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일반
상위 0.1%를 모십니다…유통가 휩쓰는 VVIP 경쟁 [큰손을 잡아라]①
- 너도나도 VIP 넘어 0.1% VVIP 서비스
차별화·브랜드 가치 줄고 비용만 커질 가능성도
[이코노미스트 서지영 기자]
백화점과 금융권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VIP 마케팅이 이커머스와 유통업계 전반으로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경기 침체와 소비 양극화가 심화하면서 매출 대부분을 책임지는 상위 고객을 붙잡는 일이 기업들의 핵심 성장 전략으로 떠올랐다. ‘상위 0.1%를 위한 경쟁’이 업종을 가리지 않고 번지는 가운데, 서비스의 상향 평준화에 따른 비용 증가와 브랜드의 진정성을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도 함께 커지고 있다.
‘VVIP’의 시대
“기존 VIP 체계만으로는 차별화하기 어려워진 거죠. 구매 금액 상한을 없애고 가장 많이 소비한 고객을 별도로 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일종의 VVIP인 셈이죠.”
국내 한 백화점이 올해 고객 등급 체계를 개편했다. 과거에는 연간 구매 금액에 따라 등급을 나눴지만 이제는 구매 금액 제한 없이 최상위 고객 수백 명만 별도 관리한다. 백화점 관계자는 “VIP 서비스가 상향 평준화되면서 더 높은 수준의 최상위 등급이 필요해졌다”며 “최상위 0.1% 고객에게만 차별화된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백화점 업계에서는 이미 ‘VIP를 넘어 VVIP의 시대’가 열렸다는 평가다. 롯데백화점은 최상위 등급인 ‘에비뉴엘 블랙’을 777명으로 한정했고, 신세계백화점은 최상위 999명만을 위한 ‘트리니티’를 운영하며 희소성을 높이고 있다. 현대백화점은 연간 1억5000만원 이상 구매 고객보다 한 단계 높은 최상위 등급을 신설했고, 갤러리아백화점은 상위 0.1% 고객을 위한 ‘PSR 블랙’을 운영하는 한편, 프라이빗 다이닝 등 초프리미엄 서비스를 확대하고 있다.
VIP 마케팅 자체는 새로운 전략이 아니다. 백화점과 금융권은 수십 년 전부터 고액 우수 고객에게 전용 라운지와 발레파킹 등 차별화된 서비스를 제공해 왔다. 다만 최근에는 일부 업종에 국한했던 최상위 고객 중심 마케팅이 산업 전반으로 빠르게 확산하는 모습이다.
대표적 사례가 이커머스 플랫폼 컬리다. 회사는 최근 6개월간 구매 실적을 기준으로 상위 999명을 VVIP, 상위 9999명을 VIP로 선정하고 있다. 특히 핵심 충성 고객인 VVIP에게는 파인 다이닝 체험을 제공한다. 우수한 식재료에 관심이 많은 고객 특성과 연결해 한국 미식 문화를 경험하게 하고, 동시에 컬리가 ‘파인(fine·품질이 높은) 플랫폼’이라는 이미지를 자연스럽게 각인시키기 위한 전략이라는 설명이다.
국내 1위 패션 플랫폼 무신사는 최고 등급인 ‘블랙 다이아몬드’를 신설했고, 라이프스타일 플랫폼 29CM는 최고 등급 회원을 위한 전담 고객센터를 운영하는 등 개인 맞춤형 서비스를 강화했다.
유통업계도 경쟁에 뛰어드는 모양새다. CJ올리브영은 블랙·골드 등급 회원만을 위한 쿠킹 클래스를 운영하고 프라이빗 라운지 이용 혜택도 제공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상위 0.1% 고객을 위해 전담 쇼핑 어드바이저·프라이빗 라운지·공항 픽업 서비스는 물론 유명 셰프와의 다이닝 외에 문화·예술 프로그램과 한정판 상품 선구매 기회까지 경쟁적으로 제공하는 추세”라고 말했다.
‘큰손’을 향한 제로섬
기업들의 VIP 전용 서비스는 효율적인 마케팅 수단으로 인식돼 왔다. 신규 고객 확보보다 기존 우수 고객의 구매를 늘리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고객 생애가치(LTV)를 높이는 것이 실적을 좌우하는 핵심 경쟁력으로 자리 잡으면서 상위 고객 확보가 기업들의 최우선 과제가 됐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문제는 모든 기업이 비슷한 전략을 택하기 시작하면서 차별성이 점차 희미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한 업체가 새로운 VVIP 혜택을 내놓으면 경쟁사도 이를 따라 하고, 다시 더 큰 혜택이 등장하는 식이다. 이른바 ‘VIP 군비 경쟁’(Arms Race)이다. 남들과 차별화하기 위해 시작한 서비스가 시간이 지나면 업계의 기본 서비스가 되고, 다시 더 큰 혜택 경쟁으로 이어지는 구조다.
서비스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기업이 부담해야 하는 비용도 함께 커진다. ▲프라이빗 라운지 운영 ▲전담 인력 배치 ▲초청 행사 ▲문화 프로그램 등은 모두 적지 않은 비용이 드는 서비스다. 단기적으로는 VVIP 고객의 구매액이 늘면서 매출이 증가할 수 있다. 그러나 경쟁사도 비슷한 수준의 서비스를 제공하면 차별 효과는 빠르게 희석된다. 반면 운영비와 마케팅 비용은 계속 늘어나면서 누구도 압도적인 경쟁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는 ‘제로섬 경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VVIP 서비스를 하지 않으면 경쟁에서 뒤처질 수 있고, 서비스를 강화하면 비용 부담이 커지는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초우량 고객 중심 전략이 항상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글로벌 명품 업계는 최근 수년간 가격 인상과 VVIP 중심 전략을 강화하며 객단가를 높여 왔다. 모두가 선망하는 최상위 고객이 선택하는 브랜드야말로 시대를 이끄는 브랜드라는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고가 서비스 비용까지 제품 가격에 반영되면서 가격이 가파르게 오르자 명품 시장의 성장 기반이었던 ‘희망 소비층’(aspirational customer)이 하나둘 이탈하기 시작했다. 실제 최근 몇 년 사이 펜디·구찌·버버리 등 입문형 럭셔리 브랜드는 중산층 소비 둔화와 맞물려 성장세가 꺾이며 실적 부진을 겪고 있다. 업계에서는 “VVIP 전략이 단기적으로는 객단가를 높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브랜드 저변을 좁힐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VVIP 서비스는 당장의 충성 고객을 확보하고 객단가를 높이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모든 기업이 같은 전략을 펼치면 차별성은 희미해지고 비용 부담만 커질 수 있다”며 “누가 더 많은 혜택을 제공하느냐보다 고객이 왜 그 브랜드를 선택해야 하는지를 만드는 기업이 결국 장기적인 경쟁력을 갖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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