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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광원의 CEO를 위한 생태학 산책(30) | 잡초는 왜 강할까?] 유연하면서 강인한 남다른 생존력

[서광원의 CEO를 위한 생태학 산책(30) | 잡초는 왜 강할까?] 유연하면서 강인한 남다른 생존력

갈대는 바람 불면 눕고 지나가면 일어서…바랭이는 마디에서도 뿌리 내려
강진만 갈대밭. 갈대는 속을 비우고 중간중간 마디를 만들어 가벼우면서도 강한 몸으로 진화했다.
바람이 분다. 여전히 뜨겁지만 선선한 바람이 많아지는 바람이다. 가을이 오고 있다는 신호다. 언제나 그렇듯 가을은 바람으로 시작한다. 바람 없는 가을을 상상할 수 있을까? 바람이 없다면 가을은 가을답지 않을 것이다. 강가와 들, 그리고 언덕에 무리 지어 서 있는 갈대와 억새에게도 선선해지는 바람은 중요한 신호다. 사람들에게 감탄을 자아내는 금빛 물결을 선사하기 위함이 아니다. 보슬보슬 피어 나는 꽃가루를 이 바람에 실어 보내야 하기에 그들은 이 선선한 바람을 반긴다. 바람이 흔들면 주저 없이 흔들리고, 너나 없이 흔들리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래야 꽃가루가 멀리 퍼져 나가면서 자신의 유전자를 후세에 남길 수 있을 터이니 말이다(갈대와 억새는 둘 다 볏과에 속한다. 그래서 모양이 아주 비슷한데 여러 다른 종이 있긴 하지만 물가에 있으면 갈대, 들판이나 산에 있으면 억새라고 봐도 무방하다).

파스칼은 왜 하필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을까? 왜 ‘굳건하게 서 있는 참나무’나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라고 하지 않았을까? 다른 풀과 나무들은 왜 제외시켰을까? 아무리 센 바람이 불어도 휘어질지언정 부러지지 않는 갈대를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리저리 흔들리고 휘둘릴 수 있지만 그럼에도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생각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고, 또 으레 그래야 할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약한 듯 보이지만 절대 약하지 않는 존재라는 뜻일 것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의 노인 산티아고를 통해 ‘인간은 파멸할지언정 패배하지는 않는다’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
 휘어질지언정 부러지지 않는 갈대
서양민들레는 봄에서 가을까지 거의 1년 내내 꽃을 피운다.
그건 그렇고 갈대는 어떻게 휘어질 수 있을까? 약해서일까? 아니다. 휘어지는 건 갈대가 만들어 낸 생존전략이다. 갈대는 이를 위해 속을 비웠다. 속을 텅 비웠기에 가볍고 그렇기에 구부러질 수 있다. 밀면 밀려 주고 흔들면 흔들려 줄 수 있다. 하라는 대로 다 하면서도 지나고 나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중심을 잡고 살아갈 수 있다. 속을 다 채울 필요가 없으니 그만큼 힘을 덜 써도 되고, 그 힘을 다른 성장에 투자하니 더 빨리 자랄 수 있다. 그래서 물가에 자리잡은 식물 중 가장 강하다. 숲이 그렇듯이 물가 생태계에서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구성원이 바뀌는 천이(遷移) 과정이 진행되는데 이 과정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녀석이 바로 갈대다. 물가 생태계의 최강자인 것이다.

그저 속만 비웠다면 그렇게 크게, 그리고 강하게 자랄 수 없을 것이다. 갈대는 더 크게 자라기 위해 중간중간 마디를 만든다. 이 마디가 지지대 역할을 해주기에 거친 물살이 들이닥쳐도, 태풍이 모든 걸 날려 버릴 듯 불어 닥쳐도 너끈하게 살아남는다. 속을 비우고 중간중간 마디를 만들어 가벼우면서도 강한 몸을 만들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마치 대나무처럼 말이다. 음식 재료로 많이 쓰는 파도 속을 비웠지만 마디를 만들지 않기에(또는 못하기에) 어느 정도만 꼿꼿이 자랄 수 있을 뿐 그 이상을 넘어서지는 못한다.

