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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NOM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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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심 잃고 좌·우파 정치 협공까지…흔들리는 마크롱 정권 [채인택 글로벌 인사이트]

전문가 칼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개혁에 힘을 실어줄 범여권 연합인 ‘앙상블(다함께)’이 6월 19일 치른 총선 결선투표에서 하원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했다. 이에 따라 마크롱 대통령이 추진해왔던 경제‧사회 분야 개혁 정책이 속도 조절의 길을 걸을 것인지, 오히려 더욱 강력한 추진으로 마크롱의 정치적 브랜드를 확고히 할 것인지에 관심이 모인다. 6월 12일의 총선 1차 투표에 이어 1주일 만인 19일에 열린 결선 투표에서 앙상블은 38.57%를 득표해 577석의 하원 의석 중 245석을 얻는 데 그쳤다. 289석 이상인 과반에서 45석이 부족한 것은 물론 2017년 총선에서 마크롱이 확보했던 의석보다 무려 105석이나 줄었다. 반면 1997년 이후 처음으로 4개 정당이 힘을 합쳐 선거를 치른 좌파연합 뉘프(NUPES‧신민중연합환경‧사회)는 31.60%를 득표해 131석을 얻었다. 연합세력으로선 2위의 의석이다. 뉘프에 참가한 극좌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LFI)’와 녹색당‧사회당‧프랑스공산당 등 4개 정당은 지난 총선에서 획득했던 의석보다 79석을 더 얻었다. 이번 좌파연합은 장 뤽 멜랑숑이 이끌었다. 프랑수아 미테랑과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을 배출했던 전통의 중도좌파인 사회당이 초라한 모습으로 극좌 정당과 손잡고 좌파 연합에 참여한 것도 눈여겨볼 점이다. 프랑스 공산당도 마찬가지다. 사회당은 지난 대선 1차 투표에서 불과 1.7%의 득표율로 당 자체가 존폐 위기에 처했다. 프랑스 공산당의 2.3%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런 위기가 이들 정당이 1997년 이후 처음으로 좌파 연합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주목할 점은 극우 국민연합(RN)이 17.30%를 득표해 89석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지난 총선 때 얻은 8석보다 무려 81석이 증가한 비약적인 발전이다. 프랑스 하원에선 15석 이상을 차지해야 원내교섭단체의 지위를 얻는데, 극우정당이 ‘마의 15석 고지’를 넘어 이를 얻은 것은 프랑스에서 처음이다. 극우 정당의 개가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극좌를 포함한 좌파연합과 극우 진영이 약진한 것에 비교해 전통의 중도우파는 이번 총선에서 그야말로 몰락했다. 7.29%를 득표해 64석 확보에 그쳤다. 지난 총선에 비해 66석이 줄었다. 이런 결과를 낸 이번 총선에서 가장 주목받은 인물은 멜랑숑이다. 지난 대선에서 21.95%의 지지율로 3위를 차지했던 극좌, 또는 급진좌파로 분류되는 정치인이다. 당시 멜랑숑은 2위를 차지했던 극우 마린 르펜과의 득표율 차이가 40만 표 정도로 1%포인트도 채 되지 않았다. 840만 표 이상을 득표해 1958년 제5 공화국 헌법 아래에서 극좌파로서 최다 득표를 기록했다. 특히 18~34세 유권자의 3분의 1이 그를 지지해 청년층 득표율 1위를 기록했다. 이를 통해 멜랑숑은 프랑스 정치 지형에서 좌파가 재기할 발판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얻었다. 그 여세를 몰아 멜량숑은 사분오열된 좌파를 모아 연합을 이루고 총선에서 승리했다. ━ 멜랑숑 “부 재분배, 정년 연장 반대”로 마크롱에 대립 멜랑숑은 급진적인 정책으로 마크롱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정치적인 도전자로 평가된다. 그는 프랑스가 불평등과 기후위기에 더해 전염병 위기에 처해있다고 진단한다. 이는 다른 정치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 해법으로 급진적인 정책을 제시해 극좌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정부가 금융을 통제하고 부를 재분배하며, 복지를 대대적으로 확대하고 에너지를 공공주도로 전환할 것을 주장해왔다. 그의 생각과 정책적 의지가 가장 잘 드러난 것이 지난 대선과 이번 총선에서 마크롱이 주장해온 정년 연장(62세에서 65세로)에 정면으로 반대한 것이다. 한국에선 정년 연장을 은퇴자나 장년층에 대한 취업 기회의 연장이라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은 편이다. 상시 고용 노동자의 평균소득을 기준으로 한 연금의 평균 소득대체율이 31.2%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42.2%보다 11%포인트가 작으며, 그 60% 수준이다. 이에 따라 노후 대비를 순전히 개인이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정년 연장을 원하는 사람이 많다고 볼 수 있다. 자녀 교육비와 결혼 경비를 비롯한 생계 외적인 부담도 상당하다. 하지만 일찍이 연금제도가 발달한 선진국에선 2017년 기준으로 미국 71.3%, 프랑스 60.5%, 일본 57.7%, 영국 52.2%, 독일 50.9%로 소득 대체율이 높은 편이다. 일찍이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 시절에 연금 개혁을 이룬 독일에서 연금의 소득 대체율이 낮은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외에는 비교적 넉넉한 은퇴 생활을 보장하고 있다. 퇴직하고 연금생활을 누리는 것도 나쁘지 않은 상황이다. 그래서 프랑스에선 마크롱이 추진하는 정년 연장이 연금 지급 시기를 늦추고 더 길게 일해야 연금을 주겠다는 것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 마크롱이 법정 은퇴 시기를 늦추는 것은 여기에 드는 연금 재정의 안전화를 기하기 위해서다. 연금 고갈을 늦추려는 연금 ‘개혁’의 일환이다. 정치적으로는 멜랑숑이 여기에 반대의 기치를 들었지만, 포퓰리스트인 극우 르펜도 같은 입장이라는 점은 눈여겨볼 사안이다. 이념적으로 극과 극인 극좌와 극우가 정년 연장 반대를 들고 나선 것은 그것이 득표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 정책이 이해가 걸린 사람이 생각 외로 많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멜랑숑의 가장 큰 정치적 지지 세력은 노동조합과 함께 ‘노란조끼’ 시위대에 참가하는 성난 노동자들이다. 이들은 마크롱 집권 초인 2018년 10월 유류세 인상에 따른 석유 제품 가격 인상에 항의하며 노동자의 상징인 녹색 안전복을 입고 처음 시위에 나섰다. 하지만 노란조끼의 요구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자동차세 인하와 고유가에 대한 대책 마련 요구로 확대됐다. 여기까지는 노동 계층 생활고의 개선을 요구하는 수준이었다. 마크롱 정부는 휘발유와 디젤유 인상을 6개월 연기하는 등 이들의 요구를 수용했다. ━ 멜랑숑 지지세력 노동계, 마크롱 개혁 정책에 반기 하지만 여러 차례의 시위로 세력을 확인한 노란조끼 시위대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들의 요구는 본격적으로 마크롱의 개혁에 대한 저항으로 번졌다. 부유세 인하와 재정 긴축 등 마크롱이 2017년부터 추진해온 개혁정책 전반에 반대하기 시작했다. 나아가 해고를 쉽게 하는 노동정책 등 마크롱의 개혁 정책 전반에 반기를 들었다. 마크롱의 개혁 정책이 중산 계급과 노동 계급에게만 일방적으로 부담을 준다는 것이 이유였다. 마크롱의 개혁정책은 좌우파 모두의 이념적 도그마에 사로 잡혔던 프랑스 경제 체질을 바꾼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이를 위해 2017년 대선부터 600억 유로의 공공 지출 축소와 공공부문 일자리 12만 개 축소를 공약했다. 이렇게 절약한 돈으로 500억 유로 규모의 공공투자로 프랑스의 미래를 새롭게 만들겠다는 약속이었다. 150억 달러를 청년과 구직자를 위한 직업교육에 투입하고, 도 다른 150억 유로를 환경과 에너지 분야에 투자해 일자리를 늘리겠다는 공양이었다. 아울러 낙후한 공공행정의 디지털화와 농업과 지역 교통, 보건 부문의 현대화를 당면 과제로 설정해 프랑스를 능률적인 나라로 바꾸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프랑스는 1960년 이래 ‘지도주의(Dirigisme)’라는 정책 이념에 따라 자본주의 체제의 틀 안에서 정부가 강력한 정책적 수단을 통원해 경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왔다. 이를 통해 경제성장의 정책적 비원과 동력을 제공하고, 노동 계층을 보호한다는 게 정부가 경제를 자유방임하지 않고 개입한 명문이었다. 실제 프랑스는 이를 통해 1960~80년대 고속 성장을 이루기도 했다. 하지만 2007~2012년 우파의 니콜라 사르코지와 2012~2017년 좌파인 사회당의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 집권기에 프랑스는 심각한 성장 동력 하락을 경험했다. 사르코지 집권기에 프랑스의 경제성장률은 2007년 2.4%, 2008년 0.3%, 2009년 –2.9%, 2010년 1.2%, 2011년 2.2%의 낮은 경제성장률에 머물렀다. 사르코지에 실망한 유권자들은 좌파인 올랑드를 대통령으로 밀었지만, 올랑드 집권기에 프랑스 경제는 2012년 0.3%, 2013년 0.6%, 2014년 1.0%, 2015년 1.1%, 2016년 1.1%의 성장률을 보여 국민에게 실망을 안겨줬다. 올랑드의 사회당 정부에 장관으로 몸담았지만 좌우파 모두를 비판하며 이념에 경도되지 않고 실용을 추구하는 새로운 중도를 표방한 신예 마크롱이 2017년에 대통령에 오른 원동력은 경제에 대한 국민의 기대와 희망이었다. 전통의 지도주의에서 탈피한 자유방임적‧자유주의적 경제 정책으로 프랑스 경제에 성장 동력을 새롭게 마련하라는 유권자의 기대가 마크롱의 어깨에 얹힌 셈이다. 마크롱은 더 일하고 더 성장하는 프랑스 경제를 만들기 위해 대대적인 개혁에 나섰지만 그의 경제 성적표도 썩 좋지 않은 상황이다. 2017년 2.3%로 반짝 좋아졌지만 2018년 1.8%, 2019년 1.5% 정도에 머물렀다. 코로나19가 강타하면서 전국적으로 봉쇄를 할 수밖에 없었던 2020년 성장률은 –8.1%로 떨어졌다. 물론 2020년의 마이너스 성장은 팬데믹 때문이라는 변명이 가능하긴 하지만 개혁의 화려한 기치에 비해선 초라하다는 평가를 면하기는 힘들다. ━ “부유층 입김 강한 대통령제 폐지, 대중 참여제” 주장도 기본적인 경제 통계로 국세를 살펴보면 마크롱의 프랑스가 차지하는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2021년 1월 통계기준 인구 6800만 명에 국내총생산은 국제통화기금(IMF) 2022년 전망치가 명목금액 기준 3조610억 달러로 세계 7위다. 미국(25조3468달러), 중국(19조9115억 달러), 일본(4조9121억 달러), 독일(4조2565억 달러), 인도(3조5347억 달러), 영국(3조3760억 달러) 다음이다. 유럽연합(EU) 내에선 전통의 경쟁국이자 협력국인 독일 다음으로 GDP가 많다. 2016년 6월 23일 국민투표를 거쳐 2020년 1월 31일을 기해 EU에서 완전 탈퇴한 영국보다도 떨어진다. 독일은 인구가 8324만 명으로 프랑스보다 많지만, 영국은 6722만 명으로 프랑스와 거의 같다.. 그런데도 프랑스 GDP가 영국보다 떨어진 것은 여러모로 프랑스 경제의 상황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프랑스가 어려움을 겪는 동안에 정부의 방역 통제 등에 불만을 품은 노란조끼 시위가 계속됐다. 이는 프랑스 정치‧경제‧사회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수술을 욕하는 극좌파와 포퓰리즘 정책을 들고나온 극우파가 지난 대선에 이어 이번 총선에서 세력을 얻은 원인으로 분석할 수 있다. 마크롱은 개혁을 하지만 이를 계급적으로 불리하다고 판단한 노동 계층과 좌파 세력에 다양한 이유를 들며 이에 지속해서 저항한 것이다. 이는 지난 4월 연임에 성공한 마크롱의 집권 2기 내내 따라다닐 ‘잎 속의 검은 잎’이 될 수밖에 없다. 결국 마크롱에게 가장 큰 부담을 주는 야당 인물은 극좌 멜랑숑일 수밖에 없다. 멜랑숑은 연금 개혁에 반대한 것은 물론, 유가 등 생필품 가격 인상에 정부가 더욱 개입할 것을 요구해왔다. 당장 오르는 물가에 시달리는 국민이 이에 호응한 것이 이번 총선의 결과로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말랑숑은 여기에 더해 정치 개혁까지도 부르짖는다. 1958년 샤를 드골이 만든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의 제5공화국의 헌법과 정치 체제를 근본적으로 수술하자고 주장한다. 프랑스는 유럽에서 드문 대통령 중심제, 그것도 대통령의 권력이 집중된 독특한 권력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밀랑숑은 이런 체제 때문에 계급적으로 부유층의 입김이 강해지고, 노동 계층의 목소리가 제대로 정치에 전달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대통령 중심제를 폐지하고 대중의 참여와 토론을 중심에 두는 새로운 정치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프랑스의 모순과 문제점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나온다며 이에 대한 대대적인 수술을 주장한다. 반마크롱과 반신자유주의를 넘어 반자본주의, 반세계화로 이어지는 반체제적인 성격까지 보이는 셈이다. 이런 멜랑숑과 마크롱의 대립과 경쟁은 앞으로 프랑스 정치와 경제를 강타할 가장 큰 요인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 극우 포퓰리스트인 르펜까지 가세하면서 프랑스 정치는 혼미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프랑스 정치는 앞으로 마크롱의 임기와 이번에 선출된 제5공화국 제16대 국회의 임기 5년 내내 어려움에 빠질 수밖에 없다. 좌·우파 모두를 공격하며 새로운 중도 정치세력을 형성한 마크롱이 좌우로부터 동시 협공을 당하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21세기 프랑스에서 정부가 경제를 지배했던 지도주의를 넘어 정치가 경제에 본격적으로 부담을 주는 묘한 상황이 도래할지도 모른다. ※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2022.07.02 15:00

