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주류로 치부하기엔 너무 아까운 서브컬처의 경제적 가치 [스페셜리스트 뷰]
삼성·롯데 등 대기업도 주목…“서브컬처 마니아 절대다수, 평범한 경제인”
“말초적인 서브컬처, 성 상품화 오해 풀어야…구변의 달걀 일화 새겨야”
[문현웅 스타라이크 최고전략책임자] 지난 8월 24일 오전, 한낮 온도가 33도에 달하는 불볕더위에도 불구하고 건축연면적 1만1019㎡(약 3333평), 대지면적 3만3678㎡(약 1만187평)에 달하는 서울 강남구 서울무역전시컨벤션센터(SETEC)는 몰려든 인파로 가득했다. 모두가 국내 최대 종합 서브컬처 행사 ‘일러스타 페스’를 방문한 서브컬처 팬덤이었다.
이틀에 걸친 행사 동안 SETEC을 찾은 유료 관람객은 2만여명에 달했다. 군중 밀집으로 인한 사고 방지를 위해 1㎡ 내에 5명 이상이 들어차지 않도록 티켓 판매량과 동시 입장 인원을 조절했음에도, 관람객 상당수는 발길을 돌리지 않고서 2km 가까이 늘어선 대기 줄에 합류해 추가 표 판매가 시작되길 기다렸다.
이날 SETEC 내부에는 만화·애니메이션·게임에 나오는 캐릭터 의상을 따라 만들어 입고 온 코스튬 플레이어(Costume player), 통칭 ‘코스어’가 가득했다. 장내 어디로 눈을 돌리더라도 코스어가 최소 서넛은 시야에 들어올 정도였다. 기업 부스에서 데려온 ‘프로 코스어’는 극소수였다. 대부분은 개인이 취미 차원에서 의상을 직접 만들거나 구매한 일반인이었다.
5회째를 맞이한 ‘일러스타 페스’엔 국경 너머에서 찾아온 손님도 부쩍 늘었다. 외국인 크리에이터들은 낯선 한국 땅에서의 이동을 돕기 위해 주최 측이 마련한 45인승 우등버스를 타고 행사장에 발을 들였다. 게임 체험 부스엔 언어 설정을 영어나 일본어로 바꿔 두고 패드를 잡는 관람객이 많았다. 행사장 한켠 사무실에서 통역을 대동해 일본인 뮤지션과 인터뷰하는 기자도 있었다.
이번 일러스타 페스에는 1000여 개 부스 규모로 참가한 개인 창작자들이 직접 제작한 서브컬처풍 그림이나 물건 등을 판매했다. 인기가 좋은 곳은 행사 첫날 오후부터 일부 상품에 ‘매진’ 팻말을 내걸기 시작했다. 일러스타 페스 주최 측 관계자는 “서브컬처 마니아 절대다수는 생업이 있는 평범한 경제인이다”며 “서브컬처 애호가는 다른 부문보다는 자신의 취미 영역인 게임·만화·애니메이션 등이나 이와 연관된 상품에 지출이 관대한 편이기에, 평소엔 사회인으로서 착실히 일하다가도 서브컬처 행사를 방문하면 취향을 발산하며 좋아하는 캐릭터나 관련 제품을 마음껏 소비하는 것”이라 했다.
급성장하는 ‘서브컬처’ 시장
서브컬처(Subculture)란 사전적으론 ‘비주류 문화’나 ‘하위문화’를 가리킨다. 순수 문학·고전 미술·클래식 음악 등 전통이 깊거나 고급으로 인정받는 문화인 ‘하이 컬처’(High Culture)와는 대척점에 있다. 한국에서 최근 회자되는 서브컬처 개념은 사전적 의미보다 한층 더 좁아서, 대개는 미소녀·미소년이나 그에 준하는 매력을 갖춘 캐릭터를 앞세운 콘텐츠를 특정해 말한다. 상당수는 만화·애니메이션·피규어·웹소설·웹툰·게임 등의 형태다.
