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주목하는 K-패션, 진화는 시작됐다[스페셜리스트 뷰]
한류 만나 주목 받기 시작한 K-패션
우영미·준지 등 해외서 각광 받는 디자이너 등장
톱 레벨의 국내 패션 디자이너 등장해야
[박세진 패션 칼럼니스트] 패션 브랜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자신 만의 정체성, 즉, 아이덴티티를 갖고 있느냐다. 무수한 대체재들이 과공급 되는 상황에서 소비자들에게 자신들이 만든 브랜드(제품)를 선택하게 하려면 다른 브랜드에게 없는 유니크함이 필요하다. 이런 유니크함이 정체성을 형성하고 대체 불가능성을 만든다. 하나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나면 소비자들은 이 제품을 다르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대체 불가능성을 만드는 방식은 시대에 따라 다르다. 과거에는 다른 곳에서 구하기 어려운 진귀한 고급 재료나 제품을 만드는 장인의 솜씨가 중요했다. 하지만 요즘은 제품 자체에 가미돼 있던 대체 불가능성이 ▲소비자의 패션 룩(Look) ▲브랜드가 가지는 세계관과 이미지 ▲입고 보고 경험하는 모든 라이프스타일에 입혀지는 분위기다.
대체 불가능성, 어떻게 만들어 낼까
대체 불가능성은 나 홀로 이뤄낼 수 있는 가치가 아니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고 팔리지 않는 독단적인 길은 패션 산업이 추구하는 길이 아니기도 하다. 우선 해당 브랜드를 만든 디자이너의 문화권과 시대의 흐름 등을 살펴봐야 한다.
예컨대 프랑스나 영국, 미국의 디자이너는 자국의 문화, 제반 산업 등의 큰 틀 속에서 비슷한 기반을 가진 주변과 구별되는 자기만의 정체성을 만들어 간다. 자신의 문화권을 배반하고 타자화시키려 해도 특정 문화권이라는 배경이 출발점일 수 밖에 없다는 얘기다.
또 시대의 흐름도 중요하다. 자원을 아낌없이 쓰는 것이 현대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환경 파괴적'이라는 비난을 듣는다. 친환경 산업은 이 시대가 원하는 흐름이다. 우연적이지만 거부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시대에 지나치게 순응하면 흔하고 평범할 뿐이다. 적당한 균형 속에서 사람들이 동경하는 패션을 내놔야 한다.
꽤 오랫동안 사람들이 동경하는 패션의 출처는 할리우드(Hollywood) 영화, 팝(POP) 뮤지션, TV 시리즈였다. 패션 스타와 화면이 결합된 유럽과 미국의 문화 재생산을 바라보며 우리는 그들을 동경하고 따라했다.
잡지에 실리는 패션 디자이너의 컬렉션과 패션 모델, 화보는 이를 증폭시켰다. 미디어의 강력한 힘은 전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미친다. 다만 소문을 듣고, 잡지로 보고, 실제로 이 패션을 만나게 되는 속도에는 시간적 간극이 있다. 결국 이 간극은 '패션의 자국화'라는 변형을 만든다.
이제는 유튜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사회관계망서비스(SNS)가 미디어를 대체하고 있다. 사람들은 인플루언서나 SNS 스타의 친숙하고 멋진 모습을 보고 따라 한다. 잡지보다는 인스타그램 위의 룩북과 짧은 동영상을 통해 새로운 트렌드를 지켜본다.
이런 미디어를 통해 시간적, 공간적 간극이 옅어지고 있다. K-문화는 이런 변화에 아주 잘 적응하고 있다. K-영화나 K-드라마 그리고 K-팝 등은 전통과 최첨단이 혼합돼 있는 우리만의 유니크한 특성을 활용하면서 쉼 없이 흘러가는 트렌드를 주도했고 이제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주목받기 시작한 K-패션
K-패션은 오래 전부터 해외 진출을 시도해 왔다. 제조 분야에서는 예전부터 해외 유명 브랜드의 아웃소싱 생산을 해왔다. 그렇지만 정작 자체 브랜드를 달고 수출을 시작했을 때는 '한국 산'이라는 사실을 숨기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딱히 장점이 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패션 쪽에서는 1992년 이신우, 이영희 디자이너가 한국 최초로 파리 컬렉션에 참가한 이후 해외 진출이 꾸준히 이어졌다. 좋은 평가를 얻는 경우도 있긴 했지만 주로 일시적인 이슈였고 한국의 패션 디자이너들이 주류 자리까지 오르기는 어려운 현실이었다.