8분 소요
팬데믹 끝에 경제대란 … 세계 공존의 길은 [채인택의 글로벌 인사이트]

전문가 칼럼

물가가 날개를 달았다. 하늘 높은 줄 모를 정도다.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이에 따라 세계 각국에서 인플레와 실업률 같은 경제 지표가 정치 문제가 되고 있다. 경제, 특히 생활물가는 각국 지도자의 정치 생명을 좌우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 국제사회를 뒤흔드는 막강한 강대국의 지도자도 이를 피해갈 수 없다.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라는 미국 민주당 빌 클린턴의 1992년 선거구호가 21세기에 가장 절실한 정치 모토가 되고 있다. 글로벌 물가 상승은 그야말로 걷잡을 수 없는 형국이다. 식료품부터 기름까지 거의 모든 생활필수품 가격이 높이뛰기 경주를 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진정되면서 생긴 글로벌 수요 급증에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에너지와 곡물 교역 동맥경화, 거기에 중국 대도시에서 잇따르는 코로나19 봉쇄에 따른 글로벌 공급망 교란까지 겹쳤다. 여러 가지 요인이 한꺼번에 작동한 '퍼펙트 스톰'이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 기업은 물론 개인까지 일상생활 속에서 그 심각성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을 정도다. 몇 가지 데이터를 살펴보자. 핵심은 기름값이다. 전 세계 196개 국가에서 나오는 2000만 종의 경제 정보를 수집해 제공하는 트레이딩이코노믹스에 따르면 6월 15일을 기준으로 평균 원유 가격은 배럴당 118.370달러로 1년 전보다 64.60%가 올랐다. 천연가스는 MMBtu당 7.4470달러로 1년 새 124.95%가 뛰었다. 인상 폭이 원유의 거의 두 배에 이른다. 소비자의 피부에 직접 와 닿는 가솔린 값은 갤런 당 3.9588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84.16%가 뛰었다. 주유소 앞에 서면 한숨부터 나는 상황이다. 어느 나라든 집권 세력 지도자는 간담이 서늘해 질 수밖에 없다. 난방유는 갤런당 4.4121달러로 한 해 전보다 108.32%가 인상됐다. 석유와 가스가 비싸고 구하기도 힘들어지자 그동안 기후변화를 유발하는 원흉으로 지목돼 조만간 생산·소비가 종말에 올 것으로 예상했던 석탄이 주목받고 있다. 석탄은 톤당 383.00달러로 1년 새 206.40달러가 올랐다. 농산물 가격도 천정부지다. 밀은 부셸(36.36872리터)당 10.4750달러로 1년 새 58.02%가 올랐으며, 쌀은 33.62%, 귀리는 75.68%, 콩은 16.98%, 옥수수는 13.60%, 감자는 10.87%가 각각 뛰었다. 야자유는 톤당 5657.00말레이시아링깃으로 66.19%가 올랐다. 지난 1년 새 해바라기유는 51.52%가, 채종유는 51.98%, 버터는 78.18%가 각각 인상됐다. 우유는 40.70%, 오렌지 주스는 52.66%, 커피는 46.20%, 캐놀라는 33.37%가 각각 올랐다. 1년 전보다 가격이 내린 농산물은 목재(-46.73%)와 기호품인 차(茶·-15.36%)·코코아(-1.58%) 정도다. 농산물 중 산업 원료인 고무(3.43%)와 양모(3.23%)로 보합세다. 특히 쌀과 함께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는 기본 곡물인 밀은 15일 부셸당 10.5200달러를 기록했다. 올해 7.5800달러로 시작해 평균 종가가 9.9253달러에 이른다. 올해 최고가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2월 24일) 12일째인 3월 7일에 기록한 12.9400달러였다. 최저가는 1월 14일의 7.4150달러였다. 올해만 따져도 최저와 최저 가격이 1.75배 차이다. ━ 세계 각국, 국가 경제 성적표가 정권 흔들어 집단으로 상승하는 물가 때문에 각국 정부는 몸살을 앓고 있다. 경제 성적표도 좋지 않다. 국내총생산(GDP)을 기준으로 10대 경제 대국의 인플레율을 살펴보면 영국(9.0%)·미국(8.60%)·독일(7.90%)·인도·(7.04%)·이탈리아(6.90%)·캐나다(6.80%)·프랑스(5.20%)·한국(5.40%)·일본(2.50%)·중국(2.10%)의 순으로 나타났다. 유로존 평균은 8.10%였다. 실업률은 이탈리아(8.40)·인도(7.80%)·프랑스(7.30%)·캐나다(6.80%)·중국(6.10%)·캐나다(5.10%)·독일(5.00%)·미국(3.60%)·한국(2.80%)·일본(2.50%)의 순이었다. 유로존 평균은 6.80%로 나타났다. 경제 성적이 낮은 정치 지도자는 가차 없이 여론의 심판을 받고 있다. 올해 들어 정치적인 불투명성과 혼란 속에 정쟁이 가열하는 나라를 보면 경제 성적표와 연관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영국에선 보리스 존슨 총리가 2020·2021년 벌어졌다가 올해 1월 말 드러난 파티 게이트로 집권 보수당에서 불신임투표에 회부됐다. 6월 6일 진행된 투표에서 소속 의원 59%의 지지로 간신히 자리를 지켰지만, 당내 불신임 투표까지 간 배경에는 이처럼 저조한 경제성적표가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경제가 좋아 집권당과 총리의 인기가 높고 정치적 기반이 탄탄 했다면 아무리 도덕주의자로 이뤄진 정당이라도 파티 게이트를 이유로 총리 불신임투표를 치르지는 않았을 것으로 볼 수 있다. 경제 성적이 그나마 주요국에서 중간을 유지한 프랑스에선 현직인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4월 대선에서 재선에 성공했다. 프랑스에서 2002년 이후 20년 만에 연임에 성공한 대통령이다. 4월 10일의 대선 1차 투표에서 1위를 차지하고 4월 24일 결선투표에서 58.54%의 지지율로 당선했다. 마크롱은 6월 12일 총선 1차 투표에선 득표율 1위를 하지 못했다. 19일의 결선투표 결과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겠지만, 순항이 그리 쉽진 않을 전망이다. 높은 실업률에 분노한 유권자들이 정년연장 반대를 외치는 좌파연합을 대거 지원하고 있어 결과가 주목된다. 미국은 문제가 심각하다. 11월 8일 연방하원의원 전체와 연방상원의원 3분의 1, 상당수 주지사를 새로 뽑는 중간선거를 앞둔 미국도 경제성적표가 정치적인 변수가 되고 있다. 미국의 인플레율 8.60%는 40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다. 매일 같이 인상된 금액으로 교체되는 주유소 기름값 표지판은 유권자를 놀라게 하면서 동시에 현직 조 바이든 대통령의 지지율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고 있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바이든 대통령의 국정 수행 지지율은 5월 24일 36%로 취임 이후 최저 수준까지 떨어졌으며, 부지지율이 59%에 이르렀다. 6월 14일에는 지지율이 39%, 부지지율이 56%로 약간 개선됐지만, 여전히 불안한 상황이다. 바이든 대통령과 같은 민주당원 중에서는 지지율이 74%, 부지지율이 23%였으나, 공화당원들은 부지지율이 88%에 이르렀으며 불과 11%만 지지했다. 백인은 62%가 부지지, 35%가 지지를 나타냈으며, 비백인은 지지가 45%, 부지지가 44%로 나타났다. ━ 바이든 정권, 지지율 저조로 중간 선거 고심 여론조사 전문 파이브서티에이트는 지난 3일로 취임 500일을 맞은 조 바이든 대통령의 국정 수행 지지율이 40.8%였다. 이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같은 시기 기록인 41.6%보다도 낮다. 1977년 민주당 소속 지미 카터 대통령 이후 최하다. 파이브서티에이트의 6월 14일 조사 결과, 바이든의 국정 수행을 지지하는 사람의 비율은 39.5%, 부지지하는 비율은 53.9%로 나타났다. 미국의 중간선거에선 통상적으로 대통령이 소속한 정당이 좋은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1910년 이후 지난 2018년까지 108년 동안 28차례 치른 미국 중간선거 결과가 이를 잘 말해준다. 대통령의 소속 정당이 상원 의석을 늘린 경우는 단 7차례밖에 없다. 우드로 윌슨의 첫 집권 때인 1914년(50→53석),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첫 집권 때인 1934년(60→69석), 존 F 케네디의 1962년(64→68석), 린든 존슨의 1966년(67→64석), 리처드 닉슨의 1970년(43→45석), 조지 W 부시의 2002년(49→51석)과 트럼프의 2018년 중간선거가 여기에 들어간다. 2016년 대선과 연방의회 선거에서 상·하원을 모두 장악했던 트럼프의 공화당은 2018년 중간선거에서 상원에서 기존보다 3석을 더 차지해 54석을 확보했지만, 하원에선 241석에서 35석을 잃고 206석을 얻는 데 그치면서 과반을 상실했다. 여당인 공화당과 야당인 민주당이 상원과 하원을 양분하는 형국이 됐다. 미국인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미국 대통령’ 순위의 최상위에 늘 올리는 로널드 레이건도 1982년 첫 중간선거에선 기존 연방상원 54석을 그대로 유지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1986년 두 번째 중간선거에선 53석에서 45석으로 8석이나 줄어들면서 과반도 잃었다. 뉴딜 정책으로 대공황을 극복하고 제2차 세계대전을 승전으로 이끌었다는 4선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도 임기 중 여섯 차례의 중간선거를 치르면서 상·하원 모두에서 의석이 줄었다. 대통령이 중간선거에서 의석을 늘리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다만 루스벨트는 임기 중 소속 정당인 민주당이 상·하원 모두에서 의석은 줄었어도 과반은 차지하면서 비교적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할 수 있었다. 루스벨트 외에 임기 중 소속 정당이 상·하원 모두에서 과반수를 차지한 대통령은 단선으로 끝난 민주당의 존 F 케네디, 린든 존슨, 지미 카터, 그리고 공화당의 워렌 하딩, 캘빈 쿨리지 정도다. 소속 정당의 의회 장악이 대통령의 재선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다. 미 국민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중간 선거에서 대통령을 견제할 수 있는 야당에 힘을 실어준다는 해석도 있다. 이처럼 미국 중간선거는 대통령에게 유쾌한 결과를 안겨주지 않은 게 사실이다. 그런데도 바이든 대통령처럼 중간 선거를 앞두고 총체적인 난국 속에서 위기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지지율이 가라앉는 경우는 흔치 않다. 비교적 낮은 실업률(3.60%)을 앞세워 경제성과를 내세워보려고 하지만 지지율은 요지부동이다. ━ 코로나19 충격에 약소국들 경제 기반 무너져 그래도 이는 그나마 전 세계에서 가장 경제력이 튼튼한 10개 국가의 이야기다. 경제력이 훨씬 떨어지는 국가들의 국민은 더욱 큰 고통을 견뎌야 한다. 1970년대 석유 파동에 식량 부족이 겹친 거대한 경제 쓰나미가 몰려온 것이나 진배없다. 이런 상황에서 자생력을 잃어가는 나라들이 늘고 있다. 스리랑카는 6월 14일 공무원들이 집에서 텃밭을 가꾸거나 가축을 키워 먹을 것을 확보할 수 있도록 월~목의 주 4일제 근무를 하도록 했다고 BBC방송이 6월 15일 보도했다. 필수 부문을 제외한 모든 공무원은 앞으로 석 달 동안 임금 삭감 없이 매주 금요일에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 인구 2200만 명의 스리랑카는 국제통화기금(IMF) 2022년 명목 금액 기준 1인당 국내 총생산(GDP)이 3699달러로 전 세계 214개 국가·자치지역 중 148위에 머물고 있다. 팬데믹으로 관광객이 끊기는 등 어려움 속에 외화가 바닥이 나면서 국가 부도 직전의 상황에 부닥쳤다. 이 나라는 지난달 18일 이후 국채 이자를 지급하지 못하면서 디폴트 상태가 됐다. 파키스탄에선 펜데믹으로 인한 경제난으로 외화 보유고가 바닥이 나면서 국민이 하루 한두 잔씩 즐기던 국민 음료인 차도 제대로 마시지 못할 처지가 됐다고 BBC방송이 15일 보도했다. BBC에 따르면 파키스탄의 외화 보유고는 지난 2월 160억 달러에서 6월 첫째 주 100억 달러 이하로 떨어졌다. BBC는 두 달 치 수입액을 간신히 충당할 수 있는 금액이라고 설명했다. 파키스탄은 연간 6억 달러 정도의 차를 수입하는데 외화 부족으로 물량 확보가 어려울 가능성이 크다는 게 BBC의 지적이다. 파키스탄은 인구가 2억4200만 명이나 되는 큰 나라지만 경제는 1인당 GDP가 1562달러로 전 세계 214개 국가·자치지역 중 178위 수준이다. 이런 상황에서 유엔의 경고는 울림이 크다. 유엔은 6월 9일 발간한 글로벌 위기 대응 보고서에서 올해 94개국에서 16억 명이 먹고 사는 데 위협을 느낄 것으로 전망했다. 차 수입 정도가 아니라 당장 매일 끓여 먹을 곡물을 수입할 돈이 없는 나라가 부지기수라는 지적이다. 기후변화에 따른 다양한 기상재해에 분쟁과 정변, 그리고 코로나19가 겹치면서 인도주의적인 위기는 더욱 심화하고 있다. 특히 미국 싱크탱크인 평화기금회가 취약국가(Fragile States)로 지정한 남수단·소말리아·중앙아프리카공화국·예멘·수단·시리아·콩고민주공화국(DRC)·차드·아프가니스탄·이라크·아이티·기니·나이지리아·짐바브웨·에티오피아 등은 식수·식량·주건·보건의료·교육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한계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팬데믹이 끝나가는 지금 글로벌 사회는 가난한 나라에 더욱 적극적으로 눈을 돌려 공존의 길을 찾아야 한다. ※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2022.06.18 18:00