서브컬처가 지향하는 미의식은 하이 컬처에 비해선 말초적(末梢的)이다. 정신과 영혼 차원에서 지고한 가치를 추구하는 하이 컬처나 순수 예술과는 달리, 대중의 욕구와 취향에 적극적으로 영합한다. 그렇기에 잠재 고객의 소비 패턴이나 유행을 예민하게 감지해 그에 맞춰 발 빠르게 변화하는 경향이 짙다. ‘보편적 욕망’과 쉽사리 결합하는 만큼 각계각층의 소비문화와 원활히 어우러져 매출을 촉진하는 특성 또한 매우 강하다.
용어에서 풍기는 뉘앙스와는 달리 ‘대중 영합’이 경제적 측면에선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서브컬처의 강력한 대중 영합성은, 그들이 제도권의 인정과 후원을 거의 받지 못하는 때에도 생명을 끈덕지게 이어 가는, 그리고 선입견을 넘어 본연의 가치를 인정받는 때 힘차게 날개를 펼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이를테면 1970년대쯤엔 ‘뽕짝’이라 불리는 하위문화였던 트로트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대중과 함께하며 명맥을 유지한 끝에 21세기 들어선 오히려 웬만한 음악 장르를 압도하는 전성기를 맞을 수 있었다. 세기말까지만 해도 서브컬처 중에서도 서브 문화로 치부됐던 만화 또한 험악한 시절을 버텨온 기반은 결국엔 특유의 ‘인기’와 ‘상업성’이었다. 그토록 힘겹게 숨결을 이어오던 만화는 이제 K-컬처를 글로벌 무대에 알리는 선봉장으로 활약하는 동시에, 민족의 미래를 담보할 먹거리 산업 중 하나로도 당당히 꼽히는 판국이다.
실제로 ‘충성 팬덤이 유발하는 구매력’에 기반한 국내 서브컬처 시장의 성장세는 경이롭다 못해 눈이 부실 정도다. 삼정KPMG가 지난해 10월 발표한 보고서 ‘엔터테인먼트·미디어 산업의 미래를 향한 콘텐츠 다양화 전략’에 따르면 국내 매출 상위 10위 내에서 서브컬처 게임이 차지하는 비중은 2020년 10%에서 2022년 30%로 대폭 증가했다. 또한 2022년 11월 첫걸음을 뗀 시프트업의 서브컬처 스타일 게임 ‘승리의 여신: 니케’는 지난 2월 누적 매출 1조원을 돌파했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인 2004년, 이동통신 3사(SKT·KT·LGU+)가 앱 다운로드 수를 기반으로 국내 모바일 게임 시장 규모 ‘전체’를 추산했던 결괏값이 불과 2747억원이었다.
만화 역시 ‘서브컬처풍’이 본격 도래하기 이전 시대와 지금은 체급 차이가 비교를 불허하는 수준이다. 가령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지난 2011년 발표한 ‘만화산업백서’에 따르면, 2005년 기준으로 국내 만화 산업 매출액은 약 4362억원에 불과했다. 그러나 ‘웹툰’이 2000년대 초부터 급부상하며 만화 시장의 지형과 판도는 완벽하게 변모했다.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가 지난 1월 발표한 ‘만화·웹툰 산업 발전 방향’에 따르면 국내 만화·웹툰 산업 시장 규모는 2022년 기준으로 2조6240억원에 달했다. 무려 6배 가까운 차이다.
서브컬처 애호가와 이들을 마케팅 타깃으로 하는 기업이 한데 모이는 행사도 성황이다. ‘일러스타 페스’는 최근 한 해 누적된 유료 참가자 수가 20만을 훌쩍 넘어선다. 일러스타 페스의 시장성을 직접 평가한 자료는 없지만, 성격과 규모가 비슷한 행사에 빗대 추산할 수는 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2019년 발표한 ‘글로벌마켓 리포트 코믹콘’ 보고서를 보면, 미국 종합 서브컬처 행사인 샌디에이고 코믹콘(SDCC)엔 매년 13만명 이상이 참석해 8470만달러(약 1170억원)를 소비했다. 여기서 발생한 세금 수입만 헤아려도 310만달러(약 42억8000만원)나 된다. 국가별 시장 규모나 물가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일러스타 페스’의 경제성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수준일 것이다.