세계적인 국내 패션 디자이너의 부재 속 K-팝 등 패션을 많이 활용하는 쪽에서는 최신 글로벌 트렌드를 찾아내 접목시키고 믹스해 새로운 볼거리를 만들어 내는 데 몰두했다. 이런 이유로 K-패션은 한동안 패션 디자이너보다는 스타일리스트를 중심으로 흘러갔다.
하지만 최근 패션 쪽에서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한류 덕분에 한국에는 문화 강국 이미지가 생겼다. 이 같은 왕성한 문화 생산 이미지는 K-패션 성장에 좋은 배경이 됐다. K-스타들을 앞세운 마케팅도 글로벌 인지도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다만 K-패션이 무조건 한류 특수를 누린 것은 아니다. 그들은 과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지만 좋은 기회를 만나지 못했을 뿐이다. K-패션은 세상에 보여줄 것이 여전히 무궁무진하다.
K-패션의 성장은 유망한 국내 디자이너들이 이끌 수 있다. 이미 몇몇 국내 디자이너와 브랜드들은 해외 시장에 진출하며 여러 성과를 내고 있다.
우영미와 준지는 해외에서 자리를 잡은 대표적인 한국 디자이너다. 해외의 명성을 통해 이들 브랜드들은 한국으로 역수입돼 MZ세대 등으로부터 큰 인기를 얻으며 '신명품'으로 불리고 있다.
우영미는 1988년 ‘솔리드 옴므’(Solid Homme)를 론칭하며 패션 브랜드 사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2002년 파리에 진출하면서 브랜드 ‘우영미’를 만들었다. 브랜드 우영미는 섬세함과 개성 있는 디자인, 성별의 경계를 허문 젠더리스 스타일이 특징이다.
데뷔 이후 파리패션위크에 참가하기 시작했고 2011년 파리의상조합의 정회원이 됐다. 2020년에는 파리에 있는 르 봉 마르쉐 백화점에서 남성관 입점 브랜드 중 매출 1위를 기록하면서 국내 인지도가 크게 늘기도 했다. 최근 파리에 플래그십 매장을 열고, 런던의 해로즈 백화점에 입점하는 등 전 세계에 40여개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정욱준은 1999년 가로수길에 ‘론 코스튬’을 오픈했고 서울 패션위크를 통해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2007년 ‘준지'(juun.j)를 론칭하고 파리패션위크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정교한 테일러링을 바탕으로 클래식과 아방가르드 등을 적절히 혼합한 패션 스타일은 ‘준지 스타일’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우영미에 이어 2013년 파리의상조합 정회원이 됐다.
우영미와 준지는 K-문화의 인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부터 해외 시장을 차곡차곡 개척해 가며 단계별 성장을 한 케이스다. 그만큼 그들이 자신들의 브랜드를 알리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K-패션의 미래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K-패션은 자체적으로 해외 진출을 위한 많은 노력을 이어왔고 이제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K-문화 인기는 K-패션 성공에 큰 힘이 됐지만 그저 K-팝이나 K-드라마 인기에 편승하는 정도에서 한국 패션의 성장이 제한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도 분명하다.
또한 국내에는 좋은 퀄리티의 원단 등 부자재 생산 업체가 많은 덕분에 K-패션 업체들은 국내를 생산 거점으로 글로벌 활동도 가능하다. 젠더리스나 지속 가능성 등 최근의 이슈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젊은 디자이너들이 많은 것도 장점이다.