우리가 어린 시절 많이 들었던 갈대와 떡갈나무의 유명한 대화도 여기에 기반한 것이다. 파브르가 쓴 [식물기]에서 갈대는 떡 버티고 서 있는 떡갈나무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너처럼 바람을 무서워하지 않아. 아무리 바람이 세게 불어도 바람이 부는 대로 몸을 숙이면 되거든.” 갈대는 이렇듯 떡갈나무와는 완전히 다른, 그러니까 밀면 밀리는, 아니 밀려 주는 전략으로 강력한 삶을 만들어 냈다. 바람이 불면 부는 만큼 눕고 지나가면 일어선다. 위기가 오면 밀려주고 지나가면 다시 일어선다. 떡갈나무처럼 버티는 것만이 생존의 전부가 아니라는걸, 밀려주는 것도 탁월한 생존전략이라는 걸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갈대와 억새가 자신의 속을 비워 성공했다면 요즘 어딜 가나 볼 수 있는 서양민들레는 생태계의 비어 있는 곳을 찾아 거기서 힘을 기르는 순차적 전략으로 번성하고 있는 녀석이다. 어느 정도로 번성하고 있을까? 녀석들은 우리나라 전역을 거의 ‘접수’한 상태다. ‘서양’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녀석은 토종이 아닌데도 이 땅에 자리를 잡는 데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토종을 거의 밀어내기 직전이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토종 민들레는 우리나라 전역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토종은 들판에서나 볼 수 있게 된 반면, 서양민들레는 도시 지역에서 많이 볼 수 있었다. 녀석들이 토종을 교외로 밀어낸 걸까? 우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눈앞의 현실이 그렇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은 다르다. 토종을 들판으로 밀어낸 건 우리들이다. 우리가 도시 지역을 온통 건물과 아스팔트로 도배하는 바람에 토종에겐 황량하고 척박한 곳이 되어 살 수 없는 곳이 되었던 것이다. 서양 민들레는 이 틈을 노렸다. 토종 민들레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식물이 떠날 수밖에 없어 텅 비어 있다시피 한 곳을 전진기지로 삼은 것이다. 척박하기는 하지만 텃세(경쟁)가 없지 않은가. 낯설고 물 설은 땅에 뿌리를 내려야 할 외래식물에게 이런 곳은 적응력을 기르기에 괜찮은 곳이었다. 마치 삼국지의 제갈공명이 ‘천하 삼분지계(三分之計)’를 들고 이미 굳건하게 자리를 잡은 조조와 손권을 피해 자리를 잡았던, 당시로서는 변방이었던 중국의 남서 지역처럼 말이다. 제갈공명이 그곳으로 가 촉(蜀)을 세우고 힘을 길러 천하통일을 도모했던 것처럼 서양민들레도 그렇게 했다. 일단 도시 지역에서 힘을 기른 후 적극적으로 세력 확대를 시작했다. 이 전략이 제대로 들어 맞았던 건 토종이 갖지 못한 여러 장점을 가졌기 때문이다.

토종은 봄에만 꽃을 피우지만 서양민들레는 봄에서 가을까지 거의 1년 내내 꽃을 피운다. 당연히 토종에 비해 엄청난 씨앗을 생산할 수 있다. 토종은 꽃이 작고 씨앗 수도 적지만 서양민들레는 꽃이 커서 벌과 나비를 쉽게 불러 들일 수 있는 데다 작고 가벼운 씨앗을 만들기에 훨씬 멀리까지 확산시킬 수 있다. 만의 하나, 꽃가루받이를 못하면 자가수분까지 한다. 자가 수분이란 동물로 치면 수컷 없이 암컷 홀로 후세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니 낯설고 척박한 땅에서도 충분히 자랄 수 있고 씨앗을 퍼뜨릴 수 있다.

