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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낮추고 권력 경계한 ‘국제무역 대부’ 역관 김근행 [김준태 조선의 부자들 (22)]

수입상·중개무역상 병행했던 역관(譯官)
국제 무역·외교에서 군수물자까지 관여
“권세가 일 돕되 권력 탐하지 말라” 명심

 
 
재일 역사학자 신기수씨가 오사카역사박물관에 기증한 ‘정덕도조선통신사행렬도’. 1711년 조선통신사 일행을 그린 그림이다. [사진 오사카역사박물관]
 
조선시대 역관(譯官) 중에는 부자가 많았다. 외국을 오가며 수입상, 중개무역상 노릇도 병행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대규모 국제 무역을 주도하며 거부(巨富)의 반열에 오른 사람도 있었는데, 오늘 소개할 김근행(金謹行, 1610~생몰연대 미상)도 여기에 해당한다.  
 
인조에서 현종 대에 이르기까지 대일 외교의 최일선에서 활동한 김근행은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한 공로로 호성원종공신 1등에 봉해진 역관 김득기의 아들이다. 고모는 선조의 후궁 순빈 김씨로, 비록 중인 계급이기는 하나 무시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집안이었다.  
 
김근행은 인조 5년인 1627년, 왜학(일본어) 역관 취재시험에 합격하여 조정에서 대마도주에게 파견하는 공식 외교사절인 문위행(問慰行)의 통역관이 되었다. 이후 대마도와 일본으로 가는 외교사절의 통역을 전담하다시피 하였고, 1663년에는 직접 문위행에 임명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탁월한 능력과 세심한 업무 처리로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덕분에 그는 정2품 자헌대부 지중추부사에까지 오른다.  
 
그렇다면 김근행은 어떻게 그처럼 많은 재산을 모을 수 있었을까? 그는 본인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돈을 번 케이스가 아니다. 워낙 실력이 좋고 인품도 훌륭하다 보니, 김근행은 자연스레 일본의 실력자들과 친분을 맺었다. 특히 대마도주와 교분이 두터웠는데, 대마도주의 처지에서도 매번 바뀌는 사신보다는 그때마다 통역으로 함께 온 김근행이 친근했고 믿음직스러웠을 것이다. 김근행은 이 신뢰 관계를 활용해 1666년(현종 6) 대마도주가 조선에 파견하는 사신의 횟수를 줄이는 성과를 낳기도 했다.  
 
대마도에서 사신이 오면 조선 조정에서는 이들을 대접하고 막대한 답례품을 하사해야 하므로 재정적인 부담이 컸다(반대로 대마도로서는 사신을 자주 보낼수록 유리했다). 상국의 입장에서 먼저 줄이라고 말하기도 체면이 깎이는 상황에서, 김근행이 이 난제를 해결한 것이다.  
 
또한, 김근행은 대마도와 일본에 구축한 자신의 인맥을 활용하여 조선 조정의 어려움을 해결했다. 당시 국방력 강화를 추진하던 조선은 화약 제조의 필수 재료인 유황 수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렇다고 유황이 풍부한 일본에서 대놓고 수입했다가는 청나라로부터 문책 받게 된다.  
 
고려말과 조선시대 역관을 다룬 도서 〈조선 최대 갑부 역관〉의 삽화. [사진 김영사]