디자이너와 브랜드는 자신만의 아이덴티티 확립이 매우 중요하다. 외국에서 유행하고 잘 팔리는 옷과 비슷한 걸 내놓는 일은 경쟁자도 많고 메리트도 없다. 외국 사람들이 굳이 한국의 패션쇼를 보러 한국을 방문하고 룩북 영상을 찾아 보며, 한국의 패션 상품을 관세와 배송료를 내가며 구매하는 이유는 '한국에만' 있는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테일러링과 소재, 만듦새 등 패션의 기본적인 요건을 잘 갖춰야 한다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정부나 기관의 노력도 필수적이다. 패션이 비즈니스라는 이유로 정부 도움 없이 '개개인의 힘으로 성공하는 분야가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문화의 판매는 정부 등 기관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유럽의 수많은 패션 협회나 대학, 기업 중심의 단체들도 여전히 가능성 있는 신인 디자이너를 찾아내고 성장시키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서울 패션위크를 개최하는 서울시와 서울 디자인 재단, 신인 발굴과 지원을 위한 한국패션협회의 K-패션 오디션 등 여러 행사가 존재한다. 그렇지만 현재 이런 이벤트들은 대중적 인기를 얻지 못하고 있다. 또 국제적인 인지도도 떨어진다. 이런 행사들이 자기들만의 잔치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거시적 관점의 방향 설정과 정교하고 현실적인 지원 등에서 더 큰 발전이 필요하다.
글로벌 스탠다드도 생각해야 한다. 예를 들어 국내에서 패션 산업을 영위하는 사업자라면 사이즈 종류를 그렇게 많이 생산하지 않아도 된다. 한국인들의 체형은 대부분 비슷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외에서 사업을 영위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더 다양한 사이즈를 생산한다는 것은 비용 상승을 의미하고 결국 제품 가격이 오르게 된다.
환경 및 지속 가능성 문제도 마찬가지다. 유럽이나 미국 등에서는 직물이나 부자재 등 생산의 초기 단계부터 염색과 봉제, 포장 등 최종 단계까지 점점 더 구체적인 친환경성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부분은 현대사회에서 사업을 영위하는 사업자라면 당연히 갖춰야 할 부분이다.
K-패션은 오랜 성숙기를 거쳐 이제 비상의 단계에 접어들었다. 현재 패션계에 무엇보다 필요한 것 중 하나는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톱 레벨의 국내 패션 디자이너가 등장하는 일이다. 그리고 가능성은 충분해 보인다. 더 큰 기대와 관심을 가지고 바라볼 만한 시점이다.
박세진 패션 칼럼니스트
박세진 패션 칼럼니스트는_패션에 관한 글을 쓰고 번역을 하며 사이트 '패션붑'을 직접 운영하고 있다. 『패션 vs. 패션』, 『레플리카』, 『일상복 탐구: 새로운 패션』, 『패션의 시대 : 단절의 구간』를 썼고 『빈티지 맨즈웨어』, 『아빠는 오리지널 힙스터』, 『아메토라: 일본은 어떻게 아메리칸 스타일을 구원했는가』 등을 번역했다. 이외 다양한 매체에 기고를 하고 강연, 자문, 전시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국내외에서 활약하는 국내 디자이너 및 브랜드
최유돈 디자이너는 국내에서 패션 디자이너로 일하다 영국 로열 칼리지 오브 아트(Royal College of Art, RCA)로 유학을 떠나 새로 도전한 케이스다. RCA에서의 졸업 컬렉션을 도버 스트리트 마켓이 바잉(Buying)할 정도로 큰 주목을 받았고 2009년 '유돈초이'(EUDON CHOI)를 론칭했다.
박소희 디자이너의 '미스 소희'는 화려하고 드라마틱한 패션으로 카디 비나 마일리 사이러스 등 세계적인 스타들에게 의상 협찬을 하면서 글로벌한 명성을 쌓아 왔다. 김나연 디자이너의 '나욘'(NAYON)은 2021년 미국패션디자이너협회(CFDA)의 디자인 스콜라 어워드에서 수상한 후 론칭한 브랜드다. CFDA의 공식 초청으로 뉴욕 패션위크에 참여하고 있다.
박상연 디자이너는 2021년 뉴욕에서 '애슐린'(ASHLYN)을 론칭했다. 동양의 패턴 메이킹과 서양의 드레이핑 테크닉을 결합한 우아한 룩을 선보인다. 또한 자투리 없는 재단과 생산과정에서의 폐기물 최소화도 목표로 하는 등 지속가능성 부분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대한민국패션대전, LVMH의 신인 발굴 프로젝트인 LVMH 프라이즈 파이널리스트, 2022년 삼성패션디자인펀드(SFDF) 수상을 하기도 했다.
