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ECONOMIST

10

조세호는 '불참', 안재욱은 '참석'...'프로불참러' 결국 결혼식에서 마주쳐

정책이슈

개그맨 출신 방송인 조세호가 결혼식을 올린 가운데 배우 안재욱이 참석해 관심이 쏠리고 있다.조세호는 지난 20일 인스타그램에 "안녕하세요 조세호입니다"라며 "결혼발표가 생각보다 빨리 알려져서 이미 결혼했다고 생각해주시는 분들도 꽤 계셨다"라고 썼다.이어 "조금전 너무나 많은분들의 축하와 축복속에 결혼식을 잘 마무리했다"며 "무엇보다 오늘 이자리 함께해주시고 축하해주신 모든분들께 다시 한번 깊이 감사의 인사 전해드리고 싶다. 또한 이 글을 읽으시면서 축하해주시는 모든분들께도 감사 인사드린다"라고 했다.그러면서 "이번 결혼준비하면서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는데 그 감사한마음 잊지 않고 살아가겠다"라며 "앞으로 평생을 함께할 두사람 서로 아끼고 의지하며 보내주신 축복 한아름 안고 감사히 행복하게 살아갈 모습도 많은 응원 부탁드린다"라고 다짐했다.조세호는 이날 오후 6시 서울 중구 신라호텔에서 9세 연하로 알려진 비연예인 연인과 결혼식을 치렀다. 이날 결혼식에서 절친 남창희가 사회를, 선배 개그맨 전유성이 주례를 맡았다. 여기에 절친 이동욱이 축사, 거미와 김범수, 태양은 축가를 불렀다. 결혼식에는 지드래곤, 유재석 등 유명 연예인들이 대거 참석했다.조세호와 특별한 인연이 있는 가수 겸 배우 안재욱도 왔다. 조세호와 안재욱의 인연은 201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당시 MBC 예능 프로그램 '세바퀴'에서 가수 김흥국이 "안재욱 결혼식은 왜 안 왔어?"라고 묻자 조세호는 "모르는데 어떻게 가요?"라고 답해 웃음을 안겼다. 이 때문에 조세호는 '프로 불참러'라는 별명이 붙었다.안재욱은 2017년 KBS 예능 '해피투게더3'에서 "내 인생에 생각지도 않게 조세호란 이름이 너무 많이 등장한다'라고 말해 웃음을 안겼다.이때문에 안재욱은 조세호의 결혼식에 참석하면서 "저는 결혼식에 왔다"고 했다.1982년생인 조세호는 2001년 SBS 공채 6기 개그맨으로 데뷔했다. 오랫동안 '양배추'라는 예명으로 활동하다가 공익근무요원 복무를 마친 이후인 2011년부터는 본명인 조세호로 활동하고 있다.

2024.10.21 10:00

2분 소요
운명을 넘어선 인연

산업 일반

어느 날 우산 속으로 우연인 듯 운명처럼 들어온 여인.그 여인을 잊지 않고 영원히 기억하겠다는 인우. 두 사람의 운명적인 사랑을 그린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2001)는 환생이라는 비현실적 소재를 멜로 장르에 녹여내 잔잔한 인기를 끌었다. 운명적인 여인을 교통사고로 잃은 인우는 17년 후 가르치고 있는 학생 현빈에게서 태희의 흔적을 읽는다.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에서도 영화의 기본적인 설정과 장면을 그대로 옮겨온다. 어느 날 갑자기 우산 속으로 들어온 여인이라는 설정이나 신발끈을 묶어주면서 물건을 집을 때마다 새끼손가락이 펴질 거라는 주문을 거는 장면, 빗속에서의 싸움과 화해 등 영화 속 인상적인 장면들이 무대에서 재현된다. 영화를 본 관객이라면 추억에 젖어 들게 한다. 무대 언어가 영상 언어와 다름에도 뮤지컬에서는 비교적 무대 언어로의 전환을 훌륭히 해낸다.첫사랑 이야기를 해달라는 반 아이들의 외침 소리가 서서히 잦아들면서 필름을 되감듯 인우와 태희가 만나는 시점으로 이동하는 장면처럼, 현재와 과거의 시공간 넘나드는 많은 장면들을 유연하게 처리한다. 무대 전면에 미닫이 막을 설치해 마치 영화의 프레임 같은 구실을 하면서 영화적인 느낌을 살렸다. 인우와 현빈이 서로를 알아보고 다음 생을 기약하며 산에 올라 뛰어내리는 장면도 서서히 막이 내려오면서 리프트에 올라선 두 인물을 지워나가는 식으로 영화의 프레임 구조를 이용해 둘의 죽음을 감동적으로 표현했다.다음 생으로까지 이어지는 사랑은 끈(인연)의 이미지로 빗댔다. 공연 전 닫힌 미닫이 막에는 흰 선 하나가 그어져 있다. 미닫이가 열리면서 인우가 등장하고 칠판에 한 줄을 긋는다. 그 흰 선 위에 작은 점을 세우고는 관객들에게 말을 건넨다. ‘이것이 지구다. 여기서 작은 바늘을 세우고 하늘에서 작은 밀씨를 뿌렸을 때 이 바늘에 꽂힐 말도 안 되는 확률로 우리는 만난 것이다.’ 이내 미닫이가 열리고 학생들이 드러나면서 이 풍경이 첫 수업에서 학생과 담임 선생님의 만남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인우와 태희의 운명적인 만남을 암시하는 말이다.인우가 다시 태희를 만났을 때 불현듯 묶어주는 신발끈이나, 현빈이 인우와 2인3각 경기를 위해 발을 묶는 끈은 둘의 운명적인 인연을 상징하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이것을 뉴질랜드의 광활한 자연을 배경으로 한 번지 점프의 끈으로까지 연장했지만 뮤지컬에서는 무대적 한계 때문에 번지점프 장면은 산 정상으로 대체했다.태희가 현빈으로 환생한 것이라고 확신하는 인우는 현빈에게 집착하면서 가정, 친구, 직장, 명예 모든 것을 잃는다. 한 사람을 기억하려는 인우의 몸부림을 바라보는 것은 안타깝다. 그런 인우의 반응을 이상하게 여긴현빈이 한순간 전생을 떠올린다는 설정은 다소 어설펐지만 인우에게 달려가다 교통사고를 당하는 장면은 마법 같은 연출로 인상적인 장면을 만들어낸다.현재와 과거에서 인우에게 달려가던 태희와 현빈이 동시에 사고를 당한다. 사고를 당한 현빈이 무리 속에서 일어날 때는 태희가 되었다가 인우와 함께 걸어나갈 때는 다시 현빈으로 돌아온다. 간단한 트릭이었지만 환생이라는 중요한 설정을 표현한 무대 아이디어가 드라마와 맞물리면서 감동을 준다.무엇보다도 뮤지컬에서는 윌 애른슨이 작곡한 아름다운 음악이 작품 내내 인우와 태희의 운명적인 사랑의 끈을 가슴속에 새겨놓는다. 9월 2일까지 블루스퀘어 삼성카드홀에서 만날 수 있다.볼 만한 뮤지컬 3편잭 더 리퍼빅토리아 시대 10주 동안 다섯 명의 창부들을 살해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름 없는 사람을 잭이라고 부르는 습관대로 그의 별명은 ‘살인마 잭’이 되었다. 이 실화를 무대로 옮긴 작품이 '잭 더 리퍼'이다. 스릴러와 멜로라는 다소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그래서 더 매력적인 조합을 한 이 작품은 원래는 체코 원작이었으나 한국 스태프들이 참여하여 드라마를 더 극적으로 각색했다.연쇄 살인범을 쫓고 있는 앤더슨 형사에게 외과의사 다니엘이 나타난다. 그가 살인마 잭에게 병든 연인을 치료하기 위해 신선한 장기를 구매했다고 자백한다. 다니엘은 더 이상의 살인을 막기 위해 앤더슨을 돕는다. 사건의 냄새를 맡은 기자 먼로가 코카인에 중독된 앤더슨 형사의 약점을 잡고 독점 기사를 달라고 거래한다. 살인 사건은 이어지고 먼로는 특종을 올리지만 좀체 잭의 행방은 잡히지 않는다. 그리고 마침내 드러나는 잭의 정체는 충격적인 반전을 선사한다.이번 공연에서는 무엇보다도 화려한 캐스팅이 눈에 띈다. 신성우, 유준상, 안재욱, 엄기준 등 뮤지컬에 종종 출연해온 연예인들이 대거 캐스킹됐다. 8월 25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왕세자 실종사건왕세자가 실종되었다는 보고로 극이 시작한다. 왕과 중전, 이들을 보필하는 하내관과 최상궁, 그리고 자숙과 구동이 주요 인물이다. 왕세자의 행방을 찾기 위한 수사 과정에서 권력이 집결된 닫힌 공간이 궁 안에서 서로에게 품었던 시기와 질투, 욕망과 사랑이 드러난다.원작은 동명의 연극이었다. 연극에서는 수사를 진행하면서 왕세자가 실종되었다는 본질을 잊고 각자의 욕망에만 충실한 이기적인 인간상이 부각되었다면,뮤지컬로 각색되면서 숨겨왔던 구동과 자숙의 사랑이 강조된다.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궁녀가 되어야 했던 자숙과 그런 그녀 곁에 머물고 싶어 내시를 택했던 구동의 사연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뿐만 아니라 왕에게 외면 받고 자신이 데리고 있던 궁녀 자숙에게도 배신을 당하는 중전이나, 구동과 중전 그리고 왕에게까지 사랑을 받지만 그래서 더 불행한 자숙, 사랑을 드러내지 못하고 몰래 가슴앓이를 해야 했던 구동 등 입체적인 캐릭터들이 극을 풍성하게 한다.진술에 따라 똑같은 과거가 여러 번 다르게 리플레이 되는 극 형식이 소소한 재미를 준다. 10월 28일까지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1관.영웅을 기다리며이순신의 ‘난중일기’에는 딱 삼일의 행적이 기록되어있지 않다고 한다. 여기서 힌트를 얻어 발칙한 상상력을 발휘한 작품이 뮤지컬 ‘영웅을 기다리며’이다. 일본 무사 사스케는 이순신을 처치하기 위해 홀로 조선에 잠입한다. 그는 이순신을 생포하지만 문제는 그가 이순신이라는 것을 모른다는 점이다. 바로 이순간 엉뚱하게도 ‘내 이름(죽음)을 알리지 마라’는 패러디가 생각난다면 바로 그런 코드가 뮤지컬 ‘영웅을 기다리며’가 취하는 태도다.사스케가 이순신을 알아보지 못할 만도 한 것이 포로로 잡힌 이순신은 우리가 상상하는 그와 매우 다르다. 막말을 일삼으며, 살기 위해 다소 비굴한 태도를 취하는 그에게서 성웅의 위엄은 찾아볼 수 없다.사스케와 이순신이 명나라 군사에게 겁탈 당하려는 막딸을 구해주면서 셋의 기묘한 동행이 이어진다.자신을 밝혀도 믿지 않는 상황이나, 자라를 보고 거북선을 생각해낸다는 억지 코믹 스토리는 억지스럽다고 여기면서 웃음을 멈출 수 없다.패러디와 정치적 풍자, 그리고 역사 비틀기 등 기존 역사 뮤지컬에서는 보기 드문 발랄한 접근이 이 작품의 특별한 매력을 발산한다. 10월 31일까지 PMC 자유극장.