8분 소요
극좌에서 극우까지 프랑스 대선이 보여준 정치의 다양성 [채인택의 글로벌 인사이트]

전문가 칼럼

대통령 중심제의 프랑스 제5공화국(1959년~)을 세우고 1959~69년 대통령을 지낸 샤를 드골(1890~1970년)은 프랑스의 정치에 대해 인상적인 말을 여럿 남겼다. “정치는 지나치게 중요해서 정치인들에게만 맡겨둘 수 없다는 결론이 이르렀다.” 지금도 자주 회자하는 이 말은 정치적인 담론 형성과 정책 실천놀에서 시민의 참여와 적극적인 투표, 정치에 대한 언론과 시민사회, 그리고 사법당국의 철저한 감시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로 해석될 수 있다. 물론 정치적인 입장과 사안에 따라 다양하게 이용되기는 하지만 말이다. 정치에 대한 허무주의를 부른다는 지적도 있는 발언이다. ━ 극우에서 극좌까지 모든 정파가 대선 후보 낸 프랑스 정계 “정치인들은 자신의 말을 스스로 믿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믿는 것을 보면 놀란다.” 이 말은 정치인의 고질적인 거짓말과 말 뒤집기에 대한 비판이 기본이다. 이와 함께 선거 때만 되면 등장했다가 그 직후엔 신기루처럼 사라지기 일쑤인 과도하고 과장되며, 실현 가능성이 낮은 약속과 허풍에 대한 비판을 담았다. 정치인들이 대중에게 마구 해대는 유토피아적인 약속과 발언의 허황됨과 허무함에 대한 야유다. 선거 때만 돌아오면 달콤한 말로 유권자의 표를 구하지만, 선거가 끝나면 돌아서서 국민이나 공동체가 아닌 개인이나 파당의 이익을 구하기에 골몰하는 정치인들의 세태를 적나라하게 표현한 말이기도 하다. 4월 10일 1차 투표를, 24일 결선 투표를 치른 2022년 프랑스 대선을 보면 드골의 말이 시대를 넘어 여전히 영감을 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246가지의 치즈가 있는 나라를 운영하는 게 어떨지 생각해본 적이 있나요?” 샤를 드골의 이 발언은 프랑스 국민이 얼마나 다양한 생각을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말로 자주 인용돼왔다. 한국에선 ‘1000가지 김치를 만들어 먹는 국민을 설득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는 말로 변형돼 유통되기도 했다. 생각이 다양할 뿐 아니라 그 범위가 극과 극이고,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며, 때론 충돌까지 하는 국민을 이끄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잘 표현한다. 정치 고유의 고충과 프랑스 내정의 전통적인 어려움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표현이다. 이번 대선은 프랑스가 참으로 다양한 정치적인 의견과 정파가 공존하는 사회임을 잘 보여줬다. 극우에서 극좌까지 거의 모든 정파가 고루 데선 1차 투표에 후보를 냈다. 극우에선 마린 르펜 후보와 에릭 제무르 후보가 나란히 나왔다. 한 가지에서 갈라져 나왔지만, 이들은 결코 합당하거나 후보 단일화 같은 정치 공학적인 공작에 나서지 않았다. 극좌에선 장 뤼크 멜랑숑 후보가 출마해 중도 좌파와 다른 생각을 하는 좌파가 있음을 보여준 것은 물론이고 1차 투표에서 700만 명 이상의 지지로 22.00%를 득표해 3위에 올랐다. 중도좌파가 표방하는 사회민주주의가 아니라 옛 공산당이 내세운 민주사회주의, 좌파 포퓰리즘, 환경 사회주의, 대안 글로벌리즘, 유럽통합 회의주의, 좌익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것으로 평가받았다. 전통의 중도 좌파 정당이 긁어주지 못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공략한 셈이다. 거기에 환경을 최우선시하는 환경주의자에, 농민의 이익을 전면에 두고 거기에 일부 노동자의 이익을 강조하는 후보까지 등장했다. 그야말로 백 가지 말이 난무하고, 백 가지 꽃이 피는 형국이다. 유권자는 그야말로 자신의 말을 대신 해주는 정치인, 자신의 하고 싶은 정책을 내세우는 후보를 지지하면 된다. 정치 공급이 국민의 수요를 충당한 셈이다. 나와 생각이 맞는 정치인은 없고, 하나같이 답답한 소리만 한다는 비난이 나오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후보가 대선에 등장해 자신의 목소리를 낸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득표율이나 당선 가능성, 후보가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누가 주류인지를 보여주기 위해 다른 후보의 사퇴를 요구하거나 정당까지 합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내 표를 갉아먹어서 나의 당선을 막는다며 상대를 비난할 일이란 더더욱 있을 수가 없다. 생각이 다르면 따로 정치하는 건 프랑스 정치에선 상식이다. 서로 약간의 생각이나 정책 차이만 있으면 따로 출마해서 국민의 선택이나 심판을 받는 것이 일반화한 셈이다. 246가지 치즈를 먹는 국민을 대하는 정치권의 자세다. 건전한 경쟁, 합리적이고 공정한 정치적 대결의 자세가 아닐 수 없다. 프랑스 대선 1차 투표는 이런 다양성 때문에 부러움을 살 수밖에 없다. ━ 분열로 1위 놓친 극우, 1차 투표 100만표도 못 얻은 중도좌파 또 하나 눈여겨 볼 점은 결선 투표에서 보여준 극우파에 대한 프랑스 국민의 생각이다. 드골은 일찍이 이성적이고 상식적이며 합리적인 애국주의와 극우들이 추구하는 내셔널리즘의 차이를 이렇게 설파했다. “애국주의는 자국민 사랑을 우선하는 것이고, 내셔널리즘은 자국민 외의 사람에 대한 증오를 우선시하는 것이다.” 24일의 프랑스 대선 결선 투표는 지난 2017년에 이어 현직 대통령인 중도의 에마뉘엘 마크롱(45)와 극우 포퓰리즘 정치인인 마린 르펜(54)이 격돌했다. 극우 포퓰리스트로 분리되는 르펜은 국민연합(RN)이라는 정당을 이끈다. 이 정당은 국가주의·국수주의·민족주의 등으로 번역되는 내셔널리즘을 지향하면서 반이민·반이슬람·반유럽연합(EU)·반글로벌리즘·보호무역·반엘리트주의 등을 내세운다. 과거 국민전선(FN)이라는 이름으로 강경한 포퓰리즘을 주장하던 이 정당은 2017년 대선 경선 투표에서 대패한 뒤 과격한 발언을 줄이고(사실은 그런 생각을 숨기고), 생활 중심의 달콤한 공약으로 표 모으기에 열중해왔다. 그러다 보니 이 정당의 정체성, 심지어 극우의 분류도 희미해지게 마련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미 오래전에 나왔던 드골의 발언은 극우 내셔널리즘 정당인 르펜의 국민연합의 정체를 밝히기에 그저 그만이다. 결과만 보면 공동체를 생각하자는 상식적인 주장을 내세우면서 사실은 그 뒤에 이주자·이슬람 등에 대한 혐오를 감춘 극우의 차이를 프랑스 유권자들은 잘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 대선 1차 투표는 프랑스 유권자 4874만 중 73.69%인 3592만 명이 투표했으며 유효표가 3514만에 이르렀다. 프랑스 대선 1차 투표에서 7명의 후보가 100만 표 이상을, 3명이 500만 표 이상을 득표했지만, 전통의 중도 우파와 좌파 모두 부진했다. 중도좌파는 100만 표도 얻지 못했다. 지난 2017년 대선에서 혜성처럼 나타난 젊은 마크롱에게 밀렸던 기득권 중도 좌·우파 정당은 이번 선거에서도 세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심지어 극우 세력에게도 여전히 밀렸다. 이들은 결선 투표에서 다만 극우 세력이 대통령이 되지 못하도록 극우가 아닌 마크롱 대통령을 지지하는 활동을 하는 데서 정당의 건전성과 정체성을 보였을 뿐이다. 1차 투표에서 LREM(전진하는 공화국)의 마크롱 대통령은 27.80%(956만545표), RN(국민연합)의 르펜 후보는 23.10%(810만9857표)를 각각 득표해 1, 2위를 차지했다. 극좌 성향의 LFI(굴복하지 않는 프랑스)를 이끄는 장뤼크 멜랑숑 후보는 22.00%(760만5225표)로 3위에 올랐다. 또 다른 극우 성향의 레콩케트(재정복)를 이끈 에릭 제무르는 7.1%(244만2624표)를 얻었다. 극우 세력이 분열하지 않았다면 1차 투표에서 30% 이상을 득표해 1위를 차지할 수도 있었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중도우파인 공화당(LR)의 발레리 페크레스 후보는 4.8%(165만8386표)를 얻어 역대 드골주의자 대선 후보로는 가장 적은 득표를 기록했다. 전통적인 중도 우파 정당의 몰락이 가속했다는 평가다. 환경주의자인 야니크 자도는 4.6% (158만7534표)를, 중도우파로 농민·노동자 보호에 적극적인 레지스통(저항)의 장 라셀 후보가 3.2%(109만5700표)를 각각 얻어 100만 표 이상을 얻었다. 전통의 프랑스 중도좌파인 사회당의 안 이달고 후보는 1.7%(60만4217표)에 그쳤다. 프랑수아 미테랑과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을 배출했던 프랑스 중도 좌파가 정치적으로 몰락한 모습이다. 마크롱 대통령은 결선 투표에서 극우 르펜 후보를 꺾고 재선에 성공하면서 프랑스에서 20년 만에 재선에 성공한 현직 대통령이 됐다. 프랑스에선 2002년 자크 시라크(1995~2007년 재임)가 재선했지만, 그의 뒤를 이은 니콜라 사르코지(2007~2012년)와 프랑수아 올랑드(2012~2017년)는 단임에 그쳤다. 프랑스 제5공화국의 대통령 임기는 7년이었지만 2000년 국민투표로 5년으로 줄었다. 시라크의 전체 재임 기간이 12년인 것은 이 때문이다. 그는 7년 임기의 대통령에 이어 2002년 5년 임기의 대통령에 재선됐다. 5년 임기의 대통령에 재선한 것은 마크롱이 처음이다. 마크롱은 2017년 대선에서 만 39세라는 역대 최연소로 당선한 기록을 세운 데 이어 이번에 재선 기록도 새롭게 만들었다. “정치인들은 자신의 말을 스스로 믿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믿는 것을 보면 놀란다.” ━ ‘극과 극은 통한다’ 마크롱 정년연장에 함께 반대한 극좌·극우 이번 대선 결선투표는 극우 세력에 그동안 얻은 결선투표 지지율 중 최다라는 데서 유럽은 충격에 빠졌다. 극우 세력이 처음 결선 투표에 오른 것은 2002년 대선 때다. 당시 1차 투표에서 대선을 노리던 시라크 대통령이 19.88%를로 1위를, 극우 국민전선의 장마리 르펜 후보(마린 르펜의 부친)이 16.6%로 2위를 각각 차지했다. 중도 좌파인 사회당의 리오넬 조스팽 후보는 16.18%로 3위에 그쳐 결선 투표에 오르지 못했다. 결선 투표에서 장마리 르펜은 17.79%의 득표로 82.21%를 얻은 시라크 대통령에 참패했다. 극우의 당선을 막아야 한다며 좌우파가 시라크에게 몰표를 주었기 때문이었다. 2007년 1차 투표에선 중도우파의 니콜라 사르코지 후보가 31.18%를, 중도좌파의 세골렌 루아얄 후보가 25.87%를 각각 득표해 결선에 올랐다. 극우 장마리 르펜 후보는 10.44%를 얻어 4위에 그쳤다. 그해 결선 투표에선 53.06%를 획득한 사르코지가 46.94%를 득표한 루아얄 후보를 꺾고 엘리제 궁에 들어갔다. 2012년 대선도 중도 좌·우파의 대결로 압축됐다. 1차 투표에서 중도 좌파 사회당의 프랑수아 올랑드 후보가 28.73%를 얻어 1위를 차지했다. 27.18%를 득표한 현직 대통령 사르코지는 2위로 결선에 올랐다. 극우 국민전선은 장마리 르펜의 딸인 마린 르펜으로 후보를 갈았지만 17.90%로 3위에 그쳤다. 그해 결선 투표에선 올랑드가 51.65%로 당선했다. 사르코지는 48.36%를 얻었지만 114만 표 차이로 고배를 마셨다. 프랑스는 좌우로 갈라졌다. 그 뒤 2017년 대선에선 사회당의 현직 대통령인 올랑드는 1%대까지 떨어진 지지율 하락으로 재선에 출마조차 하지 못했다. 사회당 정권에서 산업부 장관을 지낸 마크롱이 앙마르슈라는 정당을 만들어 별도로 출마해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결국 1차 투표에서 24.01%를 획득해 1위를 차지했다. 2위는 21.30%를 얻은 국민전선의 마린 르펜이었다. 중도 우파인 공화당은 장 피용 전 총리를 후보로 내세웠지만 20.01%의 득표로 3위에 그쳐 결선에 나가지 못했다. 결선 투표에서 마크롱은 66.10%를 획득해 33.90%를 얻은 르펜보다 2배 가까운 득표율로 승리를 거뒀다. 지금까지 프랑스 대선에서 극우 후보가 얻은 득표율의 약진을 보면 우려할 만하다. 2002년 1차 투표에선 16.6%(2위)를 결선투표에서 17.79%를 각각 얻었다. 2007년에는 10.44%로 4위에 그쳐 결선엔 오르지도 못했다. 2012년에는 17.90%로 3위에 머물러 역시 결선에는 가보지 못했다. 2017년 1차에서 21.30%로 2위를 차지한 데 이어 결선에서 33.90%를 얻어 성장세를 보였다. 그랬던 것이 이번 대선에선 마크롱과 르펜이 1차에서 23.80% 대 23.10%로 4.7%포인트 차이로, 경선에선 58.54% 대 41.46%로 17.08%포인트 차이를 보였다. 르펜은 1차와 결선 모두에서 역대 극우 후보 중 최다 득표를 한 것은 물론 당선인과 가장 적은 득표율 격차를 보였다. 물론 이것이 추세로 이어져 다음 대선에서 극우가 유리하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주목할 점은 기권과 무효표가 유난히 많았다는 사실이다. 올해 결선투표율은 71.99%로 2017년의 74.6%보다 떨어졌다. 프랑스 68혁명 직후 샤를 드골(1959~69년 재임)이 재선에 도전했던 1969년 투표율이 68.9%까지 떨어진 뒤 53년 만에 가장 낮은 수치다. 현재의 정치에 대한 국민의 실망이 커지는 상황을 반영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독특한 것은 극우 포퓰리즘과 극좌 포퓰리즘이 서로 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극우 르펜은 현행 20%(유럽에서 가장 높은 편이다)인 프랑스의 부가가치세를 낮추겠다는 이야기를 전면에 세웠는데 극좌 멜랑숑도 여기에 동조한다. 현행 62세인 법적 정년을 65세로 미뤄 더 일하고 연금을 더 늦게 받게 하겠다는 마크롱의 정책에도 극좌와 극우는 함께 반대했다. 노동자들이 일찍 은퇴해 더는 일하지 않고 연금으로 생활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한국처럼 연금이 정년 전 임금에 비해 턱없이 작은 한국과 달리 비교적 두둑한 연금이 보장되는 프랑스의 특징을 반영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5년 뒤 대선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지금의 결과로는 더더욱 짐작이 어렵다. 그래도 주목할 점이 많은 프랑스의 2022년 대선이다. ※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nag.co.kr

