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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URES history - ‘조국수호의 의무를 다했다’

FEATURES history - ‘조국수호의 의무를 다했다’

영국을 구한 넬슨의 인생을 재조명한다
넬슨 제독은 자신의 매력과 지능에 힘입어 정상에 섰다.



존 서그덴의 ‘넬슨, 앨비언의 검(Nelson: The Sword of Albion)’이 출간됐다. 호레이쇼 넬슨의 기념비적인 일대기 제2권이자 마지막권이다. 제독의 기억이 오늘날 영국인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반추하기에 좋은 시점이다. 넬슨은 1797년 9월 전투 중 팔을 잃고 일선에서 물러나 아편으로 살아가며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이 책은 그 때부터 8년 뒤 트라팔가 전투에서 승리하는 순간의 영광스러운 죽음까지를 그린다.

그 승리로 영국은 단기적으로는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로부터 안전을, 장기적으로는 다음 세기 해양 패권을 확보했다. 따라서 그를 영국의 가장 위대한 영웅으로 꼽는다 해도 이론의 여지가 없을 듯하다. 그는 오늘날 엘리자베스 1세, 웰링턴 장군, 윈스턴 처칠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평가를 받는다. 영국 해군은 아직도 매년 그의 최후이자 최대 전승 기념일인 10월 21일에 그의 ‘불멸의 기억(Immortal Memory)’을 축하한다.

책은 넬슨의 개인적인 허영심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런던 중심부 트라팔가 광장 내 51.6m 높이의 받침대 위에 그의 조각상이 올려져 있다. 하지만 책에는 그처럼 높은 넬슨의 위상을 깎아 내릴 만한 내용도 없다.

호레이쇼 넬슨은 1758년 9월 29일 잉글랜드 노포크의 버넘소프에서 태어났다. 교구 목사 에드먼드 넬슨의 생존한 아들 중 다섯째였다. 불과 12세에 64문의 대포를 갖춘 전함 ‘레조너블’을 타고 바다로 나갔다. 그의 이모부 모리스 서클링 함장이 지휘하는 함선이었다. 심하게 뱃멀미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클링은 그를 항법과 항해 전문가로 가르쳤다.

그의 실용적인 선박 조종술 교육은 대단히 효과적이었다. 넬슨은 불과 14세 때 북극 항해단의 선장용 소형보트 키잡이로 선발됐다. 귀환하자마자 대포 20문의 시호스를 타고 동인도제도로 파견됐다. 하지만 “벵골에서 바스라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지를 방문하는 동안 건강을 완전히 잃어 귀환명령을 받았다.

그에게는 암담한 시기였지만 젊은 넬슨의 개인적 숙명의식을 강하게 일깨운 시기이기도 했다. “거의 목숨을 내려놓고 싶었다”고 그가 훗날 이 시기를 가리켜 말했다. “그러나 돌연 내 안에서 애국심의 불꽃이 피어 올랐다. 이어 나는 영웅이 될 거야 라고 외쳤다. 모든 위험에 맞서겠다고 신에게 다짐했다.” 1777년 4월 넬슨은 대포 32문짜리 프리깃함 로스토프트에서 복무 중이었다.

그의 위대한 친구 윌리엄 로커 함장의 군사 철학은 간단했다. “프랑스인을 가까이 끌어들여 때려눕혀라(Lay a Frenchman close and you will beat him).” 넬슨은 그 교훈을 마음 속 깊이 새겨뒀다. 그는 자신의 매력, 지능, 노력, 그리고 뛰어난 해상작전 능력에 힘입어 승승장구했다.

때마침 이모부 서클링도 영국해군 감사관으로 승진했다. 지금은 정실주의와 개인적 후원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지만 영국의 가장 뛰어난 해군 선장이자 지휘관의 경력에는 도움이 됐다. 엘리자베스 1세, 웰링턴 장군, 윈스턴 처칠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다.

1794년 7월 12일, 넬슨은 코르시카섬 마을 칼비를 포위공격하고 있었다. 그가 서 있던 곳 근처에서 포탄이 터지며 날아오른 파편에 오른쪽 눈을 잃었다. 3년 뒤에는 포도탄(여러 개의 쇳덩이로 된 대포알)에 한쪽 팔을 잃었다. “왼손만 남은 외팔이 제독을 누가 불러주겠나”라며 그는 한탄했다. “친구들에게 짐이, 조국에는 무용지물이 됐다.”

다음 해의 사건들은 곧 그의 생각이 큰 착각이었음을 입증했다. 지난 2세기 사이 출간된 아마도 최고의 넬슨 전기에서 서그덴이 상세하게 묘사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함대가 프랑스 툴롱을 에워싼 영국군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갔다. 넬슨은 직감적으로 그들이 이집트로 향한다고 판단했다. 1798년 8월 1일 저녁 마침내 나일강 어귀의 아부키르 만에 정박중이던 프랑스 함대를 따라잡았다. 넬슨은 프랑스 진용의 머리 쪽으로 우회해 육지 쪽에서 공격을 시작했다. 해전 역사상 손꼽히는 압승을 거뒀다. 프랑스 전함 17척 중 4척만 달아났으며 나폴레옹의 군대는 아시아에서 완전히 진퇴양난에 빠졌다. 넬슨은 귀족 반열에 올랐으며 러시아의 차르, 터키의 술탄, 런던 시, 동인도 회사 등등으로부터 귀중품 선물이 쇄도했다.

