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어떻게 벨기에는 ‘맥주의 나라’서 ‘와인의 요람’이 됐나[홍미연의 와인 스토리:지(知)]
- 북상하는 포도나무...벨기에, '유럽 와인 강자'로 올라서
왈로니 스파클링 와인, 삼겹살과 '찰떡궁합'
지구 온난화로 인한 평균 기온 상승은 포도 재배의 공식을 바꾸어 놓았다. 수확 시기는 과거보다 2~3주 이상 앞당겨졌고, 포도알 속 당분은 급격히 축적되는 반면 페놀릭 성숙은 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불균형이 나타나고 있다. 그 결과 와인의 알코올 도수는 구조적으로 상승하고, 와인의 골격이자 신선함을 담당하는 산도는 빠르게 감소한다. 이는 단순한 ‘스타일의 변화’를 넘어, 기존 명산지들이 쌓아온 정체성과 지속 가능성을 위협하는 실존적 위기로 다가오고 있다.
그 결과는 냉혹하고도 분명하다. 수백 년간 명성을 쌓아온 남부 유럽의 일부 산지들은 과열된 기후 속에서 수확 시점의 ▲정밀 관리 ▲알코올 도수 조절 ▲인위적인 산도 보정이라는 삼중의 전략적 부담을 떠안게 됐다. 반면 과거 ‘포도가 익기에는 너무 춥다’는 이유로 변방 취급을 받던 북위 50도 이상 지역들은 전례 없는 기회를 맞고 있다. 유럽 와인 지도의 권력 축이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북쪽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지구온난화, 잠 들어 있던 ‘와인 유전자’ 깨워
이 변화의 전위에는 영국·덴마크·스웨덴이 서 있다. 특히 영국 남부 서섹스와 켄트 지역은 프랑스 샴페인 지역과 맞닿아 있는 백악질(Chalk) 토양을 바탕으로 세계 최고 수준의 스파클링 와인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미 샴페인의 주요 하우스들이 영국 남부 토지를 매입해 대규모 포도밭을 조성하고 있다는 사실은, 북진하는 와인 지도의 미래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덴마크와 스웨덴 역시 불과 20~30년 전까지만 해도 ‘불가능’으로 여겨졌던 포도 재배를 이제는 상업적 생산 단계까지 끌어올리며, 기후 변화가 만들어낸 새로운 테루아의 실험실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 거대한 북상 흐름 속 가장 주목할만한 곳은 단연 벨기에다. 벨기에 와인의 부상은 우연한 현상이 아니라, 오래된 유산의 ‘화려한 복귀’에 가깝기 때문이다.
벨기에의 포도 재배 역사는 기원후 1세기 로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갈리아 북부로 진출한 로마인들은 군사 거점이던 뫼즈(Meuse) 강 유역을 중심으로 포도나무를 심었다. 중세 9~14세기까지 벨기에 와인은 수도원 경제의 핵심 산업이었으며, 리에주와 나무르 일대는 유럽 북부의 주요 와인 산지로 명성을 떨쳤다. 당시에는 현재보다 기후가 온화했고, 강을 통한 교역도 활발해 벨기에는 맥주의 나라가 되기 이전부터 이미 수준 높은 와인 문화를 향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15세기 이후 시작된 ‘소빙기(Little Ice Age)’는 벨기에 와인의 역사를 단절시켰다. 반복되는 수확 실패와 기온 저하는 생산자들로 하여금 포도 대신 추위에 강한 홉(Hop·맥주에 넣는 첨가제)을 선택하게 만들었고, 이는 벨기에가 세계적인 맥주 강국으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됐다. 그렇게 수백 년간 ‘와인을 생산하지 않는 대표적인 소비국’으로 인식됐던 벨기에는, 21세기 기후 온난화와 함께 다시금 잠들어 있던 와인 생산국의 유전자를 깨우고 있다.
벨기에 와인 부흥의 중심축은 남부 왈로니 지역이다. 왈로니는 흔히 기후 변화의 ‘구조적 수혜지’로 불리지만, 핵심은 단순히 기온이 상승했다는 데 있지 않다. 포도의 신선함과 당도의 균형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는 ‘골디락스(Goldilocks) 존’에 진입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 같은 성과는 국제 무대에서도 확인됐다. 비뇨블 데 자게즈(Vignoble des Agaises)의 대표 스파클링 와인 뤼퓌스(Ruffus)는 왈로니 스파클링 와인의 전형을 제시하며 글로벌 미식가들의 주목을 받았다.
또 도멘 뒤 샹 데올(Domaine du Chant d’Éole)의 2015년 블랑 드 블랑(Blanc de Blancs)은 2020년 런던 와인 컴피티션(London Wine Competition)에서 최고상인 ‘베스트 인 쇼(Best in Show)’를 수상했으며, 2014년 뀌베 프레스티주(Cuvée Prestige)는 2019년 콩쿠르 몽디알 드 브뤼셀(Concours Mondial de Bruxelles·CMB)에서 최고 와인에 주어지는 ‘인터내셔널 레벨레이션(International Revelation)’에 선정됐다.
유럽 와인사(史) 새 장 열리다
벨기에 와인의 성장은 감각의 영역을 넘어 수치로도 입증된다. 2023년 벨기에 전체 와인 생산량은 약 340만 리터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주목할 점은 생산량 증가가 고스란히 글로벌 수요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벨기에 와인 협회와 통계청에 따르면, 벨기에 와인의 수출 가치는 최근 5년간 연평균 15% 이상 성장했다. 생산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희소성 덕분에 벨기에 와인은 네덜란드·프랑스·일본 등 까다로운 미식 시장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특히 샴페인의 본고장인 프랑스로의 역수출이 늘고 있다는 점은 상징적이다. 벨기에 와인이 리스트에 올라 있다는 사실 자체가 레스토랑의 미식적 안목을 증명하는 지표로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한국 시장에서도 의미가 크다. 고알코올·과숙 스타일에 피로감을 느끼는 소비자들이 늘면서 낮은 알코올과 선명한 산도, 음식 친화적인 와인에 대한 선호가 뚜렷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벨기에 와인의 진가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식재료인 돼지고기와의 조합에서 극대화된다. 특히 껍질을 바삭하게 구운 삼겹살은 왈로니 스파클링 와인의 정교한 기포와 만나 식감의 대비를 극대화한다. 북방 테루아 특유의 산미는 삼겹살의 지방미를 깔끔하게 정리하며 다음 한 점을 기대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벨기에 전통 요리와 한국식 수육, 엔다이브(시코리) 쌈과의 조합 역시 와인의 미네랄리티를 한층 돋보이게 한다.
와인 지도가 북쪽으로 이동하는 지금, 벨기에는 그 변화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맥주의 거품 뒤에 가려졌던 로마의 유산이, 기후 변화라는 역설적 기회를 통해 다시 세계의 와인 잔 위로 떠오르고 있다. 우리는 지금 유럽 와인사의 새로운 장이 쓰이는 순간을 목격하고 있는 셈이다.
홍미연 씨엠비 와인앤스피리츠 C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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