2012.08.22 16:13

5분 소요
“돈이란 것은 써야 돈 값을 하지”

산업 일반

백선행은 1930년대 한국의 대표적 여성 사회사업가였다. 그가 교육과 사회사업에 기부한 금액은 31만여원. 서울 시내 고급주택 31채를 살 수 있는 거금이었다. 16세에 과부가 된 그는 어떻게 거금을 모았고, 왜 사회사업에 나섰을까? ▎1933년 5월 13일 평양에서 거행된 백선행 사회장 광경. 조선 최초의 여성 사회장으로 평양 주민 3분의 2가 참여했다. 1848년 헌종 15년에 백지용의 외동딸로 태어난 ‘백 과부’는 이름이 없었다. 그녀는 ‘아가’로 불리길 14년, ‘새댁’으로 불리길 2년, 나머지 70성상을 ‘백 과부’로 불렸다.아버지 백지용은 평양 박구리에 살던 가난한 농민이었다. 그나마 외동딸이 7세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편모슬하에서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한 채 어렵게 성장한 백씨는 14세에 가난한 농민 안재욱에게 출가했다. 그러나 남편은 결혼 직후 병석에 누워 불과 2년 만에 자식 한 명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철창 속의 여인16세에 과부가 된 백씨는 친정으로 돌아왔다. 과부 모녀는 청대(쪽으로 만든 검푸른 물감) 치기와 간장 장사, 베 짜기 등 닥치는 대로 일해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먹기 싫은 것 먹고, 입기 싫은 옷 입고, 하기 싫은 일 하고’를 생활신조로 삼고 열심히 일하다 보니 과부 모녀의 형편도 조금씩 나아졌다.그렇게 10년을 하루같이 살다 보니 150냥짜리 집 한 채와 현금이 1000냥 남짓 생겼다. 구차한 살림살이를 겨우 면했을 때, 어머니 김씨가 세상을 떠났다. 백씨는 봉양 한 번 제대로 못하고 모친을 저세상으로 보내는 것도 서러웠지만, 모친의 상여 뒤를 따를 상주 한 사람 없는 게 더 원통했다.백씨는 조카뻘 되는 친척을 모친의 사후 양자로 입적해 장례를 치르게 했다. 그러나 양자는 장례와 제사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모친의 유산에만 관심을 두었다. 양자는 아들인 자신이 모친의 전 재산을 상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백씨는 모친과 함께 10년 동안 갖은 고생을 하며 모은 현금 1000냥을 양자에게 빼앗기고, 150냥짜리 집 한 채만 겨우 물려받았다.백씨는 악귀를 쫓을 때 하는 평안도 풍속에 따라 문간에 콩을 뿌리고, 다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어머니와 재산을 한꺼번에 잃은 후, 다시 10년을 ‘먹기 싫은 것 먹고, 입기 싫은 옷 입고, 하기 싫은 일 하고’ 살다 보니, 50여 석 추수의 땅문서가 생겼다. 그때부터 백씨의 재산은 해가 다르게 불어났다.생활비는 일해서 생긴 돈으로만 충당하고, 땅에서 나오는 수입으로는 땅을 불려 나갔다. 백씨는 키가 크고 몸집이 벌어진 억센 여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억세다 해도 조선시대 여성이 남편도 없이 홀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가시밭길을 걷는 것처럼 고단한 일이었다. 백씨가 재산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온갖 사내가 그의 재산을 집어삼키려고 달려들었다.1900년 악명 높은 탐관오리 팽한주가 평양 부윤으로 부임했다. 그는 박구리에 사는 백 과부가 기백 석 추수의 재산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죄 없는 백씨를 잡아다 하옥했다.백씨에게 갖은 누명을 씌운 후, 재산을 바치면 풀어주겠노라고 회유하고 협박했다. 그러나 40여 년간 과부로 갖은 풍파를 겪은 백씨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백씨가 죽어도 재산은 바칠 수 없다고 버티자, 팽한주는 10여 일 만에 그를 방면했다.행복한 돈 쓰기 ▎백선행기념관과 백선행 동상. 현재까지 평양시내에 남아 있다. 탐관오리만 백씨의 재산을 노린 것이 아니었다. 과부 혼자 사는 집에는 수시로 강도가 침입했다. 백씨는 강도의 완력 앞에 맨손으로 저항하다가 뒷머리와 앞이마에 큰 상처를 입기도 했다.목에 칼을 들이대도 백씨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돈 있는 곳은 알려줄 수 없다고 버텼다. 백씨의 집에 숱한 강도가 침입했지만, 엽전 한 닢 훔쳐 나간 강도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사고 소식을 듣고 위문 간 사람들이 “가지고 계신 돈을 조금 내어주셨으면 이런 곤욕을 치르지 않으셨을 것 아닙니까” 하며 채근하면 백씨는 항상 이렇게 핀잔을 주었다.“불쌍한 사람들에게도 다 못 나눠주는 돈을 밤중에 달려들어 사람 때리고 중상 입히는 놈에게 어찌 주겠나? 내 목숨이 없어져도 돈만 남아 있으면 그 돈이 좋은 일에 귀하게 쓰이게 될 것을 아는데, 눈을 뜨고 내 손으로 그런 나쁜 놈에게 내어줄 수야 있나.”강도의 침입으로 죽을 고비를 넘긴 백씨는 ‘목숨’과 목숨보다 귀한 ‘재산’을 지키기 위해 대문, 중문, 방문, 부엌문, 들창, 장지 등 집안 곳곳을 굵은 철창살로 에워쌌다. 백씨는 그 철창살 속에서 돈 궤짝을 부둥켜안고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1908년, 백씨가 태어난 지 한 갑자(甲子)가 흘렀다.과부생활 45년 동안 앳되고 뽀얗던 얼굴은 강도에게 맞은 흉터와 깊게 팬 주름으로 거칠어졌지만, 끼니를 걱정하던 곤궁하던 살림살이는 부자 소리를 들을 정도로 나아졌다. 백씨는 환갑잔치도 하지 않고, 대동군 객산리 남편 묘소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백씨는 객산리 마을에 들러 오랫동안 품어온 계획을 전했다.“나무다리를 허물고 돌다리를 놓아주겠소.”객산리 나무다리는 낡아서 언제 무너질지 알 수 없을뿐더러 교각도 몹시 낮아 큰 비라도 내리면 물이 넘쳐 다리 구실을 못하기 일쑤였다. 백씨는 서울에서 석공기술자를 불러와서 목교가 있던 자리에 넓고 튼튼한 석교를 놓았다. 객산교(客山橋)를 준공하기까지 든 3000원 남짓의 비용을 모두 백씨가 부담했다.객산리 사람들은 백씨의 은덕으로 준공된 다리를 ‘백 과부 다리’라 불렀다. 동네 유지들은 그처럼 착한 일을 한 사람을 ‘백 과부’라 부르기 민망하다 하여 ‘과부’ 대신 ‘선행(善行)’이라 부르고, 다리 이름도 ‘백선교’라 고쳐 불렀다. 조선의 윤리와 법도가 아직 굳건하던 헌종 시절 태어난 백씨는 환갑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름을 얻었다.백선행은 사람을 좀처럼 믿지 않았다. 평생을 과부로 수절하면서 터득한 삶의 지혜였다. 허튼 욕심 부리지 않고 매사에 신중했지만, 딱 한 번 교활한 거간에게 속아 낭패를 본 일이 있었다. 1917년 백선행은 평양에서 대동강 건너편에 있는 강동군 만달산 부근의 토지가 좋다는 거간의 말만 믿은 채, 평당 7~8원을 주고 수천 평의 땅을 샀다.그러나 알고 보니 그 땅은 석회질이 많아서 풀 한 포기 자라기 힘든 황무지였다. 1~2전을 받고도 팔기 어려운 박토 중에 박토였다. 그 후 몇 년이 지나서 일본인이 그 지역에서 시멘트 원료를 발견했다. 일본인은 그 사실을 극비에 부치고 부근 토지를 모조리 평당 3~4원을 주고 매수했다. 백선행에게도 토지를 팔라고 매매 교섭을 했다.백선행의 땅을 사지 않고는 시멘트 공장을 도저히 세울 수 없는 형편이어서 땅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1~2전 하던 땅값은 순식간에 100배가 올라 1~2원을 호가하더니 얼마 후 10~20원까지 뛰었다. 매수호가가 백씨가 산 가격의 2~3배가 되었어도 백씨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일본인은 결국 평양 부윤을 찾아가 사정했다. 평양 부윤이 주선해 성사된 매매가격은 평당 70원. 백선행이 속아서 산 가격보다 10배나 비싼 가격이었다. 이 거래 한 건으로 백선행의 재산은 30만원으로 불어났다. 속아서 산 황무지 덕분에 백선행은 동네 부자에서 평양 굴지의 대재산가로 올라섰다.장례식은 최초 여성 사회장으로 치러져 ▎백선행을 소개한 기사. 『신여성』 1933년 2월호. 평양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되었어도 백선행의 일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집에 온 손님에게 냉면을 대접했다가 찌꺼기를 남기는 이가 있으면 “여보시오! 거 아깝지도 않소?” 하며 따로 보관해 두었다가 나중에 먹을 정도로 검소했다.백선행은 한평생 학교는커녕 서당 한 번 다녀보지 못했다. 한글은 물론 숫자조차 읽고 쓰지 못해 굵기가 다른 수수깡에다 손톱으로 표시해 금전의 출납을 기록했다.그런 식으로 30만원 상당의 재산을 관리했지만 한 번도 계산이 틀린 적이 없었다. 그러나 문자의 도움 없이 그럭저럭 재산을 관리할 수 있다고 해서 못 배운 것이 서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백선행은 광성보통학교, 숭인상업학교, 숭현여학교, 창덕보통학교 등 평양 시내 사립학교에 수십만원을 기부했다. 친지들이 돈을 그렇게 마구 쓰다간 얼마 못 버틴다고 충고할 때마다 백선행은 이렇게 말했다.“돈이란 것은 써야 돈 값을 하지, 쓰지 않으려면 돈은 모아서 뭐 하나.”그렇듯 돈을 아낌없이 기부한 덕분에 글조차 읽지 못하는 백선행은 위대한 교육자로 추앙받게 되었다. 70세 전후 백선행은 조선을 대표하는 여성 사회사업가로 온 국민의 존경을 받았다. 1925년 숭현예배당에서 ‘백선행 여사 교육 열성 찬하회’를 시작으로 백선행의 미거를 기리는 찬하회와 기념비 제막식, 동상 제막식 등이 꼬리를 물고 개최되었다.1928년에는 근우회 평양지회 주최로 ‘백선행 여사 위안 야유회’까지 열렸다. 야유회가 열린 기림리 공설운동장에는 2000여 명의 여성이 운집해 그때까지 평양에서 가장 많은 여성이 참여한 행사로 기록되었다. 1928년까지 평양에는 조선인이 집회를 열 만한 공회당이 없었다.부립공회당은 사실상 일본인의 전유물이었다. 조선인은 한여름이나 한겨울에도 야외에서 집회를 열어야 했다. 조만식, 오윤선이 백선행을 찾아가 조선인 중심의 공회당과 도서관을 건축할 뜻을 전하자 백선행은 흔쾌히 건립 자금을 내주었다. 백선행은 6만5000원의 공사비를 전액 부담했을 뿐만 아니라 재단법인 설립을 위해 추가로 8만5000원의 자본금을 출연했다.개관식 사회를 맡은 조만식은 백선행의 뜻을 기리는 의미에서 새로 지은 공회당의 공식명칭을 ‘백선행기념관’이라 선포했다. 백선행은 자기 배로 낳은 자식은 한 명도 없었지만, 그의 은혜를 입고 그를 어머니, 할머니로 섬기는 사람은 수만, 수십만을 헤아렸다. 백선행은 1933년 5월 8일 새벽 여든여섯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최초의 여성 사회장으로 치러진 그의 장례식에는 평양 주민의 3분의 2가 참석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2009.12.21 17:30

