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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500조원 퇴직연금...‘저수익 함정’에서 깨어나라
- [퇴직연금, 이제 굴려야 할 시간]④
김성일 업라이즈투자자문 대표 기고
원리금보장 쏠림·무력화된 디폴트옵션
개인 전략과 제도 혁신 동시 필요
현재의 물가 상승과 화폐가치 하락을 감안하면 1%대 수익률은 ‘유지’가 아니라 ‘감소’에 가깝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산의 실질가치는 훼손되고, 노후를 지켜줄 방패는 서서히 약해진다. 퇴직연금이 본래 기능을 수행하려면 저수익 구조의 원인을 정확히 짚고, 개인의 운용 태도와 제도적 설계 모두를 바꿔야 한다.
원리금보장 쏠림…‘복리 효과 스스로 포기’ 구조
퇴직연금 수익률을 낮추는 가장 큰 요인은 원리금보장형 상품에 대한 과도한 쏠림이다. 2025년 4분기 기준 확정급여(DB)형 자산의 80% 이상, 확정기여(DC)형 가입자의 약 66%가 원리금보장형에 자금을 묶어두고 있다.
문제는 장기 투자 자산을 사실상 단기 예금처럼 운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10년간 원리금보장형 상품의 연평균 수익률은 약 1.7% 수준에 그친 반면, 실적배당형 상품은 4.8% 내외를 기록했다. 격차는 장기 투자에서 폭발적으로 확대된다. 동일하게 1억원을 30년간 운용할 경우 1.7% 수익률은 약 1억6000만원대에 머무르지만, 4.8%로 운용하면 4억원을 넘어선다. 단순한 수익률 차이가 아니라 노후 생활 수준을 결정짓는 구조적 격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입자들은 원금 손실에 대한 심리적 불안을 이유로 안정형 자산에 머문다. 단기 변동성을 피하는 대신 장기 복리 효과를 포기하는 선택이다. 결과적으로 퇴직연금은 ‘노후 대비 자산’이 아니라 ‘저금리 예금의 연장선’으로 전락하고 있다.
제도적 장치 역시 기대만큼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디폴트옵션(사전지정운용제도)이다. 미국의 401(k)나 호주의 슈퍼애뉴에이션 제도는 가입자가 별도 지시를 하지 않을 경우 TDF(타깃데이트펀드) 등 자산배분형 상품에 자동 투자되도록 설계돼 있다. 이들 국가에서 연 7~9%대 수익률이 가능한 배경이다.
반면 한국은 구조가 다르다. 가입자가 사전에 상품을 지정해야만 디폴트옵션이 작동하며, 원리금보장형 상품까지 포함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사실상 ‘디폴트’의 개념이 무력화된 셈이다. 실제로 DC형 계좌의 디폴트옵션 가입자 중 약 89.5%가 다시 원리금보장형을 선택하면서 제도 도입 취지가 퇴색됐다.
개인 전략과 제도 개편…‘이중 접근’이 해법
이 같은 한계를 극복하려면 개인의 투자 전략과 제도 개편이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
우선 개인 차원에서는 퇴직연금을 더 이상 ‘회사에 맡긴 돈’으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 임금 상승률과 기대 투자수익률을 비교해 DB형과 DC형 중 유리한 구조를 선택할 필요가 있다. 임금 상승률이 높은 초기에는 DB형이 유리할 수 있지만, 임금피크제 진입 시점에는 DC형으로 전환해 직접 운용하는 전략이 효과적이다.
투자 방식 역시 바뀌어야 한다. 원금 보장 중심에서 벗어나 자산배분 전략을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주식·채권·대체자산을 분산 투자하면 위험을 낮추면서 수익성을 확보할 수 있다. 직접 운용이 어렵다면 TDF나 밸런스드펀드, 로보어드바이저를 활용하는 것도 현실적인 대안이다.
세제 전략도 중요하다. 성과급을 DC형 계좌로 수령하면 과세이연 효과를 통해 자산 증식 효율을 높일 수 있다. 일반 급여로 받을 경우 최고 49.5%의 세율이 적용되지만, 연금으로 수령하면 세 부담을 크게 낮출 수 있다. 절세된 금액까지 복리로 운용된다는 점에서 장기 효과는 더욱 크다.
아울러 2024년 10월 전면 시행된 ‘퇴직연금 실물이전’ 제도를 활용하면 기존 자산을 매도하지 않고도 상품 경쟁력이 높은 금융사로 이동할 수 있다. 이는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즉각적인 개선 수단이다.
제도 측면에서는 보다 근본적인 변화가 요구된다. 디폴트옵션에서 원리금보장형 상품을 제외하고, 글로벌 자산배분형 상품 중심으로 재설계해야 한다. 또한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도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 있다. 전문 운용기관이 규모의 경제를 바탕으로 자산을 관리할 경우, 현재의 소극적 운용 구조를 탈피할 가능성이 크다.
퇴직연금은 단순한 금융상품이 아니라 ‘평생 월급’에 해당하는 자산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저수익 구조가 지속된다면 497조원의 거대한 자금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채 잠든 자산으로 남게 된다. 개인의 인식 변화와 제도 혁신이 동시에 작동할 때, 비로소 퇴직연금은 대한민국 직장인의 노후를 지키는 실질적 안전망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김성일 업라이즈투자자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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