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 일반
정부는 “수익률 높여라”, 기업은 “손실 나면?”…퇴직연금 딜레마
- [500조 퇴직연금 어디로]②
정부, DB형 수익률 제고·실적배당 다변화 압박
운용 실패 시 기업 재무 부담 우려
[이코노미스트 이병희 기자] 정부가 기업이 운용 책임을 지는 확정급여(DB)형 퇴직연금을 대상으로 사실상 체질 개선 압박에 나섰다. 적립금의 대부분이 예·적금 등 원리금보장형 상품에 매여 있는 구조를 깨고 실적배당형 상품으로의 다변화를 적극 유도하겠다는 방침이다. 하지만 자칫 원금 손실이 발생할 경우 그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정부는 지난 8월 DB형 적립금의 목표수익률을 최소한 임금 상승률 이상으로 설정할 것을 권고했다. 고용노동부와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25년 말 기준 전체 퇴직연금 적립금 501조4000억원 가운데 DB형은 228조9000억원으로 45.7% 수준이다.
DB형은 근로자가 퇴직할 때 받을 급여가 사전에 정해지는 퇴직연금 상품이다. 기존의 ‘퇴직금’과 유사하다. 통상 직장인의 퇴직 전 3개월 평균임금에 근속연수를 곱해 계산한다. 직장에 오래 다닐수록 임금이 인상되는 것을 고려하면 퇴직연금도 이에 비례해 올라간다. 사용자가 직장인의 DB형 연금을 운용해 높은 수익률을 내면 회사의 부담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런데 지난해 DB형 연간 수익률을 보면 3.5%에 그친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5년간 누적 수익률은 15.9%로 같은 기간 임금 상승률 18.9%를 밑돌았다. 만약 적립금 수익률이 임금 상승률보다 낮으면 그 차이만큼을 기업이 추가로 적립해야 하기 때문에 기업 부담이 커진다. DB형 적립금의 91.9%가 원리금보장형 상품에 집중된 것을 고려하면 정부가 DB형 퇴직연금 수익률을 높이라고 권고하는 원인을 짐작할 수 있다.
정부는 퇴직연금사업자의 자문을 활용해 자산배분을 할 것을 유도하고 있다. 자산 운용 전문가인 퇴직연금사업자가 기업의 정보와 위험 선호도 등을 분석해 목표수익률과 자산배분 방안을 제시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실제 자문을 받아 실적배당형·원리금보장형 등으로 투자를 다변화한 한 사업장의 수익률이 5.9%에서 7.4%, 25.5%로 개선된 사례를 소개하기도 했다.
고용노동부는 연말까지 DB형 적립금 운용 모범 사용자와 사업자를 선정해 포상한다는 계획인데, 동시에 적립금 미충족 사업장에는 정기 감독을 실시하고 과태료 부과 등 실효적인 제재 조치도 병행한다는 방침이다.
문제는 원금 손실이 발생할 경우 그 책임을 누가 질 것인가 하는 점이다. DB형의 핵심 구조는 운용 결과에 따른 손익이 온전히 기업에 귀속된다는 데 있다. 운용 수익이 높아지면 기업의 납입 부담이 줄어들지만, 반대로 시장 변동성으로 손실이 발생하거나 목표 수익률에 미달하면 그 부족분을 기업이 자금을 마련해 메워야 한다.
정부 권고에 따라 원리금보장형에 묶여 있던 적립금을 주식·채권형 펀드, 상장지수펀드(ETF) 등 실적배당형 상품으로 옮겼다가 증시 폭락 등으로 원금 손실이 발생할 경우 재무적 타격은 고스란히 기업의 몫이 된다는 뜻이다.