2022.04.30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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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佛 마크롱, 연임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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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신화통신)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극우 성향의 마린 르펜 국민연합 후보를 제치고 연임에 성공했다.프랑스 여론조사기관 엘라브의 출구조사 결과 마크롱 대통령이 58.6%, 르펜 후보가 41.4%를 득표할 것으로 보인다고 BFM 방송이 24일 밤(현지시간) 보도했다.마크롱은 이날 밤 파리 에펠탑 앞에서 유권자들의 지지와 신뢰에 감사한다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 그는 프랑스 사회가 회의와 분열에 휩싸여 있다며 "어느 한 진영의 대통령이 아니라 모든 프랑스인의 대통령이 되고 싶다"고 강조했다.출구조사 결과가 발표되자 르펜 후보는 패배를 인정하고 국회의원 선거에 뛰어들겠다고 밝혔다.프랑스 대통령의 임기는 5년이며 선거는 '결선투표제'를 채택한다. 1차 투표에서 과반수 득표자가 없을 경우 1, 2위 득표자가 결선 투표에 진출한다. 2차 투표에서 다수의 표를 얻은 후보가 승리하게 된다. 지난 10일 열린 1차 투표에서 마크롱과 르펜은 각각 27.85%, 23.15%를 득표해 24일 2차 결선 투표에 들어갔다.올해 44세인 마크롱은 2017년 5월 대선 결선 투표에서 르펜을 누르고 프랑스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이번에 또 르펜과 경합을 벌였다.

2022.04.25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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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마크롱·르펜 5년 만에 佛 대선 결선서 또 만나

차이나 포커스

(파리=신화통신)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과 극우 성향의 마린 르펜 국민연합 후보가 프랑스 대통령 선거 결선투표에서 만날 것으로 보인다.프랑스 여론조사기관 엘라브의 최신 통계 결과 마크롱 대통령이 28.2%, 르펜 후보가 23.4%를 득표할 것으로 보인다고 BFM 방송이 10일 밤(현지시간) 보도했다.10일 오전 8시부터 시작된 프랑스 대선 1차 투표에서 약 4천870만 명의 유권자가 투표에 참여했다. 마크롱을 포함한 12명의 후보가 올해 대선에 출마했다.마크롱은 2017년 5월 대선 결선 투표에서 르펜을 누르고 프랑스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이번에 또 르펜과 경합을 벌이게 됐다.프랑스 대통령의 임기는 5년이며 선거는 '결선투표제'를 채택한다. 1차 투표에서 과반수 득표자가 없을 경우 1, 2위 득표자가 결선 투표에 진출한다. 프랑스 대선 결선 투표는 오는 24일 실시된다.

2022.04.11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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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롱 佛 대통령, 재선 출마 공식 선언

차이나 포커스

(프랑스 파리=신화통신)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대선 후보 등록 시한을 하루 앞두고 재선 도전을 공식 선언했다.3일(현지시간) 프랑스 현지 언론에 따르면 마크롱 대통령은 이날 밤 프랑스 국민에게 보낸 공개서한을 통해 다음달 예정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겠다는 뜻을 밝혔다.마크롱 대통령은 서한에서 지난 5년간 프랑스가 수많은 위기를 겪었다며 재선을 통해 국민의 신뢰를 재차 얻겠다고 강조했다.그는 '세기의 도전'에 직면해 프랑스 국민과 함께 '프랑스와 유럽의 단일한 반응'을 만들어 내겠다고 자신했다.1977년 12월생인 마크롱은 2012년 엘리제궁(프랑스 대통령실) 사무차장, 2014년 경제·산업·디지털부 장관을 거쳐 2017년 5월 프랑스 대통령으로 선출됐다.프랑스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은 '결선투표제'에 따라 5년 임기로 선출된다. 1차 투표에서 과반을 득표한 후보가 없을 경우 상위 두 명의 후보가 2차 결선에서 맞붙는 형식이다.

2022.03.04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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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필리핀·일본·브라질… 2022년 선거가 바꿀 세계는 [채인택의 글로벌 인사이트]

