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일반
유니세프까지 번진 VVIP 마케팅…기부도 ‘0.1% 잡기’ 경쟁 [큰손을 잡아라]②
- 럭셔리 굿즈·유명인 동원 캠페인 홍보
고액 후원자 위한 타깃 마케팅 전략
업계 “진짜 경쟁력은 꾸준히 쌓은 신뢰”
[이코노미스트 서지영 기자]
‘0.1% 큰손’을 잡기 위한 마케팅 경쟁은 소비 시장을 넘어 비영리단체 사이에서도 치열하다. 각종 구호기관들은 고액 후원자를 위한 전용 프로그램과 화려한 후원 굿즈를 내세우며 기부를 하나의 ‘브랜드 경험’으로 만들고 있다. 하지만 후원 유치를 위한 마케팅 경쟁이 과열될수록 기부의 본질보다 후원자의 등급과 혜택만 부각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기부 역시 결국 사람들의 신뢰를 얻는 것이 가장 강력한 경쟁력이라는 것이다.
유니세프도 뛰어든 ‘VVIP’ 마케팅
“자신의 분야에서 탁월함을 증명한 이들이 향하는 곳, 유니세프 엑설런스입니다.”
공식 UN 산하 아동구호기관 유니세프한국위원회(유니세프)는 지난 6월부터 ‘유니세프 엑설런스’ 캠페인을 시작했다. 이번 캠페인은 유니세프가 펼쳐온 이벤트 가운데서도 손꼽힐 만큼 ‘럭셔리’를 지향해 화제가 되고 있다.
14K 골드가 플레이팅된 써지컬 스틸로 제작한 엑설런스 반지와 배지는 글로벌 하이엔드 주얼리 디자이너 샐리 손이 재능기부로 디자인했다. 연필을 모티브로 한 반지와 배지에는 ‘UNICEF’ 각인과 함께 ‘모든 어린이가 자신의 꿈을 키우며 인생의 주인공으로 성장하길 바란다’는 응원의 메시지를 담았다.
유니세프는 엑설런스 캠페인을 알리기 위해 톱스타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배우 김희선·전여빈·이도현과 안무가 리정, 음악감독 김문정, 영화·CF감독 신우석, 사진작가 김시현, 마술사 유호진, 모델 박태민 등이 한껏 차려 입고 금빛 반지를 착용한 화보는 마치 까르띠에나 불가리 등 럭셔리 주얼리 브랜드의 프로모션을 연상시켰다.
유니세프도 이 점을 적극적으로 부각했다. 홈페이지에는 엑설런스 반지와 배지를 소개하며 “글로벌 하이엔드 브랜드의 시그니처 디자인으로 그 가치를 담았다”, “더 큰 영향력으로 더 많은 어린이의 미래를 바꾼다”, “정기후원을 통해 엑설런스가 되어 자신의 탁월함을 더 큰 선한 영향력으로 이어가는 분들께 반지를 드린다”고 소개했다. 엑설런스 캠페인은 기존 팀팔찌를 제공하는 다른 캠페인보다 월 정기후원 금액이 높게 책정돼 있다. 기부를 독려하는 과정에 최근 확산하는 VVIP 마케팅을 차용한 셈이다.
유니세프를 비롯한 각종 구호단체들은 수십 년 전부터 정기 후원자에게 팔찌나 반지 등을 증정해 왔다. 후원에 대한 감사의 표시이자 연대의 상징으로, 기부 문화를 확산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다.
진짜 경쟁력은 진정성
유니세프의 최상위 기부자 대상 마케팅을 바라보는 시선은 엇갈린다.
회사원 김정인(53)씨는 “젊은 시절 유니세프 정기 후원자가 된 뒤 받은 팔찌를 이따금 착용하곤 했다”며 “팔찌를 볼 때마다 선행을 했다는 뿌듯함도 있었고 패션 굿즈로 활용할 수도 있어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고 말했다. 이어 “VIP를 위한 마케팅은 예전부터 있었던 것 아닌가. 선한 영향력을 실천하려는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순기능도 있다”고 덧붙였다.
소수의 고액 후원자가 안정적인 재원을 제공하면 장기적인 구호사업을 추진하기 쉽고, 영향력 있는 후원자의 참여가 다른 개인이나 기업의 기부를 이끌어내는 촉매 역할을 할 수 있다. 실제 해외 주요 비영리단체들도 고액 기부자를 위한 별도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대형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반면 기부에 럭셔리 마케팅을 접목하는 데 불편감을 느꼈다는 주장도 있었다. 김원정(47)씨는 “과거 비영리단체의 후원 프로그램이 감사장이나 소정의 기념품을 제공하는 수준이었다면 최근에는 후원자의 소속감과 자부심을 높이는 방향으로 진화하는 것 같다”며 “자발적인 후원에 럭셔리 마케팅이 결합된 모습을 보니 뒷맛이 개운하지만은 않다”고 했다.
미국 자선·비영리 전문매체 ‘크로니클 오브 필란스로피’는 “비영리단체들이 ‘고액 후원자 중심 피라미드’에 지나치게 의존하면서 후원이 거래처럼 변질되고 있다”며 “고액 후원자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아질 경우 경기 침체나 관계 변화에 따라 모금이 크게 흔들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비영리단체는 고객서비스 부서처럼 운영될 수 없다”며 후원자에 대한 과도한 차별화와 특별대우는 기부의 본질을 흐릴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런 지적은 기업의 ESG(환경·사회·지배구조) 마케팅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소비자들은 이제 화려한 캠페인보다 기업이 오랜 시간 얼마나 일관되게 가치를 실천해 왔는지를 더 중요하게 평가한다. 브랜드와 비영리단체 모두 신뢰는 화려한 이벤트가 아니라 꾸준한 실천으로 쌓인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대표적인 사례가 글로벌 아웃도어 브랜드 파타고니아와 프랑스 스니커즈 브랜드 베자다. 먼저 파타고니아는 환경보호를 일회성 캠페인이 아니라 기업 운영 전반에 녹여내며 오랜 기간 소비자의 신뢰를 쌓았다. 베자 역시 친환경 소재와 공정무역을 사업 모델 전반에 반영하며 지속가능성을 브랜드의 정체성으로 만들었다.
반대로 ESG나 친환경을 앞세운 마케팅만 강조하고 실질적인 변화가 뒤따르지 않으면 역풍을 맞기도 한다. H&M은 친환경 컬렉션과 ‘컨셔스 캠페인’을 적극 홍보했지만, 과장된 환경성 주장 논란으로 ‘그린워싱’ 비판을 받으며 타격을 입었다.
비영리단체도 예외는 아니다. 후원자를 위한 차별화된 프로그램과 굿즈는 기부의 문턱을 낮추는 방법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후원을 이어가게 하는 힘은 ‘이 단체라면 믿고 맡길 수 있다’는 신뢰에서 나온다. 후원금이 어디에, 어떻게 쓰였는지 투명하게 공개하고 사회에 어떤 변화를 만들었는지 꾸준히 보여줄 때 신뢰는 쌓인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후원을 지속시키는 힘은 럭셔리한 경험이 아니라 오랜 시간 일관되게 이어온 진정성이기 때문이다.
비영리업계 관계자는 “마케팅은 기부의 문을 여는 역할을 할 수 있지만 후원을 이어가게 하는 것은 결국 단체에 대한 신뢰”라며 “굿즈나 혜택보다 중요한 것은 후원자가 자신의 기부가 어떤 변화를 만들었는지 꾸준히 확인할 수 있는 시스템”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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