다”고 그는 말했다. “전형적인 작전 방식이다.”
약 20년이 지난 후, 클래리지는 니카라과 반정부 세력을 남반구 최대 반군 조직으로 바꾸는 일에 매달렸다. 이는 그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업적이 되기도 했다. 그가 손을 대기 전, 콘트라 반군은 아르헨티나 파시스트 군정부가 조직하고 훈련시킨 오합지졸 “강도” 무리에 지나지 않았다. 클래리지는 CIA 중남미 지국장으로 취임하자마자 반군을 이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공식적으로 콘트라 반군은 반미 좌파 산디니스타 혁명이 다른 중앙아메리카 국가로 전파되지 않도록 막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반군의 진짜 임무는 최대한 많은 공산주의자를 살해하는 것이라고 CIA 빌 케이시 국장에게 전해준 일을 클래리지는 애틋한 표정으로 회고했다. 거래를 좀 더 매력적으로 만들기 위해 “그 과정에서 많은 쿠바인도 죽게 될 것이라고 말해줬다.”
콘트라 반군은 적과 싸우는 것보다 비무장 민간인을 살해하고 자신의 잇속을 챙기는데 훨씬 능했기 때문에 CIA는 종종 방해공작 임무에 직접 개입해야 했다. 클래리지는 밤 늦게까지 사무실에 남아 CIA 요원이 개입한 작전 상황을 라디오 통신을 통해 실시간으로 전해 들었다. 니카라과 유일의 원유 하역장 코린토를 대상으로 한 CIA의 포함 공격도 그중 하나였다. 클래리지는 CIA가 하역장을 “사실상 전소시켰다”며 자랑스레 말했다.
어느 날 밤, 클래리지는 진을 마시고 시가를 피우다가 자신의 경력에서 가장 많은 논란을 일으킬 작전을 짰다. 니카라과 항구에 정박한 배를 기뢰로 공격하는 것이었다. 공격으로 러시아 화물선 1척이 침몰했고, 미 의회는 이 은밀한 전쟁에서 등을 돌리게 됐다. “제3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려 한다는 비난을 받았다”고 클래리지가 별 거 아니라는 듯 인정했다.
이란-콘트라 스캔들은 어떨까? 클래리지가 보기에 이는 언론이 괜히 나서 일을 키운 것에 불과하다. “헌법을 위반하거나 쓸데없이 호들갑을 떤 걸로 기소된 사람은 없다”고 그는 주장했다. “그런데 그들은 의회에 사실을 말하지 않거나 문서를 파기한 걸로 기소됐다.” 언론은 좌파 수녀와 몸을 섞는 민주당이 장악했으며, 레이건의 정책이라면 무조건 흠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됐다고 그는 주장했다.클래리지는 새너제이 머큐리 뉴스의 개리 웹 기자를 향한 멸시를 특히 감추지 못했다. 웹 기자는 1996년 CIA가 크랙 코카인을 의도치 않게 미주 도심 지역으로 전파하는 데 일조했다는 기사를 연속 보도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CIA 감찰관이 이 주장을 조사하러 나섰을 때 클래리지는 그가 몸 담았던 기관의 모든 질문에 대해 “엉터리”라며 답변을 거부했다. 웹 기자에 대한 나의 책이 최근 영화로 제작됐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클래리지는 CIA에 대한 할리우드의 비뚤어진 편견이 아주 놀랍다고 말했다. “마약 사건은 정말 날조된 헛소문”이라고 말한 그는 분을 참지 못했다. “사실도 아닌데 그 얘기를 영화로 다시 만들기까지 했더군!”
