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태윤 칼럼니스트] 2025년 11월 4일, 미국 정치사에 한 획이 그어졌다. 인도계 우간다 태생의 91년생(34세) 무슬림 사회주의자 청년이 뉴욕시장에 당선된 것이다. 조란 맘다니(Zohran Mamdani). 100년 만의 최연소 시장이자 첫 무슬림 시장. 더 놀라운 건 그가 정치 왕조의 후계자 앤드루 쿠오모를 꺾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의 진보적 정책 - 임대료 동결, 무료 대중교통, 시영 식료품점 - 에 대해선 찬반이 갈릴 수 있다. 하지만 이 글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건 그의 정치 성향이 아니다. 보수든 진보든, 정치든 비즈니스든, 새로운 세대와 소통하려는 모든 이들이 참고해야 할 혁신적 브랜딩 전략이다. 어떻게 2월 지지율 1%의 무명 정치인이 6월엔 32%, 11월엔 시장 당선자가 될 수 있었을까? 그는 정치를 하지 않았다. 새로운 브랜드를 만들었다.
알고리즘 해킹: 정치광고가 아닌 콘텐츠를 만들다
기성 정치인들이 TV 광고에 수백만 달러를 쏟아부을 때, 람다니는 93초짜리 동영상 으로 승부를 봤다. 뉴욕 길거리 상인과 대화하며 노점상 허가증 가격(2만 2000달러!)을 폭로한 영상은 순식간에 300만 뷰를 돌파했다.
비결은 '광고'가 아닌 '콘텐츠'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Subway Takes’라는 틱톡 시리즈에선 지하철에서 지하철카드를 마이크 삼아 시장 출마를 선언했다. 100만 팔로워를 보유한 이 채널과의 협업으로 만든 영상은 57만 5000개의 '좋아요'를 받았다. 출구조사가 증명한다. 18-29세 투표자의 78%가 그를 선택했다. 쿠오모가 천문학적 자금으로 만든 광고들은 MZ세대의 알고리즘을 뚫지 못했다. 반면 람다니의 콘텐츠는 댓글과 공유, 듀엣과 스티치를 통해 자생적으로 퍼져나갔다.
"Hot Girls for Zohran." 흥미롭게도 이 캠페인은 람다니가 만든 게 아니었다. 브루클린에 사는 두 친구가 자발적으로 시작한 운동이었다. 2020년 버니 샌더스를 지지했던 #HotGirlsForBernie에서 영감을 받은 이들은 람다니의 정책에 감명을 받아 재미있는 캠페인 티셔츠를 만들어보자"는 단순한 아이디어로 시작했다. 하지만 여기서 람다니의 진짜 전략이 드러난다. 그는 이런 자발적 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토양'을 만들었다.
최저임금 30달러, 시영 식료품점, 무료 대중교통 같은 급진적이지만 구체적인 정책들. 이는 뉴욕의 진보적 인플루언서들의 신념과 정확히 일치했다. 슈퍼모델 에밀리 라타이코프스키가 동참한 건 우연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2020년 버니 샌더스를 지지했던 진보 성향의 인플루언서였다. 280만 틱톡 팔로워를 보유한 그녀는 단순히 "지지한다"고 선언한 게 아니라, 직접 티셔츠를 입고 거리에 나섰다. 선거일 아침, 람다니와 함께 찍은 셀피 스타일 영상에서 "이번 선거는 젊은 유권자가 결정할 것"이라며 투표를 독려했다.
가수 로드, 배우 신시아 닉슨, 감독 에이바 듀버네이, 배우 마크 러팔로... 이들 모두가 자발적으로 콘텐츠를 만들고 전화 캠페인에 참여했다. 심지어 배우겸감독 소피아 코폴라(프란시스코폴라의 딸)가 람다니에게 투표하는 영상까지 나왔다.
결과는 어땟을까? 1만 8000명 이상의 팔로워, 5만 명의 자원봉사자, 150만 개의 현관문을 두드린 캔버싱. 이는 '동원'이 아닌 '참여'였고, '지지자'가 아닌 '공동창작자'였다.
하이퍼로컬 전략: 10개 언어로 말하는 후보
브루클린 선셋파크에선 중국어로, 퀸스 잭슨하이츠에선 벵골어로, 브롱스에선 스페인어로. 람다니 캠프는 10개 이상의 언어로 유권자와 소통했다. 단순 번역이 아니었다. 각 커뮤니티의 문화적 맥락에 맞춰 메시지를 재창조했다. 특히 주목할 건 그가 직접 힌디어로 순위선택투표제를 설명하는 영상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남아시아 팝컬처 레퍼런스까지 곁들인 이 영상은 단순한 정보 전달을 넘어 문화적 유대감을 형성했다.