전문가 칼럼

대한민국은 올해 3월 9일 새 대통령을 뽑는 대통령 선거를 치르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선거에 대한 관심이 높다. 2022년에는 한국은 물론 전 세계 곳곳에서 굵직한 선거가 열린다. 선거의 해인 2022년, 글로벌 사회는 어떤 변화의 흐름을 탈지 주목된다. ━ 프랑스, 중도우파 공화당이 명예회복 성공할까 굵직한 선거로 4월 10일(결선투표는 4월 24일)의 프랑스 대통령 선거가 있다. 프랑스는 현직인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집권당인 ‘레퓌블리크 앙마르쉐’를 제외한 다른 주요 정당 대부분에서 대선 후보를 확정했다. 마크롱은 당연히 재선 도전이 유력하지만 “대선 후보가 아닌 대통령으로 일을 더 하겠다”며 마지막 순간까지도 출마 선언을 보류하고 있다. 이번 선거는 2017년 대선에서 전통의 기존 좌·우파 정당을 기득권 정당으로 모조리 침몰시키고 좌우를 넘어서겠다는 젊은 에마뉘엘 마크롱을 대통령에 앉힌 유권자들의 혁신 물결이 계속될지가 가장 큰 관심사다. 마크롱은 자신의 새로운 정당인 레퓌블리크 앙마르쉐를 앞세워 의회도 장악했다. 이에 따라 당시 선거에서 몰락했던 중도우파, 중도좌파, 그리고 극우파와 극좌파는 올해 대선으로 어떤 전략으로 설욕에 나설지도 관심거리다. 프랑스에서 관심을 끄는 정당이 전통의 프랑스 우파 대표인 공화당(LR)이다. 지난 2017년 대선에선 유권자들이 기득권‧제도권 정당에 반기를 들고 좌우 모두를 경원하는 바람에 결선 투표에도 진출하지 못하는 치욕을 당했다. 그런 공화당이 이번에 이미지를 대대적으로 쇄신하고 나왔다. 중도우파 정당 사상 처음으로 여성을 대선후보로 선출한 것이다. 발레리 페크레스가 그 주인공이다. 페크레스는 후보 당선 직후 여론 조사에서 마크롱 대통령 다음으로 앞서가고 있다. 결선 투표에 진출할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다. 프랑스에서 2021년 12월 이뤄진 여론조사 중에서 조사 대상이 1만928명으로 가장 많은 입소스(Ipsos) 조사(7~13일)에 따르면 마크롱 대통령이 24%로 2위를 지키고 있다. 눈에 띄는 것이 중도 우파의 페크레스가 17%로 2위라는 사실이다. 지금 결과대로라면 마크롱과 중도 우파의 페크레스가 결선 투표에서 맞붙을 수 있다. 주목할 점은 페크레스가 수도 파리와 인근을 관할하는 수도권인 일드프랑스의 주지사라는 사실이다. 일드프랑스는 프랑스 본토를 이루는 광역지방자치단체인 레지옹(주) 18개 가운데 인구가 가장 많고 경제력이 가장 강하다. 인구는 1230만 명에 이르고 프랑스 본토 면적의 2.2%의 지역에 인구의 18.8%가 산다. 지역총생산(GRP)는 1조570억 달러로 레지옹 가운데 1위다. 1인당 GRP는 6만100유로(7만1900달러)로 역시 레지옹 중 1위다. 물론 수도권도 마크롱 지지가 강하고 좌·우파와 극우‧극좌가 고루 분포하고, 대선과 주지사 선거는 별개인 게 사실이다. 게다가 수도권은 부유한 파리와 가난한 교외 지역으로 나뉘어 프랑스의 양극화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지역이기도 하다. 하지만 인구 밀집지역을 배경으로 둔 만큼 대선에서도 어느 정도 유리하다고 할 수 있다. 더욱 주목할 점은 중도우파 정당인 공화당이 이번 선거에 필사적이라는 사실이다. 공화당은 당 내부적으로 강경·온건파로 나뉘는데 온건파인 페크레스는 경선 1차 투표에서 2위였으나, 2차 투표에서 강경파인 에릭 시오티 하원의원을 20%포인트가 넘는 득표율 차이로 눌렀다. 공화당으로 상징되는 프랑스 우파는 제5공화국을 이룬 샤를 드골과 자크 시라크, 니콜라 사르코지 등 쟁쟁한 대통령을 배출했다. 그런 공화당에서 온건파 후보가 결선 투표에서 큰 차이로 후보 자리를 따낸 것은 이번 대선에서 중도우파로서 극우와 차별화를 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하게 보여준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당의 극우화를 막겠다는 당원들의 의지일 수도 있다. 독특한 점은 2021년 12월 5일 창당된 새로운 극우 정당인 레콩퀘스트(R!‧재정복) 소속 에릭 제무르가 15%로 3위를 차지했다는 사실이다. 전통의 극우정당으로 프랑스 극우 정치를 이끌어온 국민연합(RN‧국민전선(FN)에서 2018년 개명)의 마리 르펜 후보를 근소한 차로 눌렀다. 르펜은 14.5%를 차지했다. 르펜은 지난 2017년 대선에서 1차 선거 2위로 결선투표에서 마크롱과 맞붙었지만 현재로썬 중도 우파는 물론 같은 성향의 극우파 제무르에게도 밀린 것이다. 극우 세력에서도 인물 교체 바람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제무르와 극우파들의 지지를 양분한 것인지도 모른다. 둘을 합치면 극우세력은 여전히 1차 투표에서 30% 정도의 고정 지지층을 확보한다는 이야기다. 그린피스 활동가 출신으로 유럽생태녹색당 소속의 환경주의자인 야니크 자도 유럽의회 의원은 8.8%의 지지율을 얻고 있다. 극좌 정당인 ‘불복하는 프랑스’를 이끄는 장뤽 멜랑송도 8.5%의 지지율을 확보하고 있다. 멜랑송은 사회당에서 더욱 강력한 좌파 정책을 내걸고 별도 정당을 창당해 상당한 세력을 확보하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전통의 중도좌파 정당인 사회당(PS)이다. 사회당 소속 안 이달고 파리 시장은 4.5%의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다. 사회당은 자당 소속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이 임기 말인 2016년 좌파로부터는 배신자, 우파로부터는 무능이라는 비난을 받으며 지지율이 4%로 추락한 이후 좀처럼 기력을 회복하지 못하는 셈이다. 전통 프랑스 좌파의 현주소다. 결국 4월의 프랑스 대선은 마크롱 바람으로 상징되는 혁신의 바람을 계속 이어갈지가 관심사다. 이념적 도그마에서 벗어난 실용주의를 앞세우는 마크롱은 대선을 앞두고 소형모듈원자로(SMR) 개발을 앞세우며 인공지능(AI), 전기자동차 등 과학기술을 통한 혁신 경쟁의 재점화를 선언했다. 미래를 끌고 갈 것인지, 이념의 기치를 높이 들지가 2002년 프랑스 대선의 핵심이다. ━ 필리핀, 대통령 자녀가 대통령·부통령 취임 가능성 높아 5월 9일의 필리핀 대선은 이 나라의 정치가 얼마나 거대 정치가문에 좌우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국민에 밀려났던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가문이 이번 대선을 통해 복귀와 명예 회복을 노리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럴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크다. 필리핀 대선을 앞두고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1917~89년, 재임 1965~86년) 전 대통령인 외아들인 페르디난드 ‘봉봉’ 마르코스(64)가 여론조사에서 계속 압도적 1위를 차지하고 있다. 마르코스 전 상원의원은 부친의 이름은 물론 정치적 자산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봉봉’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마르코스는 가문의 영향력을 바탕으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고향인 북일로코스의 부지사(1980~83년)와 주지사(1998~2007년)를 지낸 뒤 이곳을 지역구로 하는 하원의원(2007~2010년)과 상원의원(2010~2016년)을 지냈다. 봉봉이 이 지역에서 계속 선출직에 당선하면서 마르코스 가문은 ‘국민에 쫓겨난 독재자 집안’의 굴레에서 벗어나 정치적으로 재기에 성공했다. 2022년 필리핀 대선은 마르코스 가문이 다시 대통령궁을 차지하면서 정치적 재기를 넘어 명예 회복까지도 할 수 있는 한 해가 될 것으로 보인다. 봉봉은 지난해 12월 1일부터 엿새 동안 24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펄스아시아의 필리핀 대선후보 여론조사에서 53%의 지지율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고 12월 23일 로이터통신이 보도했다. 마르코스의 지지율은 펄스아시아가 여론 조사를 시작한 이래 가장 높다. 로드리고 두테르테 현 대통령과 대립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져온 레니 로브레도 부통령이 2위를 차지했지만 봉봉과 한참 차이가 나는 20%에 불과했다. 배우이자 방송인 출신인 프란시스코 도마고소 마닐라 시장이 8%로 뒤를 이었다. 필리핀의 복싱 영웅으로 국내외에서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매니 파키아오 상원의원이 같은 8%를 나타냈다. 현직인 두테르테는 필리핀 헌법에 따라 연임할 수 없이 이번에 대선 출마가 불가능하다. 대신 두테르테 대통령의 딸인 사라 두테르테-카르피오(43) 다바오 시장이 부통령 후보 지지율 조사에서 지지율 45%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사라는 부통령 후보 등록 직후 마르코스와 러닝메이트를 선언했다. 이들이 이번 선거에서 당선하면 필리핀 사상 최초의 전직 대통령 자녀가 대통령과 부통령에 나란히 취임하게 된다. 대통령 가문의 자녀들이 정치적으로 제휴해 시너지를 내면서 권력을 계속 누리는 ‘2세 동맹’이다. 필리핀은 여러모로 족벌 정치 체제라는 지적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됐다. ━ 친선외교 강화와 전쟁 개헌의 갈림길에 선 일본 7월에는 일본 참의원 선거가 있다. 2021년 10월 4일 취임해 10월 22일의 총선에서 선거 전과 동일한 284석을 확보하면서 선방한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총리가 본격적으로 자신의 정치력을 보여주는 무대가 되는 선거다. 참의원 선거에서 승리할 경우 기시다는 안정적인 의석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장기 집권의 길을 걸을 수 있다. 이를 통해 자민당 내 1·2위 파벌인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의 아베파와 아소 다로(麻生太朗) 전 총리의 아소파의 입김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독자적인 자신의 정치를 할 길도 어느 정도 만들 수 있다. 기시다 총리는 아베나 아소와 달리 외교에서 이웃나라들과 친선과 교류·협력을 강조하는 비둘기파로 분류된다. 하지만 기시다가 더욱 힘을 얻기 위해 이 부분에서 양보하고 아베나 아소와 힘을 합쳐 보수 강평파의 오랜 꿈인 개헌을 이루고 전쟁할 수 있는 일본으로 한걸음 나갈 수도 있다. 모든 것은 정치적 환경과 상황에 좌우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혼란의 중동국가 레바논은 3월에 총선에 예정됐지만 연기될 가능성이 크다는 평가다. 선거를 제대로 치를 정도의 정치력도, 국민 신뢰도, 치안 능력도 없기 때문이다. 선거 일정이 제대로 진행되는 것만으로도 행정력이 제대로 작동한다고 볼 수 있다. ━ ‘좌파가 돌아온다’ 룰라 당선 가능성 높은 브라질 남미 브라질에선 10월 2일(결선투표를 한다면 10월 30일) 대통령 선거와 상·하원 선거를 치른다. 1억4600만 명의 유권자들이 투표를 기다리는 거대한 선거다. 이번 선거에선 좌파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전 대통령(76세·2003~2010년 재임)의 정치적 복귀가 관심을 모은다. 현직인 우파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의 재선 가능성은 그리 커 보이지 않는다는 평가다. 흘러간 권력의 복귀와 좌파 세력의 정치적 복권이 핵심 관심 사안이다. 브라질은 2022년 전 세계의 눈이 몰리는 지역이다. 10월 대선을 앞둔 브라질에선 좌파의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전 대통령이 각종 여론조사에서 압도적으로 1위를 지키고 있어 재선이 유력하다. AP통신에 따르면 현지 여론조사업체 다타폴랴의 12월 13~16일 조사 결과 좌파인 룰라가 1차 투표에서 47~48%를 얻을 것으로 전망됐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지지다. 룰라는 21~22%를 확보한 우파의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을 크게 앞질렀다. 우파에서 그의 대안으로 평가 받는 세르지우 모루 전 법무장관은 9% 확보에 그쳤다. 3666명을 대상으로 조사(오차범위 ±2%포인트)해 16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다. 브라질 좌파는 조금만 더 힘을 모으면 결선투표를 벌이지 않고 1차 투표에서 룰라가 바로 당선할 수도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금속 노동자 출신의 노동운동가로 좌파 노동자당 소속인 룰라는 2002년과 2006년 대선에서 연거푸 승리해 8년을 집권했다. 2016년 그의 후계자인 지우마 호세프 당시 대통령이 권력 남용 혐의 등으로 탄핵되면서 좌파 정권이 무너졌다. 룰라 자신도 퇴임 뒤 뇌물과 돈세탁 등의 혐의로 1심과 2심 재판에서 실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대법원이 2심 재판의 유죄 판결만으로 피고인을 수감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판결하면서 지난 2019년 11월 8일 수감 580일 만인 석방돼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았다. 그 뒤 2021년 3월에는 연방대법원으로부터 지난 2018년 부패 혐의로 선고받았던 징역 12년형이 무효라는 최종 판결을 받으면서 기사회생했다. 앞선 판결은 룰라에게 유죄를 선고하도록 판사들과 검사들이 담합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등 공정성이 문제가 되면서 논란을 불렀다. 결국 룰라의 부패 혐의는 정치적이었던 것으로 드러나고 룰라는 정치적으로, 사법적으로 복권이 됐다. 이런 룰라 전 대통령이 내년 대선에서 당선하면 7년 만에 부활하게 된다. 중남미 최대 국가인 브라질에서 좌파인 룰라가 당선하면 중남미에 핑크타이(좌파 도미노)를 이룰 가능성이 있다. 룰라는 과거 집권 당시 빈곤층에 대한 위생‧교육‧안전‧기회 제공 등에 치중하면서 빈곤 인구를 줄여 양극화를 완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기업 정책에서도 균형을 유지해 브라질 경제의 고속성장을 이끌었다. 룰라는 빈곤과 부패, 그리고 혼란이 그치지 않는 브라질에서 하나의 희망으로 간주되고 있다. 한편으로는 새로운 인물의 등장 없이 재판과 수감으로 오랫동안 발목이 잡혔던 과거 대통령이 다시 돌아오는 회전문 대선이라는 평가를 할 수도 있다. 육군사관학교 출신인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우파의 희망으로 대통령에 당선했으나 권위주의적인 행동과 코로나19의 위험을 무시하는 행동을 비롯한 갖가지 비상식적인 기행으로 인기를 잃어갔다. 브라질은 코로바19 팬더믹에서 세계에서 가장 높은 감염률을 보인 나라의 하나가 됐으며, 보우소나루 대통령 본인도 확진 판정을 받고 격리됐다. 여러모로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비슷한 특징을 보여 ‘브라질의 트럼프’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결국 그의 정치적 신뢰도는 크게 추락해 10월 대선에서 좌파 룰라에게 정권을 빼앗길 가능성이 커진 상황에 처하게 됐다. ━ 미국 중간선거 앞두고 아프간 전쟁 멍에 쓴 바이든 11월 8일은 미국의 조 바이든의 1기 하반기 명운을 가를 중간선거(상·하원 의원선거)가 열린다. 미국 정치에서 중간선거는 일반적으로 대통령이 소속한 집권당에 불리하게 진행돼 왔다. 이번 중간선거에서도 민주당이 상원과 하원에서 계속 우위를 유지할지가 관심사다. 현재로썬 그럴 가능성이 상당히 낮다고 할 수 있다. 아프가니스탄 철군에서 보여준 혼란과 미국에 대한 국제사회의 신뢰 하락은 바이든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더해 코로나로 인한 인력난이 부른 미국의 물류난, 물가 상승도 국민의 불만을 불러왔다. 급기야 ‘레츠 고 브랜든(Let’s go Brandon)’이라는 밈이 미국 전역과 인터넷 상에서 돌며 바이든 때리기, 조롱하기가 미국민의 ‘국민 스포츠’가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NBC 방송이 미국의 인기 자동차 대회인 나스카에서 유력 선수인 브랜든을 인터뷰하는 동안 인근에서 관객들이 바이든을 욕하는 구호를 외쳤는데, 방송 기자가 이를 ‘레츠 고 브랜든(Let’s go Brandon)’이라고 돌려서 전하는 바람에 반민주당, 반바이든 국민의 비웃음을 샀다. 이런 민심 상황을 극복하고 올해 11월 8일 중간선거에서 바이든이 얼마나 선전할지는 미국뿐 아니라 국제정치에서 큰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nag.co.kr