7분 소요
저명인사·연예인 민족종교 신자 누가 있나

산업 일반

이름을 대면 알 만한 저명인사 중에 민족종교 신자가 상당수지만, 면면을 살펴보면 종교별로 조금씩 분위기가 다르다. 때로는 현대사의 부침도 반영돼 있고, 종교별 특색도 얼추 드러난다. 예컨대 일제하 상해 임정의 구성원 자체가 대종교 신자 일색이어서 의정원 의장 이동녕을 포함해 의원·각료의 반수 이상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졌다. 해방 직후까지도 그랬다. 안재홍 민정장관, 정부 초대내각의 부통령 이시영,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 이범석, 문교장관 안호상, 감찰위원장 위당 정인보, 심계원장 명제세 등으로 채워진 미군정이 그 일례다. 화려했던 시절 대종교 신자들의 면면도 화려무비하다. 하지만 현대사의 부침 때문인지 기복이 많기로는 천도교를 따를 종교가 없어 보인다. 천도교 교령을 지낸 뒤 1978년 월북을 선택했던 고 최덕신씨의 경우 한국전쟁 정전회담 대표와 유엔총회 수석대표를 지냈던 거물이다. 현재 천도교의 큰 재산 목록인 서울 종로구 종로1가의 수운회관은 그가 교령으로 있을 때 박정희 대통령의 지원으로 세웠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지금도 북한에는 천도교청우당이라는 정당이 명목상으로나마 존재한다. 천도교의 근거지가 서북지방이라는 역사적 연고의 흔적일까? 박정희 대통령의 통치이념에 많은 자문을 했던 철학자 고 박종홍(전 서울대 교수)박사도 천도교 신자였다. 그 이전에 백범 김구도 신자다. ‘백범일지’에도 그렇게 기록돼 있지만 동학혁명 때 그는 황해도 지역 책임자인 접주(接主)까지 했다. 천도교의 평등사상에 번개 맞았기 때문이다. 동학전쟁 전해인 1893년의 일이고 당시 최연소(만 17세) 접주여서 ‘애기 접주’로 불렸다. 김구·김규식 선생을 모시고 남북협상에 참가했던 신숙, 전 KBS 부사장 김재중(현 종법사), 이경희 가야대 총장, 윤석산 한양대 교수, 최동희 고려대 명예교수 등도 신자다. 윤 교수는 ‘동경대전’ 영역(2007년)에 공이 크고, 최 교수는 ‘동경대전’ 국역에 참여했다. 재야학자 고 김승복씨 이름도 차제에 기억돼야 한다. 천도교 수련 기풍 마련에 애를 썼던 그는 작고 3년이 지난 지금도 ‘도인’으로 평가받는다. 신자는 아니어도 ‘천도교 매니어’인 시인 김지하씨도 바로 그의 감화로 수운과 해월의 사상을 알게 됐다. 동양학자 도올 김용옥씨도 당연히 천도교 매니어 그룹에 속한다. 생전 ‘원주의 예수’로 불렸던 고 무위당 장일순도 수운에 대한 애정이 큰 천도교 매니어로 유명하다. 천도교의 요직을 두루 거쳤던 고 주동림(탤런트 주현의 부친), 천도교 대전교구장인 한상준(야구선수 한대화의 부친)씨 등 알고 보면 친근한 인물도 많다. 반면 젊은 민족종교라는 이미지를 가진 증산도에는 젊은 대중연예인이 많다. 1982년생 신세대 가수 휘성이 대표적이다. 그는 2003년 입도식을 거쳐 신자가 됐다. 입도식 당시 “증산도 진리를 알았을 때 항상 내 자신에게 물어왔던 질문들의 해답을 찾았다. 그 감동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는 진솔한 소감을 남겼다. 탤런트 허영란·최민용도 증산도 신자다. 이들이 젊은층에 해당 종교의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은 생각 이상이다. 팬들은 좋아하는 연예인들의 신체 사이즈에서 취향·기호에 이르기까지 줄줄이 꿰기 때문이다. 물론 휘성·허영란·최민용은 ‘빅3 종교’인 불교·개신교·가톨릭을 믿는 연예인 신자들에 비하면 극소수에 속한다. 이를테면 연예인 불교 신자들은 이름을 열거하기 벅찰 정도다. 유재석·보아·전지현·송혜교·문근영·김민종·장동건·성시경·이승환·이승철·문희준·이병헌·이계진·김흥국·은지원·유재석·채림·서민정·이의정·함소원·남보원·이덕화·독고성·이정섭·김민기·이혜숙·진미령·전유성·정수라·강호동·황보·이수만·임하룡·이세은·독고영재 등이 대표적인 불교신자로 꼽힌다. 스포츠 스타 박세리·박지은(이상 골프), 홍명보·김남일·박지성·설기현(이상 축구)도 불교신자다. 역시 초강세는 개신교다. 그들의 면면은 가히 별들의 잔치판이라고 해도 될 정도다. 이효리·성유리·이진·유진·장나라·정다빈·윤은혜·심은진·이태란·추상미·차인표·신애라·김혜자·송승헌·원빈·고수·임창정·안재욱·김건모·안재모·조형기·박수홍·신동엽·유승준·조성모·최지우·명세빈·심은하·우희진·권상우·이재원·차태현·전지현·소유진·박상미·임동진·박지윤 등이 그들이다. 천주교도 개신교 못지않게 송윤아·김하늘·황수정·손예진·이민영·손숙·김지혜·고소영·김남주·유인촌·김래원·이동건·안성기·바다·J·이소은·류시원·배용준·GOD 박준형·NRG 문성훈·태사자·김형준·여욱환·염경환·지상렬·이휘재·김국진·김태희·성유리·심은하 등 스타가 수두룩하다. 하지만 증산도와는 달리 민족종교 원불교에는 중후한 이미지를 가진 저명 인사가 많다는 특징이 있다. 그중에는 현직들도 상당수여서 검찰총장, 헌법재판관, 국회의원, 교수 등이 다수 포진해 있다. 원로 영문학자 백낙청 서울대 교수가 대표적인 원불교 신자며, 정상명(검찰총장), 홍석현(중앙일보 회장), 김종대(헌법재판관), 김성곤(국회 국방위원장), 조정남(SK 부회장)씨 등에 이어 김옥렬(전 숙대 총장), 주정일(전 숙대 교수), 조정제(전 해양수산부 장관), 김성진(전 해양수산부 장관), 김세옥(전 경호실장) 등이 소문난 신자로 꼽힌다.