규리김(GYOUREEKIM)은 김규리 디자이너의 브랜드로 2022년 도쿄 컬렉션을 거쳐 2023년 런던 패션위크에 참여했다. 창의적인 레이어드와 실루엣을 기반으로 한 로맨틱 세미쿠튀르 컬렉션을 선보이고 오래 보아도 질리지 않는, 간직하고 싶은 옷을 제작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재고 소재, 중고 원단, 쓰고 남은 원단을 업사이클해 활용하는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이외에도 프랑스의 LVMH 프라이즈나 미국의 CFDA 스콜라 어워드 등 해외의 신인 디자이너 등용문을 통해 수상하고 인지도를 넓혀가고 있는 국내 디자이너가 늘어나고 있는 것도 최근의 중요한 흐름이다. 특히 2024년에는 2NE1의 씨엘(CL)이 LVMH 프라이즈의 심사위원으로 합류하기도 했다.
김민주 디자이너는 2013년 H&M 디자인 어워드에서 대상을 받고 2014년에는 LVMH의 영 패션 디자이너 프라이즈 준결승에 진출했다. 그리고 2015년 자신의 브랜드 민주킴(MINJUKIM)을 런칭하게 된다. 환상적이고 동화적이고 우아한 분위기의 패션을 선보이는데 특히 2020년 넷플릭스에서 방영한 글로벌 패션 서바이벌 프로그램 넥스트 인 패션에서 우승하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다. 2022년에는 가회동에 한국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플래그십을 오픈하고 최근에는 세컨 브랜드 파쿠아를 런칭하기도 했다.
디자이너 황록은 2016년 런던을 기반으로 ROKH를 런칭했다. 타임리스, 원시적, 감각적인 디자인을 표방하고 클래식한 디자인을 정교하게 해체해 재구성하는 패션을 선보이고 있다. 2018년 LVMH 프라이즈 후보에 올라 2위 특별상을 수상하고 2019년 파리 패션위크에 진출하게 된다. 최근에는 H&M과의 협업 컬렉션으로 주목을 받기도 했다.
포스트 아카이브 팩션(PAF)는 임동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와 정수교 디자이너 등의 팀원으로 구성되어 있고 2018년에 런칭했다. 조형의 요소를 기반으로 공예적, 기능적으로 완성된 디자인을 중심으로 한 패션을 선보이고 있다. PAF는 설립 초창기부터 SNL에서 켄드릭 라마가 입고 나오는 등 주목을 받았는데 2021년에는 LVMH 프라이즈에서 세미 파이널리스트에 올랐다. 아라리오 갤러리에서의 전시나 버질 아블로와의 협업 컬렉션 등 다양한 활동을 선보이고 있다.
김준태 디자이너는 런던과 서울을 기반으로 2021년 준태킴(JUNTAEKIM)을 런칭했다. 한국에서 여성복을 공부하고, 런던에서 남성복을 공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남성복과 여성복, 과거와 현재의 요소들을 병치할 때 나타나는 새로움과 로맨티시즘을 만들어 내는 패션을 선보이고 있다. 최근에는 로코코, 바로크 시대 여성복의 실루엣을 남성복에 접목시킨 컬렉션을 선보이기도 했다. 2023년 LVMH 프라이즈에서 세미 파이널리스트에 올랐다.
조기석 아트 디렉터는 원래 포토그래퍼로 활동을 했는데 2016년 쿠시코크(KUSIKOCH)를 런칭하며 패션으로 영역을 넓혔다. 실패할 권리라는 슬로건을 앞에 내세우고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패션을 선보이고 있다. 김준태 디자이너와 같은 해인 2023년 LVMH 프라이즈에서 세미 파이널리스트에 올랐다.
김지용 디자이너는 2021년 브랜드 지용킴(JiyongKim)을 런칭했다. 자연광에 오랜 시간 노출한 선 블리치드 방식을 특징으로 하는데 햇빛에 천천히 그을린 원단은 화학 염료를 이용해 순식간에 변색시킨 섬유보다 훨씬 깊이감 있는 색을 낸다. 2023년 SFDF에서 1위를 했고 2024년에는 LVMH 프라이즈에서 세미 파이널리스트로 선정이 되었다. 룩북과 전시 등의 방식으로 컬렉션을 선보이고 있다.