이후 함께 와인을 마시던 그는 갑자기 폭탄 발언을 했다. 적어도 내가 그 말을 믿길 바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레이건 선거팀이 이란 억류 미국인 인질 석방을 카터 대통령 임기가 종료될 때까지 막았다는 ‘10월의 깜짝쇼’ 음모론이 사실이라는 암시였다. 그는 베테랑 스파이로 활동했던 조지 케이브가 CIA 최고의 이란 전문가였다고 말하며, 케이브가 2013년 출간한 소설 ‘1980년 10월’을 언급했다. 소설에서는 이란 출신의 사업가가 테헤란에 억류된 인질을 석방시키려는 미국을 도우며 부를 축적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소설인데, 사실 소설이 아니다”라고 클래리지는 설명했다. 인질 석방 날짜를 정한 사람은 사실 이란-콘트라 중개상으로 악명 높은 마누처 고르바니파였다. 그런데 그가 인질 석방 시기를 두고 “라스베이거스에서 판돈이 아주 아주 큰 도박에 돈을 걸었다”고 클래리지는 설명했다. “케이브의 이야기는 진짜 있었던 일”이라고 그가 속삭였다. “소설 전체가 진짜다.” (고르바니파에게 사실을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케이브와는 최근 인터뷰를 가졌다. 그는 레이건 정부 관료들이 인질 석방 날짜를 일부러 뒤로 미룬 사실은 믿지 않지만, 이란 사업가에 관한 이야기는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고르바니파는 라스베이거스를 아주 좋아했다”고 케이브는 말했다. “그런 정보를 알고 있었다면 도박을 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클래리지가 CIA에서 은퇴하고 오랜 시간이 지났다. 최근 수년간,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사이 국경을 따라 그가 정보 네트워크를 두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기자에 대해 “평생 혐오감”을 품고 있긴 했지만, 그는 고객으로 뉴욕타임스를 받아들였다. 뉴욕타임스는 친(親) 알카에다 무장단체 하카니 네트워크가 억류 중이던 데이비드 로드 기자 석방을 위해 노력할 때도 그의 도움을 받았다. 클래리지는 미 육군 병사 보 버그달이 하카니에 생포됐을 때도 수 분 후 납치 사실을 알았다고 주장했다. 라디오 교신 내용을 근거로 추측했을 때 납치 당시 버그달은 마리화나에 완전히 취해 있었던 걸로 보인다. “버그달 사건에 관해서는 미 정부 관료보다 많이 알고 있다”고 클래리지는 자랑했다. “그가 납치된 사실을 가장 먼저 알게 된 백인도 바로 나다.”
녹음기를 끄기 전, 전직 스파이는 뭐라도 출간한다면 자신의 말이 인용된 부분을 먼저 보내 검토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나와의 인터뷰 전에 같은 약속을 했던 다른 기자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한다. “제대로 적은 게 하나도 없더라”고 클래리지는 말했다.
그에게 연락해 허락받을 일은 없었다. 괴팍한 전직 첩보원이 활동 기간 동안 기자와 만나거나 이야기를 나눈 일이 너무 없어서 내 책에 그에 대한 일화가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의 인터뷰에서 문장을 하나 뽑아야 한다면 이 말은 어떨까 싶다. 클래리지도 선뜻 허락을 해줬을 문장이다. “최악의 책은 죄다 기자가 썼다.”
- 니컬러스 스카우 뉴스위크 기자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당신이 좋아할 만한 기사
브랜드 미디어
브랜드 미디어
성산일출봉 근처 수상한 벽돌이 ‘둥둥’…20kg 마약이었다
세상을 올바르게,세상을 따뜻하게이데일리
이데일리
이데일리
김제동 근황 공개 “나 무시하냐” 발끈..왜?
대한민국 스포츠·연예의 살아있는 역사 일간스포츠일간스포츠
일간스포츠
일간스포츠
‘세관 마약 수사팀’ 임은정·백해룡 충돌한 이유(종합)
세상을 올바르게,세상을 따뜻하게이데일리
이데일리
이데일리
[오일 Drive]사모펀드부터 디지털 자산까지…대체투자 ‘거점’ 만드는 두바이
성공 투자의 동반자마켓인
마켓인
마켓인
[의료AI 다크호스]"업무 효율·수익 동시에 UP"…와이즈AI, 성장 날갯짓⑤
바이오 성공 투자, 1%를 위한 길라잡이팜이데일리
팜이데일리
팜이데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