2022.01.04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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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보리치 당선인이 소환한 아옌데의 추억 [채인택의 글로벌 인사이트]

전문가 칼럼

남미 칠레가 12월 19일 치른 대선 결선투표에서 35세의 ‘밀레니얼 세대 정치인 가브리엘 보리치가 당선했다. BBC에 따르면 후보 중 극좌파로 분류되는 보리치는 55.87%를 득표해 44.13%를 얻은 호세 안토니오 카스트(55) 후보를 10%포인트 이상 앞섰다. 35세는 칠레에서 대통령에 출마할 수 있는 최소 연령이다. ━ ‘좌향좌’ 예고한 보리치 “칠레 신자유주의 무덤 될 것” 보리치는 좌익 성향의 정당연합인 아프루에보 디그니다드(AD‧존엄 찬성) 소속이다. AD는 생산수단의 사유화를 강조하는 민주사회주의 성향의 정당으로, 개량주의적인 사회민주주의보다 더욱 왼쪽에 위치한다. 카스트는 극우 포퓰리즘과 민족주의 성향의 정당연합인 기독교사회전선(PLR) 소속이다. 결과적으로 이번에 대선에 나온 정당이나 정당연합 중 가장 오른쪽과 왼쪽 세력이 2차에서 격돌한 것이다. 1차 투표에서 47.3%였던 투표율은 결선 투표에서 55.6%로 뛸 정도로 이번 대선은 국민의 뜨거운 참여를 이끌어냈다. 결선투표에 참여한 유권자는 827만 명으로 1차 때의 702만 명보다 120만 명이나 더 많았다. 7명의 후보가 나온 대선 1차 투표에선 극우와 극좌 성향의 후보가 1,2위를 차지하고 중도 좌파와 중도 우파가 대거 몰락했다. 카스트 후보가 27.91%로 1위를, 보리치가 25.82%로 2위를 각각 차지했다. 보리치는 이처럼 1차 투표에선 카스트에게 밀렸지만, 결선투표에서 역전했다. 결선투표에서 좌파가 단합한 것은 물론, 1차 투표에서 냉담했던 유권자까지 투표소로 몰린 셈이다. 1차 투표에서 중도좌파인 인민의 당(PDG)의 프랑코 파리시는 12.81%, 중도우파와 극우파의 중간인 칠레 포데모스 마스(ChP+‧칠레 우리는 더 많이 한다)의 세바스티안 시셸은 12.79%를 각각 득표했다. 중도에서 중도좌파 성향의 신자유계약(NPS)의 야스나 프로보스테는 11.60%, 민주사회주의‧환경주의‧페미니즘을 내세운 좌파 포퓰리즘 정당인 진보당(PRO)의 마르코 엔리케오미나미는 7.60%, 칠레공산당을 승계한 공산주의 정당인 애국주의동맹(UPA)의 에두아르도 아르테스는 1.46%를 각각 얻어 바닥권을 머물렀다. 대선과 함께 치른 총선에선 칠레 포데모스 마스가 53석, 보리치 당선인이 소속한 아프루에보 디그니다드가 37석, 신자유계약이 37석, 기독교사회전선이 15석, 인민당이 6석을 각각 얻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보리치 당선인은 대선 과정에서 최저임금 인상과 연금 개편, 의료 시스템 정비, 교육 개혁, 국영 리튬 회사의 설립 등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웠다. 그런 보리치는 대선 기간 내내 “그동안 칠레가 신자유주의의 요람이었다면 이제부터는 무덤이 될 것”이라며 대대적인 ’좌향좌‘ 경제‧사회 개혁을 예고했다. 그 결과 빈부 격차와 소득 불평등에 불만이 높은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었다. 보리치는 2011년 고등교육 개혁을 요구하는 대학생 시위를 주도하다 정치에 뛰어들어 하원의원에 선출됐다. 주목되는 것은 WSJ이 그런 보리치의 모습에서 남미 최초로 선거로 당선했던 마르크스주의자인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1908~1973년, 1970~73년 집권)을 떠올린 것이다. WSJ은 “보리치가 아옌데 이후 가장 좌파적일 수 있다”고 평가했다. ━ 과감한 진보정치 펼쳤던 아옌데, 보리치 비추는 거울 보리치 당선인과 비교된다는 아옌데는 어떤 인물이며 어떤 정책을 폈는지를 살펴보면 보리치가 추구하려는 정치적 지향을 파악할 수 있다. 아옌데는 오랫동안 죽음과 어두움으로 점철됐던 칠레 현대사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아옌데는 1970년 11월 중남미에서 최초로 선거로 대통령에 당선한 좌파 정치인이다. 아옌데의 좌파 정권을 1973년 9월 미국의 지원을 음양으로 받은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국방부 장관이 군사쿠데타로 무너뜨리면서 칠레의 정치적 비극이 시작됐다. 소아과 의사 출신인 아옌데는 1970년 9월 대통령 선거에서 칠레사회당 소속으로 출마했으며,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공산당의 대선 후보였던 시인 파블로 네루다와 후보 단일화를 이뤄 좌파 대중연합의 나섰다. 아옌데는 우파 국민당의 호르헤 로드리게스 후보와 팽팽한 접전 끝에 36.6%를 득표해 승리했다. 35.4%를 득표한 로드리게스와의 표차가 3만9338표에 지나지 않은 초박빙 선거였다. 과반 득표자가 없어 헌법에 따라 의회 투표를 거쳐 아옌데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칠레에서 대선결선 투표는 2012년 도입됐다. 그렇게 집권한 아옌데가 과감하게 진보정치를 펼쳤다. 외국자본을 추방하고 구리광산과 금융업체를 비롯한 주요 산업을 국유화했다. 토지의 4분의 1에서 5분의 1을 국유화했다. 그렇게 확보한 재정으로 교육을 확대하고 빈곤층에 일자리를 만들어줬다. 어린이에게는 우유를 무료로 급식했다. 정부 재원으로 극빈자들에게 식료품을 무료로 제공하는 프로그램이 가동됐다. 이런 프로그램 덕분에 영양실조 환자는 17%가 줄었다. 5만5000명의 자원봉사자를 가난한 남부에 보내 주민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의료 서비스를 제공했다. 오랫동안 사회의 아웃사이더였던 원주민을 사회에 통합하는 교육‧연금 등 프로그램도 도입됐다. 12만 채의 주택 건설에 나서면서 대규모 고용을 촉진했고, 이를 위해 고용된 건설노동자들에게 사회보장을 제공했다. 빵 가격을 고정하고, 원가에 연동한 전기요금 인상 계획을 철회했다. 블루컬러를 위한 최저임금은 1971년 첫 분기에 56%를 인상했다. 같은 시기 화이트컬러의 평균 임금은 23%가 올랐다. 이를 통해 화이트컬러와 블루컬러의 평균임금 격차가 1970년 49%에서 1971년 35%로 줄었다. 1971년 평균임금이 22.3%가 올랐음에도 인플레이션율은 1970년 36.1%에서 1971년 22.1%로 오히려 줄었다. 중앙정부 지출은 36%가 증가해 국내총생산(GDP)의 21%에서 27%로 늘었다. 아옌데가 대통령으로 재임한 3년 동안 공공주택 건설은 매년 평균 5만2000채에 이르렀다. ━ 경제정책 실패에 쿠데타로 최후 맞은 아옌데 경제원칙을 무시한 조치로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가격 통제에서 많은 문제가 생겼다. 대표적인 것이 수요-공급의 법칙을 무시하면서 생긴 공급과 물자 부족 현상이 전국으로 파급됐다. 슈퍼마켓의 선반은 텅 비었다. 인플레이션이 이를 더욱 악화시켰다. 가격을 고정하고, 급여를 올리면 국민이 풍요롭게 살 것이라는 아옌데의 확신은 경제법칙 앞에 무력화했다. 생필품인 쌀, 콩, 설탕, 밀가루를 거래하는 암시장이 곳곳에서 판을 쳤다. 토지 몰수 등을 추진한 아옌데의 경제정책에 토지 소유주와 고용주들, 사업가들, 소상인들, 공무원들이 대대적으로 반발했다. 시기도 좋지 않았다. 베트남전쟁에 개입한 미군이 1969년부터 병력 감축에 들어간 데 이어 1973년 1월 27일 북베트남 등과 파리평화협정을 맺고 전쟁을 끝내기로 했다. 미국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1월 19일 베트남 전쟁 종전을 선언했다. 3월 29일엔 미군이 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구리가 필요한 포탄과 탄약의 수요가 급감하면서 구릿값이 폭락했다. 칠레는 지금도 세계 최대의 구리 생산국이다. 미국 지질 서베이에 따르면 2020년 전 세계의 구리 생산량은 2000만t로 그 중 칠레에서 570만t이 나왔다. 생산량 2위인 페루가 220만t, 3위인 중국이 170만t, 민주콩고공화국(DRC)이 130만t, 미국이 120만t임을 고려하면 엄청난 물량이다. 칠레는 구리 매장량도 세계 1위로 2억t에 이른다. 현재 칠레 전체 산업의 10%를 광업이 차지하고, 광업 생산액의 90%를 구리에서 얻는 칠레 경제의 특성상 구릿값 폭락을 경제 불안을 부를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1973년이 되자 인플레율이 140%로 치솟았다. 해외투자가 끊겼는데, 정부 지출이 늘었기 때문이다. 경제는 –5.6%의 역성장을 기록하며 뒷걸음쳤으며, 정부 재정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파는 군사 쿠데타를 부추겼다. 미국 대통령이던 리처드 닉슨은 중앙정보국(CIA)을 통해 이를 지원했다. 아옌데 본인이 임명한 국방부 장관인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쿠데타를 주도했다. 아옌데는 쿠데타가 시작된 직후 대통령 관저인 모데나 궁에서 라디오 생방송으로 국민에게 작별 연설을 전했다. 아옌데는 그 암울한 순간에도 희망을 강조했다. “내 나라의 노동자들이여, 나는 칠레와 그 운명에 대한 신념이 있습니다. (중략) 이 어둡고 쓰라린 순간은 극복될 것입니다. 머지않아 자유인들이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는 위대한 시대가 다시 열릴 것입니다.” 쿠데타군은 도주로를 열어주겠다고 아옌데를 회유했지만, 그는 연설 직후 경호원들에게 투항을 지시하고 자신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쿠바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가 선물한 AK-47 자동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이 소총에는 ‘방법은 다르지만 목적은 같은 친구 살바도르에게, 피델로부터’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무장혁명으로 정권을 탈취한 카스트로가 선거로 당당히 정권을 차지한 동지에게 보낸 글이었다. 아옌데 지지자들은 그의 자살을 믿지 않았다. ‘직접 소총을 들고 쿠데타군에 맞서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했다’ ‘쿠데타 병력이 체포한 뒤 총살했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아옌데는 ‘순교자’로 받들어졌다. 하지만 민주화가 이뤄진 뒤 재조사에서도 아옌데는 달아나지 않고 대통령으로서 스스로 최후를 맞은 것으로 확인됐다. 이렇게 자신의 신념을 위해 스스로 희생한 아옌데는 칠레가 민주화되고 피노체트 일당이 군사정권 당시의 반인륜적 범죄로 단죄되면서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1990년 민주화 이후 칠레는 아옌데의 정책을 다시 실시하는 대신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에 복지를 가미한 새로운 정책으로 경제발전과 사회통합을 이뤄가고 있다. 아옌데의 분배 중심 정책은 오히려 우고 차베스의 베네수엘라에서 계승됐다. ‘아옌데 시즌2’가 본국인 칠레가 아닌 베네수엘라에서 펼쳐진 것이다. ━ 민주화 뒤 겉은 안정, 속은 곪았던 칠레 중도 정책을 취한 칠레는 경제는 어느 정도 안정됐지만 속으로 곪아왔다. 전체인구의 1%인 부유층이 전체 국부의 25%를 소유하면서 빈부 격차가 심화했다. 이는 2019년 대규모 시위로 표출됐다. 2019년의 칠레 대형 시위는 전 세계에 충격을 줬다. 한때 경제 발전과 민주화 모두에서 남미의 모범으로 평가받던 칠레가 2019년 11월 16~17일 세계 21개국 정상이 참여해 수도 산티아고에서 열릴 예정이던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시위 사태로 취소했기 때문이다. 세비스티안 피녜라 대통령은 10월 30일 APEC 정상회의 취소를 발표했다. 칠레가 야심차게 준비해왔던 다자외교 행사를 취소할 정도로 급박한 형편이 된 외형적인 이유는 공공 지하철 요금 인상에 따른 국민의 시위사태였다. 그해 10월 25일 건국 이래 최대 규모인 120만 명이 수도 산티아고에 몰리고 사망자가 20명에 이르는 등 칠레는 민란 수준의 통제 불능 시위 사태를 겪었다. 그 배경으로 ‘고인물 권력’을 지목할 수 있다. 칠레는 1970년 살바도르 아옌데의 좌파 정권은 1973년 아우구스토 피노체트(1973~81 군사정권, 1981~89 권위주의 민간정부 대통령)가 쿠데타로 이를 전복했다. 하지만 칠레 국민은 끈질긴 투쟁으로 1989년 피노체트 정권을 몰아내고 이듬해 민주화를 이뤘으며 이후 안정과 민주화, 경제 성장을 구가해왔다. ━ 보리치, ‘그들만의 정치’에 신음하는 칠레 구할까 문제는 2006년 이후 좌·우파 회전문 권력으로 부정부패와 정권의 독선을 감시할 건전한 비판 세력이 없었다는 점이다. 칠레는 대통령이 중임은 할 수 있지만, 연임은 할 수 없다. 한 정치인이 대통령을 연속 두 차례 지낼 수는 없지만, 한 임기를 쉬면 그다음 선거에 다시 나올 수 있다. 칠레에선 이 제도를 이용해 좌·우파에서 같은 인물이 대통령을 번갈아 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좌파에선 미셸 바첼렛(2006~2010년, 2014~2018년 재임), 우파에선 세바스티안 피녜라(2010~2014년, 2018년~현직)가 이렇게 대통령을 맡아왔다. 그러자 문제가 발생했다. 유권자를 겁내지 않는 고인물 권력층이 형성됐으며, ‘우리끼리 정치’ ‘그들만의 정치’가 판치기 시작했다. 피녜라의 우파 정권의 경우 지난 정권의 마지막 법무장관이 현 정권에서 외무장관을 맡는 등 좁은 인재풀에 고위 공직이 기득권층의 자리 돌리기로 메워졌다. 결국 정치는 소수 엘리트 정권의 파당 정치에 빠졌고, 정치와 정책은 진영 논리에 빠졌다. 이들은 정치인과 대중 간의 괴리를 불러왔다. 결국 이번 시위 사태를 부른 지하철 요금 인상은 도화선일 뿐 실제 원인은 대중과 좌우 기득권층의 해묵은 대립인 셈이다. 지하철 요금 인상에 항의하는 시위가 발생하자 경제 장관이 “조조할인을 이용하라”고 막말을 하면서 사태에 기름을 부은 것도 민심과 동떨어진 ‘그들만의 권력’의 실체를 보여준 사례로 지목된다. 결국 국민을 겁내지 않고 쉽게 권력을 차지한 정치인들이 국민의 목소리 듣지 않고 자신들이 잘하고 있다고 착각하다 끝내 분노한 대중으로부터 대규모 시위라는 강펀치를 맞은 셈이다. 결국 APEC 취소에 이른 칠레 민란 배경은 ‘고인물 권력’인 셈이다. 이 시위로 피녜라 대통령은 2020년 10월 25일 ‘새 헌법을 원하는가’와 ‘누가 새 헌법을 제정해야 하는가’를 각각 묻는 국민투표를 했다. 그 결과 투표자의 78.28%가 새 헌법을 원했으며, 78.99%가 의회와 제헌 기구가 혼합하는 대신 제헌의회를 구성해 헌법을 새로 작성해야 한다고 답했다. 이에 따라 지난 5월 15~16일 제헌의회 선거가 이뤄져 43.43%의 투표율로 155석의 의석 중 중도좌파 바모스 포르 칠레가 37석(20.6%), 좌익 성향의 아프루에보 디그니다드가 28석(18.7%), 무소속연합인 인민리스트(16.2%)가 26석, 사회민주주의 계열의 리스타 델 아프루에보가 25석(14.5%), 비중도 무소속이 11석(8.3%), 기타 무소속이 11석(15.5%)을 각각 얻었다. 좌도 우도 독단으로 새 헌법을 제정하기 힘든 분포다. 이런 분포의 제헌의회는 7월 4일 개원해 새 헌법을 제정하고 있다. 내년 7월에 제정이 완료되면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될 예정이다. 보리치 당선인은 칠레의 고질적인 경제 양극화를 치유하면서 제헌 과정을 관리해야 하는 책무를 떠맡았다. 보리치가 3월 취임하고 새 헌법이 7월 이후 확정되는 2022년은 칠레에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한 해가 될 수밖에 없다. 청년 대통령 보리치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nag.co.kr