2007.10.30 13:46

4분 소요
“평창 유치 땐 강원도 시대 열릴 것”

산업 일반

▶김진선 도지사는… 1946년 강원도 동해생. 북평고, 동국대 행정학과 졸 1974년 15회 행시 합격 1983년 강원도 영월군수 91년 강원도 강릉시장 94년 경기도 부천시장 98년~현재 강원도지사(민선 3기) 2006년 민선 4기 전국시·도지사협의회 회장 “이제는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습니다. 동북아가 중심이 되고 웰빙이 중요시되고 있죠. 이제는 청정지대 강원도의 시대가 오고 있다는 얘깁니다. 2014 평창 동계올림픽이 그 서막을 알릴 겁니다. ”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에 발벗고 나선 강원도의 수장 김진선(62) 강원도지사는 유치 가능성에 대해 ‘50대50’이라며 조심스러운 입장을 보였다. 섣부른 자신감을 앞세우기보다는 항상 부족하다는 심정으로 끝까지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 때문이다. 보통 허장성세(虛張聲勢)는 세(勢)가 불리할 때 부린다. 김 지사의 담담한 어조는 반어적으로 결코 상황이 불리하지 않다는 뜻이다. 2010년 동계올림픽 유치에 실패한 만큼 이번에는 절대 놓칠 수 없다는 각오도 배어 났다. 낙후된 지역 급속도로 발전 “평창에서 동계올림픽이 열리면 그동안 상대적으로 낙후된 강원도가 급속도로 발전하는 경제효과를 가져올 겁니다. 동계올림픽이 강원도를 뒤집어 놓을 수 있다는 거죠. 꼭 동계올림픽을 유치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 김 지사는 88년 서울 올림픽이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을 이끌었고, 2002년 한·일 월드컵은 대한민국의 위상을 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계기였다는 점을 강조했다. 따라서 평창 동계올림픽은 강원도의 경제적 위상을 높이고 전 세계인에게 강원도를 알릴 수 있는 ‘터닝 포인트’라고 강조했다. 또 평창의 동계올림픽 유치는 대한민국의 올림픽을 완성한다는 측면에서도 의의가 있다. 평창이 동계올림픽을 유치하면 우리나라는 하계 및 동계 올림픽과 월드컵을 모두 개최한 6번째 국가가 되기 때문이다. 평창 동계올림픽이 88 서울올림픽·월드컵의 완성판이 되는 셈이다. 처음으로 동계올림픽 유치 아이디어를 냈다고 들었는데. “11년 전에 처음으로 동계올림픽 유치를 꿈꾸고 외롭게 시작했습니다. ‘심지기위의’(心之起爲意·마음이 일어나면 뜻이 된다)라는 평소 좌우명을 가지고 마음 먹은 이후 전력을 다했습니다. 2010년 유치에는 실패했지만 세계에 이름조차 생소했던 평창이라는 두 글자를 새겼다는 데 의의를 두고 있습니다. 그 덕분에 지금은 평창 하면 다들 알지 않습니까. 실패했다고 모든 게 허망하게 돌아간 건 아니라는 거죠. ” 유치 가능성에 대해 일부에서는 비관적 전망도 있던데. “현재로서는 3개 후보 도시 모두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3개 도시 모두 충분히 올림픽을 치를 수 있는 여건을 갖췄고 적극적인 홍보활동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타 도시와 차별화되는 평창만이 가진 명분과 비전, 유산을 충분히 홍보하면 승산이 있다고 봅니다. 지금은 큰소리 치는 것보다 차근차근 내실을 다지는 게 더 중요합니다. 승산은 충분합니다. ” 지금 현재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무엇보다 2월에 있을 실사에서 평창의 확실한 경쟁력을 검증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7월에 있을 개최지 투표에서 IOC 위원들의 표심을 잡는 것도 중요하고요. 2010년 유치과정에서부터 쌓아 온 국제적인 인적 네트워크를 잘 활용할 생각입니다. IOC 위원별로 성향과 관심 분야를 파악해 맞춤식 유치활동을 펼쳐나가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성을 담아 올림픽 정신을 확산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겠지요. ” 북핵이 오히려 훌륭한 홍보거리 북핵 문제가 장애 요인이 될 것이란 분석도 있습니다. “꼭 그렇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지난해 이미 북한 당국의 공식적인 지지와 협력방안을 담은 합의서를 받았습니다. 오히려 평창에서 동계올림픽이 열리면 남북관계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어요. 올림픽이 평화 무드를 조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IOC 위원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아주 훌륭한 홍보거리가 되는 셈이죠. ” 경쟁 도시에 비해 평창의 장점을 꼽는다면. “잘츠부르크는 기본적으로 동계스포츠의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고 지명도에서도 앞서 있는 게 사실입니다. 또 소치는 정치적 배경과 막대한 물량공세를 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평창 역시 기존의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고 국제적으로 인증받은 경기장도 많습니다. 여기에다 평창은 유럽이 주도하는 동계스포츠의 아시아 진입과 성장의 요람이 될 수 있다는 좋은 명분도 갖고 있습니다. 또 IOC가 강조하고 있는 스포츠를 통한 평화의 실천이라는 ‘올림픽 무브먼트’에도 가장 부합한다고 봅니다. ” 평창의 동계올림픽 유치가 국내적으로는 국토 균형발전에도 이바지한다고 보는데. “맞습니다. 강원도는 그동안 지리적·지형적 여건으로 인해 발전에서 소외된 지역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강원도가 가진 청정지역이라는 환경 자원을 보면 분명 강원도의 시대가 올 것으로 봅니다. 평창의 올림픽 유치는 그 촉매제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무분별한 개발은 절대 안됩니다. 철저히 친환경적인 개발에 가치를 두고 있습니다. ” 유치 시 경제적 파급효과가 클 것으로 기대되고 있죠? “물론입니다. 단순히 행사기간뿐만 아니라 연관산업으로의 투자 및 민자시설 촉진 등이 이어져 질적 개발의 계기가 될 것으로 봅니다. 최근 사회적으로 ‘수도권 대 비수도권’의 이분법적인 개념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 각 지역이 경쟁력이 서로 높아져야 합니다. 수도권 강화만이 국가경쟁력 강화가 아니라는 말이죠. 결국 평창의 올림픽 유치는 합리적인 국토공간 전략에도 딱 들어맞는 행사죠. ” 국민에게 바라는 바가 있다면.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는 전 국민의 열정과 지지가 필요합니다. 그런 에너지가 세계에 전달될 때 유치도 가능하리라 봅니다. 2010년에 한번 실패한 만큼 이번에는 더 많은 지지와 성원을 보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집안에 재수생이 있다고 보시고 따뜻한 격려의 시선과 국민적인 열의가 다시 한번 필요할 때입니다. ” 동계올림픽 위해 뛰는 ‘12번째 서포터스들’ “박세리도 미셸 위도 발벗고 나섰죠” 축구는 11명이 뛰는 경기다. 그렇지만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에는 12번째 전사가 있다. 바로 ‘붉은 악마’다. 평창에도 12번째 서포터스들이 있다. 2014 평창 동계올림픽을 위해 뛰는 48명의 명예 홍보대사와 11만의 ‘동사모(동계 스포츠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다. 명예 홍보대사 중 눈에 띄는 사람은 우선 ‘천만 달러 소녀’ 미셸 위다. 미셸 위는 지난해 연말 미국 플로리다 올랜도 골프클럽에서 48번째 명예 홍보대사로 위촉됐다. 미국 타임스지 선정 ‘세계에서 영향력 있는 100인’에 선정되기도 한 미셸 위는 이제 2014 평창 홍보를 위해 뛰고 있다. 국제 언론의 지지가 필요한 평창으로서는 큰 힘이 될 전망이다. 미셸 위 이외에도 운동선수로는 박세리, 최경주, 김연아, 이형택, 황영조 등이 명예 홍보대사로 활동하고 있다. 연예인 중에는 앙드레 김과 안재욱 등이, 예술인으로는 조수미·공지영 등이 명예대사로 위촉돼 있다. 일반인으로 구성된 풀뿌리 서포터스인 동사모도 빼놓을 수 없다. 2003년 11월 새롭게 결성된 동사모는 2010평창 당시에는 5000여 명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11만 명이 넘는 네티즌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동사모는 전국 스키장 13개소에 ‘동사모의 집’을 지정해 스키어와 관광객을 대상으로 동계올림픽 유치 홍보를 하고 있다. 또 7월 동계올림픽 개최지 투표가 이뤄지는 과테말라에 응원단을 파견하기 위해 모금 활동도 벌이고 있다. 특히 IT 강국답게 전용 홈페이지(www. dongsamo2014. com)를 구축하고 다양한 홍보를 하고 있다. 오프라인 모임에서는 푸른색 유니폼을 착용하고 ‘예스 평창’을 외치며 동계올림픽 유치를 염원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부산에서 평창까지 735㎞ 유치 기원 도보행진을 하기도 했다.