이외에도 아더 에러, 앤더슨 벨, 젠틀 몬스터, 혜인 서, 강혁, 오호스(OJOS)등등 많은 브랜드들이 자신 만의 패션으로 해외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컬렉션이나 팝업 스토어를 열고, 국내를 찾아온 사람들이 매장을 찾아오게 만들고 있다.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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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불가능성을 만드는 방식은 시대에 따라 다르다. 과거에는 다른 곳에서 구하기 어려운 진귀한 고급 재료나 제품을 만드는 장인의 솜씨가 중요했다. 하지만 요즘은 제품 자체에 가미돼 있던 대체 불가능성이 ▲소비자의 패션 룩(Look) ▲브랜드가 가지는 세계관과 이미지 ▲입고 보고 경험하는 모든 라이프스타일에 입혀지는 분위기다.
대체 불가능성, 어떻게 만들어 낼까
대체 불가능성은 나 홀로 이뤄낼 수 있는 가치가 아니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고 팔리지 않는 독단적인 길은 패션 산업이 추구하는 길이 아니기도 하다. 우선 해당 브랜드를 만든 디자이너의 문화권과 시대의 흐름 등을 살펴봐야 한다.
예컨대 프랑스나 영국, 미국의 디자이너는 자국의 문화, 제반 산업 등의 큰 틀 속에서 비슷한 기반을 가진 주변과 구별되는 자기만의 정체성을 만들어 간다. 자신의 문화권을 배반하고 타자화시키려 해도 특정 문화권이라는 배경이 출발점일 수 밖에 없다는 얘기다.
또 시대의 흐름도 중요하다. 자원을 아낌없이 쓰는 것이 현대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환경 파괴적'이라는 비난을 듣는다. 친환경 산업은 이 시대가 원하는 흐름이다. 우연적이지만 거부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시대에 지나치게 순응하면 흔하고 평범할 뿐이다. 적당한 균형 속에서 사람들이 동경하는 패션을 내놔야 한다.
꽤 오랫동안 사람들이 동경하는 패션의 출처는 할리우드(Hollywood) 영화, 팝(POP) 뮤지션, TV 시리즈였다. 패션 스타와 화면이 결합된 유럽과 미국의 문화 재생산을 바라보며 우리는 그들을 동경하고 따라했다.
잡지에 실리는 패션 디자이너의 컬렉션과 패션 모델, 화보는 이를 증폭시켰다. 미디어의 강력한 힘은 전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미친다. 다만 소문을 듣고, 잡지로 보고, 실제로 이 패션을 만나게 되는 속도에는 시간적 간극이 있다. 결국 이 간극은 '패션의 자국화'라는 변형을 만든다.
이제는 유튜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사회관계망서비스(SNS)가 미디어를 대체하고 있다. 사람들은 인플루언서나 SNS 스타의 친숙하고 멋진 모습을 보고 따라 한다. 잡지보다는 인스타그램 위의 룩북과 짧은 동영상을 통해 새로운 트렌드를 지켜본다.
이런 미디어를 통해 시간적, 공간적 간극이 옅어지고 있다. K-문화는 이런 변화에 아주 잘 적응하고 있다. K-영화나 K-드라마 그리고 K-팝 등은 전통과 최첨단이 혼합돼 있는 우리만의 유니크한 특성을 활용하면서 쉼 없이 흘러가는 트렌드를 주도했고 이제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주목받기 시작한 K-패션
K-패션은 오래 전부터 해외 진출을 시도해 왔다. 제조 분야에서는 예전부터 해외 유명 브랜드의 아웃소싱 생산을 해왔다. 그렇지만 정작 자체 브랜드를 달고 수출을 시작했을 때는 '한국 산'이라는 사실을 숨기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딱히 장점이 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패션 쪽에서는 1992년 이신우, 이영희 디자이너가 한국 최초로 파리 컬렉션에 참가한 이후 해외 진출이 꾸준히 이어졌다. 좋은 평가를 얻는 경우도 있긴 했지만 주로 일시적인 이슈였고 한국의 패션 디자이너들이 주류 자리까지 오르기는 어려운 현실이었다.