저품질·저렴한 의복 입어 세간 시선 방어 처세 관리

 
이에 좌의정 원두표, 훈련대장 이완, 한성부우윤 유혁연 등 군부의 책임자들이 김근행에게 상의했고, 김근행은 밀수의 형태로 유황을 사들여왔다. 비변사등록 효종 7년 3월 26일자 기사를 보면, 김근행이 유황 1만 5천 근을 수입해왔는데 종전에 나라에서 구매한 것보다 3분의 1이나 싼 가격이었다고 한다. 이 외에도 김근행은 유황 4만 근의 반입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고, 조총, 장검, 화약 등 무기 수입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런데 이 정도 규모의 유황과 무기를 비밀리에 반입하려면 그것을 감출 수 있을 정도의 다른 물품이 필요했다. 일본으로부터 은·구리·흑각·후추 등을 수입하고, 일본에 쌀·공목(公木·무명)·비단·인삼을 수출하는 무역선에 위장해 실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 김근행은 자연스레 대일무역에 개입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막대한 재산을 축적한 것이다. 일본과 거래하고 싶은 조선 잠상이나 조선과 거래하고 싶은 일본 잠상을 연계하며 받은 수수료도 적지 않았다. 더욱이 나랏일을 하는 것이니 당연히 조선 조정의 비호를 받을 수밖에 없었고, 대마도주를 비롯한 일본의 실력자들로부터도 후원받았으니 그의 국제 무역은 거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역관은 어디까지나 약자다. 아무리 김근행이 공신의 아들이요 순빈 김씨의 조카라 하더라도, 아무리 그가 나랏일에 공을 세웠다고 하더라도 양반 관료들이 천시했던 중인 역관에 불과하다. 권력자가 마음만 먹으면 그의 재산쯤은 언제든 가로채어 갈 수 있고, 목숨까지 앗아갈 수도 있다. 김근행의 인품이 훌륭하고 인간관계가 두루 원만한 것만으로는 소용없다. 실제로 그가 중인 주제에 정2품 품계를 받고, 엄청난 재산을 가졌다며 질시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로 인해 김근행은 여러 번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따라서 김근행은 처세에 각별하게 신경 썼다. 당상관이었지만 질이 낮은 관자(貫子)와 갓을 착용하였고, 관복이나 의복도 값싼 재질로 만들어 입었다. 사용하는 용품들도 모두 평범한 것이었는데,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묻자 이렇게 말한다. “내가 사용하는 물건이 화려하고 아름다우면 양반 귀족들이 탐낼 것이다. 내가 이것을 주지 않으면 인심을 잃게 될 것이고, 심하면 강제로 빼앗기거나 도둑맞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골고루 나눠줄 수도 없지 않은가? 대저 사치와 자랑은 화를 부르는 법이다.” 김근행은 자손들에게도 결단코 사치하지 말고, 물건을 자랑하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경북 문경새재 도립공원 안에 광화문이 바라보이는 육조거리를 재현한 촬영세트장. 육조거리는 조선시대 이ㆍ호ㆍ예ㆍ병ㆍ형ㆍ공조의 육조 관청들이 있던 길이어서 붙은 이름이다. [중앙포토]

권력에 탐하지 않고 줄 안 서니 풍파에 휘말리지 않아

 
조선 후기의 학자 심재가 지은 ‘송천필담(松泉筆譚)’에도 관련 일화가 등장한다. 후배 역관이 처세에 대한 가르침을 청하자, 김근행은 “역관은 직무상 필연적으로 높은 분을 모실 수밖에 없네. 하지만 틀림없이 망할 것 같은 가문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게. 잘못하면 큰 재앙을 입고 말 걸세.”라고 하였다. 후배 역관이 ‘망할 것 같은 가문’은 어찌 구별할 수 있는지를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집 앞에 수레와 말이 법석대는 자, 무뢰배 건달이나 이득을 챙기려는 무리를 모아다가 일의 향방을 따지고 이문을 취하려는 자, 점쟁이나 잡술가를 청해다가 공적인 일이건 사적인 일이건 길흉을 묻는 자, 거짓으로 말과 행동을 꾸며 선비인 체하는 자, 아침의 말과 낮의 행동이 다른 자, 으슥한 길에서 서로 작당하는 자, 항상 윗자리에 있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자는 반드시 망하고 말걸세.”  
 
역관은 통역관일 뿐 아니라 무역 상인이고, 나라 밖의 최신 정보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인물이다. 중국 조정의 사정을 알고 싶다든가, 중국이나 일본에서만 구할 수 있는 물품을 사고 싶다든가 하는 이유로 권세가들이 역관을 찾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역관으로서도 권세가의 후원을 받아야 활동이 쉬워지기 때문에, 이래저래 이들을 잘 모실 수밖에 없다. 하지만 권세가가 몰락하면 그를 따르던 역관 역시 재앙을 입는다.  
 
실제로 인조 후반기 최고 권신이었던 김자점이 실각할 때 측근이었던 역관 이형장이 참형을 당했다. 그래서 김근행은 권력을 탐하고, 탐욕스럽고, 거짓되게 행동하고, 음모를 꾸미길 좋아하는 사람은 반드시 몰락하고 말 것이니, 이런 사람의 근처에는 가지도 말라고 경계한 것이다.  
 
또한, 김근행은 “다른 사람이 자네는 누구의 사람이라고 말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네.”라고 간곡히 당부했다. 권세가들의 일을 도와주더라도 특정인의 줄에 서지 말라는 것이다. 내가 누구 라인이다, 누구 파벌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게 되면, 정적들이 보스를 공격할 때, 가장 약한 고리인 나부터 과녁으로 삼는 법이니 말이다. 요컨대 김근행은 자신을 한껏 낮추고 조심한 덕분에 재산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었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김준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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