2007.01.29 14:09

5분 소요
[박미숙 기자의 여성리더 탐구(19)] 1인 기업 2년 만에 백만장자로

산업 일반

10억 부자면 백만장자다. 맨손으로 창업한 지 2년 만에 백만장자가 된 사업가가 있다. 모바일 콘텐트 제공업체인 보보스 컴퍼니의 이은아(34) 대표다. 이 대표는 2001년 6월 스타 이미지 사진을 휴대전화에 서비스하는 보보스 컴퍼니를 설립, 2002년 매출액 9억원을 기록했다. 2003년 10억원을 넘었고, 2004년엔 37억원까지 끌어올렸다. 2002년 창업경진대회에선 중소기업청장상을 받았다. 2004년 5월 서울에서 열린 ‘세계여성지도자 회의’에서는 한국 대표로 ‘IT비즈니스를 통한 온라인 마케팅’을 주제로 연설하기도 했다. 이름이 알려지자 이곳저곳에서 창업 강의를 요청해왔다. 서울여대와 동덕여대, 항공대 등 각 대학에서 창업을 주제로 강연해달라고 초청받았다. 그는 현재 중소기업청 IT 교육 강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발로 뛰며 이동통신사와 계약 회사를 설립했을 때 그의 나이는 29세였다. 그가 창업을 결심한 건 순전히 호기심 때문이었다. 고려대에서 식품영양학을 전공한 그는 원래 IT와는 인연이 멀었다. 정해진 룰대로 사는 것에 별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그는 대학시절 단과대 그룹사운드에서 키보드를 치면서 자유로움과 끼를 발산했다. 95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그는 KBS 문화사업단(현재는 영상사업단으로 통합)에 입사했다. 그곳에서 수퍼 탤런트 선발대회 등 다양한 사업들을 접하고 기획했다. 그 이후 씨에프랑스라는 여행사로 자리를 옮겼다. 그때 솔루션 기획팀에서 홈페이지를 운영하면서 IT일을 배웠다. 그 시절 일본 출장을 자주 다니면서 접한 것이 다양한 휴대전화 모바일 시장이었다. “우리나라는 흑백폰밖에 없었는데 일본은 이미 컬러폰이 등장했고 벨 소리도 다양했죠. 앞으로 국내에도 컬러폰 시장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예상했어요. 컬러폰이 들어왔을 때 어떤 콘텐트가 인기를 끌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 스타 사진 제공을 하게 된 거죠.” 이 대표가 회사를 설립할 당시만 해도 국내에는 휴대전화 배경화면 콘텐트 회사가 20~30개 있었다. 하지만 스타 사진을 제공하는 회사는 없었다. 모바일 시장은 일본에 먼저 형성됐으나 사진 콘텐트 서비스나 동영상폰 등은 국내에서 보보스 컴퍼니가 처음 시도한 셈이다. 그는 1인 기업으로 시작했다. 사무실 구할 돈이 없어 아는 사람 사무실 한 귀퉁이에 책상 하나와 전화기 한 대를 놓고 시작했다. 궁색했지만 가슴 벅찬 출발이었다. 지인들을 통해 인맥을 넓혀가며 장동건·고소영·안재욱·송윤아 등 유명 연예인들의 초상권을 따는 데 사력을 다했다. 발로 뛴 덕분에 창업 자금은 크게 들지 않았다. 그 다음 작업은 공룡 같은 이동통신사들의 문을 뚫는 것이었다. 그는 밤을 새워가며 제안서를 수십 번 고쳐쓰며 도전한 끝에 ‘사업성이 있다’는 평가를 얻어냈다. 2001년 5월 이동통신사와의 시제품 테스트가 끝나 계약에 들어갈 즈음 여성경제인협회(이하 여경협)의 창업지원센터에 입주 허가가 떨어졌다. 그곳에선 사무실을 싼 가격에 빌려줬고 전기료도 지원해줬다. 전화비용 등 잡세만 내면 부담없이 일을 할 수 있었다. 그해 9월 개인사업자에서 법인사업자로 전환했다. ‘컬러폰 보급으로 모바일 콘텐트 시장이 넓어질 것’이라는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국내에도 2003년부터 컬러폰 시장이 기하급수적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던 것. 10대나 20대 소비자들은 컬러폰에 걸맞은 콘텐트에 목말라 했다. 돈을 내고서라도 자기 폰을 꾸미고 싶은 욕구가 넘쳤지만 콘텐트는 한정돼 있었다. 2004년 컬러폰이 대중화되면서 보보스 컴퍼니의 매출은 껑충 뛰었다. 2004년 전년 대비 매출액이 4배 증가한 것은 컬러폰 대중화가 끼친 영향이 컸다. 누구에게나 창업은 만만치 않은 도전이다. 그가 말한 창업 키포인트는 대략 세 가지 정도다. 첫째, 창업할 때는 아무리 자신이 넘쳐도 회사생활을 최소한 1~2년은 해보고 난 뒤 하라. 직원의 입장도 겪어봐야 조직이 커졌을 때 효율적인 운영을 할 수 있다. 둘째, 여성들의 경우 ‘내가 여자기 때문에…’라는 잠재의식을 버려라. 제약을 두기 시작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본인이 가지고 있는 장점은 십분 발휘하고 단점 역시 단점대로 살려라. 필요 이상으로 완벽하려고 노력하지 마라. 모든 걸 다 가지려하면 한 가지도 제대로 가질 수 없다. 셋째, 철저한 계획을 세워라. 판매 경로 등을 예상하고 지출과 수입에 따른 가상 재무를 미리 짜고 시작하라. 그렇게 해서 수익구조가 나오지 않는다면 처음부터 다시 계획하라. 그는 창업을 위한 지식을 쌓기 위해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기회만 되면 세무 강의부터 모바일·디지털 콘텐트 관련 강의를 쫓아다녔다. 그때 얻은 지식은 일을 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지금의 남편도 한창 창업 공부를 하러 다닐 때 소프트진흥원 세미나에서 만났다. 겁없는 전진이 성공의 비결 그에게도 고비가 없었던 건 아니다. 모바일 콘텐트 시장이 넓어지고 돈이 된다고 생각하자 여기저기서 비슷한 업체들이 생기기 시작했던 것. 혼자 먹던 파이를 나눠 먹어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게다가 모바일 툴을 제공하던 거대 이동통신사들도 자체적으로 모바일 콘텐트 자회사를 만들어 운영하기 시작했다. 회사 규모나 자금력으로 봤을 때 거대 이동통신사들과의 경쟁은 그에게 힘에 겨울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모 스타 한 명과 초상권 계약 막바지까지 갔었는데 연락이 없더라고요. 나중에 알고 봤더니 이동통신사의 자회사 모바일 업체와 일하고 싶어 연락을 안 한 것이었어요.” 그때 이 대표는 창업 이후 처음으로 혼자 울었다. 마음속으로 ‘거대 회사들과 승부를 겨루기 위해선 이제 진짜 실력으로 승부를 겨룰 때’라고 다짐한 것도 그 일이 있은 직후다. 유혹도 많았다. 스타 사진을 한다니까 연예인 누드 사진 제공을 하자는 제안이 잇따라 들어왔다. 하지만 그는 조회만 하면 돈이 쏟아지는 누드 콘텐트에 눈을 돌리지 않았다. 사업가로서 정도가 아닌 길을 걷지 않겠다는 신념이었다. 그는 스타 사진 콘텐트뿐만 아니라 영화 홍보 마케팅도 펼치며 사업을 다각화했다. 2002년 4월 한국영화 ‘예스터데이’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한국영화 약 40편, 외화 약 15편 등 총 55편의 영화관련 콘텐트(텍스트·스틸·동영상 등)를 유·무료 형태로 이동통신사의 모바일 매체에 제공하고 있다. 보보스 컴퍼니의 실력은 해외 업체에서도 인정받기 시작했다. 미국의 드림웍스사와 직접 계약을 하고 국내에서 상영되는 영화에 대한 독점 콘텐트 판매권을 따기도 했다. 지난해엔 미국의 월트디즈니 컴퍼니 본사와 계약, 캐릭터 모바일을 독점 배급하고 있다. 지금은 오프라인 사업도 한다. 드림웍스나 디즈니 영화에 나오는 캐릭터 인형을 독점 판매하고 있다. 디즈니와의 독점 계약도 보보스의 명성이 알려져 여러 군데서 추천받아 이루어진 것이다. 실력으로 입소문이 나자 누구도 회사 규모를 보고 주저하거나 계약을 취소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이 대표가 사업을 운영하며 가장 힘들었던 건 역시 사람 관리였다. “사장 마음과 직원 마음이 다르다는 걸 가끔 느낄 때 외로워지죠. 사장은 전 직원에게 마음을 몽땅 주는데 직원들은 언제라도 더 좋은 곳이 있으면 떠나버리니까요. 저 역시 그랬고요. 억지로 사람을 붙들어 맬 수는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조직원으로 같이 있을 때 최대한 서로 마음을 모아 시너지를 내게 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걸 알았죠.” 그는 장기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모바일 콘텐트 시장에서 장기 계획을 세우는 자체가 발목을 잡는 일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시장을 발 빠르게 앞서가는 추진력으로도 회사 안팎에서 인정받고 있다. 이 대표는 말하는 것으로만 보면 천상 여자였다. 하지만 그를 조금만 오래 접한 사람들은 ‘성격만 보면 천상 남자’라고들 말한다. 겁이 없고 배포도 크기 때문이다. 그는 KBS 문화사업단을 그만두고 한 달 동안 미국 북부에서 남부까지 혼자 여행했다. 덩치가 세 배나 큰 흑인과 히피들이 가득한 열차와 버스 등을 갈아타며 여행할 때도 두려움보다는 여행에 대한 설렘이 더 컸던 그다. “기회가 오면 주저하지 않는 성격이 이제껏 저를 전진하게 한 힘이었던 같습니다.” 그가 도전한 세상은 손바닥 만한 휴대전화 화면이었다. 하지만 이 대표는 그 작은 공간에 무한한 꿈을 그렸고 결국 꿈을 이뤘다. 1972년생, 1995년 고려대 식품영양학과 졸업, KBS 문화사업단 사업부 1997~2000년 넷스케이프 넷센터 기획팀장 2001년 보보스 컴퍼니 설립 현재 보보스 컴퍼니 대표이사

2006.06.05 14:32

5분 소요
지상특강  이것이 시장경제다⑬···정부가 일자리를 만든다?