2021.12.25 19:00

9분 소요
[오늘의 경제정책 브리핑] 완공 1년 신한울 1호기, 운영허가 나오나

정책이슈

━ 신한울 1호기, 원안위 안건 재상정될까 한국수력원자력이 신청한 신한울 원전 1호기 운영허가안이 9일 오후 열리는 원자력안전위원회(원안위) 심의·의결 안건으로 재상정될지 처리 여부가 주목된다. 이번 심의는 김부겸 국무총리가 신한울 1호기의 운영허가 승인을 엄재식 원자력안전위원장에게 요청하겠단 뜻을 밝혀 더욱 관심이 쏠린다. 1400㎿ 규모인 신한울 1호기는 2010년에 착공해 2020년 4월 완공했다. 운영허가만 받으면 바로 가동이 가능한 상황이지만, 운영 허가가 나지 않아 원전 가동이 이례적으로 늦어지고 있다는 지적이 일각에서 나왔다. 원안위는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KINS) 측으로부터 총 12차례에 걸쳐 운영 허가 관련 보고를 받았음에도 지난달 열린 140차 회의에서 결정을 보류했다. 원안위는 신고리 원전 4호기의 경우 8차례, 신월성 원전 2호기의 경우 6차례의 보고를 받고 운영 허가를 내준바 있다. ━ 민주당, 사흘간 국민·당원 여론조사 더불어민주당은 9일부터 사흘간 국민·당원 여론조사를 거쳐 11일 예비경선을 마무리한다. 이후 상위 6명이 겨루는 본경선에 돌입한다. 본경선에서는 선두주자인 이재명 후보와 ‘반명 전선’ 간 명확한 대결구도가 형성될 것으로 보인다. 이 후보는 본경선에서 과반 득표를 이뤄 결선투표 없이 대선 본선행을 확정, 1·2·3차로 나뉘는 선거인단 투표결과에서 1차(8월15일) 발표에 승부를 보겠다는 포부다. 이를 위해 1차 모집 선거인단 신청을 독려했다. 추격 주자들은 과반을 저지해 이 후보에 반대하는 지지층을 결집, 결선 투표에서 역전을 이루겠다는 각오다. 이낙연 후보 측은 최근 당 지지층의 지지율이 반등했다는 점에 고무된 반응을 보이며 ‘반명 연대’의 구심점으로 자리를 굳히겠다는 방침이다. 정세균 후보는 이광재 의원과의 단일화 후 본경선에서 상승 곡선을 기대하고 잇다. 동시에 다른 후보와의 추가 단일화도 모색해 '반명 전선'의 확대에 앞장설 것으로 보인다. 중도 확장성을 앞세우는 박용진 후보 등도 컷오프 통과를 확신했다. 안팎에서는 ‘반명연대’에 맞서는 ‘명추(이재명-추미애) 연대’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다. 김하늬 기자 kim.honey@joongang.co.kr

