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일반
임산부 D라인 드러낸 최소라..'샤넬'이 바꾸는 럭셔리 미의 기준 변화
- 오젬픽 시대 ‘헤로인 시크’ 트렌드
초슬림 미학에 균열 내기 시작한 샤넬
패션계 문법 바꾸는 샤넬의 변화
하이패션 임산부에 대한 시선, 진정성 바꿀까
[이코노미스트 서지영 기자]
지난 5월 서울에서 열린 샤넬의 ‘2026 샤넬 공방 컬렉션 쇼’. 피날레를 장식한 모델 최소라는 배를 감싸안고 런웨이를 걸었다. 몸을 따라 흐르는 흰 드레스 사이로 드러난 D라인은 이날 선보인 어떤 의상보다 강한 인상을 남겼다.
최소라는 런웨이를 걷는 내내 배를 다정하게 어루만지고 조심스레 토닥였다. 쇼가 끝난 뒤 임신 사실이 알려지자. 국내외 패션계에서는 뜨거운 반응이 이어졌다. 패션 매체와 소셜네트워크(SNS)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D라인”, “엄마 뱃속에서 런웨이에 데뷔한 아기”라는 반응이었다. 완벽하게 통제된 아름다움이 지배하던 패션쇼의 런웨이에 생명과 모성의 순간이 등장했다는 점에서 상징적인 장면으로 회자됐다.
헤로인 시크의 흐름, 샤넬의 선택
샤넬이 임산부 모델을 런웨이에 세운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앞서 4월 프랑스 비아리츠에서 열린 샤넬 크루즈 컬렉션 쇼에서는 임신 5개월 차의 노르웨이 출신 모델 카야 윌킨스가 런웨이에 올랐다. 배를 드러낸 트위드룩을 선보인 그는 가방에 아기 신발 장식을 달고 등장해 화제를 모았다.
우연은 아니었다. 미국 패션지 보그에 따르면 당시 쇼를 총괄한 마티유 블라지 아티스틱 디렉터와 캐스팅 디렉터는 임신한 모델을 의도적으로 찾은 것으로 알려졌다. 윌킨스 역시 인터뷰에서 “샤넬이 임신한 모델을 찾고 있었다”고 밝혔다.
사실 임신한 모델이 런웨이에 서는 것 자체는 특별하지 않다. 모델 이리나 샤크는 2016년 빅토리아 시크릿 패션쇼에 배가 부른 상태로 등장했다. 최근에도 다양한 글로벌 브랜드가 임산부 모델을 기용하고 있다.
패션계가 올해 샤넬의 행보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만큼 오랫동안 명품업계 미의 기준을 제시해온 브랜드이기 때문이다. 샤넬은 패션계의 기준을 만들어온 럭셔리 하우스로 꼽힌다. 트위드 재킷·퀼팅 백·투톤 슈즈 등 수많은 패션 코드를 탄생시켰다. 여성복 의류에 남성복 요소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면서 패션 문법을 바꿔놓기도 했다.
동시에 샤넬은 지나치게 마른 체형을 미의 기준으로 제시한다는 비판에서도 자유롭지 않았다. 2009년 샤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던 칼 라거펠트는 “아무도 둥근 몸의 여성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발언해 논란을 빚었다.
이후 패션업계는 다양성과 포용성을 앞세우며 변화를 시도했다. 플러스사이즈 모델과 시니어 모델, 장애인 모델 등이 런웨이에 오르기 시작했고, 신체 다양성은 글로벌 패션업계의 주요 화두로 떠올랐다.
최근 런웨이는 다시 초슬림 체형 중심으로 회귀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국 보그와 영국 가디언 등 외신은 체중 감량 치료제 오젬픽 열풍과 함께 패션계가 ‘헤로인 시크’(Heroin Chic) 미학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분석했다. 헤로인 시크란 창백한 피부와 앙상한 몸매, 병약해 보일 정도의 마른 체형을 이상적인 아름다움으로 소비하는 패션계 트렌드를 말한다.
패션매체 보그 비즈니스가 뉴욕·런던·밀라노·파리 패션위크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2025 가을·겨울 시즌 8703개 룩 가운데 플러스사이즈 모델(미국 사이즈 14 이상)이 착용한 비중은 0.3%에 그쳤다. 2022년 2%대를 기록했던 것과 비교하면 크게 감소한 수치다. 반면 일반 모델(미국 사이즈 0~4)은 전체의 97.7%를 차지했다. 영국 가디언은 이 흐름을 두고 “패션업계가 다시 ‘마름’(thinness)으로 회귀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런웨이 위로 올라온 여성의 삶
최근 샤넬의 행보는 소비자 변화와도 맞물려 있다. 현재 글로벌 명품 시장의 핵심 고객층은 런웨이 위 20대 모델이 아니라 출산과 육아를 경험한 3050 여성들이다. 브랜드가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 고객의 삶과 경험을 얼마나 반영하는지가 경쟁력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얘기다.
글로벌 컨설팅업체 베인앤드컴퍼니는 ‘2025 럭셔리 시장 보고서’에서 명품 소비가 경험과 정서적 만족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재편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과거 럭셔리 브랜드들은 현실과 거리가 먼 동경의 대상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광고와 런웨이 위 여성 모델들은 소비자가 닮고 싶어 하는 이상향에 가까웠다. 그러나 최근 소비자의 관심은 브랜드가 어떤 가치를 지향하는지, 어떤 이야기를 전달하는지로 옮겨가고 있다. 제품의 품질뿐 아니라 브랜드가 보여주는 철학과 태도, 세계관까지 구매를 결정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
비즈니스 오브 패션은 “소비자들은 더 이상 완벽한 판타지만을 원하지 않는다”며 “자신의 삶과 연결되는 진정성 있는 서사에 반응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패션 컨설팅 업계는 럭셔리 브랜드들이 제품보다 ‘가치와 철학’을 판매하는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소비자들이 단순히 가방이나 의류를 구매하는 것이 아닌 브랜드가 지향하는 정체성과 세계관에 공감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시장에서는 샤넬의 행보를 하나의 신호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샤넬은 단순한 브랜드를 넘어 트렌드를 제시하는 하우스로 통한다. 샤넬이 보여주는 변화는 다른 브랜드들의 컬렉션과 캐스팅 전략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쳐 왔다.
국내 패션업계의 관계자는 “과거 명품 브랜드들이 보여준 여성상은 현실과 일정한 거리를 둔 이상향에 가까웠다”며 “최근에는 실제 고객의 삶을 브랜드 안으로 끌어들이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는데 임산부 모델 기용 역시 같은 흐름으로 볼 수 있다”고 했다.
이어 “예전 런웨이가 이상적인 몸을 보여주는 공간이었다면, 이제는 여성들의 실제 경험을 담아내는 공간으로 변하고 있다”며 “특히 샤넬처럼 기준을 만들어온 브랜드가 이런 메시지를 내놓고 있다는 점에서 상징성이 크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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