산업 일반

지난해 코엑스에서 열린 ‘일자리 창출을 위한 투자전략보고회’.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해 대기업 회장들이 대거 참석했다. 안재욱 경희대 경제학부 교수 정부가 ‘일자리 창출 방안’을 쏟아내고 있다. 그러나 일자리는 정부가 만든다고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기업의 투자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기업이 향후 사업 전망이 좋다고 판단되면 시설 투자를 하고, 이에 따라 인력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이 되면 고용을 늘리는 것이다. 반대로 사업 전망이 좋지 않다고 판단하면 투자를 줄이고, 고용을 늘리려 하지 않는다. 물론 정부가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특정 부문에 재정 지출을 증가시키면 그 부문에서 일자리가 증가함은 사실이다. 그래서 마치 우리 눈에는 일자리가 증가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부에 의해 일자리가 증가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부문의 일자리가 감소한 결과다. 정부가 일자리를 만드는 데 드는 자금은 하늘에서 떨어진 돈이 아니다. 그 자금은 민간부문의 납세자들에게서 나온 돈이다. 정부가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납세자에게서 세금을 더 거둬들여야 한다. 납세자들은 덜 먹고, 덜 입고, 덜 쓸 수밖에 없다. 그 돈을 납세자에게서 거둬들이지 않고 납세자의 손에 남아 있게 한다면 납세자들은 식품·의류·자동차·컴퓨터·TV 등에 보다 많이 지출했을 것이다. 그러면 각 부문이 자극을 받아 일자리가 늘어났을 터다. 그러므로 정부의 일자리 창출 프로그램은 사회 전체의 고용량을 증가시키는 것이 아니라 기껏해야 부문 간의 고용 구성 형태만을 변경시킨 것에 불과하다. 사회 전체 고용량 변화없어 정부의 일자리 창출 프로그램이 일자리를 창출하지 못하기만 하면 그래도 나은 편이다. 새로운 고용이 창출되지 않고 단지 고용이 한 부문에서 다른 부문으로 이동하기만 하면 사회 전체적으로 고용량의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사회 전체적으로는 해가 없을 뿐더러, 더욱이 고용의 혜택이 가난한 사람에게 돌아간다면 정부의 일자리 프로그램은 얼마든지 수용될 수 있다. 그럼에도 정부가 불황 때 일자리를 창출하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근거로 미국의 뉴딜 정책을 든다. 일반적으로 뉴딜 정책은 대공황을 극복한 훌륭한 정책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미국이 대공황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민간 투자가 증가한 이후였다. 뉴딜 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미 연방정부는 1933년 16억 달러이던 조세를 1940년 53억 달러로 늘렸다. 세금이 무려 세 배나 증가한 것이다. 소비세·소득세·상속세·법인세, 그리고 이른바 ‘초과 이윤세’ 등 모든 세금이 올랐다. 이로 인해 투자자와 기업의 투자심리가 얼어붙으면서 민간 투자가 극도로 침체된다. 결과적으로 불황이 장기화됐으며, 많은 일자리가 사라져 1930년대는 연평균 17%대의 실업률을 기록하게 된다. 다른 뉴딜 프로그램 역시 일자리를 만들지 못했다. 1933년에 제정된 ‘전국산업부흥법(National Recovery Act)’과 1935년의 ‘전국노동관계법(National Labor Relations Act)’에 의해 임금이 시장 수준보다 높게 책정되면서 기업의 고용 비용이 증가함에 따라 고용이 줄고 생산이 줄었다. 이로 인해 가장 피해를 본 사람은 흑인 노동자들이다. 약 50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1933년의 ‘농업조정법(Agricultural Adjustment Act)’ 역시 농민들을 돕는 것을 목적으로 해 농산물 생산을 줄이게 하고 농산물 가격을 올려 주었다. 그러나 생산이 줄면서 일자리가 줄어들게 됐고, 결국 가난한 흑인 소작농이 일자리를 잃었다. 테네시강 유역개발공사(Tennessee Valley Authority:TVA)’는 우리가 뉴딜 정책의 극적인 성공 사례로 알고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댐의 건설로 인해 73만 에이커가 물에 잠겼으며, 그로 인해 1만5654명이 고향을 떠나야 했다. 한국 경제가 장기 침체에 빠져 회복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경제성장률은 2003년 3.1%, 2004년 4.1%를 기록했다. 올해는 4%에 못 미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실업률은 2003년 3.4%, 2004년 3.5%를 기록했다. 청년실업률은 7.9%에 이른다. “뉴딜도 일자리 만들지 못해” 이런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 얼마 전 정부는 ‘종합투자계획(한국형 뉴딜정책)’을 발표했다. 이를 통해 “5% 경제성장률을 달성하고, 40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것이다. 과연 이 정책에 실효성이 있을지는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의심스럽다. 지금 경기가 침체에 빠져 실업이 증가한 근본적인 원인은 정부의 잘못된 정책에 있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시장경제 정책을 써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정부 정책은 그 반대 방향이었다. 상속·증여세 포괄주의, 토지공개념, 종합부동산세, 공정거래법 개정안, 노조의 경영 참여 등은 모두 반시장적인 정책이었다. 또한 정책의 비일관성에도 그 원인이 있다. 경기를 활성화시키고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처방은 ‘뉴딜 정책’이 아니다. 민간 활동이 증가하고 기업 하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기업 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기 위해 우선 취해야 할 조치는 규제 완화다. 경제 관련 각종 규제가 7400종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내 기업과 외국 기업의 투자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노동시장의 경직성도 기업 활동을 막는 요소다. 정부는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확보하는 제도적 뒷받침을 해야 한다. 그리고 불법적인 노동운동에 대해서는 철저히 법과 원칙을 지켜 그러한 활동이 만연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2005.05.30 00:00