이런 상황은 이웃 일본에서도 비슷한데, 이에 대해 식물학자 이나가키 히데히로는 [풀들의 전략]이라는 책에서 서양민들레는 여기에 더 강력한 전략 하나를 더해 거의 ‘천하통일’을 이루는 시점에 도달했다는 비보를 전한다. 더 강력한 전략이란 서양민들레가 자신의 꽃가루를 토종의 암술에 붙여 꽃가루받이를 하는 것이다. 꽃가루받이란 식물의 짝짓기를 말하는 건데, 가까운 사이이니 그럴 수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서양민들레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엄청난 씨앗을 만들기에 이렇게 생겨난 잡종 1세대에 또 자신의 꽃가루를 붙일 가능성이 크다. 다음 2세대에도 또 그럴 수 있다. 이런 과정을 계속하면 어떻게 될까? 토종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이런 상황이 지금 서양민들레와 토종 사이에 벌어지고 있다. 아니 상황은 거의 끝났다고 할 수 있다. 서양민들레가 들어오기 전 오랜 시간 동아시아에 뿌리를 내려온 민들레가 멸종 직전인 것이다. 자연은 오랜 시간 살아왔다고 봐주는 법이 없다. 지금 어떤 생명력을 가졌느냐를 기준으로 판단한다. 흔히 말하는 자연선택이다.
 토종 민들레 압도하는 서양민들레 번식력
바랭이는 퍼져 나간 새로운 마디와 뿌리가 스스로 물과 양분을 조달할 수 있다.
살아있다는 건 이렇듯 자기만의 자리, 자기만의 강점과 전략으로 더 나은 삶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모든 생명체에 적용되는 생존의 원리다. 우리는 갈대나 억새, 그리고 민들레 같은 들풀을 잡초라고 부르고,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기에 그들의 삶 또한 그렇겠거니 생각하지만, 번성하는 생명체들이 그렇듯 이들 잡초들 또한 차별적인 생존력을 개발했기에 살아있는 것이고 더 강력한 생존력을 만들어 냈기에 번성하는 것이다.

잡초는 왜 강할까? 잡초는 살아가는 힘을 스스로 만들어 내야 한다. 어느 누구의 도움도 없이 싹을 틔우고 잎을 내고 꽃을 피워야 한다. 길가의 수많은 잡초를 들여다 보면 아무리 크기가 작아도 꽃과 열매를 맺는 편이다. 맨 눈으로는 보기 어려울 정도로 크기가 작은 잡초들도 정말이지 티끌 만한 꽃을 피운다.

꽃은 우리들이 보기에 좋을 뿐, 만드는 당사자에게는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아기를 낳는 것과 같은 그런 복잡다단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많은 에너지를 투자해 꽃을 피워야 하고, 괜찮은 짝을 만나야 하며, 수정을 해야 하고, 열매를 맺어야 한다. 이뿐인가. 이런 열매를 효과적으로 퍼뜨리는 방법까지 개발해야 한다. 불편하고 힘들고 번거롭기 짝이 없는 과정이다. 하지만 이렇게 한다. 자신의 유전자를 그대로 복제하는 것보다 다양한 유전자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유전자는 변하는 환경에 적응력을 높여주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생존전략은 또 어떤가. 이름이 낯설어서 그렇지 알아볼 수만 있다면 어디서건 볼 수 있을 정도로 생명력이 좋은 바랭이가 대표적이다. 이 들풀은 도심이건 들이건 밭이건 가리지 않고 번성하는 탓에 특히 밭일을 하는 농부들에겐 소중한 노동력을 빼앗아 가는 장본인이다. 정말이지 뽑아도 뽑아도 다시 생겨나니 엄청난 골치거리다. 우리나라 농부에게만 그런 게 아니다. 세계 농부들에게 그러니 세계적으로 악명이 자자한 골치거리다. 그 정도로 생존력이 좋다.