벵골계 청년들은 세대 간 타운홀 미팅을 열어 복잡한 정책을 쉽게 설명했다. 장애인 권익 단체는 수어로 캠페인 영상을 제작했다. 'Deafies for Zohran'(조란을 돕는 청각장애자들) 같은 그룹들은 각자의 커뮤니티에서 자율적으로 활동했다.
기성 정치인들의 '표 계산용' 다문화 행사와는 차원이 달랐다. 람다니는 각 커뮤니티의 일원이 되어 그들의 언어로, 그들의 방식으로 소통했다. 브롱스 킹스브리지에서 2% 열세가 14% 우세로 뒤집힌 비결이다.
선거자금이 800만 달러 상한선에 도달하자 람다니는 "더 이상 기부하지 마세요. 대신 자원봉사를 해주세요."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정치 컨설턴트들은 경악했다. 하지만 이 한 마디가 그의 브랜드를 완성했다. 쿠오모가 슈퍼팩 자금 5500만 달러를 쏟아부을 때, 람다니는 소액 기부로 모은 800만 달러로 승부했다. 투명하고 솔직한 소통은 그 자체로 강력한 메시지가 됐다.
더 놀라운 건 그가 자신을 '미화'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GQ와 인터뷰 매거진 화보를 찍으면서도 "실패한 래퍼"라는 과거를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불완전함이 그를 더 '진짜'로 만들었다.
정치를 넘어, 브랜딩의 미래를 보다
람다니 현상이 브랜드 마케터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첫째, 인플루언서를 '활용'하려 하지 말고 그들이 '참여'하고 싶은 운동을 만들어라. 둘째, 완벽한 이미지보다 불완전하지만 진짜인 스토리가 강하다. 셋째, 플랫폼의 언어를 구사하되 본질을 잃지 마라. 넷째, 타깃을 관객이 아닌 공동창작자로 대하라.
무엇보다 람다니는 '참여의 아키텍처'를 구축했다. 사람들은 더 이상 브랜드를 '소비'하는 데 만족하지 않는다. '함께 만들기'를 원한다. 이것이 알고리즘 시대, MZ세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브랜드 문법이다. 'West Village Girl'(뉴욕웨스트빌리지의럭셔리한 삶을 영위하는 젊은 여성) 현상이 보여주듯, 오늘날 젊은이들은 미니 크루아상을 사기 위해 새벽부터 줄을 선다. 단순히 제품을 사는 게 아니라 그 경험을 공유하고, 소속감을 느끼며,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람다니는 이런 문화적 코드를 정치에 접목시켰다.
100년 만의 최연소 뉴욕시장. 그의 당선은 단순한 정치적 사건이 아니다. 브랜드가 만들어지는 방식, 메시지가 전파되는 경로, 팬덤이 형성되는 과정의 패러다임 전환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2026년 한국 지방선거를 앞둔 지금, 람다니 현상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수막과 명함, 악수와 인사가 전부였던 선거판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미 일부 젊은 정치인들은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에서 새로운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단순히 '젊은 플랫폼'을 쓰는 게 아니다. 람다니가 보여준 것처럼, 시민을 동원의 대상이 아닌 참여의 주체로, 유권자를 관객이 아닌 공동창작자로 보는 근본적인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한국에도 '한국의 람다니'가 나타날까? 구태의연한 정치 문법에 갇히지 않고, 새로운 세대의 언어로 소통하며, 진정성 있는 비전으로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는 정치인 말이다. 2025년 11월 4일은 정치가 브랜딩을 만난 날로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묻게 될 것이다. "당신의 브랜드는 람다니 이전입니까, 이후입니까?"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당신이 좋아할 만한 기사
브랜드 미디어
브랜드 미디어
화장실서 발견된 여성 시신…범인은 ‘해경’ 남자친구였다 [그해 오늘]
세상을 올바르게,세상을 따뜻하게이데일리
이데일리
일간스포츠
아이브, 라이브로 KGMA 무대 '찢었다'
대한민국 스포츠·연예의 살아있는 역사 일간스포츠일간스포츠
일간스포츠
일간스포츠
김건희 ‘샤넬백 3종’…法 검증대 오른 제품들 살펴보니[누구템]
세상을 올바르게,세상을 따뜻하게이데일리
이데일리
이데일리
[마켓인]KFC코리아 매각 난항…밸류 이견에 협상 제자리걸음
성공 투자의 동반자마켓인
마켓인
마켓인
카무루스 '긍정적' 임상 결과, 펩트론에 쏠리는 눈
바이오 성공 투자, 1%를 위한 길라잡이팜이데일리
팜이데일리
팜이데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