최근엔 서브컬처와는 전혀 무관했던 상품마저도 ‘콜라보’를 통해 시너지 효과를 얻고 있다. 이를테면 GS리테일이 운영하는 편의점 GS25가 지난 5월 넥슨의 서브컬처풍 모바일 게임 ‘블루 아카이브’와 협업해 출시한 빵은 출시 47일 만에 200만개 넘게 팔려 나갔다.
맛이나 성분이 다른 상품과 차별화될 정도로 특별했던 것은 아니다. 그저 블루 아카이브 캐릭터 디자인을 포장재와 동봉한 스티커에 반영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구매할 이유’를 충족한 서브컬처 팬덤은 GS25 편의점마다 줄을 서며 폭발적인 매출을 이끌어냈다. 커피브랜드 메가MGC커피가 지난 8월 서브컬처풍 게임인 ‘원신’과 손잡고 내놓은 상품 또한 15일 만에 총 누적 판매량 60만 개를 돌파하는 기록을 세웠다.
서브컬처를 둘러싼 오해와 진실
그럼에도 서브컬처를 바라보는 세간의 주된 인식은 여전히 ‘돈 안 되는 애들 놀이’에 그쳐 있다. 서브컬처 향유층 대부분은 경제활동과는 거리가 먼 미성년자 내지 한정치산자 집단이고, 그렇기에 기껏 손을 잡아 본들 유의미한 수준의 매출 효과는 기대하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서브컬처가 현실 시장에 ‘경제 효과’를 대규모로 촉발하는 캐시카우가 된 현시점엔 당연히 불식이 필요한 오해와 편견이다. 그러나 대중 다수가 서브컬처를 그렇게 여기게 된 현실에도 분명한 당위는 존재한다. 서브컬처가 이름자 그대로 서브(Sub-, 아래 혹은 밑)에 머물렀던 짧지 않은 세월 동안, 드물게나마 언론에 노출되는 계기는 히키코모리(引き籠もり)라고도 불리는 ‘은둔형 외톨이’와 그들이 빚어내는 사회 문제로 인한 것이 태반이었다. 정상적인 근로 활동은커녕 타자와의 사회적 교류마저 거부한 채 오로지 만화·애니메이션·2차원 캐릭터·피규어·웹소설·웹툰·게임 등에만 탐닉한 청년을 조망하는 기사는 그리 낯설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은둔형 외톨이는 서브컬처 마니아 중에서도 극소수일 따름이었으나, 서브컬처를 잘 알지 못하는 데다 일말의 관심조차 없는 사람들로선 굳이 그러한 팩트를 따져 가며 호의를 품어줄 까닭은 달리 없었다.
‘서브’와 ‘인디’, 혹은 ‘음지’를 모호하게 구분하는 풍조도 서브컬처의 경제성과 생산성 저평가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이들은 ‘주류’(Major)가 아니라는 공통점 때문에 종종 비슷한 개념으로 오인당하지만, 세부적으로 뜯어보면 내포한 의미가 아예 다를 정도로 차이가 크다. 우선 인디 음악·게임 등 콘텐츠 업계에서 ‘인디’가 붙은 것은 거대 자본의 지원이나 영향을 받지 않는 창작물을 의미한다. ‘인디’의 어원인 ‘독립된’(independent)에 충실한 셈이다.
반면 서브컬처는 말 그대로 ‘하위’ 내지 ‘비주류’를 뜻할 뿐 용어에 자본과의 관계를 암시하는 바가 전혀 없다. ‘불법’을 암시하는 ‘음지’와도 전혀 무관한 것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주류가 아니다=인디 or 음지’라는 흔한 오해 때문에, 서브컬처 창작자나 소비자는 거대 자본이나 일상 세계와 융합할 수 없고 또한 이를 적극 거부하는, 경제 활동이나 현실과 동떨어진 존재로 오인당하는 경우가 잦은 것이다.