세계적인 국내 패션 디자이너의 부재 속 K-팝 등 패션을 많이 활용하는 쪽에서는 최신 글로벌 트렌드를 찾아내 접목시키고 믹스해 새로운 볼거리를 만들어 내는 데 몰두했다. 이런 이유로 K-패션은 한동안 패션 디자이너보다는 스타일리스트를 중심으로 흘러갔다.
하지만 최근 패션 쪽에서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한류 덕분에 한국에는 문화 강국 이미지가 생겼다. 이 같은 왕성한 문화 생산 이미지는 K-패션 성장에 좋은 배경이 됐다. K-스타들을 앞세운 마케팅도 글로벌 인지도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다만 K-패션이 무조건 한류 특수를 누린 것은 아니다. 그들은 과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지만 좋은 기회를 만나지 못했을 뿐이다. K-패션은 세상에 보여줄 것이 여전히 무궁무진하다.
K-패션의 성장은 유망한 국내 디자이너들이 이끌 수 있다. 이미 몇몇 국내 디자이너와 브랜드들은 해외 시장에 진출하며 여러 성과를 내고 있다.
우영미와 준지는 해외에서 자리를 잡은 대표적인 한국 디자이너다. 해외의 명성을 통해 이들 브랜드들은 한국으로 역수입돼 MZ세대 등으로부터 큰 인기를 얻으며 '신명품'으로 불리고 있다.
우영미는 1988년 ‘솔리드 옴므’(Solid Homme)를 론칭하며 패션 브랜드 사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2002년 파리에 진출하면서 브랜드 ‘우영미’를 만들었다. 브랜드 우영미는 섬세함과 개성 있는 디자인, 성별의 경계를 허문 젠더리스 스타일이 특징이다.
데뷔 이후 파리패션위크에 참가하기 시작했고 2011년 파리의상조합의 정회원이 됐다. 2020년에는 파리에 있는 르 봉 마르쉐 백화점에서 남성관 입점 브랜드 중 매출 1위를 기록하면서 국내 인지도가 크게 늘기도 했다. 최근 파리에 플래그십 매장을 열고, 런던의 해로즈 백화점에 입점하는 등 전 세계에 40여개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정욱준은 1999년 가로수길에 ‘론 코스튬’을 오픈했고 서울 패션위크를 통해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2007년 ‘준지'(juun.j)를 론칭하고 파리패션위크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정교한 테일러링을 바탕으로 클래식과 아방가르드 등을 적절히 혼합한 패션 스타일은 ‘준지 스타일’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우영미에 이어 2013년 파리의상조합 정회원이 됐다.
우영미와 준지는 K-문화의 인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부터 해외 시장을 차곡차곡 개척해 가며 단계별 성장을 한 케이스다. 그만큼 그들이 자신들의 브랜드를 알리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K-패션의 미래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K-패션은 자체적으로 해외 진출을 위한 많은 노력을 이어왔고 이제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K-문화 인기는 K-패션 성공에 큰 힘이 됐지만 그저 K-팝이나 K-드라마 인기에 편승하는 정도에서 한국 패션의 성장이 제한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도 분명하다.
또한 국내에는 좋은 퀄리티의 원단 등 부자재 생산 업체가 많은 덕분에 K-패션 업체들은 국내를 생산 거점으로 글로벌 활동도 가능하다. 젠더리스나 지속 가능성 등 최근의 이슈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젊은 디자이너들이 많은 것도 장점이다.
디자이너와 브랜드는 자신만의 아이덴티티 확립이 매우 중요하다. 외국에서 유행하고 잘 팔리는 옷과 비슷한 걸 내놓는 일은 경쟁자도 많고 메리트도 없다. 외국 사람들이 굳이 한국의 패션쇼를 보러 한국을 방문하고 룩북 영상을 찾아 보며, 한국의 패션 상품을 관세와 배송료를 내가며 구매하는 이유는 '한국에만' 있는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테일러링과 소재, 만듦새 등 패션의 기본적인 요건을 잘 갖춰야 한다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정부나 기관의 노력도 필수적이다. 패션이 비즈니스라는 이유로 정부 도움 없이 '개개인의 힘으로 성공하는 분야가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문화의 판매는 정부 등 기관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유럽의 수많은 패션 협회나 대학, 기업 중심의 단체들도 여전히 가능성 있는 신인 디자이너를 찾아내고 성장시키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서울 패션위크를 개최하는 서울시와 서울 디자인 재단, 신인 발굴과 지원을 위한 한국패션협회의 K-패션 오디션 등 여러 행사가 존재한다. 그렇지만 현재 이런 이벤트들은 대중적 인기를 얻지 못하고 있다. 또 국제적인 인지도도 떨어진다. 이런 행사들이 자기들만의 잔치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거시적 관점의 방향 설정과 정교하고 현실적인 지원 등에서 더 큰 발전이 필요하다.
