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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바지 입고 출근? 자율 복장제, 이대로 괜찮을까[스페셜리스트 뷰]

2008년 삼성의 복장 자율화 이후 변화 시작
격식과 예 갖추는 문화도 필요

광화문네거리에서 시민들이 회사로 출근하고 있다.[사진 연합뉴스]  
[이헌 패션칼럼니스트] 옷 애호가인 필자는 1970년대에 태어나 90년대 학번으로 살아오면서 대한민국에서 발생한 여러 격동의 현장을 목격했다. 그런데 요즘 후드티는 물론, 반바지와 샌들까지 출근복 리스트로 허용되는 ‘자율 복장제’를 바라보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을 느낀다.

필자는 일제의 잔재를 없앤다는 미명하에 진행된 교복 자율화 역풍 속에서도 다니던 학교의 외골수 정책에 따라 교복에 얽매여 고교 시절을 보냈고 심지어 교련복까지 싸들고 다녔다. 지긋지긋한 시절을 돌이켜보면서 한편으로는 새마을 운동과 군대 문화로부터 영향 받은 획일화의 압박과 굴레를 이제는 벗어던지나 싶은 근래의 복장 자율화가 반갑기만 하다. 

하지만 실로 붕괴에 가까운 복식 문화의 변화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스스로를 ‘옷 환자’로 칭하며 상황과 격식에 맞는 옷차림에 대해 연구해온 필자 입장에서 요즘처럼 편안한 차림의 출근복을 용인하는 문화가 조금은 걱정스럽다.

과도한 노출과 상황(TPO/Time·Place·Occasion)에 맞지 않는 옷차림을 개성으로 합리화하는 젊은 층의 시도가 여전히 낯설고 안타깝다. 한편으로는 이 또한 사회적·시대적 요구이니 어쩌겠는가. 

필자는 자율 복장제도에 관한 [이코노미스트]의 기고 요청을 받은 이후 최근 한 달 간 부지런히 주변의 옷차림을 관찰했다. 여전히 급여생활자를 우아하게 유지하고 있는, 이제는 ‘꼰대’로 분류되는 50대의 친구들과 선배들은 물론, 협업이나 컬래버레이션 등의 이름으로 만나게 되는 현업에 종사하는 2030세대의 젊은 사회인들까지, 사회의 주축을 이루는 다양한 직종과 연령대의 직장인들의 복장에 좀 더 깊은 관심을 기울여 보게 됐다. 

한국의 복식문화 변천사

의식적으로 필자가 직장을 다니던 20대 후반을 돌이켜보니 확실히 더 편하고 개성이 드러나는 옷차림이 많아짐을 느낀다. 1990년대 중반 닷컴(.com) 버블과 함께 등장한 점점 ‘더 편하게, 더 자유롭게 옷 입기’의 경향은 코로나 팬데믹과 사회의 주류가 된 MZ세대의 강력한 자기 표현과 맞물려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2000년대 초부터 유행처럼 자리했던 강력한 맞춤복에 대한 수요는 온데간 데 없다. 평생 한 번뿐인 결혼식을 위한 예복 맞춤 시장마저도 점점 증가하는 캐주얼화 경향에 따라 기성 브랜드의 셋업 차림으로 빠르게 대체되는 중이다.

백화점 남성복 판매 층의 필수 코너로 등장하던 넥타이와 셔츠 매장은 이미 5~6년 전 부터 자취를 감췄다. 세계적인 복장 규정 변천의 결정적인 원인, 코로나19 팬데믹과 재택근무제도 도입은 인류의 ‘편하게 옷 입기’ 바람을 좀 더 빠르게 구체화시켰다.

비대면 미팅과 자율 근무 제도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면서 ‘대면 격식’에 대한 가치관도 달라졌다. 야외 활동과 개인 취미 활동에 쏟는 시간과 비용의 비중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이런 활동을 위한 옷차림이 일터와 일상에 스며들게 됐다. 

우리는 서양에서 유래된 복식(옷·장신구 등 꾸밈새에 관한 문화)을 식민지 시절부터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왔다. 이후 우리의 복식문화는 6·25 동란을 겪으면서 특별한 저항이나 반성 없이 부족한 물자의 수급사정에 따라 수용됐다.

또 우리의 전통이나 문화적 반성에 따른 발전이나 변형을 취하지 못한 채 소위 ‘정장’, 혹은 ‘양복’에 해당되는 옷이 자연스럽게 출근복으로 받아들여졌다. 또 요즘처럼 다종다양하게 분류된 직군과 달리 과거에는 이분법적 분류로 '화이트칼라'(White-collar)와 '블루칼라'(blue collar)로 대비되는 두 가지 직군이 존재했다.