4분 소요
노동시장 경직 우려

산업 일반

역대 정부는 예외 없이 '기업하기 좋은 나라'에 경제 정책의 최우선 순위를 둔다고 강조해왔다.노무현 대통령도 마찬가지다.그러나 기업들을 둘러싼 현실은 아직도 이런 '구호'와는 거리가 멀다.새 대통령마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되풀이 강조한다는 점은 아직 갈길이먼 기업환경의 실상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포브스코리아는 자유 시장경제를 추구하는 학회인 하이에크소사이어티(회장김영용 전남대 교수)와 함께 경영자유지수(MFI,Management Freedom Index)를 분기마다 조사해 발표하기로 했다.경영 현장의 기업인과 학계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조사하는 MFI는 우리 경영환경이 얼마나 좋은지를 엿볼 가늠자가 될 것이다.(편집자주) 새 정부 출범 이후 기업 경영환경의 악화를 우려하는 시각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다. 기업 경영환경이 올 2분기에 악화될 것이라는 전망이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포브스코리아가 기업인과 학자 등 117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경영자유지수(MFI) 2분기 전망치는 84.6로 집계됐다. 이는 2분기에도 정치적 불안이나 노동시장 악화 등 불안요인이 지속될 것이라는 시각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MFI는 우리나라가 기업하기에 얼마나 좋다고 보는지를 지수화한 것으로, 100보다 낮으면 악화된다는 응답이 호전된다는 답변보다 많음을 뜻한다. MFI가 84.6이라는 것은 100명을 기준으로 할때 ‘악화’가 ‘호전’보다 15명 정도 많았다는 의미다. 2003년 1분기의 경영환경은 전분기인 2002년 4분기에 비해 크게 악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1분기의 MFI 실적치는 65.8로 매우 낮은 수준을 기록했다. 경영환경 악화의 이유로는 정치불안이 27.0%로 가장 많이 지적됐고, 노동시장 불안, 정책수단의 악화, 반기업적인 국민정서 심화 순으로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이처럼 전분기에 비해 경영환경이 악화된 상황에서 다음 분기에도 계속 악화될 것으로 보는 전망치가 나온 것은 중기적으로 경영환경의 개선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으리라는 비관론이 우세함을 반영한다. 다만 2분기 지수는 1분기에 비해 높아져 노무현 정부의 출범이 1분기에 기업들의 발목을 잡았던 불확실성이나 불안감을 조금은 덜어줄 것을 기대한 결과로 풀이된다. 2분기 MFI 전망치는 외국계나 중소기업에 비해 대기업과 학계에서 상대적으로 낮게 나왔다. 중소기업의 악화 요인은 정치적 불안과 경직적 노사관계에 집중됐다. 반면 대기업과 학계는 반기업적 규제와 정책수립, 국민정서 악화를 들었다. 1분기 MFI 실적치를 구성하는 각 분야별 평가는 100점을 만점으로 이뤄졌다. 금융시스템과 관료주의, 재산권 보호 분야는 상대적으로 높은 점수가 나온 반면 노동시장의 유연성, 정부의 규제, 정책수단, 조세부담, 국민정서는 점수가 낮았다. 점수는 분야별로 가장 이상적인 수준에 비해 어느 정도 수준이냐는 설문의 응답을 100점 만점으로 환산한 결과로, 대부분 항목에서 50점 미만으로 나왔다. 이는 기업인들이 각 조사대상 분야의 경영자유도가 보통 수준을 밑도는 것으로 평가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외국계기업이 평균적으로 높은 점수를 줬고, 중소기업과 학계는 대기업에 비해 점수를 낮게 매겼다. 노무현 정부 관료주의 개선 기대 기업인들은 이번 정부에서 경영환경이 악화될 것으로 전망했다. 호전될 것으로 생각한 사람은 20명으로 17.2%에 그친데 비해 악화될 것으로 평가한 사람은 꼭 두배인 40명, 34.5%였다. 또 김대중 정부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응답한 사람은 응답자 116명 가운데 56명으로 48.3%였다. 분야별로 보면 금융시스템의 개선, 관료주의 완화, 조세부담 완화 등 세 부문에서 호전될 것이라는 응답이 30%를 넘어 새 정부 출범에 거는 기대가 집중된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국민정서와 재산권 보호는 악화될 것이라는 전망이 각각 26.1%, 33.6%로 높았다. 특히 노동시장의 유연성과 우호적 정책수단은 ‘악화’ 전망이 ‘호전’을 크게 상회하고 있어 기업인들의 우려를 반영하고 있다. 노동시장의 유연성 분야에서는 ‘동일’ 응답자가 크게 줄어들면서 악화 전망이 증가해 기업인들이 노무현 정부의 노동 편향적 정책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응답자 가운데 대기업과 중소기업 모두 경영자유 환경이 전반적으로 악화될 것으로 봤다. 분야별로는 대기업은 우호적인 정책수단 분야, 중소기업은 노동시장의 유연성 악화를 다른 분야에 비해 크게 우려했다. 반면 외국계 기업은 노동시장과 재산권 보호에 대한 우려가 상대적으로 두드러졌다. 학계는 ‘동일’ 반응이 적은 대신 ‘악화’가 크게 증가하는 구성비를 보였다. 특히 노동시장 유연성, 우호적인 정책수단, 국민정서, 재산권 보호에서 50% 이상의 응답자가 악화될 것으로 봤다. 이런 조사 결과는 기업의 경영환경이 노무현 정부에서 크게 개선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를 반영하고 있다. 이런 기업인들의 우려가 이른 시일내에 불식되지 않는다면 경기 회복과 경쟁력 향상 등 새 정부의 주요 경제 운용과제 수행에 어려움이 가중될 전망이다. 김대중 정부 경영자유도 뒷걸음 역대 정부별 경영자유도는 전두환 정부 이후 김영삼 정부까지 꾸준히 개선된 것으로 평가됐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에서는 다소 후퇴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전두환 정부의 경영자유도는 17.6으로 가장 낮았으며, 노태우 정부 32.1, 김영삼 정부 46.4로 나타났다. 대체로 1980년대 이후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경영 자유도도 개선됐다는 평가였다. 다만 외환위기 극복이 최대 과제였던 김대중 정부에서는 경영자유지수 44.0으로 김영삼 정부에 비해 약간 낮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분야별로는 대부분 개선되는 추세를 보였다. 특히 금융시스템의 개선에 성과가 컸던 것으로 나타났다. 아주 낮은 수준에서 시작해서 크게 개선돼 다른 분야와 비슷한 수준까지 높아졌다. 기업에 우호적인 정책수단 분야가 유일하게 김영삼 정부에 비해 김대중 정부에서 낮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우호적인 정책수단을 제외한 대부분의 분야에서 평가가 개선됐음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정부에서 전반적인 경영자유지수가 후퇴한 것으로 나타난 이유는 주관성을 지수로 표현하는 서베이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응답자 가운데 대기업은 김대중 정부에 대해 우호적 정책수단과 국민정서 두 분야에서 후퇴한 것으로 평가했다. 중소기업은 노동시장의 유연성이 개선되지 않았고, 우호적 정책수단에서 후퇴한 것으로 평가했다. 외국계기업은 노동시장 유연성은 크게 개선된 것으로 평가했으나 우호적 정책수단은 후퇴한 것으로 평가했다. 반면 학계는 기업과는 다른 평가를 했다. 노동시장의 유연성은 역대 정부에서 계속 낮아졌다고 평가, 김대중 정부의 노동정책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음을 드러냈다. 국민정서 역시 김대중 정부에서 크게 후퇴했다고 지적했다. 관료주의가 심해지고 조세부담이 가중됐으며 재산권 보호도 뒷걸음질 친 것으로 평가했다. 경영자유지수란 기업하기 얼마나 좋은가를 지수화 포브스코리아MFI는 우리 기업들에게 얼마나 기업하기 좋은 환경이 제공되고 있는가를 나타내는 서베이지수다. MFI 개발을 위한 이론적 근거 및 설문지 작성은 하이에크소사이어티 회원인 안재욱 경희대 경제통상학부 최승노 자유기업원 기업연구실장 등이 주도했다.설문조사와 결과 분석은 포브스코리아와 하와에크소사이어티가 공동으로 실시했다. MFI설문은 전반적인 경영환경에 대한 평가와 전망,7개 세부항목(노동시장 유연성,금융시스템 개선,관료주의 완화,우호적 정책수단,조세부담 완화,국민정서,재산권 보호)별 평가로 나눠 실시한다.세부항목 중 우호적 정책수단이란 금융이나 조세등에 속하지 않은 환경,보건복지,지방자치단체 등의 기업관련 정책을 포괄해 지칭한 것이다.기업경기실사지수(BSI)등 유사한 지수들처럼 MFI도 전 분기와 동일한 경영환경이라면 지수는 100이다.지수가 100보다 높으면 경영환경이 개선된 것이고,100보다 낮다면 경영환경이 위축됐다는 평가가 많음을 의미한다. 경제자유지수와 어떤 점이 다른다 경제자유지수는 전세계 국가를 대상으로 객관적 테이터만을 가지고 만들어지며,주된 목적은 국가간 비교다.또 어떤 국가가 더 경제적 자유가 높은가를 1년 이상 지난 뒤 사후적으로 보는 것이다.세계적으로 미국의 헤리티지 재단과 경제자유네트워크 두 곳에서 매년 발표한다. 하지만 경제자유지수는 한국의 특성과 세부적인 사항,그리고 기업인이 느끼는 현실적 감각을 제때 반영하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이에 비해 MFI는 기업인을 대상으로 국내 경영환경이 얼마나 자유롭다고 보는지를 매 분기 조사하는 것이다.따라서 기업인들이 체감하는 경영환경과 개선 과제를 적시에 파악 할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서베이 대상 설문조사는 기업의 경우 대기업,중소기업,외국계기업으로 구분해 진행했다.또 하이에크소사이어티 회원을 중심으로 한 학계도 응답에 참여했다.응답자는 대기업의 40.2%로 가장 크다.이는 대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한 것이다.중소기업은24.8%,외국계기업은 17.9%의 구성비를 갖는다.기업의 경영환경에 대한 조사이므로 설문조사는 주로 기업의 임원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조사는 2월3일~8일까지 1주일간 실시됐다.조사대상자 가운데 일부가 비공개를 요구해 응답자 명단은 싣지 않았다.

2003.07.22 09:38

6분 소요
미스코리아 출신 영화 제작자 손정은 두손드림픽처스 사장

산업 일반

손정은 두손드림픽처스 사장 여성으로서 아름답다는 것은 커다란 행운이다. 더구나 그 아름다움을 사회적으로 인정받은 경우에는 더 큰 행운일 것이다. 이 아름다움에 일 잘하는 능력을 겸비했다면 더할 수 없는 행운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지난 1978년 미스 코리아 진이었던 두손드림픽처스의 손정은(48) 사장이 바로 이런 행운의 주인공이다. 손사장은 4월4일 개봉한 안재욱·이은주 주연의 영화 ‘하늘 정원’의 제작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미스 코리아요? 에이, 난 큰 의미 안 둬요. 친구 따라 갔다가 우연히 됐거든요. 대학원 다닐 때라 나이도 많았고….” 손사장은 손사래를 치며 “미스 코리아가 안 됐어도 영화 일을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학교 다닐 때 발레를 했거든요. 발레는 본인이 스토리를 짜서 음악·의상·춤을 맞추는 종합적인 장르잖아요. 그래서 그런지 스토리·연기·녹음·촬영·의상 등 여러 가지가 함께 움직이는 영화가 좋았어요.” 원래 손사장은 무용과 교수가 꿈이었다. 이화여대 무용과와 대학원 무용학과를 졸업한 그가 중앙대 교육대학원에 진학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교수 자리 얻기는 그 때나 지금이나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웠다. 그 와중에 우연히 미스 코리아가 됐고, 그는 교수 대신 연예인이 됐다. 연예인으로서 그는 열정적인 활동을 했다. 영화 ‘광염 소나타’, 연극 ‘오늘 같은 날’ 등에 출연했고, TBC TV ‘쇼쇼쇼’의 MC를 했는가 하면 「진하게 블랙으로」라는 소설도 썼다. 팔방미인이었던 셈이다. 분야마다 나름대로 매력은 있었지만 영화 제작이 가장 재미있는 일이었다. 지난 84년 영화사 김필름을 설립했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창 밖에 잠수교가 보인다’(85년), ‘미리 마리 우리 두리’(87년) 등의 영화가 김필름을 통해 세상에 선을 보였다. “하지만 사정이 좋지 않아 영화사를 접고 영화 수입도 하고 해외 구경도 했죠. 그렇게 15년을 보냈어요. 하지만 영화 만드는 것만큼 재미있는 일은 없더군요. 왜 다시 영화 제작을 하느냐는 질문이 많은데 하던 일 다시 하는 것 뿐이에요.” 손사장의 희망은 감동이 진하게 느껴지는 영화를 만드는 것. 진한 감동만이 관객들과 소통할 수 있는 통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손사장은 이와 함께 영화배우와 모델을 양성하는 사업과 매니지먼트도 함께 진행하고 있다. 일종의 수직 계열화를 통해 시너지 효과를 창출하기 위함이다. “스타에만 의존하지 않는 시스템을 만들고 싶어요. 스타만이 좋은 영화를 만드는 것은 아니잖아요. 많은 인력들을 길러내 영화계로 보낼 겁니다. 이게 제가 할 일이지요.”