글로벌 스탠다드도 생각해야 한다. 예를 들어 국내에서 패션 산업을 영위하는 사업자라면 사이즈 종류를 그렇게 많이 생산하지 않아도 된다. 한국인들의 체형은 대부분 비슷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외에서 사업을 영위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더 다양한 사이즈를 생산한다는 것은 비용 상승을 의미하고 결국 제품 가격이 오르게 된다.
환경 및 지속 가능성 문제도 마찬가지다. 유럽이나 미국 등에서는 직물이나 부자재 등 생산의 초기 단계부터 염색과 봉제, 포장 등 최종 단계까지 점점 더 구체적인 친환경성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부분은 현대사회에서 사업을 영위하는 사업자라면 당연히 갖춰야 할 부분이다.
K-패션은 오랜 성숙기를 거쳐 이제 비상의 단계에 접어들었다. 현재 패션계에 무엇보다 필요한 것 중 하나는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톱 레벨의 국내 패션 디자이너가 등장하는 일이다. 그리고 가능성은 충분해 보인다. 더 큰 기대와 관심을 가지고 바라볼 만한 시점이다.
박세진 패션 칼럼니스트
박세진 패션 칼럼니스트는_패션에 관한 글을 쓰고 번역을 하며 사이트 '패션붑'을 직접 운영하고 있다. 『패션 vs. 패션』, 『레플리카』, 『일상복 탐구: 새로운 패션』, 『패션의 시대 : 단절의 구간』를 썼고 『빈티지 맨즈웨어』, 『아빠는 오리지널 힙스터』, 『아메토라: 일본은 어떻게 아메리칸 스타일을 구원했는가』 등을 번역했다. 이외 다양한 매체에 기고를 하고 강연, 자문, 전시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국내외에서 활약하는 국내 디자이너 및 브랜드
최유돈 디자이너는 국내에서 패션 디자이너로 일하다 영국 로열 칼리지 오브 아트(Royal College of Art, RCA)로 유학을 떠나 새로 도전한 케이스다. RCA에서의 졸업 컬렉션을 도버 스트리트 마켓이 바잉(Buying)할 정도로 큰 주목을 받았고 2009년 '유돈초이'(EUDON CHOI)를 론칭했다.
박소희 디자이너의 '미스 소희'는 화려하고 드라마틱한 패션으로 카디 비나 마일리 사이러스 등 세계적인 스타들에게 의상 협찬을 하면서 글로벌한 명성을 쌓아 왔다. 김나연 디자이너의 '나욘'(NAYON)은 2021년 미국패션디자이너협회(CFDA)의 디자인 스콜라 어워드에서 수상한 후 론칭한 브랜드다. CFDA의 공식 초청으로 뉴욕 패션위크에 참여하고 있다.
박상연 디자이너는 2021년 뉴욕에서 '애슐린'(ASHLYN)을 론칭했다. 동양의 패턴 메이킹과 서양의 드레이핑 테크닉을 결합한 우아한 룩을 선보인다. 또한 자투리 없는 재단과 생산과정에서의 폐기물 최소화도 목표로 하는 등 지속가능성 부분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대한민국패션대전, LVMH의 신인 발굴 프로젝트인 LVMH 프라이즈 파이널리스트, 2022년 삼성패션디자인펀드(SFDF) 수상을 하기도 했다.