이에 사무실에서 일하는 직장인인 이른바 '화이트칼라'에겐 상하의가 동일한 재질과 컬러로 만들어진 정장에 넥타이를 매는 차림이 요구됐다. 여성들에게는 이에 준하는 여성복이 복장 규정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블루칼라' 직종엔 회사가 공급하는 유니폼이 제공돼 복장에 대한 고민이나 사회적 고찰이 특별히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남들이 입으니 그렇게 입었고, 개성이나 선택권 보다는 사회가 용인하는 정해진 규격에 따라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모두가 복장 규정을 따르던 시절이었다.

오로지 부를 향해 달리는 효율 제일주의의 새마을운동의 획일화 정책은 이런 경향을 더욱 부추겼고 군사정권 특유의 상명하복 문화도 어설픈 격식으로 우리의 사고를 경직시켰다. 
전두환 전 대통령 취임식 모습.[사진 대통령기록관]

특히 필자에게 성장(盛裝·훌륭히 몸을 단장)이라는 이미지가 뇌리에 각인된 장면은 고 전두환 전 대통령의 취임식 사진이다. 당시 그는 군주제에 기반한 강력한 군사문화를 가진 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연미복과 훈장을 착용한 복장을 입었다. 이러한 복식문화가 반영된 대통령의 취임식은 과거 소공동 맞춤 거리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이러한 격식에 따라 갖춰 입는 문화가 활성화되면서 맞춤 양복 시장은 꾸준히 인기를 구가했다. 

군사 정권의 후광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노태우 정부는 이러한 맞춤복 위주 복식문화의 틀에 큰 변화를 야기하는 시대적 전환점이 됐다. 당시 노태우 정권의 모토는 아이러니하게도 '위대한 보통사람들의 시대'였다. 군 출신 대통령은 이미지 쇄신을 위해 손수 가방을 들고 국정에 참여하는 등 좀 더 캐주얼한 이미지 변신을 시도했다.

취임식 역시 당시 일반 회사원들과 같은 타이를 착용한 평범한 양복 차림이었다. 이후 1988년 서울 올림픽을 통해 도입된 다양한 해외 문화는 보다 자유로운 복식문화에 불을 당겼다.

해외 여행 자율화에 따라 국민들은 여러 해외 문화를 경험하고 체험하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이들은 점차 개성을 중시하고 그동안 찾아보기 힘들던 새로운 복식문화를 수용하고 추구해 왔다. 

통신과 교통의 발전도 이런 편안하고 자유로운 개성 표현에 크게 기여했다. 인터넷을 통한 동호회 활동은 심도 깊은 취향과 개성의 자가발전 계기를 마련했고 자연스럽게 취미와 관심은 기능을 동반한 의복의 선택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눈부시게 분화 발전했다.

다만 냄비 끓듯 한 두 가지 유행에 유독 집착하는 경향도 이때 시작됐다. 또래 집단이 입는 옷은 '나의 패션'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지난 2018년 열린 체감온도 낮추는 직장인 '시원차림 패션쇼' 모습.[사진 이데일리]

광화문네거리에서 직장인들이 출근하고 있다.[사진 연합뉴스]

복장자율화의 이면

1997년 4월 발매돼 9월 가요프로그램 차트를 석권했던 DJ DOC의 'DOC와 춤'을 이라는 노래말엔 이런 부분이 있다. “청바지 입고서 회사에 가도 깔끔하기만 하면 괜찮을 텐데. 여름교복이 반바지라면 깔끔하고 시원해 괜찮을 텐데. 사람들 눈 의식하지 말아요. 즐기면서 살아갈 수 있어요. 내 개성에 사는 이세상이에요. 자신을 만들어 봐요.”

돌발행동으로 유명세를 타던 한 음악 집단의 노랫말은 고스란히 시대상을 반영했었다. 자유와 개성을 강조하지만 여전히 청바지는 근무복으로는 금기시됐고 여름 교복으로 반바지를 입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인 시대였다.

하지만 시대적 요구에 따라 대기업들이 자율복장제도를 도입하면서 청바지와 반바지, 샌들이 점차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점진적으로 이뤄진 복장 자율화, 근무복 자율화의 과정을 살펴보면 이는 이미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요구임을 확인하게 된다. 하지만 필자는 기업들이 복장 자율화의 이유에 대해 '유연한 조직 구조'나, '창조적인 기업문화'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불편함 감정을 느낀다. 

