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7회 이데일리 전략포럼 2일차
산업·문화서 전략적 가치 커진 韓
경직된 노동 문화, 제도 개선은 숙제
이 변화는 한국에 부담이자 기회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선택을 요구받는 압박은 커졌지만, 반도체와 배터리, 자동차, 조선 등 핵심 산업에서 한국이 가진 전략적 가치는 오히려 커졌다는 것이다. 탈세계화 시대에 미국과 중국 모두가 계산에 넣어야 하는 산업 강국이 된 셈이다.
제임스 김 주한미국상공회의소 회장과 박기순 성균관대 중국대학원 교수는 17일 서울 중구 신라호텔에서 ‘힘의 시대, 문명의 재편: 누가 신세계를 설계하는가’를 주제로 열린 제17회 이데일리 전략포럼에서 공급망 재편과 경제안보의 관점에서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진단했다.
단순 제조기지 넘어 美 전략 파트너로
제임스 김 회장은 한국이 더 이상 단순한 제조기지가 아니라 미국의 핵심 전략 파트너로 성장했다고 평가했다. 김 회장은 “한국은 미국의 8대 교역 파트너”라며 “한국 기업들은 미국 30여개 주에 진출해 대규모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기업들의 대미 누적 투자 규모가 2100억달러에 달하고, 이를 통해 미국 내 약 80만개의 일자리가 창출됐다고 설명했다.
특히 김 회장은 자동차와 반도체, 배터리, 조선 등을 한미 협력의 핵심 축으로 꼽았다. 현대차와 기아, 삼성전자, SK하이닉스, 한화오션, HD현대 등 한국 기업들이 미국 산업 생태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졌다는 것이다. 김 회장은 “한국은 저비용 제품을 만드는 국가에서 출발했지만, 이제는 기술과 품질, 브랜드 가치까지 갖춘 국가로 성장했다”고 강조했다.
한국의 전략적 가치는 제조업에만 머물지 않았다. 김 회장은 K콘텐츠와 K뷰티, K푸드 등 문화 산업의 성장도 한국의 위상을 바꾸고 있다고 봤다. 넷플릭스의 한국 콘텐츠 투자, 미국 시장에서 성장하는 한국 식품 브랜드, 전 세계로 확산하는 K팝과 웹툰 등을 언급하며 “K컬처가 한국의 브랜드와 이미지를 완전히 바꿔놓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김 회장은 한국이 글로벌 기업의 아시아 거점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제도적 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싱가포르와 홍콩에는 각각 수백개에서 1000개가 넘는 다국적 기업 지역본부가 있지만, 한국은 100개 미만에 그친다고 설명했다. 우수한 인프라와 인재를 갖췄음에도 규제 환경과 노동시장 경직성, 정책 불확실성이 투자 유치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는 진단이다.
김 회장은 “한국이 해외 기업들이 투자할 수 있는 더 좋은 플랫폼이 돼야 한다”며 “한국에 있는 다국적 기업 지역본부가 100개에서 1000개로 늘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안정적이고 투명한 규칙, 현대화된 노동 기준, 국제 기준에 부합하는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한국이 일부 제도적 마찰을 줄인다면 탈세계화 시대의 ‘게임체인저’가 될 수 있다는 평가다.
박기순 성균관대 중국대학원 교수는 공급망 재편을 ‘경제안보’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교수는 “경제와 안보가 분리되는 시대는 끝났다”며 “이제는 경제·안보가 아니라 경제안보의 시대”라고 말했다. 과거에는 누가 더 싸게 생산하느냐가 중요했다면, 이제는 누가 끊기지 않고 공급할 수 있느냐가 국가 경쟁력의 핵심이 됐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이를 ‘저스트 인 타임’에서 ‘저스트 인 케이스’로의 전환이라고 설명했다.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필요한 만큼만 생산하고 공급하던 시대에서, 위기 상황에도 버틸 수 있는 공급망을 확보하는 시대로 바뀌었다는 의미다. 그는 “공급망은 이제 안보”라며 “미국과 중국 모두 산업정책을 국가 전략 차원에서 활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은 반도체법, 인플레이션감축법(IRA), 인프라법에 이어 트럼프 2기 들어 관세 정책까지 종합적 산업정책으로 활용하고 있다. 박 교수는 “트럼프 1기에는 중국을 대상으로 고관세를 부과했다면, 2기에는 동맹도 예외가 아니다”라며 “미국은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상대의 이익을 낮출 수 있다면 자신도 손해를 감수하는 정책을 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중국 역시 산업정책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박 교수는 중국이 1953년 이후 5개년 계획을 이어오며 국가 주도의 산업 육성 전략을 지속해왔다고 설명했다. 특히 희토류, 흑연, 배터리 원료, 원료의약품 등 일부 핵심 분야에서는 중국이 글로벌 공급망의 상당 부분을 장악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미국이 반도체 수출통제로 중국을 압박하면, 중국은 업스트림(공급망의 앞단) 공급망을 막는 방식으로 대응한다”며 “핵심 광물과 소재 공급망은 실제 무기 못지않은 경제 산업 분야의 핵과 같다”고 말했다.
문제는 한국이 이 공급망 구조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점이다. 박 교수는 한국이 배터리 원료와 반도체 소재 등 일부 핵심 품목에서 중국 의존도가 높다고 지적했다. 미국의 디리스킹(위험 의존도 줄이기) 압력이 커지는 상황에서 중국 의존도를 단기간에 낮추기 어려운 산업일수록 한국 기업의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한국 기업들이 미국 시장에 직접 진출하는 전략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고 봤다. 관세와 보조금, 시장 접근성을 고려하면 현대차·기아, 배터리, 반도체 기업들이 미국에 생산 거점을 구축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필요한 선택이라는 설명이다.
박 교수는 “한국은 1990년대 이후 국가주도 산업정책에서 시장경제 체제로 전환하면서 산업정책이 산발적으로 이뤄져왔다”며 “지금은 전 세계가 산업정책을 다시 하고 있는 만큼 한국도 장기적 관점에서 통합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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