규리김(GYOUREEKIM)은 김규리 디자이너의 브랜드로 2022년 도쿄 컬렉션을 거쳐 2023년 런던 패션위크에 참여했다. 창의적인 레이어드와 실루엣을 기반으로 한 로맨틱 세미쿠튀르 컬렉션을 선보이고 오래 보아도 질리지 않는, 간직하고 싶은 옷을 제작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재고 소재, 중고 원단, 쓰고 남은 원단을 업사이클해 활용하는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이외에도 프랑스의 LVMH 프라이즈나 미국의 CFDA 스콜라 어워드 등 해외의 신인 디자이너 등용문을 통해 수상하고 인지도를 넓혀가고 있는 국내 디자이너가 늘어나고 있는 것도 최근의 중요한 흐름이다. 특히 2024년에는 2NE1의 씨엘(CL)이 LVMH 프라이즈의 심사위원으로 합류하기도 했다.
김민주 디자이너는 2013년 H&M 디자인 어워드에서 대상을 받고 2014년에는 LVMH의 영 패션 디자이너 프라이즈 준결승에 진출했다. 그리고 2015년 자신의 브랜드 민주킴(MINJUKIM)을 런칭하게 된다. 환상적이고 동화적이고 우아한 분위기의 패션을 선보이는데 특히 2020년 넷플릭스에서 방영한 글로벌 패션 서바이벌 프로그램 넥스트 인 패션에서 우승하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다. 2022년에는 가회동에 한국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플래그십을 오픈하고 최근에는 세컨 브랜드 파쿠아를 런칭하기도 했다.
디자이너 황록은 2016년 런던을 기반으로 ROKH를 런칭했다. 타임리스, 원시적, 감각적인 디자인을 표방하고 클래식한 디자인을 정교하게 해체해 재구성하는 패션을 선보이고 있다. 2018년 LVMH 프라이즈 후보에 올라 2위 특별상을 수상하고 2019년 파리 패션위크에 진출하게 된다. 최근에는 H&M과의 협업 컬렉션으로 주목을 받기도 했다.
포스트 아카이브 팩션(PAF)는 임동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와 정수교 디자이너 등의 팀원으로 구성되어 있고 2018년에 런칭했다. 조형의 요소를 기반으로 공예적, 기능적으로 완성된 디자인을 중심으로 한 패션을 선보이고 있다. PAF는 설립 초창기부터 SNL에서 켄드릭 라마가 입고 나오는 등 주목을 받았는데 2021년에는 LVMH 프라이즈에서 세미 파이널리스트에 올랐다. 아라리오 갤러리에서의 전시나 버질 아블로와의 협업 컬렉션 등 다양한 활동을 선보이고 있다.
김준태 디자이너는 런던과 서울을 기반으로 2021년 준태킴(JUNTAEKIM)을 런칭했다. 한국에서 여성복을 공부하고, 런던에서 남성복을 공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남성복과 여성복, 과거와 현재의 요소들을 병치할 때 나타나는 새로움과 로맨티시즘을 만들어 내는 패션을 선보이고 있다. 최근에는 로코코, 바로크 시대 여성복의 실루엣을 남성복에 접목시킨 컬렉션을 선보이기도 했다. 2023년 LVMH 프라이즈에서 세미 파이널리스트에 올랐다.
조기석 아트 디렉터는 원래 포토그래퍼로 활동을 했는데 2016년 쿠시코크(KUSIKOCH)를 런칭하며 패션으로 영역을 넓혔다. 실패할 권리라는 슬로건을 앞에 내세우고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패션을 선보이고 있다. 김준태 디자이너와 같은 해인 2023년 LVMH 프라이즈에서 세미 파이널리스트에 올랐다.
김지용 디자이너는 2021년 브랜드 지용킴(JiyongKim)을 런칭했다. 자연광에 오랜 시간 노출한 선 블리치드 방식을 특징으로 하는데 햇빛에 천천히 그을린 원단은 화학 염료를 이용해 순식간에 변색시킨 섬유보다 훨씬 깊이감 있는 색을 낸다. 2023년 SFDF에서 1위를 했고 2024년에는 LVMH 프라이즈에서 세미 파이널리스트로 선정이 되었다. 룩북과 전시 등의 방식으로 컬렉션을 선보이고 있다.
이외에도 아더 에러, 앤더슨 벨, 젠틀 몬스터, 혜인 서, 강혁, 오호스(OJOS)등등 많은 브랜드들이 자신 만의 패션으로 해외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컬렉션이나 팝업 스토어를 열고, 국내를 찾아온 사람들이 매장을 찾아오게 만들고 있다.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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