그러나 통념과는 달리 서브컬처 시장 내 구성원들의 구매력은 결코 가벼이 볼 수준이 아니다. 이를테면 지난 2월 경기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린 종합 서브컬처 행사인 ‘제3회 일러스타 페스’에선 ‘선행 입장권’(오전 8시 입장)보다 고작 1시간 일찍 들어갈 수 있는 특별 입장권을 무려 49만8000원에 판매했는데, 예매 단계에서 준비해 둔 10장 모두가 팔려 나가 주최 측을 놀라게 했다. 당시 주최 측 관계자는 “선행 입장권은 1만2000원에 불과했던 만큼 40배 넘게 비싼 특별 입장권이 팔릴 것이라 기대하진 않았는데 순식간에 매진되는 바람에 당황했다”며 “서브컬처 마니아들이 ‘진심인 취미’에는 얼마든 지갑을 열 수 있음을 잘 보여준 사례”라고 했다.
또한 일러스타 페스 내에서 벌어진 경매에선 캐릭터 이미지를 인간 신체와 1대 1로 비례하도록 키워 패널에 인쇄한 ‘등신대’가 30만원에 거래된 기록도 있다. 그나마도 경매가 과열될 기미를 보이자 주최 측에서 제지해 이 정도 가격에서 그친 것이라 한다. 일반적인 인물 및 캐릭터 등신대 판매가는 제작 주문할 경우 5만~10만원 안팎이다.
비단 일러스타 페스 무대가 아니라 하더라도 ‘마니아’들은 좋아하는 서브컬처 관련 상품에 돈을 아끼는 법이 없다. 이를테면 국내 고급 피규어 제작사 ‘JND스튜디오’가 내놓았던 295만원짜리 ‘할리퀸 피규어’는 스토어 오픈과 동시에 준비된 수량이 모두 팔려 나갔다. 발매 당일엔 국내에서만도 JND스튜디오 홈페이지에 8000명이 동시에 몰리며 서버가 다운됐다 한다.
정부 역시 국내 서브컬처 시장의 소비력과 경제적 가치를 이미 인정하고 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은 피규어·애니메이션 굿즈 수집 등을 포함한 국내 키덜트(어린이 감성을 추구하는 어른) 시장 규모가 2021년에 이미 1조6000억원대에 도달했으며 향후 최대 11조원까지 성장할 것으로 내다봤다. 실제로도 2014년엔 5000억원에 불과했던 키덜트 시장이 7년 만에 3배 넘게 성장한 만큼, 그 추정 수준이 턱없이 무리하거나 과장됐다고 말하긴 어려울 것이다.
서브컬처의 성장을 위한 과제
물론 서브컬처의 현재와 미래가 돌부리 하나 없는 장밋빛 일색인 것만은 아니다. 오랜 번영과 도약을 위해 극복해야 할 난관 또한 엄연히 존재한다. 무엇보다도 가장 거대한 벽은 ‘성 상품화 이슈’다.
대중의 욕망과 취향에 적극 영합하는 말초적 콘텐츠라는 것은, 결국엔 인간의 기본 욕구에 순응하는 방향으로 제작되기 쉬움을 암시한다. 실제로 서브컬처 관련 콘텐츠에선 캐릭터의 복장이나 노출도 등을 둘러싼 선정성 논란이 잦은 편이다. 사실 흔한 오해와는 달리 ‘여성 성 상품화’만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노출이나 성애를 직접 묘사한 BL(Boys Love) 작품은 물론 소아 남성 캐릭터를 성애 대상으로 바라보는 ‘쇼타콘’ 성향 또한 지탄을 받기는 매한가지였다.
서브컬처를 둘러싼 성 상품화 논란에서 특히 난감한 것은, 일각에서 벌어진 초월적 사례가 업계 전체를 대변하거나 이미지를 표상하는 경향이 짙다는 것이다. 가령 아이돌 그룹 하나가 무대에서 다소 선정적인 안무와 퍼포먼스를 선보인 결과 K-팝(Pop) 전체를 성 상품화라 치부한다면, 대다수는 억측이 지나치다는 반응을 내비칠 것이다. 혹은 특정 영화에서 과도한 성애 묘사가 나왔다고 해서 시네필 전체를 엽색가로 몰아붙인다면 동조하거나 납득할 사람이 드물 것이다. 서브컬처도 마찬가지다. 제작자와 소비자 절대다수는 엄연히 실정법을 준수하며 일탈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서브컬처에선 드문 예외가 업계 전체의 지향과 행각으로 호도되는 상황이 유달리 흔하다.