이번 여름, 집의 베란다 창문 틀에 쌓인 눈곱 만한 흙에 녀석이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뻗어가기에 안 됐다 싶기도 하고 마치 빈 화분이 있어 살그머니 뽑아 옮겨준 적이 있다. 조심스럽게 뽑았는데도 뿌리가 반쯤 뜯겨서 그런지 다음날 보니 축 늘어져 있는 게 아닌가(올 여름이 오죽 더웠는가).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라도 살게 내버려 둘 걸, 괜히 옮겨주었구나 싶었다. 그렇게 잊어버리고 있다가 며칠 후 다시 보니 세상에, 시퍼렇게 살아 꼿꼿하게 서 있는 게 아닌가? 도대체 이런 힘은 어디서 나올까?
 뽑아도 뽑아도 다시 나는 바랭이의 강인한 생명력
바랭이가 가진 힘의 원천은 뿌리에 있다. 앞에서 언급한 식물학자 이나가키 히데히로에 따르면 보통 식물은 두 가지 성장 모양 중 하나를 선택한다. 옆으로 퍼져 나가는 형태가 있고, 위로 솟아오르는 형태가 그것이다. 둘 다 햇빛을 더 받기 위한 것인데 바랭이는 흔치 않게 둘 다 사용한다. 양손잡이처럼 말이다. 독특한 건 이 녀석도 갈대처럼 마디를 발명했는데 갈대보다 훨씬 첨단이다. 옆으로 퍼질 때 녀석들은 이 마디에서 뿌리를 내린다. 뿌리를 내릴 수 있으니 원 뿌리에서 물과 양분을 조달하지 않고 ‘현지 조달’ 할 수 있다. 당연히 병참 같은 지원 시스템이 필요하지 않고, 여기에 들어가는 에너지를 아낄 수 있다. 또 원 뿌리가 뽑히거나 안 좋은 일을 당하더라도 중앙집중식이 아닌 분권제라 영향을 받지 않는다. 퍼져 나간 새로운 마디와 뿌리가 스스로 물과 양분을 조달할 수 있기에 독립적으로 멀쩡하게 살아남을 수 있다.

위로 솟아 오르는 형태일 때는, 갈대나 대나무의 마디처럼 지지대 역할을 하며 솟아오르는 줄기를 받쳐 준다. 이 마디 역시 무슨 일이 생겨 비상상황이 되면 그 마디에서 뿌리를 내린다. 덕분에 마디 하나만 살아남아도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물론 마디를 만드느라 자라는 속도가 늦어지긴 하지만 그럼에도 이 방식을 유지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그동안 수많은 일을 겪어 오다 보니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세상에서는 빨리 자라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걸 터득한 것이다. 조금 늦어도 언제든 새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갖추는 게 더 빠른 길이라는 걸 말이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이렇듯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스스로 개발한 자신만의 차별화된 전략으로 살아있다. 이것이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법인 까닭이다. 보기엔 멋있을지 몰라도 살아가기엔 너무나 치열한 들판에 부는, 가을로 가는 바람이 만드는 기분 좋은 흔들림은 뜨거운 여름을 견뎌냈다는 증거이자, 이제 한 해를 마무리해야 할 때가 왔다는 신호다. 흔들림을 느낀다는 건 살아있다는 것, 죽은 것들은 이 생명의 맥박을 느낄 수 없다. 그래서 프랑스의 시인 폴 발레리는 일찌감치 그의 시 ‘해변의 묘지’에서 이렇게 읊었을 것이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세찬 바람은…’



※ 필자는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 소장이다. 조직과 리더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한 콘텐트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사장으로 산다는 것] [사장의 길] [사자도 굶어 죽는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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