2003.03.27 00:00

2분 소요
비 내리는 北京…'韓流'가 곪고 있다

산업 일반

지난 10월27일 베이징(北京) 수도(首都)체육관에서 한국의 유명 여자가수팀 B의 공연이 있었다. 워낙 유명한 팀이라 한국학생들 사이에선 가보고 싶어도 표를 못 구할 것이란 얘기도 돌았다. 그러나 이 날 공연에 갔다온 몇몇 학생들로부터 믿을 수 없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 소식이 한국인 사회에 퍼졌고, 단순한 흥행 실패가 아닌 ‘그 무엇’과 연관시켜 씁쓸한 귓속말이 오고갔다. 이른바 ‘한류(韓流)’ 바람이 끝난 것이 아니냐는 우려였다. 웃기는 것은 이날 중국의 날고 기는(?) 암표상들이 암표를 대량으로 매집했다가 안 팔리자 3백위엔(元)짜리 표를 10위엔까지 팔았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려는 사람이 없자 암표상들은 지나가는 행인들에게까지 표를 사라고 사정했다고 한다. 이날 1만8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실내체육관은 4분의 1 정도만 찼다. 골수 ‘하한쭈(哈韓族·한류매니어를 일컫는 중국말)’ 만 왔을 뿐 일반인들에게는 철저히 외면당한 꼴이었다. 불과 1년 전 노동자(工人)체육관에서의 H.O.T. 공연이 젊은이들로 미어터졌던 것에 비하면 참담한 결과였다. 아니나 다를까. 중국 신문들은 다음날 이 사실을 놓치지 않고 요란하게 보도했다. 이 날 거의 같은 시각에 대만출신 가수 장신철(張信哲)이 노동자체육관에서 공연을 해 대성공을 거뒀다는 소식과 함께. 이 날은 하루종일 비가 내렸다. 이 때문에 베이징신보(北京晨報)는 장신철의 공연장소가 노천이었다는 걸 특히 강조하면서 ‘대만의 태풍(台風)이 한류풍을 잠재웠다’고까지 보도했다. 지금 중국에서는 그 이후 한류가 눈에 띄게 약해지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일고 있다. B의 공연에 대해 중국 신문이 보도한 베이징 젊은이들의 불만을 들어보면 가관이다. 한마디로 포스터에 나온 B의 공연을 보러 갔더니 B는 잠시 얼굴만 비치고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저질’ 가수들만 잔뜩 나와 시간을 때우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이 “한 번 속지 두 번 속나요. 그러니까 이제는 관심 없어요”라는 것이었다. 이 말은 한류에 대한 중국인들의 최근 냉랭해진 심사를 여실히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한국 드라마가 처음 중국인들의 안방에 파고 들 때는 배우들의 옷 뿐아니라 집안 장식·거리풍경 등 모든 것이 신기했지만 지금은 다르다는 것이다. 최근 들어 한류가 급속도로 식어가고 있는 징후의 가장 큰 이유는 한류가 ‘고급’의 이미지를 잃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면 틀림없다. 베이징 둥쓰(東四)에서 조그만 한국 악세사리점을 하고 있는 K 모 사장은 “아직은 한류의 덕을 본다. 그러나 한국 상품이 더 이상 중국 젊은이들에게 신기한 것이 아니다. 차츰차츰 새로운 것을 찾는데 공급이 미처 못따라가 매출이 생각만큼 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가게명이 밝혀지면 매출에 지장이 있다며 극구 익명을 부탁할 정도로 최근의 분위기에 걱정이 태산 같았다. 올 봄만 해도 하루 매출 1만위엔(약 1백60만원)은 수월했으나 요즘은 5천∼6천위엔이 고작이라는 것. 그 가장 큰 이유는 이곳에서 파는 상품이 더 이상 중국 학생들에 신기하지 않다는 것이다. 베이징에서 몇 년전 붐을 이루며 우후죽순처럼 생겼던 한국 상품 전문판매장이 지금 거의 전멸하거나 간신히 몇 군데만 명맥을 유지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물론 아직도 중국인들에게 한국 드라마는 인기가 있다. 일반인들뿐 아니라 베이징의 젊은 학생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대단하다. 심지어 중국의 미래 외교인력을 양성하는 외교학원(外交學院) 기숙사에서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은 ‘순풍산부인과’라고 한 한국 유학생이 전할 정도다. 중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연예인은 안재욱·김희선이 꼽힌다.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은 몰라도 김희선이란 이름은 누구나 알고 있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다. 중국의 CCTV와 수많은 지방방송에서 지금도 한국 드라마를 여럿 방영하고 있어 ‘한국풍’의 위력은 여전하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한류가 과연 중국인의 소비행태를 바꿀 수 있는 근본적인 평가로 이어질 수 있느냐 하는 거다. 이것이 이곳에 나와 있는 한국기업들의 최대 관심사다. 한국에 대한 관심을 잘만 활용하면 마케팅은 거저먹기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 기업들이 한류의 주무대인 TV를 중심으로 마케팅 작전을 펴고 있다. 예컨대 삼성전자가 지난 4월(그때는 한류가 한창 기세를 높일 때였다) 후원한 ‘2008년 베이징올림픽 유치기원 한·중슈퍼음악회’는 5만여명의 젊은이들이 참여한 대형 행사로 CCTV를 통해 13억 인구에 생방송돼 엄청난 광고 효과를 거뒀다. 중국TV에 가장 자주 나오는 한국회사는 삼성전자와 SK다. 삼성전자는 작년 6월부터 전국 고교생들을 대상으로 한 ‘산싱지리콰이처(三星智力快車)를 CCTV에서 방영 중이다. SK는 장웬방(壯元榜)을 베이징TV에서 방영 중이다. 이 두 프로그램은 마치 우리나라의 장학퀴즈 같은 것인데 중국 학생들의 인기를 독차지, 시청률은 중국 교양프로그램에서 1, 2위다. 여기에 LG는 오래 전부터 낙후된 시골학교를 지원해 오면서 방방곡곡까지 지명도를 다지고 에어컨이나 일반가전품에서의 월등한 보급률을 활용해 일명 ’풀뿌리 마케팅‘을 해오고 있다. 최근에는 ’월드컵 마케팅‘까지 등장해 월드컵 티켓과 항공권을 내건 가전품 판촉활동도 인기를 끌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은 ’한류=한국산=고품질‘이란 이미지를 원동력으로 한 것이다. 80년대 한때 중국에선 ’인도풍(印度風)‘이 유행했다. 그러나 지금은 어느 누구도 그때를 돌아보지 않는다. ’인도=후진국‘이란 인식 때문이다. 결국 든든한 경제적 배경과 지속적인 교류로 뿌리를 내리는 문화만이 중국에서 살아남게 되는 것이다. 이곳에서 미국과 일본문화는 한류처럼 요란하진 않다. 그러나 여전히 최고급으로 통한다. 신영수(愼榮樹) 재중국한인회 회장은 “한류는 곧 힘이다. 본국의 경제력이 뒷받침돼야 중국을 움직일 수 있다”고 강조한다. 한류가 앞으로도 폭발적인 위력을 발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이에 대해 한창호(韓昌浩) 삼성전자중국법인 부장은 “문화적 가치를 국제시장에서 비즈니스와 결합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즉 훌륭한 노래나 드라마를 만들었으면 이를 해외시장에서 가전·소비재 등 인접상품으로 확대 재생산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류의 한가운데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우전소프트의 김윤호 사장은 “중국은 다른 민족의 문화에 대해 퍽 개방적이지만 유입속도가 지나치게 빠르면 반드시 제동을 건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너무 갑자기 뜨면 반드시 규제를 한다는 것이다. 지금 대만과 홍콩가수의 공연이 중국에서 뜸한 이유도 한때 너무 뜨니까 ’한 가수 1년에 1회 공연‘으로 규제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이 점에서 베이징에 있는 한국의 문화계 인사들은 지난 8월말 김한길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이 ’한류체험관‘을 베이징 등에 세우겠다고 말한 것은 ’어리석은 인기주의‘라고 지적하고 있다. 정부까지 나서서 한류를 홍보한다고 설치면 자칫 중국측에 한류를 규제할 빌미만 줄 가능성이 크다는 설명이다. 최근 중국의 일부 언론이 심상찮은 논조를 보이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작년만 해도 중국 신문들의 보도는 상당히 긍정적이었다. 베이징신보는 “한파(寒波)로 얼어붙은 베이징에 훈훈한 한파(韓波)가 몰려오고 있다”고 호의적인 제목을 달았다. 그러나 이 신문은 11월 중 대여섯차례에 걸쳐 한류에 대한 시리즈 기사를 내면서 ’한류도 별 것 아니다‘는 속셈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았다. 이곳에서 오래동안 사업을 하고 있는 박정오(朴正五) 마이다스 사장은 “처음엔 일과성 유행쯤으로 대수롭잖게 생각했다가 중국 젊은애들이 지나치게 빠지는 것 같으니까 언론이 제동을 걸기로 작심하고 나서기 시작한 것 같다”고 분석했다. 박사장에 따르면 지난 80년대 한국산 컬러TV가 중국 시장에서 욱일승천할 때 어느 날 갑자기 중국 언론들이 일제히 한국제품의 A/S 부실 등을 집중적으로 거론하는 바람에 시장을 송두리째 잃었다는 것이다. 한류는 지금 곪고 있다. 또 한편으로 한류는 지금 중국에서 살아남느냐 아니면 한때의 유행으로 끝나느냐의 기로에 서 있다. 중국의 WTO가입으로 문화시장 환경은 근본적으로 바뀌게 된다. 지금처럼 따오판(盜版) 음반 한 장에 10위엔이던 시장은 차츰 사라지고 정당한 가격으로 평가받는 시장이 다가온다. 이 말은 곧 품질이 모든 것을 말해 주는 시대가 온다는 뜻이다. 지난 10월13∼17일 베이징에서 김민기씨의 뮤지컬 ’지하철 1호선‘ 공연이 있었다. 별로 요란하지 않게 치러졌는데도 매스컴의 반향은 호의적이었다. 특히 CCTV에 나온 한 중년여인은 “한류, 한류 하기에 젊은 애들이나 보는 흥미거리로 알았는데, 오늘 지하철 1호선을 보니 너무 마음에 와 닿았다”며 “한류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알았다”고 밝혔다. 이 말은 한류가 앞으로 중국에서 어떻게 뿌리내릴 수 있을지를 시사해 주는 중대한 힌트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중국인들이 공감하면서 ’동경할 수 있는‘ 고품질의 문화상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싸구려로는 더 이상 안 통한다는 것이다.

2001.12.11 00:00

6분 소요

많이 본 뉴스

많이 본 뉴스

MAGAZINE

MAGAZINE

1781호 (2025.4.7~13)

이코노북 커버 이미지

1781호

Klout

Klout