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담보 대신 가치를 산다”…은행 ‘국가대표 VC’로 날개 펴나
- [위험가중치 나비효과]
주식 투자 RWA 400%에서 250%로 하향…투자 여력 31조6000억원 확보 기대
벤처 투자 가중치 완화, 모험자본 공급 확대…‘한국형 유니콘’ 키울까
[이코노미스트 이병희 기자] 가계대출 시장에 이례적인 ‘금리 역전’ 현상이 고착화하고 있다. 보통 담보가 확실한 주택담보대출(주담대)이 기업대출보다 금리가 낮은 것이 일반적이지만, 최근 주요 시중은행의 가계대출 금리가 기업대출 금리를 앞지르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정부가 주담대에는 허들을 높이고 기업대출에는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생산적 금융 강화 정책이 실질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한국은행이 1월 발표한 ‘(2025년) 12월 금융기관 가중평균 금리’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예금은행의 신규취급액 기준 대출금리는 4.19%를 기록했다.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가계대출 금리는 4.35%로 전월(4.32%)보다 0.03%포인트(p) 상승하며 3개월 연속 오름세를 나타냈다. 이 가운데 주담대 금리는 0.06%p 상승한 4.23%로 집계됐다. 반면 기업대출 금리는 0.06%p 상승했음에도 4.16%를 기록하며 가계대출 금리보다 낮은 수준을 유지했다. 대기업 대출 금리는 4.08%, 중소기업 대출 금리는 4.24%로 각각 나타났다. 담보가 확실한 주담대 금리가 대기업 대출 금리보다 높게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위험가중치(RWA) 조정으로 가계부채 억제·기업투자 유도
이런 현상의 배경에는 정부의 생산적 금융 강화 정책이 자리한다. 이억원 금융위원회 위원장은 지난해 9월 “전면적인 감독 개선을 통해 금융사의 생산적 금융 기능을 확립하겠다”며 규제 개선 방안을 공개했다. 은행의 주식·펀드 관련 위험가중치를 대폭 낮춰줌으로써 기업에 대한 투자 여력을 끌어올리고 주담대 문턱을 높여 부동산 쏠림 현상을 막겠다는 취지다. 국제결제은행(BIS) 기준의 규제 합리화를 통해 은행의 체질을 개선하겠다는 것이 정책의 핵심이다. 금융위원회가 발표한 규제 개선 방안을 정리하면 ‘주식·펀드에 대한 위험가중치(RW·자산의 위험도에 따라 자기자본 비율을 설정하는 가중치)는 완화하고 주택담보대출 RW는 강화한다’는 방향이다.
은행은 대출을 실행할 때 예상되는 손실에 대비해 자기자본을 일정 비율 이상 보유해야 한다. 이를 BIS 자기자본비율이라고 한다. 이때 분모가 되는 기준이 바로 위험가중자산(RWA)이다. RWA는 은행이 보유한 자산을 위험도에 따라 다시 계산한 수치다. 주식·펀드 RW의 경우 지금까지는 은행의 신용리스크를 산정할 때 주식에는 400%를 부과하고, 상장주식이나 은행과 장기적 경영관계를 갖는 기업의 비상장주식에 한해 250%를 적용해 왔다. 그런데 금융위원회는 국제 바젤 기준과 유사하게 주식에 부과하는 RW를 400%에서 250%로 낮추기로 했다. 다만 생산적 금융의 취지와 맞지 않는 단기(3년 미만) 매매 목적의 투자나, 가격 변동성에 크게 노출된 일부 벤처주식 등 예외적인 경우에만 400%를 유지한다.
RWA가 중요한 이유는 은행이 같은 돈을 빌려주더라도 위험자산 대비 쌓아둬야 하는 자금 규모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만약 은행이 기업에 100억원을 빌려줄 경우 RWA 비중이 15%라면 15억원을 적립해야 하지만, 이를 20%로 높이면 은행은 5억원을 더 끌어와야 한다. 그만큼 다른 곳에 추가로 투자할 여력이 사라진다.
은행판 ‘국가 대표 VC’ 시동… 면책 제도 등 과제도
그동안 은행들이 벤처 투자를 꺼렸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자본 부담’이었다. 1조원을 벤처 기업에 투자하면 위험자산이 4조원으로 잡혀 BIS 비율을 방어하는 데 치명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중치가 250%로 낮아지면 위험자산 산출액이 2조5000억원으로 줄어든다. 은행 입장에서는 자본 부담이 절반 가까이 줄어들면서 벤처 투자가 수익성과 자본 효율성을 동시에 챙길 수 있는 ‘해볼 만한 게임’으로 바뀌는 것이다.
금융위원회는 주식 RW 합리화를 통해 은행권 전체적으로 총 31조6000억원의 RWA가 감소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를 통해 약 31조원 이상의 투자 여력이 새롭게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은행이 단순한 대출 기관을 넘어 직접 주주가 되는 ‘지분 투자(Equity 투자)’가 활성화되면 ▲대출 이자보다 높은 배당 수익 및 매각 차익 기대 ▲유망 벤처 기업의 초기 단계부터 성장을 돕는 파트너십 구축 ▲부동산에 쏠린 금융 자금을 미래 성장 동력으로 전환하는 국가 경제적 선순환 구조 마련 등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장밋빛 전망을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규제 완화의 속도감 있는 이행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해 9월 발표된 위험가중치 개선 방안에 대해 금융당국은 일부 시행 세칙 개정을 조속히 마무리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현장에서는 "가격 변동성이 큰 벤처기업에 투자할 때 여전히 RW를 400%로 책정해야 하는 불확실성이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자본 부담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 은행이 기업 투자를 공격적으로 늘리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특히 ‘책임’과 ‘전문성’을 확보하는 것은 가장 치명적인 문제다. 은행권 내부에서는 투자 실패 시 책임을 누가 질 것인가에 대한 실무적인 우려가 크다. 원금 보장과 안정성을 최우선으로 하는 은행의 보수적인 조직 문화가 고위험·고수익을 지향하는 벤처 투자 시장의 문법과 충돌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은행업계 관계자는 “은행이 단순히 예대마진으로 수익을 내는 곳을 넘어 국가 경제에 활기를 불어넣는 모험자본의 역할을 수행하려면, 내부적으로 투자 전문 인력을 대거 확보해야 한다”며 “동시에 투자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고의나 중과실이 없다면 관대한 면책을 받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뒷받침 돼야 은행원들이 적극적으로 혁신 기업 발굴에 나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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