그 전투 중 이마에 중상을 입어 나폴리에서 회복하던 중 엠마 해밀턴과 사랑에 빠졌다. 나폴리 주재 영국 대사 윌리엄 해밀턴경의 부인이었다. 낭만파들은 역사상 손꼽히는 멋진 로맨스로 묘사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론의 여지 없이 섹시했지만 사실 다소 짜증나는 여성이었던 듯하다. 그녀가 넬슨의 강한 허영기에서 바람을 빼지 않은 건 분명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단명에 그친 ‘아미앵 휴전협정(Peace of Amiens)’이 끝날 무렵 넬슨은 지중해 지역 해군 사령관에 임명됐다. 그 뒤 2년 동안 자신의 지휘함 빅토리호를 10일 이상 벗어나지 않고 프랑스 툴롱을 봉쇄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2년이었다.

프랑스 불로뉴의 대군은 언제라도 영국해협을 횡단할 태세를 갖췄다. 영국 해군이 유인작전에 걸려들어 봉쇄가 풀리는 순간만 기다렸다.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와 1940년 브리튼 전투(런던 상공에서 벌어진 영국과 독일의 전투) 사이의 기간에 나폴레옹은 영국에 최대의 위협이었다.

넬슨은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 편대를 뒤쫓아 사력을 다한 대서양 횡단 항해를 두 차례나 했다. 그뒤 마침내 1805년 10월 21일 적군을 따라잡고 스승인 로커 함장의 이론을 최종 시험하는 데 성공했다. 서그덴의 탁월한 설명에 따르면, 트라팔가에서 넬슨의 전략은 2열 종대로 적진을 뚫고 들어가 대략 3등분으로 갈라놓은 뒤 후방 3분의 2에 영국 화력을 집중시키는 방법이다. 그래서 연합편대의 33척과 영국 27척의 숫자를 대등하게 만들려는 의도였다. 창의적이고 대담했으며 부하 지휘관들로부터 ‘넬슨 터치’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 계획은 완벽하게 성공했다. 하지만 실행하는 데는 상당한 기술과 담력이 필요했다. 적군이 영국 함대에 일제포격을 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군은 답답할 정도로 오랜 시간 포격을 당한 뒤에야 대응 포격이 가능했다. 넬슨은 빅토리호에서 한 쪽 열을 지휘했다. 전투 개시 직전 그는 함대에 자신의 유명하고 감동적인 신호 깃발을 올리도록 지시했다. “영국은 모든 사람이 자신의 의무를 다하기를 기대한다.”

계획은 넬슨의 지시대로 정확히 실행됐다. 하지만 전투 중 대포 74문의 프랑스 리다 우터블호의 높은 곳에 있던 저격수가 그를 향해 총알을 발사했다. 머스켓 탄환이 왼쪽 어깨에 명중해 그에게 치명상을 입혔다. “놈들이 끝내 나를 잡았군.” 그가 빅토리호의 하디 함장에게 말했다. “내 척추를 관통했어.” 그러나 넬슨이 숨을 거두기 전 하디는 그에게 한 척의 영국 전함도 잃지 않고 적함 14척이 항복했다고 알릴 수 있었다. “천만다행으로 내 의무를 다했구나.” 아직도 영국인들이 해마다 찬양하는 불멸의 영광 속으로 사라져가면서 넬슨이 대답했다.

자료조사부터 저술까지 훌륭하게 이뤄진 이 책을 읽는 영국인은 강한 격세지감, 동경, 비애감을 억누르기 어렵다. 영국 해군의 옛 위용과 현재의 유례없는 쇠락을 두드러지게 대비시키기 때문이다. 지금은 사상 처음으로 프랑스 해군이 영국 해군보다 더 크고 강해졌다.

당시 영국 외무장관이자 미래 총리인 파머스턴 경은 1840년 1월 프랑스 대사 세바스티아니 백작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평화시든 전시든 우리 현역 함대가 프랑스 함대보다 열세가 되는 일은 결코 없다. 휘그당(자유당의 전신)이든 토리당(보수당의 전신)이든 정부와 국민이 허용하지 않는다.” 그는 불황으로 국방비 지출 결정권이 재무장관 손으로 넘어갈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견하지 못했다. 역사의식과 해양대국의 자부심을 지닌 영국인에게 이 뛰어난 책은 정말 달콤씁쓸한 경험을 준다.

- 필자 앤드류 로버츠는 ‘전쟁의 폭풍우(The Storm of War: A New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등 여러 편의 책을 펴냈으며 현재 나폴레옹 전기를 저술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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