은행권 관계자는 “원리금보장 상품 수익률이 높지 않아도 상당수 직장인이나 기업이 이 상품을 선택하는 데에는 ‘적어도 원금을 지킬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라며 “높은 수익률을 원하면서 손실을 감내할 수 있는 직장인이라면 퇴직연금을 확정기여(DC)형으로 전환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자율적 머니무브…5대 은행 DC·개인형 퇴직연금(IRP) 투자형 비중↑
실제 개인 가입자가 직접 운용하는 DC형과 IRP 시장에서는 이미 자발적인 ‘머니무브’가 전개되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 등 5대 시중은행의 DC형 퇴직연금 내 원리금비보장형(투자형) 적립금 비중은 올해 1분기 말 29.15%에서 2분기 말 37.73%로 석 달 만에 8.58%포인트 늘었다. 적립금 규모 역시 17조9173억원에서 25조3701억원으로 7조4528억원이나 불어났다.
IRP 시장에서의 자금 이동은 더 공격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5대 은행의 IRP 원리금비보장형 비중은 1분기 말 39.73%에서 2분기 말 48.01%로 8.28%포인트 상승했다. 적립금 규모도 30조8979억원에서 42조37억원으로 11조1058억원 증가했다.
이 같은 머니무브의 배경에는 상반기 증시 호황과 ETF 수요 확대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증시 상승세가 이어지는 동안 정기예금 등에 묶여 있던 자금을 ETF 등 실적배당형 상품으로 갈아탄 가입자가 늘었고 기존에 투자해 둔 상품의 평가액 자체가 커진 점이 비중 확대에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설명했다.
원금 손실 위험은 낮게, 기대 수익률은 높게
퇴직연금 시장에서 실적배당형 투자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지만, DC형과 IRP 가입자에게는 반드시 지켜야 할 법적 규제도 있다. 전체 적립금의 최소 30%는 원리금보장형이나 가격 변동성이 낮은 안전자산으로 채워야 한다는 ‘안전자산 30% 의무 보유 규정’이다.
오은미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 지식콘텐츠팀 팀장은 ‘흔들리는 증시 속 퇴직연금 지키기, 안전자산 30% 채우는 법’ 보고서를 통해 안전자산을 굴리는 다섯 가지 운용 방식을 소개했다. 첫째, 원금을 절대 지키고 싶은 투자자는 정기예금이나 원리금보장형 주가연계파생결합사채(ELB)·파생결합사채(DLB) 등 원리금보장상품에 가입하는 것이다.
둘째, 매일 이자를 받으며 필요할 땐 다른 곳에 투자하고 싶은 투자자는 금리형(파킹형) ETF를 추천할 수 있다. 안정적인 곳에 자산을 맡겨 하루치 이자를 챙기다가 언제든 자금을 활용할 수 있다.
셋째, 금리가 하락할 때 시세차익을 챙기고 싶은 투자자는 채권형 ETF를 눈여겨볼 만하다. 채권형 ETF는 기초자산이 채권이기 때문에 이자 수익이 분배금 형태로 지급된다. 또 금리 하락 국면에서는 채권 가격이 상승하기 때문에 자본 차익을 추가로 기대할 수도 있다.
넷째, 주식 비중을 최대한으로 늘리고 싶은 투자자라면 채권혼합형 ETF를 주목할 수 있다. 주식과 채권을 혼합한 상품으로 상품 내 주식 비중이 최대 50%까지 포함될 수 있다. 퇴직연금에서 30% 안전형 자산 자리에 이 채권혼합형을 넣으면 전체 포트폴리오에서 주식이 차지하는 비중을 극대화할 수 있다.
다섯째, 복잡한 계산이 싫은 경우 은퇴 시점까지 자산배분을 맡아주는 타깃데이트펀드(TDF) 상품도 있다. 적격 TDF 상품은 투자 기간에 맞춰 주식 비중을 자동으로 조절해 준다. 은퇴 기간이 다가오고 남은 투자 기간이 줄어들수록 주식 투자 비중을 줄여가면서 운용해 주는 방식이다.
오 팀장은 “30% 규정은 언뜻 제약처럼 보이지만, 지금 같은 변동성 장세에서는 포트폴리오의 중심을 잡아주는 든든한 축이 된다”며 “30%를 자산배분 관점에서 전략적으로 채워두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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