이러한 상황이 벌어지는 근원은 사실 명쾌하다. 판단을 내리는 대다수가 서브컬처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알지 못하는 영역에 관해 판단을 내리려면 그나마 드러나 눈에 보이는 일각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성 상품화로 논란을 빚는 과격한 일부’에 의존해 ‘서브컬처 업계 전체’를 극단적인 엽색으로 판단하는 전개는 오히려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몇몇 소수 때문에 서브컬처 산업군 전체를 오해하고선 버리거나 외면하는 것은 경제적인 손해가 지나치게 막심하다. 지난 2023년 12월 산업연구원이 발표한 ‘콘텐츠산업에서의 서브컬처 트렌드 및 시사점’에 따르면, 2022년 한국의 글로벌 콘텐츠 수출액은 124억 5290만달러(약 16조6284억원)로 전 세계 국가 중 7위에 달했다. 또한 2021년 6687억엔(약 6조1178억원)이었던 일본의 오타쿠(한 분야에 열중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며, 이 자료에서는 ‘서브컬처 애호가’를 지칭하는 용도로 사용됨) 시장 규모는 2022년엔 7164억엔(약 6조5542억원)으로 늘어났다. 게다가 2019년 기준으로 3억9000만명에 달했던 중국 내 서브컬처 이용자 수는 2022년엔 4억명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됐다. 앞서 언급했듯 국내에서의 서브컬처 시장 팽창과 성장세는 이미 경이로운 수준이며, 국경 넘어 세계에서도 한국의 서브컬처 지식재산권(IP)은 눈부시게 활약하고 있는 데다, 우리의 무대가 될 글로벌 시장은 나날이 넓어지는 추세인 것이다. 경제·산업적 관점에서 판단하자면 이만큼 유망한 시장도 드물다.
공자 후손들의 언행을 모은 ‘공총자’(孔叢子)에 소개된 이런 일화가 있다.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가 위(衛)나라 군주인 신공에게 ”장수가 될 만한 재목”이라며 구변(苟變)을 천거했다. 위신공이 말하기를 “나도 그가 장수의 재목이 되는 것은 알고 있으나, 그가 일찍이 아전으로 있을 적 남의 계란 두 개를 먹은 일이 있기 때문에 장수로 부리진 않는다”고 했다. 이에 자사는 “성인이 인재를 취하는 것은 목수가 나무를 쓰는 솜씨와 같아, 몇 자 썩은 부분이 있어도 멀쩡한 곳은 남기고 나쁜 구석만 버리기 마련이다”고 했다. 그러자 위신공은 구변을 받아들여 중책을 맡겼다.
서브컬처도 마찬가지다. 도를 넘는 인원이나 잠재적 위험 요소가 존재한들 이를 빌미로 유망한 부분까지 전부 물리치는 것은 결코 현명한 전략이 아니다. 일말의 리스크를 명분으로 서브컬처를 등지거나 배척하는 태도는, 이제는 고전이 된 서브컬처 작품인 ‘은하영웅전설’의 표현을 빌리자면 “화재의 원인이 된다는 이유로 불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나 진배없는 실책인 셈이다.
물론 서브컬처 창작자와 애호가 측에서도 ‘서브컬처=성 상품화’라는 오해가 진실로 번져 나가지 않도록 적극 노력할 필요 또한 있다. 집단 내에서 발생한 도를 넘는 일탈을 감싸는 대신 앞장서 제지한다거나, 서브컬처 작품이 사회와 마찰 없이 어우러지기 위한 가이드라인을 설정하고 또 준수하는 등의 액션을 보이는 식이다.