2021.07.09 06:00

2분 소요
[혼돈의 중남미 어디로] 남미 좌우파 정권 치열한 대립 양상

산업 일반

모랄레스 전 볼리비아 대통령 사임 두고 갈등… 칠레·볼리비아 이어 니카라과 정세 급변 가능성 라틴 아메리카가 요동치고 있다. 일당독재 국가를 제외하고 중남미 좌파 지도자 중 최장 기간 권좌를 지켜온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이 부정선거 문제로 촉발된 대규모 시위 사태로 11월 10일 사임하고 이튿날 멕시코로 망명했다. 중남미의 민주주의와 경제 성장의 모범국이었던 칠레는 지하철 요금 30페소(50원) 인상에 따른 대규모 시위사태로 11월 16~17일로 예정됐던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취소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 모랄레스, 좌파의 희망에서 장기 집권 모략가로 2006년 1월 볼리비아에서 원주민 최초로 대통령에 오른 사회주의운동당의 에보 모랄레스는 ‘남미 좌파 정치의 희망’에서 ‘장기 집권 음모가’로 변질됐다가 결국 권좌에서 물러났다. 모랄레스는 대선 조작 논란으로 수도 라파스를 중심으로 대규모 시위 사태가 발생한 지 3주 만인 11월 10일 스스로 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모랄레스의 퇴진은 윌리엄스 칼리만 군 최고사령관과 쿠리 칼데론 경찰청장이 시위를 진압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대통령 사임을 요구한 다음날 발표됐다. 모랄레스는 사임 발표 후 텐트에서 지내는 사진을 공개했지만 다음날 멕시코 군용기를 타고 멕시코로 망명했다. 그는 “더욱 강해져서 돌아오겠다”며 “신자유주의자들이 권력을 잡으려고 군대와 손잡고 민주주의 정권을 억압했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사임이 ‘쿠데타 때문’이라고 표현했다.멕시코 정부는 “모랄레스가 전화로 망명을 신청해 이를 받아들였다”고 공개하고 “(볼리비아) 군이 헌법을 위반해 대통령 사임을 요구한 것은 정권에 대한 테러”라고 주장했다. 아르헨티나의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대통령 당선인(12월 10일 취임 예정)과 11월 8일 석방된 룰라 이그나시우 다시우바 전 브라질 대통령을 비롯한 좌파 지도자들은 모랄레스의 사임 사태를 “쿠데타”라고 주장했다.페르난데스는 지난 10월 27일 아르헨티나 대선에서 승리해 4년 만에 페론주의 정당인 ‘정의당’의 좌파 포퓰리즘 정권을 복원했다. 룰라는 뇌물과 돈세탁 혐의로 2017년 7월 1심 재판에서 9년 6개월, 지난해 1월 2심 재판에서 12년 1개월 징역형을 각각 선고받고 지난해 4월 7일 수감됐다. 하지만 연방대법원이 2심 재판의 유죄 판결만으로 피고인을 수감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11월 7일 판단하면서 룰라는 580일 만에 석방됐다. 공산주의 일당독재 국가인 쿠바의 미겔 디아스카넬 국가평의회 의장과 두 명의 대통령이 존재하는 베네수엘라의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도 같은 주장을 펴며 모랄레스를 응원했다.모랄레스는 아무런 수습책 없이 혼란의 볼리비아만 남기고 망명을 떠났다. 그가 사임을 발표한 날 대통령직 승계 1순위인 부통령은 물론 2순위인 상원의장도 물러났으며, 3순위인 하원 의장도 승계를 고사해 권력 공백 상태에 빠졌다. 그러자 모랄레스가 속한 집권 여당인 사회주의 운동당(MAS)의 불참 속에 야당 소속 자지네 아녜스 하원부의장이 11월 13일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임시 대통령을 맡았다. 임시정부는 대선 재선거를 실시할 것이라고 선언했다.볼리비아 사태의 발단은 10월 20일 치러진 대선·총선의 부정선거 시비다. 현직인 모랄레스는 유효표의 47.08%를 득표해 36.51%를 득표한 2위 카를로스 메사(시민공동체) 후보보다 10%포인트 이상 득표한 것으로 나타났다. 볼리비아 대선은 1차 투표 1, 2위 득표자가 결선투표를 치르지만 격차가 10% 포인트 이상인 경우 결선투표 없이 1위 득표자의 당선을 선언한다. 문제는 중간 집계에서 격차가 10% 미만이었던 것이 최종 발표에서 10% 이상으로 발표되면서 많은 사람이 석연치 않다고 생각하게 됐다는 점이다.거기에 선거를 감시했던 미주기구(OAS)가 이번 선거를 조작과 결과 바꾸기, 날조가 횡행한 부정선거라고 선언하고 재선거를 권고하면서 사태에 기름을 부었다. OAS는 1948년 창설된 중남미 지역의 협의기구로 현재 35국이 가입하고 있으며 미국 워싱턴에 본부가 있다. 이번 대선에선 한국계 이민 출신인 정치현 후보는 우파 기독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8.78%를 득표해 3위에 올랐다. 우파 민주사회운동의 오스카 안텔로 후보가 4.24% 득표로 4위에 올랐다. 만일 결선투표를 치렀으면 야당 세력의 합종연행으로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규모 항의시위가 터지고 이를 통제하지 못한 모랄레스는 퇴진과 망명을 선택한 셈이다. 결국 모랄레스의 퇴진은 남미의 좌우파 정권 간의 대립까지 부르고 있다.이번 사태의 바탕엔 볼리비아 정치의 대결 구도가 자리 잡고 있다. 모랄레스가 1998년 창당해 그가 대통령에 오른 2006년 1월부터 집권당으로 자리 잡은 사회주의 운동당(MAS)은 좌파 포퓰리즘 정당이자 원주민 정당으로 분류된다. 지지자들은 당 이름의 약자를 따서 마시스타스로 불린다. 볼리비아는 1150만 인구의 68%가 백인과 원주민의 혼혈인 메스티조이고, 20%가 18개 이상의 언어를 쓰는 원주민이 차지한다. 백인은 5%, 아프리카계는 1% 수준이다. ━ 국민투표 결과조차 무시한 안하무인의 태도 남미 최초의 원주민 출신 대통령인 모랄레스는 바로 이 원주민들과 빈민, 그리고 좌파의 지지를 권력 기반으로 삼았다. 모랄레스는 2005년 자신이 주도했던 가스산업 국유화 요구 시위 사태로 정국이 혼란한 상태에서 2006년 1월 정권을 쥐었다. 당시 민족주의·포퓰리즘 정당인 민족혁명운동당은 시위 사태로 직격탄을 맞았다. 곤살로 산체스 데 로사다(2002년 8월~2003년 10월 재임) 대통령과 이를 승계한 부통령 카를로스 메사(2003년 10월~2005년 6월)가 줄줄이 사임하고 대법관 출신 에두아르도 로드리게스(2005년 6월~2006년 1월)가 세 번째 승계자로 간신히 남은 임기를 채웠다. 모랄레스는 자신이 주도한 시위 사태로 정치권이 무력해진 권력 공백 상태에서 2005년 12월 치러진 대선에서 53.74%를 득표해 28.59%를 얻은 보수정당인 민주사회세력 소속 호르헤 키로가 전 대통령을 상대로 압승을 거뒀다.모랄레스는 취임 후 남미 2위의 매장량을 자랑하는 천연가스 등 에너지 기업에 대한 세금을 높이고 광산·전기·통신·철도 등을 국영화해 얻은 재원을 빈민과 원주민 복지 향상에 투입하는 정책을 폈다. 취임 당시 전체 인구의 16%에 이르던 문맹을 퇴치하는 사업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성장과 복지를 동시에 추구한 정치인으로도 통했다. 미국이 주도한 ‘마약과의 전쟁’에 맞선다며 코카인 원료인 코카잎 재배자의 권리를 옹호하기도 했다. 지지층인 원주민의 권리를 고려한 조치다.이처럼 모랄레스는 남미 대륙의 첫 인디오 출신 대통령으로 인권정치를 앞세우며 기대를 모았으나 장기 집권에 골몰하다 결국 추락하기에 이르렀다. 모랄레스는 자신이 추구하는 정책이 ‘정의’라며 이를 실천하기 위해선 더 긴 임기가 필요하다고 내세우며 장기 집권을 시도해왔지만 민주적·절차적 정당성을 훼손한다는 지적을 받아왔다.모랄레스는 결국 장기 집권 욕심에 국민투표 결과조차 무시하는 안하무인의 태도를 보였다. 그는 2017년 2월 대통령 임기 제한 폐지안을 담은 국민투표에서 51대 49로 패배했다. 하지만 그해 11월 순응적인 헌법재판소로부터 “임기 제한은 위헌”이라는 판결을 받아내고 올해 4선에 도전했다. 민주주의를 주장하며 집권했지만 권력에 취하자 노골적으로 장기 집권 의도를 드러냈다. 대선 전부터 이에 반발하는 국민이 시위를 벌였지만 모랄레스는 귀를 막았다가 결국 대선 부정 시비로 권좌에서 밀려났다. 모랄레스가 물러나자 원주민이 중심이 된 지지자들이 맞시위를 벌였지만 혼란만 초래하고 있을 뿐 상황을 역전하기에 역부족이다. ━ 경제와 민주화 모범국 칠레의 급변사태 칠레 사태도 전 세계에 충격을 주고 있다. 한때 경제 발전과 민주화 모두에서 남미의 모범이던 칠레가 11월 16~17일 세계 21개국 정상이 참여해 수도 산티아고에서 열릴 예정이던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시위 사태로 취소했다. 칠레의 세비스티안 피녜라 대통령은 10월 30일 APEC 정상회의 취소를 발표하면서 미국과 중국의 무역합의와 문재인 대통령의 중남미 순방을 비롯한 다양한 글로벌 외교 일정이 꼬이게 됐다.칠레가 야심차게 준비해왔던 다자외교 행사를 취소할 정도로 급박한 형편이 된 외형적인 이유는 지하철 요금 인상에 따른 국민들의 시위사태였다. 10월 25일 건국 이래 최대 규모인 120만 명이 수도 산티아고에 몰리고 사망자가 20명에 이르는 등 칠레는 민란 수준의 통제불능 시위사태를 겪었다.그 배경을 살펴보면 ‘고인물 권력’을 지적할 수 있다. 칠레는 1970년 살바도르 아옌데(1970~1973년)가 대통령에 당선하면서 남미에서 민주선거로 집권한 첫 좌파 정권을 수립했지만 1973년 아우구스토 피노체트(73~81 군사정권, 81~89 권위주의 민간정부 대통령)가 쿠데타로 이를 전복했다. 하지만 칠레 국민은 끈질긴 투쟁으로 1989년 피노체트 정권을 몰아내고 민주화를 이뤘으며 이후 안정과 민주화, 경제 성장을 구가해왔다. 문제는 2006년 이후 좌우파 회전문 권력으로 부정부패와 정권의 독선을 감시할 건전한 비판 세력이 없었다는 점이다. 칠레는 대통령이 중임은 할 수 있지만 연임은 할 수 없다. 한 정치인이 대통령을 연속 두 차례 지낼 수는 없지만, 한 임기를 쉬면 그 다음 선거에 다시 나올 수 있다. 칠레에선 이 제도를 이용해 좌우파에서 같은 인물이 대통령을 번갈아 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좌파에선 미셸 바첼렛(2006~2010년, 2014~2018년 재임), 우파에선 세바스티안 피녜라(2010~2014년, 2018년~현직)가 이렇게 대통령을 맡아왔다. 그러자 문제가 발생했다. 유권자를 겁내지 않는 고인물 권력층이 형성됐으며, ‘우리끼리 정치’ ‘그들만의 정치’가 판치기 시작했다. 피녜라의 우파 정권의 경우 지난 정권의 마지막 법무장관이 현 정권에서 외무장관 맡는 등 좁은 인재풀에 고위 공직이 기득권층의 자리 돌리기로 메워지고 있다. 결국 정치는 소수 엘리트 정권의 파당정치에 빠졌고, 정치와 정책은 진영 논리에 빠졌다. 이들은 정치인과 대중 간의 괴리를 불러왔다.결국 이번 시위 사태를 부른 지하철 요금 인상은 도화선일 뿐 실제 원인은 대중과 좌우 기득권층의 해묵은 대립인 셈이다. 지하철 요금 인상에 항의하는 시위가 발생하자 칠레 경제 장관이 “조조할인을 이용하라”고 막말을 하면서 사태에 기름을 부은 것도 민심과 동떨어진 ‘그들만의 권력’의 실체를 보여준 사례로 지목된다. 결국 국민을 겁내지 않고고 쉽게 권력을 차지한 정치인들이 국민의 목소리 듣지 않고 자신들이 잘 하고 있다고 착각하다 끝내 분노한 대중으로부터 대규모 시위라는 강펀치를 맞은 셈이다. 결국 APEC 취소에 이른 칠레 민란 배경은 ‘고인물 권력’인 셈이다. ━ 혁명가가 권력욕의 화신으로 중남미 급변사태의 다음 차례는 니카라과의 다니엘 오르테가 대통령일 가능성이 크다. 오르테가는 니카라과의 좌파정당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NL)을 이끌고 2007년 1월부터 장기 집권하고 있다. 오르테가는 친미 소모사 족벌정권을 몰아낸 1979년 니카라과 혁명의 지도자로 1979~1985년 국가재건위 의장에 이어 1985~1990년 대통령을 지냈지만 재선에 실패한 후 17년간 야당 지도자로 있다가 2007년 다시 권력을 움켜쥐었다. 재집권 후 그는 국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빈민층의 국민의 의료·교육·대출 ·사회복지 접근성을 확대하는 정책으로 주목받았다. 반미정책을 추구하는 중남미 지도자와의 연대도 강화했다.쿠바에서 마르크스 레닌주의와 게릴라 교육 받은 후 1979년 혁명으로 친미 소모사 족벌정권을 전복시켜 좌파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일당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포기하고 다당제 민주사회주의자로 정치적 입장을 바꿨지만 2007년 재집권하자 장기 집권에 혈안이 되고 있다. 2014년 1월 의회에서 헌법을 개정해 대통령 임기 제한을 폐지했다. 2017년 4기 취임 후에는 과거 산디니스타 게릴라 활동을 함께했던 부인 로사리오 무리요를 부통령에 앉히고 권한을 몰아주고 있다. 좌파 게릴라 운동으로 족벌정치를 무너뜨렸던 오르테가가 이젠 권력을 사유화하며 ‘붉은 족벌정치’를 확대하는 어이없는 상황이다. 남미 반독재의 아이콘이 권력욕의 화신으로 변질된 셈이다. 중남미 피플파워의 다음 대상이 오르테가가 될 가능성이 큰 이유다.이처럼 중남미는 좌파, 우파 할 것 없이 고장 난 정치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중요한 것은 좌우가 아니라 국민임을 다시 한번 일깨운다. 좌우할 것 없이 권력은 국민에서 나온다는 평범한 진리를 잊고 정의를 독점하려는 권력층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2019.11.16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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