지난 2008년, 삼성그룹은 비즈니스 캐주얼을 도입하며 근무복 자율화를 시작했다. 당시 교복처럼 정장을 입고 출퇴근하던 직장인들에게 이는 적지 않은 혼란을 가져왔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기업의 복장 자율화는 실로 의류 시장 전체에 큰 영향을 주는 중차대한 일이었고 이를 계기로 맞춤복 시장에 큰 변화가 일게 된다. 
갑자기 도입된 비즈니스 캐주얼은 그 정의와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당사자는 물론, 그들의 배우자에게도 큰 혼란을 야기했다. 자연스럽게 맞춤복과 관련 업종 종사자들의 일터가 줄면서 인력난이 과중됐다.

또 당시 노동시간과 임금제도의 변화로 소규모 자영업 형태의 맞춤복·완성복업계는 사양산업이 됐다. 현재 이 시장에는 극소수의 업체만이 살아남았을 뿐이다.

이후 코로나 팬데믹이 찾아오며 맞춤복·완성복업계는 더욱 어려워졌다. 사람들이 외출을 하지 못하면서 사실상 수준 높은 맞춤복과 완성복을 생산하던 기술인력들이 업계를 떠나게 됐기 때문이다.

자율화로 퇴색된 격식과 예



복장 자율화에 대해 필자가 불편한 감정을 갖고 있는 것은 비단 이런 산업적인 측면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옷을 갖춰 입고 상대를 배려하는 격조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붕괴되고 있다는 안타까움이 더 크다.

관혼상제와 같은 행사를 위해 번거롭고 복잡한 복식을 갖추고 유지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행사를 준비하는 과정을 통해 인간의 도리와 마음을 준비하게 하는 강력한 순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장례식장에서 단정하게 예를 갖춘 어두운 색상의 정장과 넥타이는 황망한 상주를 향한 예의를 갖춘 위로나 다름없다. 혼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최근 결혼식은 신부를 위한 일생일대의 돈 잔치로 변질됐다. 이에 요즘 결혼식은 복식문화의 중요성보다 시각적 욕망과 살림살이 자랑만 남았다. 이런 결혼식의 변질이 부부를 더 쉽게 헤어지게 만들진 않았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폴리에스테르 소재로 만들어 주름이 가지 않는 셔츠, 공장에서 찍어낸 셋업 수트는 우리의 출근 일상을 더 편리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셔츠 다림질을 통해 마음을 가다듬고, 정성들여 좋은 옷을 준비하는 간곡한 마음의 공간은 이제 우리에게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깝다.

아무리 덥고 습해도 긴 바지를 입어 예의를 갖추고 정성들여 타이를 매는 것은 중요한 업무에 앞서 우리의 마음가짐을 다잡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은 우리보다 빠르게 산업화를 경험하고 일찌감치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지만 여전히 격식과 예를 갖추는 가치를 중시한다. 이는 최근 문예 부흥이라는 이름으로 과거의 소중한 문화를 무시하고 모든 것을 간결하게 만든 중국의 경우와 대비된다. 이런 측면에서 다양한 문화적 활동을 통해 전 세계에서 탁월한 성과를 내고 있는 대한민국이지만 앞으로도 줄곧 그 성과를 유지할 수 있을지 우려와 걱정이 앞선다.

무조건적인 자율화와 간소화보다는 격식을 갖추고 예를 다하려는 노력은 인간의 존엄성과 관계의 가치를 더욱 높이는 일이다. 자율복장제 속에서도 시간을 들여 자신을 꾸미고 상대를 배려해 예를 다하는 이들이 우리 부서와 우리 회사에도 한 둘쯤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박수와 존경의 눈빛을 보내보자. 그러면 복장의 자유보다 더 큰 배포와 우아한 격조를 얻게 될 것이다.

이헌 패션칼럼니스트
이헌 패션칼럼니스트

이헌 패션칼럼니스트는_'한국신사'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는 칼럼니스트이자 스타일리스트, 디자이너다. 뉴욕 FIT에서 패션 머천다이징(MD)을 전공했고 후에 패션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신사용품', '오빠와 아저씨는 한 끗 차이' 등의 저서가 있고 번역 및 감수로 패션 저술에 관여했다. 현재는 '스타일 인문학', '한국신사 유람일기'로 예술과 문화 등에 관한 다양한 칼럼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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