그러한 준비가 없다면 돌발 상황을 맞이하는 순간 서브컬처 생태계는 너무나도 허망하게 무너져 내릴 수 있다. 지난 2005년 7월 MBC 생방송 음악캠프에 출연한 인디 밴드 멤버들이 전 국민 앞에서 예고 없이 성기를 노출했던 사건을 떠올려 보자. 물의를 빚은 가수들이 인디 음악계 전체를 대변하진 않는다는 사실 자체는 자명하다. 그러나 사건 이전엔 인디 밴드 관련 지식이 거의 없던 국민 대다수는 인디 음악계 전체를 ‘생방송 도중 하의 탈의를 한 범죄자 집단’으로 인지할 따름이었다. 그렇게 대한민국 인디 음악계는 사실상 멸망했고, 활력을 조금이나마 되찾기까지는 5년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서브컬처를 대중에 바르게 알리는 동시에 일부 창작자의 일탈을 미연에 통제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서브컬처 역시 인디 음악계와 비슷한 재난을 맞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대기업도 발 빠르게 진출한 ‘서브컬처 콜라보’ 시장
세간에 만연한 오해에도 불구하고, 대기업 중 트렌드에 밝은 곳은 이미 서브컬처와 손잡고서 청년 세대를 적극 공략하는 중이다. 삼성전자는 지난 3월 넥슨게임즈와 제휴해 케이스와 스트랩 케이스 등 스마트폰 액세서리를 서브컬처향 게임 ‘블루 아카이브’ 캐릭터로 꾸민 ‘갤럭시 S24 울트라 액세서리 블루 아카이브 에디션’을 출시했다. 상품가는 33만9000원. 스마트폰 단말기는 포함하지 않은, 오로지 액세서리값이다. 저렴하다 말하긴 어려운 가격이었으나, 판매를 개시한 이래 재고 2000개가 모두 소진되기까지는 1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롯데시네마는 지난 7월 버튜버 팬을 위한 공간 ‘브이스퀘어’(V-SQUARE)를 롯데시네마 건대입구 3층에 개장했다. 버튜버란 ‘버추얼 유튜버’의 줄임말로, 카메라나 특수 장비를 통해 실제 사람의 표정과 움직임을 인식하며 똑같이 움직이는 서브컬처풍 가상 캐릭터를 뜻한다. 브이스퀘어는 서브컬처 팬들이 버튜버 문화를 자유롭게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서 팝업존·캐릭터 콜라보 카페·포토존·미디어룸 등으로 구성했다.
‘일러스타 페스’ 유료 입장객 연령대는 10~30대가 92%에 달한다. 이는 서브컬처 애호가가 30대 이하 청년층에 집중돼 있음을 방증한다. 10~30대가 주요한 타겟인 상품은 서브컬처를 매개로 마케팅을 전개하면 좋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식음료(F&B)나 전자기기는 물론 문화공간 등에서 서브컬처와의 콜라보가 활발한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러한 이치를 일찍이 감지한 기업들은 자사 상품과 브랜드에 서브컬처를 발 빠르게 접목해, 청년층의 이목을 끌 수 있는 신선한 매력을 새로이 부여했다.
물론 그들 역시 서브컬처의 리스크는 사전에 인지했을 것이다. 다만 목재가 살짝 벌레 먹거나 상했다며 전부를 버리진 않듯, 서브컬처 또한 적절한 검수와 통제를 거쳐 유용한 부분만 추리고선 이롭게 활용했을 따름이다. 그간 서브컬처라는 장미에 붙은 ‘가시’가 우려돼 손을 내밀기 주저했던 기업이나 마케터라면, 그리고 청년층 고객 확보와 충성도 제고에 관심이 많고 또 절실한 경제 및 산업 주체라면, 더는 서브컬처와의 협업과 제휴를 망설이거나 주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문현웅 스타라이크 최고전략책임자(CSO)는_서울대 지리학과·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조선일보 취재기자로 입사해 사회부·여론독자부·디지털뉴스본부·스포츠부 등에서 근무했다. ‘조선2보’, ‘디테일추적’ 등 서브컬처 지식을 활용한 콘텐츠 프로젝트를 주도해 젊은 독자를 대거 유입하는 성과를 냈다. 사람인에서 콘텐츠 총괄팀(SMC팀) 팀장을 맡았을 땐 업계 최초로 브랜딩과 마케팅에 버추얼 유튜버(버튜버)를 도입해 이목을 끌었다. 지금은 서브컬처 행사 ‘일러스타 페스’ 주최사이자 리듬 게임 개발사인 스타라이크에서 콘텐츠·홍보를 비롯한 사업 전략을 총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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